19361212일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Chiang Kai-shek)가 시안(Xian)에서 자신의 휘하 병력에게 체포되어 구금되는 일이 발생했다.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의 체포를 주도한 이는 바로 만주 지역 군벌의 아들이었던 장쉐량 즉 장학량이었다. 장제스를 구금한 장학량이 그에게 요구한 것의 핵심은 바로 이거였다. 바로 일본에 맞서 싸우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장학량은 장제스를 납치해서 대일전을 촉구한 것일까?

 

1920년대 중국은 손문의 주도아래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었다. 그러나 제1차 국공합장은 1925년 손문의 사망과 더불어 장제스가 반공주의 노선으로 돌아서면서 결렬됐다. 당시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로 대립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장제스를 주축으로 한 우파가 공산당의 출출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영향력 배제를 요구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국민당이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추구하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 19263월에 일어났다. 그 사건이 바로 중산함 사건이다. 장제스는 중산함의 회항을 공산당의 반란음모로 규정하고 광주(광저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지휘관 이지룡을 체포한 뒤 보로딘을 비롯한 18명이 소련 고문단 철수를 요구했었다. 중산함 사건을 시작으로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 안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장제스 정권의 공산당 탄압은 1927년에 들어 극심해졌다. 217일 장제스 휘하의 국민당 군대는 저장성 성도인 항저우를 점령했고, 공산당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이러자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상하이 노동조합은 상하이 함락을 염두에 두고 총파업을 개시했는데, 이후 장제스는 4.12 쿠데타를 획책하여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 및 학살을 자행했다. 장제스의 4.12 쿠데타 이후 3주 동안 최소 1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것은 마오쩌둥을 포함한 공산당원들이 홍군을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제1차 국공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마오쩌둥 휘하의 공산당은 농촌을 기반으로 홍군 근거지를 건설하고 정강산에서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이것이 정강산 투쟁이었다. 홍군은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지만, 그만큼 국민당의 포위 및 전투도 격렬해졌다. 국민당군의 포위전은 제5차 초공전까지 진행되었다. 4차 초공전의 경우 장제스의 경우 최소 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화 소비에트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1933년에 있던 5차 초공전에선 장제스는 나치 독일의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kt)를 군사고문으로 초빙하고, 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전쟁비용을 마련했으며, 10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이른바 토치카 작전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국민당군의 포위 믹 군사 작전으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19341016일 강서성과 서금을 포기하고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은 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군사작전에 나서는데 그것이 바로 20세기 전쟁사에서 상징적인 작전인 대장정(Long March)이다. 마오쩌둥 휘하의 10만 군대는 1년간의 대장정을 거치며 군대가 8,000명에서 1만 명으로 급감했다. 당연히 수백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국민당군의 공격과 추격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홍군은 다두허 도하 작전이라는 역사적인 기적을 창조해냈다. 이는 에드가 스노(Edgar Snow)의 저작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이와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중국 공산당은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추격과 군사적 압박은 지속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계기로 부르주아 계급을 포함한 광범위한 반파시스트 연합전선전략이 강조됨에 따라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항일투쟁의 목소리를 높였고, 국민당에게도 항일연합전선을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국민당은 공산당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기에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19361212일 이른바 시안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는 신속히 진행되어 그날 아침 6시까지는 모든 일이 끝났다. 국민당 측의 동북군과 서북군은 시안을 완전히 장악했고, 자다가 기습을 당한 남의사 병력은 무장해제당한 뒤 체포되었으며, 참모부 요원 전원은 시안 영빈관 숙소에서 포위당해 사실상 구금 상태에 놓였다. 경찰국장 사오리쯔가 사로잡혔으며, 이에따라 시안 시 경찰은 모두 반란군에게 투항했다. 난징 정부의 폭격기 50대와 조종사들은 비행장에 억류당했다. 장제스를 체포하는 과정에선 양측간의 교전이 일어났다. 새벽 5시에 장제스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 전개되었고, 궁극적으로 장제스는 체포됐다. 시안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장제스에게 요구한 것은 8개 항목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공동책임을 분담케 할 것.

2. 내전을 즉각 전면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 7명을 석방할 것.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손문 박사의 유지를 이행할 것.

8.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이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은 바로 만주 군벌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이었다. 장제스를 체포한 군인들은 장제스에게 각하를 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들은 단지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과 싸우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장학량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쿠데타 이후 장학량은 중앙정부와 각 성의 지도자 그리고 중국인에게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으며, “총통이 각성하도록 당분간 서안에 체류하도록 요청했다. 즉 앞에서 언급한 8개 항목에 대한 발표인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 얘기하자면, 그렇다면 왜 장학량은 장제스를 납치하여 대일전을 촉구한 것일까?

 

그 이유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중국 상황과 관련이 있다. 장제스가 제1차 국공합작을 와해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가운데, 그는 이른바 북벌도 진행했다. 쉽게 말해 중국 내에서 군벌전쟁도 벌인 것이다. 장제스 북벌에 대한 맞대응으로 일본은 중국 산동으로 출병하여 무력 대응을 하기도 했으며, 1928년에는 만주 군벌 장작림이 장제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장작림 폭살 사건을 획책했다. 더 나아가 일본은 19319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1932년 만주 전역을 점령한 이후엔 이른바 상해 사변을 일으켜 전투를 치렀는데, 군함 80척과 항공기 300대를 투입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물론 국민당군이 일본에 맞서 항일전을 안 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규모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다소 무능하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오쩌둥>전기 저자 필립 쇼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대대적인 침략을 개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침략자 일본을 저지하기 보단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을 축출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장제스가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 안한 것은 아니었다. 1932년부터 전쟁을 준비했지만, 그는 공산당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치욕적인 양보를 거듭했다. 즉 이런 부분에서 마오쩌둥은 국민당에 대해 부끄러운 무저항 정책을 추친하며 중국의 국가이익을 팔아넘기고 있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시안사건에서 장제스를 구금했던 장학량은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장작림의 아들이었다. 장작림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은 1931년 만주사변 과정에서 굴욕적인 양보를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이행해야 했다. 따라서 그의 시각에선 합리적으로 장제스가 항일전은 안하고 공산당 토벌에만 앞장서고 있다.” 판달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장제스는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국 공산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물론 장학량은 대략 6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비슷한 시기 19377월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중국 대륙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했다. 중일전쟁이 격해지면서 일본은 중국에서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다. 대표적으로 난징에선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본군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 그러나 국공합작으로 단결한 중국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은 세월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중국 전선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2차 국공합작은 형식적인 차원에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신뢰관계는 1941년 신사군 사건을 계기로 완벽히 무너졌다. 당연히 여기에서 가장 큰 책임은 국민당에게 있었다.

 

참고문헌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 아카데미, 1992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 푸른나무, 1999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1999

 

-현대 중국사 (), 이매뉴얼 C. Y. , 서정희(), 까치, 2013

 

중국의 붉은 별, 에드거 스노, 홍수원 안양노 신흥범(), 두레, 2013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2015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심규호(), 민음사, 2017

 

마오쩌둥 1, 필립 쇼트, 양현수(), 교양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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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 정부가 점점 신망을 잃음에 따라 이를 상쇄하기 위한 군사적 노력은 점점 더 필사적으로 변해 갔다. 점점 신망을 잃음에 따라 이를 상쇄하기 위한 군사적 노력은 점점 더 필사적으로 변해 갔다. 1967년 말 하원의 한 비밀 보고서는 베트콩이 남베트남 정부보다 다섯 배가량 많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있는데 반해, 베트남 정부의 토지분배 프로그램은 사실상 답보상태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베트콩은 지주의 지배를 없애 버리고 부재지주와 G.V.N(베트남 정부) 소유의 토지를 땅 없는 사람들과 베트콩 당국에 협조하는 사람들에게 재분배했다.”

 

사이공 정부가 지지를 잃었다는 점은 1968년 초에 민족해방전선이 사이공을 비롯한 정부가 장악한 도시를 대대적으로 침투하는데도 현지 주민들이 정부에 경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로써 민족해방전선은 기습공격(당시는 베트남의 신년 연휴인 구정(Tet)’이었다)에 착수, 사이공 심장부로 진입하고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을 마비시켰으며 심지어 잠시 동안이지만 미국 대사관까지 점령했다. 비록 격퇴당하기는 했지만, 이 공격은 미국이 베트남에 퍼부은 그 모든 거대한 화력으로도 민족해방전선 자체와 그들의 사기, 그들에 대한 대중의지지, 싸우려는 의지를 파괴하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구정 공세는 미국 정부 내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재평가를 야기했고 미국인들 사이에 더 큰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개 중대의 일반 병사들이 저지른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해 대규모 파괴를 가하려는 고위급 군 및 민간 지도자들의 계획과 비교하면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1966년 초, 국방부 차관보 존 맥노턴(John McNaughton)은 북베트남 촌락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낳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른 전략을 제안했다. 맥노턴은 촌락에 대한 공습은 해외와 국내에서 반발의 물결이 높아지는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신 이렇게 제안했다.

 

그러나 제대로 처리하기만 한다면 수문과 댐을 파괴하는 전략은 유망한 효과를 발휘할지도 모릅니다. 이를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곳을 파괴한다고 사람을 죽이거나 익사시키지는 않습니다. 논에 관개되는 수량을 줄이고 식량을 제공하지 않으면 얼마 뒤에 기아(100만 명 이상이겠지요?)가 널리 확산될 테지요. 그 때 식량을 제공하겠다고 회담 테이블에서 말하면 된는 겁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인구 밀집지역에 대한 폭격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폭격은 베트남의 평범한 국민들의 저항의지를 파괴하려는 목적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군사 목표물만을 폭격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하긴 했지만, 정부는 폭격을 묘사하기 위해 나사를 한 번 더 돌려라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1966년 중 어느 때인가 중앙정보국에서 더 강력한 폭격 계획을 권고했는데, 중앙정보국의 표현대로 하면 정권의 의지 자체를 목표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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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가지게 된 것은 아마 메갈리아가 뜨면서 부터인데,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른다는 말로 일괄하게 되지만, 그래도 얘기하겠다.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면서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안티 페미니즘도 나타났는데, 이 두 진영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둘 다 어떠한 의제에서 양극단으로 빠지는 느낌이 강하다. 우선 내가 한국의 페미니즘 진영에 실망을 많이 느꼈던 점은 첫번째로는 친서방주의라 할 수 있고, 두번째로는 오바마나 힐러리식의 반공주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안티 페미니즘쪽 진영은 뭐 그냥 거의 폐급으로 쓰레기 같은 반공주의자들이 많아서, 일정부분 옳은 말을 해도 싫게 된다.

 

근데 아직도 나는 두쪽 얘기 들었을 때, 두 쪽의 의견에서 어 이거는 페미가 옳은 말했고, 이거는 안티페미가 옳은 말 했네. 이렇게 느끼는 경우가 적잖게 있다.

 

자 나만의 결론!

 

여윾시 쿠바가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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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탈환 이후 발견된 집단 매장지)

 

후에 학살(Massacre at Hue)는 베트남 전쟁 당시 구정공세(Tet Offensive) 기간 동안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1968년 구정 공세 당시 옛 황궁의 도시 후에(Hue)는 대략 1달 동안 전투 지역으로 바뀌었다후에에서는 단기간에 점령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도시를 탈환하려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맞서 전투를 치렀는데이러한 과정 속에서 적잖은 민간인이 사망했다이들 중 수천 명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으며연합군의 후에 탈환 이후 대량의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군 전투지원사령부가 게릴라 포로 한 사람으로부터 가지고 있던 서류뭉치를 발견했는데그 문서에 따르면 행정 공무원 1,892정치인 48악덕 지주 790명을 처형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또한 미군은 구정 공세가 끝난 뒤 공식 발표에서 후에 전투에서 희생된 민간인 숫자의 절반 이상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처형당한 순수한 민간인들이었다.”고 밝혔다.

 

아무튼 미국이나 남베트남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후에 전투에서 적잖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구정 공세 이후 후에에서 최소 3,000명 이상이 뭍힌 민간인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다또한 일설에 따르면 2,800명 이상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하며많게는 5,70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이후 후에 학살의 수치는 6,000명 그리고 어떤 이들은 7,000명에서 8,000명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거기에는 봐라 빨갱이들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안다.”라는 식의 논리도 들어가 있다따라서 후에 학살은 특히 반공주의자들 즉 주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해 지지하거나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이처럼 후에 학살은 반공주의자들이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의 적국이었던 북베트남과 적대세력이던 베트콩에 대한 악마화 내지는 비판 및 비난의 수단으로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관점은 2010년에 나왔던 게임 콜 오브 듀티 블랙옵스(Call of Duty Black Ops)에서도 잘 드러난다냉전 시대 CIA 첩보전을 다룬 블랙옵스는 중간에 베트남 전쟁을 다루는 데여기서 게임 주인공은 후에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북베트남군이 후에 민간인들을 보이는 데로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영웅적으로 싸운 뒤 무사히 미군의 화력지원을 부른 이후 PT 보트에 타고 탈출한다. 10대 시절 이 게임을 했던 나 또한 게임 주인공이 정당한 전쟁을 치르는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로이 게임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이런 식으로 합리화 시킨 것이다.

 

후에 학살은 한국사회에서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대두가 될 때인터넷 뉴스 댓글에 자주 언급되는 소재인 것 같다. 2017년 대통령 문재인이 베트남 정부에게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을 때나는 어떤 이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빨갱이들은 미라이 학살에서 미군이 학살한 것 보다 20배나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라고 언급한 댓글을 읽은 적이 있다그 댓글에 따르면 미라이 학살 희생자는 300명인데 후에 학살 희생자는 6,000명이라는 것이다따라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또한 학살을 저질렀고미군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았을 때 후에 학살은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대해 우파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려는 이들이 자주 언급하는 소재다그러나 이 후에 학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후에 학살에 대한 반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표적으로 미국의 진보적인 정치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와 언론학자 에드워드 해르먼(Edward Herman) 그리고 미국의 역사학자인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 등이 있다이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 자신들이 조사하고 찾은 사료와 증거자료들을 바탕으로 후에 학살이 미국과 남베트남 측에 의해 상당히 과장되고 각색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혔고주장했다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과연 후에 학살에 숨겨진 또 다른 이야기가 무엇인지 얘기하고자 한다.

 

후에 학살에 대한 반론을 쓰기 전 미리 언급할 것이 있다이 글은 후에 학살에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의한 처형이 아예 없었다거나 그들에 의한 무고한 희생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글이 아니다다만 세간에 알려진 내용들이 다소 과장되고 맥락과 핵심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증거가 명확하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이는 가레스 포터와 에드워드 해르먼이 1975년에 작성한 기사인 후에 학살의 신화(The Myth of the Hue Massacre)’에서도 밝히고 있다우선 노엄 촘스키가 집필한 저서 <미국 대외정책론>에 따르면 후에 학살 신화를 뒷받침하는 기초문서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첫 번째는 1968년 4월 사이공 정부(남베트남)가 발행한 보고서두 번째는 1969년 11월 미국 사절단이 공개한 포획문서 그리고 세 번째는 1970년 USIS의 직원 더글라스 파이크(Douglas Pike)가 발간한 긴 분석자료 등이다.

 

촘스키와 해르먼에 따르면 이들 문서의 내용이 면밀히 살펴볼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무엇보다 1950년대 당시 반공주의자들이 악의적으로 과장하고 각색했던 호치민의 토지개혁의 처형자 수치처럼 후에 학살 또한 사망한 민간인의 공식추계 수치는 미국 내의 정치적 사건에 따라 급증하였는데이는 구정 공세 이후 확산된 반전운동과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의 폭로의 충격과 맥을 같이 했다존슨 정부 이후 등장한 미국의 닉슨 정부에서 1969년 11월 미라이 학살이 폭로되어 전국적으로 충격 및 반전여론이 격화되었는데같은 해 미국 사절단이 공개한 후에 학살 포획 문서의 공개는 미라이 사건의 충격을 완화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촘스키와 해르먼은 주장한다.

 

1968년 4월 말 사이공 정부의 선전부대에서 발행한 보고서에서는 대략 천 명이 처형되었고그 중 절반이 생매장되었다고 나와 있다이 얘기가 나왔을 무렵 서방 언론인 중 아무도 그 시체가 별견되었다는 무덤지역을 가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얘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전혀 제기 되지 않았다프랑스의 사진작가 마르크 리보(Marc Riboud)는 지방서장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300명의 정부측 민간 공무원이 처형되었다고 주장하는 장소 중의 한 곳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거듭 거절당했다또한 그가 헬리콥터를 타고 예정했던 장소로 가려는 도중 조종사가 그 지역이 안전하지 못한 지역이라고 주장하면서 착륙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9개월 뒤인 1969년 11월에 베트콩 포로로부터 얻은 포획문서(앞에서 마이클 매클리어 책에서 언급한 대목을 보라)를 발견했는데이 문서에 따르면 후에 전투 기간 동안 2,748명의 살해를 용인했다는 것이다즉 이 문서의 공개 된 이후 USIS에서 근무했던 더글라스 파이크는 이 문서를 토대로 이른바 후에 학살 신화를 구성했고여기서 지나친 과장 및 단어와 맥락의 왜곡이 있었다이 문서를 토대로 프란시스 피츠제럴드는 “1968년 후에에서 공포의 한 달 동안 베트콩과 북베트남군대가 대략 3,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당연히 그는 파이크가 대략적으로 끼워맞춘 증거와 마찬가지로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사이공측 얘기를 모두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 로버트 톰프슨(Robert Tompson)은 저서 ‘No Exit From Vietnam’에서 후에 학살의 수치를 5,700명으로 늘렸다물론 이러한 얘기 및 문서들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이런 현상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나 근거가 제시되지도 않았다심지어 미국 상원의원인 윌리엄 색스비(William Saxbe) 상원의원은 더 부풀려 북베트남인에 의해 살해된 사람은 7,000명이나 된다.”라고 주장했다이 수치는 후에 전투에서 사망한 민간인 숫자의 대부분이나 더 많은 수치이기도 하다문서의 내용을 각색한 더글라스 파이크 또한 더 나아가 5,800명의 시민이 후에에서 학살되었다고 주장했다.

 

더글라스 파이크를 포함하여 그들이 과장의 토대로 삼았던 문서의 진실은 무엇일까우선 1969년 11월에 공개된 문서를 토대로 얘기하자면후에 전투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892명의 행정요원과 39명의 경찰관, 790명의 악덕지주남베트남군 대위 6중위 2명 그리고 소위 20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들이 확보한 이 포획문서에도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이 소위 민간인을 처형했다는 문장이나 그것을 암시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따라서 여기서부터 미국과 사이공 측의 해석을 확증하여 판단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 문서의 주된 내용은 후에라는 특정 지역에서 거둔 군사적 승리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포획문서를 언급하거나 인용한 신문사나 후에 학살측 강경론자들은 베트콩의 잔인성을 재확인하는 데 급급하여 이런 세세한 면모는 살피지도 않았다쉽게 말해 맥락무시를 저지른 것이다.

 

또한 위에서 확인한 이 문서의 2,748명의 명단에는 전투 중에 죽거나 다친 적군의 숫자를 포함하고 있었고문서상에서 등장하는 단어 행정요원의 원본의미는 베트남어의 (te)’를 잘못 번역한 것이었다여기서 등장하는 라는 단어는 꼭두각시 인물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민간 행정관과 군인이 다 같이 포함된다또한 이 명단에서 즉시 처형되야할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후에 시의 비밀경찰 간부들뿐이었으며그 밖의 명단은 정확히 말하자면 재교육시켜야 할 명단들이었다이에 따라 미국의 역사학자 게리스 포터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민간인을 처형시킬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어떠한 포획문서도 지금까지 나온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더 나아가 포터는 ‘US Political Warfare in Vietnam’에서 문서상으로 살펴본 결과 베트콩의 전반적 전략은 일반대중조직화된 종교단체심지어 하급경찰관까지 동원하여 그 지지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포터가 했던 주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후에 사건의 참된 교훈은 평화적이고 정치적인 통제가 완벽한 상황하에서 사이공 정권과 협력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기본정책은 사이공측 탄압기구 핵심 인물이 아니라면 결코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리고 핵심인물의 경우에도 그들이 혁명군에 대한 정항을 포기함에 의해 마지막 단계에서 구제될 수 있다.”

 

거기다 후에 학살에 대해 사실상 논외가 되어버린 사실도 있다그것은 바로 미군의 폭격 및 화력전으로 인한 대량살상 및 파괴다전투 기간에 후에는 초토화가 됐다미국의 폭격으로 도시의 65%에서 70%가 파괴되었다. 2만개의 가옥 중에서 1만 8천 개가 파괴되거나 손실을 입었다통계다마 조금씩은 다르지만 촘스키가 쓴 미국대외정책론에 따르면 후에의 17,134개의 가옥 중에서 9,776채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3,169채 이상이 크게 파손된 것으로 공식 집계되었다고 한다이런 유혈적 재탈환 과정에서 벌러진 전투에서 죽은 민간인 수는 남베트남 측 통계에 의하면 3,776명이다.

 

당시 공군차관 타운젠드 후프스(Townsend Hoopes)는 탈환작전에서 건물의 80%가 잿더미 화되었다고 하는데 그 부서진 폐허 속에 최소 2,000명 이상의 민간인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또한 후프스는 후에 시가지에서 베트콩 측은 폭격으로 학살당한 2천 명의 시신을 무덤에 매장했다고 주장했다즉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후에 탈환 이후 발견된 시신들 중 대다수가 미군 폭격에 의한 희생자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된다이것이 절대 과장이나 선전선동이라고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미군의 폭격이 후에 시 전체를 초토화했기 때문이다촘스키의 저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공격에 따른 민간인 사망자 중 일부는 베트콩측 요원에 의해 자신들의 사망자와 함께 공동무덤에 매장되었다그리고 나머지 민간인 대부분은 연합군에 의해 불도저로 공동무덤에 밀어 넣어진 것이다베트콩측은 폭격으로 죽은 2,000명의 희생자를 대규모 무덤에 매장했다고 주장했다오버도퍼는 점령의 희생자 2,800명이 공동무덤에서 발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그는 그들이 미국의 폭격으로 죽음 사람들이 아니라베트콩과 북베트남 측의 정치적 학살에 희생된 사람들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그는 공보부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한 듯하다폭스 버터필드(Fox Butterfield)는 1975년 4월 11일자 뉴욕 타임즈지에서 심지어 무덤 하나에 3,000명씩이나 배당하고 있다! CIA의 전 정보분석가 사무엘 A. 아담스(Samuel A. Adams)는 1975년 3월 26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지에서, “남베트남측과 공산주의측의 사망자 추계는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사이공측은 자신들이 약 2,800명의 시체를 파묻었다고 말한다베트콩 경찰보고서는 그 숫자를 약 3,000으로 적고 있다고 썼다그와 같은 말을 한 베트콩 경찰 보고서는 알려진 바 없다또한 아담스로서는 2,800이라는 숫자가 문서를 조작할 필요성에 의해 짜맞추어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못했음이 분명하다이 공동 무렵 기사 중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독자적인 기자들이 그 발굴현장에 가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며또 거듭되는 그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확한 장소를 밝혀 내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한 기자는 최초로 공개된 무덤현장에 참석했던 한 미국 해병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그 해병은믿을 만한 사람들로서 신중하게 선별된 기자들만 그곳에 참석했으며 시체의 점검은 허용되지 않았고또 자신은 불도저가 동원됐음을 시사하는(당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은 불도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바퀴자국과 밀어 낸 흔적을 보았다고 주장했다아마도 무덤을 조사한 유일한 서방측 의사인 캐나다의 알제 베네마(Alje Vennema)박사는 미국과 사이공측의 계산은 그가 조사한 무덤에 묻혀 있던 희생자 수보다 7배나 많게 공식주장된 477명이 아니라총 67명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들 대부분은 상처자국이 있어서 전투의 희생자인 것 같았으며 또 그가 본 시체는 대부분 군복을 입고 있었다.“

 

출처미국 대외정책론 p.413~414

 

뿐만 아니라 후에 탈환 이후 남베트남 정부는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협력한 이들을 색출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고이 과정에서 자경단에게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일단 후에 탈환 이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측 지지자들은 당연히 사이공 정부의 보복에 의해 가장 희생되기 쉬운 입장에 처해 있었으며이후 사이공 군대나 자경단에 의해 대대적인 보복살해가 있었음을 밝혀주는 증거도 발견됐다그 대표적인 증언은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의 증언인데 그는 후에에서 온 프랑스 신부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요컨대 사이공 군대에 의해 해방된 후 1,100명이 죽임을 당했다대부분이 학생대학교수성직자였다후에 시의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은 베트콩에 대해 그들이 동조한 사실을 결코 감추지 않았다.”

 

2,800명에서 3,000명 그리고 4,000명에서 5,700명이 학살당했다는 후에 학살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미국이나 사이공 정부 측이 제시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수천 명의 민간인 학살은 사실상 매우 근거가 희박한 증거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또한 앞서 말했듯이 미군의 기계화된 화력에 죽은 이들이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에 의해 죽은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을 가능성이 더 높다또한 미국 역사학자 게리스 포터의 분석처럼 미국과 사이공 측 선전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대대적인 정치적 살인이 후에의 혁명군 전략에서는 생각되지도 않았으며 또 그 전략과 일치하지도 않았음을 보여준다즉 베트콩 포로로부터 얻은 2,784명의 명단이 적힌 문서는 대다수의 경찰관과 공무원 그리고 군인들은 처형자 리스트가 아닌 재교육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근거와 자료를 통해 보았을 때후에 학살은 1950년대 호치민의 토지개혁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에 의해 상당히 과장되고 각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물론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처형으로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예를 들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나오는 미군 참전용사 크리스마스 중령의 증언이 그렇다그의 증언에 따르면, “베트콩 몇 사람이 즉결 처분 기구를 결성한 후 정부조직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는 증언이다그러나 크리스마스 중령은 또 다른 증언도 남겼는데, “북베트남 지휘관 한 사람이 이를 알아채고 곧바로 중지시키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어쨌든 후에 학살은 상당히 과장되거나 각색되어 알려져 있다이러한 점에서 후에 학살의 또 다른 이면을 들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따라서 미국이나 남베트남 정부가 만들어낸 신화왜곡과장 등은 당연히 비판적으로 봐야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미국대외정책론촘스키임채정일월서각, 1985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마이클 매클리어유경찬을유문화사, 2002

 

What Really Happened in Hue? It was the Americans themselves who made the victims, Kaspar Mengelberg Pages 372-381

 

The Myth of the Hue Massacre 1975년 기사, Volume 13, No.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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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13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페이퍼네요!

NamGiKim 2021-05-13 23:51   좋아요 0 | URL
반공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가 참 많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구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됐다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2년 이내에 남북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했지만민중의 80%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할 것을 알고 있던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그 과정에서 아이젠하워는 17도선 이남에 자신들의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응오딘지엠을 대통령으로 한 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월남 혹은 남베트남이다.

(남베트남군 관련 서적, 부제목을 보아선 남베트남을 찬양하는 서적으로 보인다.)

 

사실 남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주의 전쟁을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구도로 포장하기 위해 세운 바오다이 황제의 베트남국의 연장선상이었다이른바 바오다이 해결책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에 베트남국을 세웠는데이는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확산되던 1949년의 일이었다당시 프랑스군은 안정화 전략(Pacification)이라는 명목 하에 자신들의 하수인을 기반으로 한 밀집촌을 세우고베트민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의심이 되면 마을 주변에서 무차별 폭력과 부녀자 강간 그리고 집단 양민학살을 저질렀다또한 마을의 가축을 죽이고 불태우며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 폭탄을 투하했다이러한 프랑스군의 전략은 미국과 남베트남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어받게 된다.

 

여기에는 프랑스군 휘하에 있는 군대가 있는데 그게 바로 바오다이 국가 소속의 괴뢰 베트남군이었다이 군대의 기지는 보통 남베트남 지역에 있었으며응우옌반티에우나 응우옌까오끼 그 외의 남베트남 측 군부나 지도부들 또한 달랏(Da Lat)에 있는 프랑스측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많다추가적으로 구정 공세 시기 베트콩 용의자를 재판도 없이 처형한 남베트남군 경찰 총장 응우옌응옥로안 또한 이쪽 출신이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 분단되자 미국은 남베트남의 바오다이에서 자신들의 괴뢰 앞잡이 응오딘지엠으로 바꾸는 전략을 수립했고미국으로부터 막강한 지원과 후원자를 얻은 응오딘지엠은 토착 세력인 빈쑤옌과 까오다이 세력 그리고 호아하오 세력들을 하나둘씩 숙청하거나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썼다이런 과정 때문에 일각에서는 응오딘지엠이 친불파를 숙청했다.”는 말 안되는 소리를 하기도 하는데결과적으로 토착 친프랑스 세력의 힘을 약화시킨 것이지이것이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인적청산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남베트남군 관련 서적2,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가 쓴 책이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미국의 남베트남군에 대한 전략은 이러했다.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에는, “미국은 24만 명에 달하는 남베트남 정규군(ARVN)을 훈련시키는 한편재정 지원을 지속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프랑스와도 협력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나온다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남베트남은 말 그대로 프랑스 제국주의에서 미제국주의의 하수인 국가가 된 것 뿐이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지배자 미제가 들어와 한반도 이남을 미제국주의 반공기지로 세운 것과 일맥상통한다한국에는 미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이 있었다면남베트남에는 미제국주의 앞잡이 응오딘지엠이 있었던 것이다.

 

1954년 9월 제네바 회담 결과에 따라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에 대한 남베트남의 원조가 사라지자 남베트남군에 대한 군사원조는 과거 한국군을 훈련시켰던 미국 오다니엘(O’Daniel)이 지휘하는 군사원조고문단이 맡게 되었다. 6개월 뒤인 1955년 2월에는 훈련교육단이 활동하기 시작했으며이러한 시점부터 미국은 남베트남을 자신들의 반공군사기지화 했다. 1954년 시점에서 남베트남군(ARVN)은 최소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951년에는 공군, 1952년에는 해군 그리고 1954년 10월에는 해병대가 창설됐다적어도 공군과 해군은 프랑스 식민지배 기간에 만들어진 것이다즉 이런 행정기반에서 남베트남군은 군대 규모를 확장했다.

(구정 공세 시기 남베트남군)

 

1959년 이후 남베트남은 군대의 숫자가 확장되었는데, 1960년에 이르러 디엠 정권은 정규군 17만 5,000명과 민병대 10만 명자경단 6만 명 그리고 경찰력 4만 5,000명으로 병력 숫자가 급증했다. 1963년에는 50만 명의 규모를 자랑하는 군대로 성장했다그러나 이러한 군대 숫자의 증가가 주민이 남베트남 정권을 지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비슷한 시기 응오딘지엠 정권은 가족정치를 실행하여 자신의 동생 응오딘누에게 경찰력을 부여했고누는 비밀경찰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학살하는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그렇게 해서 죽게 된 사람이 수만 명에 달한다.

 

또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케네디 행정부의 대통령 비서인 로버트 맥나마라의 기획에 따라 전략촌 계획(Strategic Hamlet)을 세웠다이 전략촌 건설 계획을 통해 과거 프랑스가 했던 전략을 그대로 이용했고이는 당연히 민중의 반발을 샀다쉽게 말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을 단위의 코호트 격리를 공산주의자들 막는다는 핑계로 마구잡이로 한 것이다그 결과 1963년 말 기준에서 베트콩은 남베트남 지역의 75%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 근현대사를 연구한 저명한 역사학자 버나드 폴(Bernard Fall)에 따르면 1957년부터 1965년 4즉 남베트남에서 처음으로 북베트남 대부대가 발견된 것으로 전해지는 시기 이전까지이 사이에 15만 명이 넘는 베트콩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이는 사실상 1965년 이전 미국과 남베트남이 저지른 대량 학살이라 주장했다즉 이 과정에서 죽은 건 베트콩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이다폴에 따르면 베트콩들은 미군 기갑부대네이팜탄제트폭격기그리고 구토유발 가스 등의 치명적인 환경 속에서 싸웠고이런 최신식 군사력 앞에서 베트콩과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M-16 소총을 들고 있는 남베트남군)

 

응오딘지엠 정권이 급격한 군대 증가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이 민중에게 전혀 지지받지 않았다는 사실과 무능하다는 사실이 한 전투에서 밝혀졌는데그게 바로 1963년에 치러진 압박 전투(Battle of Ap Bac). 1963년 1월 2일에 치러진 압박 전투에선 최소 1/5이나 1/6의 우월한 병력과 최신식 APC 장갑차 그리고 헬리콥터와 미군 고문단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은 83명이 전사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투입되었던 헬기 15대 중에서 14대가 손실을 입었으며이중 5대는 전투 현장에서 파괴되었다투입되었던 10대 이상의 APC 장갑차 중 3대가 파괴되었다반면 무기와 화력 그리고 병력에서 밀렸던 베트콩은 18명의 전사자와 39명의 부상자만 나왔다.

 

그 외에도 남베트남군은 1964년 12월에 치러진 빈지아 전투나 1965년에 치러진 동쏘아이 전투에서 베트콩에게 대패했다. 1964년 12월엔 수도 사이공으로 부터 30km 정도 떨어진 빈 지아에서 베트콩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병력상으로 2.5배나 많은 남베트남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전투에서 승리했는데베트콩은 32명이 전사했지만미군사고문단에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군은 압도적인 장비와 화력에도 불구하고 201명이 전사했다심지어 빈지아 전투 소식을 들은 호치민은 작은 디엔비엔푸 전투라 표현할 정도였다. 1965년 5월 말에는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며칠 동안의 전투 끝에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완전히 괴멸시키기도 했으며, 1965년 6월 남베트남군은 동쏘아이 전투에서 미정규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트콩보다 3.5배나 더 많은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다추가적으로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20명도 같이 전사했다.

 

이처럼 남베트남군은 군대로써도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베트남 전쟁 기간 남베트남군의 탈영병 숫자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미 국방부 자료에 의하면, 1966년 한 해에 12만 4000명의 남베트남 병사들이 탈영했다남베트남 지상군의 21%에 해당되는 숫자였다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남베트남군의 탈영병 숫자는 수십만 명에 달했다한마디로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군대였다역사학계와 군사학계를 막론하고 미국의 개입이 없었으면 1965년이나 1966년에 남베트남이 패망했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학설이다즉 남베트남이라는 나라는 1965년 린든 존슨 정부의 대대적인 군사개입을 통해 목숨이 10년 더 연장된 것뿐이었다.

 

1973년 파리 평화회담 1년 후인 1974년 북베트남 공산당은 통일을 위한 총 공세를 논의하여 1975년 3월에 실행했다실행하자마자 남베트남군의 주요거점인 부온마투옷이 5일만에 함락되고다낭과 후에 호이안 퀴논 나짱 등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진격으로 단기간에 함락되었다최후로 형성된 쑤언록 방어선은 레민다오 준장 휘하의 남베트남군이 방어를 했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함락되었고북베트남군 총공세 개시 1달 만인 4월 30일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이 패망했다마치 한국전쟁때 인민군의 진격에 1달 만에 임시수도 부산까지 밀렸던 그 역사가 비추어질 정도다한국의 경우 정부수립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어난 일이라 최소한의 변론이 가능할지 몰라도 남베트남의 경우 군사력이나 장비면에서도 북베트남군에게 밀렸고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서도 패망했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답이 더더욱 없는 국가였다.

(깃발을 들고 있는 남베트남군 대열)

 

거기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응오딘지엠을 초대 건국 대통령으로 세웠던 남베트남 공화국의 군부는 육군 중령 한 사람만 빼놓고 죄다 프랑스 식민군 출신의 민족반역자들이었다당시 100만 이상의 병력을 자랑했던 남베트남 군대의 대다수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군에 복무했던 반역자들이었다. 1963년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을 지휘했던 후인반까오(Huỳnh Văn Cao)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 복무했고위에서 언급한 응오딘지엠을 죽인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또한 식민지 시절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한 인물이었으며남베트남의 4성장군이었던 까오반비엔(Cao Văn Viên)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했던 인물이었다이처럼 남베트남군의 지도부는 프랑스에 빌붙어 민족반역의 길을 걸었던 반역자들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남베트남군은 그냥 미국의 지원으로만 간신히 버티던 부정부패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으며정통성이라곤 1%도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었다이런 군대가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승리를 쟁취한 호치민의 군대에게 패배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이러한 이유에는 당연하게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문제가 들어가 있으며베트남 전쟁 참전 혹은 침략전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이 항상 외면하는 아주 불편한 진실이다또한 이런 한심한 군대와 국가를 기념하며 미국과 호주 등에서 활동하는 보트피플들은 말 그대로 답이 없는 똥멍청이들이다.

 

참고문헌

 

미국의 대외정책론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해르먼임채정(), 일월서각, 1985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창비, 1999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마이클 매클리어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02

 

호치민 평전윌리엄J.듀이커정영목(), 푸른숲, 2003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윤충로선인, 2005

 

리영희 평전김삼웅책보세, 2010

 

최고의 인재들데이비드 핼버스탬송정은 황지현(), 글항아리, 2014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들녘, 2015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들녘, 2015

 

디엔비엔푸보 응우옌 잡강범두(), 길찾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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