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시리즈를 연재하기로 했는데거의 5개월 가까이 연재를 하지 않았군요기다리신 분들을 위해 사과드립니다다시 방학기간이니졸문이지만 종종 연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 사변을 통해 일본은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였다이런 일련의 침략행위를 통해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잠자고 있던 서방 세력에게 힘을 과시했다비슷한 시기 지구반대편에서도 파시즘이 급부상하고 있었다일본의 만주 점령 10년 전 이미 이탈리아에선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이끄는 검은 셔츠단(Blackshirts)이 수도 로마로 진군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했다즉 이탈리아에선 10년 가까이 파시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2.26 사건, 1936년에 일어난 이 군부의 쿠데타는 일본이 중국 침략을 하게 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은건 반공주의 성향의 조직들을 모아 폭력과 무력으로 잡은 것이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도 이러한 반공주의 운동이 하나의 조직으로 나타났는데그것이 바로 1920년 히틀러를 당수로 둔 나치당(Nazi Party)이었다이들은 무솔리니의 검은셔츠단을 예시로 삼아 갈색셔츠단 즉 돌격대(Stormtrooper)를 만들어군대 쿠데타를 통한 정권 전복에 나섰다그러나 1923년 바이마르 당국의 진압으로 실패했고히틀러 또한 감옥생활을 경험했다당시 독일의 바이마르 정권은 그 이후 계속 유지되다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을 맞으면서나치와 사회주의 세력에 의해 흔들렸었다경제 대공황 이후 다시 경제가 휘청거리자나치는 다시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1933년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서 독일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20세기 파시즘을 추구한 인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무솔리니가 선배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지속되면서 히틀러의 힘이 무솔리니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대표되던 시대는 끝났고군부를 중심으로 정치가 형성되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 사변을 통해 시작됐다또한 정치인들에 대한 테러도 시작이 됐다이노우에 닛쇼가 결성한 국가주의 단체 혈맹단은 일본 정부의 전 대장이나 대신 그리고 재벌 총수 등을 차례로 암살했다. 1932년엔 5.15 사건이라고 하여일본 해군출신의 청년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을 살해하고육사 생도등이 정부와 정당 기관 그리고 일본 은행 등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이것은 당시 히로히토 천황의 측근과 정당 그리고 재벌에 대한 테러이자 쿠데타였다.

(5.15 사건을 보도한 일본의 언론사)


(찰리 채플린, 무명영화 배우로 유명한 찰리 채플린 또한 이 사건에서 암살당할 뻔했으나, 덴뿌라를 먹고 있어서 살아남았다.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룬적이 있다.)

 

이런 쿠데타를 일으켰던 이들은 재판에서 위기에 처한 국가방위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옹호했다쿠데타에 가담했던 이들은 가담의 정도에 따라 유기징역과 집행유예 및 훈방조치를 받았다당시 일본 민중들이 정당정치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오히려 반란 장교를 구명하려는 탄원이 많이 있었으며이에 따라 사형을 받은 이들은 한명도 없었다재판을 받은 40명 중에 거의 전원이 1~2년 내에 석방됐다그러나 일본에서 일어난 5.15사건은 1920년대로 대표되던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식민지 조선에서는 문화통치로 일컬어지던 시대의 종말 즉 정당내각 시대의 종언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2.26 쿠데타 당시 진격하는 일본군)


(2.26 쿠데타 관련 일본 측 서적)

 

1932년에 일어난 5.15 사건은 이렇게 끝났지만, 1936년 2월 26일에 일어난 이른바 2.26 쿠데타는 아니었다. 1936년 2월 26일 수도 도쿄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사단의 청년 장교들이 이끄는 1,400명의 병력은 말 그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이들은 육군대신의 공관을 포위했고경시청을 점거했으며총리대신과 대장 대신내대신시종장을 암살했다그리고 육군 교육총감의 집으로 몰려가 총감을 살해했다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존황토간(尊皇討奸)’으로 천황을 제대로 받들기 위해 간신들을 치겠다는 의미였다이들은 천황에게 자신들의 뜻을 알리기 위해육군대신의 공관으로 몰려들어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알려줬다그들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정치사회적 개조와 통제파 지도자들을 체포할 것

2. 황도파 장교들을 요직에 임명할 것

3.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아라키 장군을 관동군 사령관에 임명할 것

 

당시 2.26 쿠데타에 연루가 됐던 인물 중에는 사회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입장에 있던 기타 잇키(Kita Ikki)도 있었다그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일본 제국 패망사의 저자 존 톨랜드(John Tolland)는 그에 대해 사회주의 강령에 제국주의를 결합하려고 애쓴 열렬한 혁명가이자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는데그는 급직적인 사회상을 꿈꾸면서도 천황 숭배 사상에 사로잡혔었다고 톨랜드는 주장했다물론 톨랜드의 주장과는 달리 기타 잇키가 천황제를 거부했다는 주장도 있고, 2.26 쿠테타의 실질적인 정신적 지주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기타 잇키, 그는 사회주의와 제국주의 성향이 혼합된 인물로 말 그래도 짬뽕인 인물이다.)


(국내에 출판된 기타 잇키 전기,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 시리즈로 출간했다. 분량과 가격이 만만치 않은 책이다.)

 

기타 잇키는 중국과 인도의 7억 형제들은 우리의 보호와 지도력이 없으면 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고이러한 생각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입장에서도 나타났다물론 그는 일본 정부가 식민지인들을 차별하는 것에 반대했고그러한 차별을 완벽히 철폐해야한다 생각했다이러한 그의 생각은 하나의 일본제국 하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대등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라는 그의 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그렇지만일본의 지배 자체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또한 2.26 쿠데타에 관여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사회주의와 제국주의가 혼합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2.26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 장교들은 천황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1932년 5.15 사건을 생각하며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이 쿠데타 소식을 들은 천황은 매우 분노했고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겠다고 하며 큰소리를 쳤다반면 일본 육군은 청년 장교들의 취지에 공담한다면서 천황을 설득하고자 했다결국 천황의 명령에 따라 일본 군대는 쿠데타 진압에 나섰다결국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장교 2명이 자결하고 세 차례의 재판 결과 주모자 및 적극 가담자 18명이 교수대에 올랐다. 6명이 무기징역형, 22명은 1년 6개월~6년의 징역형을 받았다이렇게 되면서 2.26 쿠데타는 막을 내렸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도쿄에 있던 독일 대사관도 이 소식을 접했고당연히 반란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당시 나치독일의 언론 지였던 프랭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비공식 통신원으로 일하던 대사관의 무관 비서관은 2.26 쿠데타에 관한 임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보고서를 2개나 작성했다하나는 나치 독일에 보내는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소련에게 보내는 것이었다이 임시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의 증조부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친구사이였다그가 바로 소련의 스파이로 독소전쟁에 큰 기여를 했던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였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나온 박정희, 어린 시절 그는 2.26 쿠데타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주군 중위가 된 박정희, 그는 결국 1940년 만주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의 기회주의적인 생애가 시작된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이 2.26 쿠데타는 25년 뒤 한국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젊은 시절 군인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의 한 청년이 이에 감명 받았기 때문이다그가 바로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Park Chung hee)였다. 2.26 쿠데타가 진압으로 끝나면서 통제파가 전면에 서게 되었고일본 군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전시체제가 확고해졌다앞에서 언급한 소련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덕분에 소련은 “2.26 사건을 통해 일본이 중국 대륙을 향한 팽창주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소련이 예측한 대로 일본은 1년 뒤 중국과의 확실한 전면전에 돌입했고그것이 바로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이었다마지막으로 일본 제국 패망사』 1장 게코쿠조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리하르트 조르게, 그는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의 활약 덕분에 소련은 상당히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스파이임이 발각되어 1944년 처형당했고, 1960년대 초 소련에서 영웅으로 인정받았다.)


(일본에 있는 조르게의 묘, 현재는 러시아 대사관 측 인물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

 

“2. 26 사건은 끝났다여기서 발생한 폭력 사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유혈극이었다다만 목숨을 잃은 사람이 7명에 불과했고 폭도들은 순수히 항복했다가장 뛰어난 용기의 모범은 여인들이 보여주었다반대로 장군들은 허둥거렸다대부분의 외국인에게 이 반란은 초국가주의자가 저지른 또 하나의 학살극에 지나지 않았다그리고 이 사건의 의의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단 소련은 알았다이 사태가 중국 내륙을 향한 팽창주의로 이어질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한 조르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태는 끝났지만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진 것처럼 파문은 이미 태평양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출처일본 제국 패망사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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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정규군을 파병하던 1965년 쿠데타를 일으켜 남베트남에서 정권을 잡은 인물이 있다그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은 남베트남에서 10년간 대통령을 했던응우옌반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였다응우옌반티에우는 1963년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주도했던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암살 쿠데타에 가담했던 인물로 한국의 박정희와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박정희가 1950년대 이승만 제거 계획에 참가했던 인물이라는 점과 이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티우랑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이 시기 티우와 더불어 같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 있었다그가 바로 남베트남의 수상이자 공군 사령관이었던 응우옌 까오 끼( Nguyễn Cao Kỳ).

 

응우옌 까오 끼는 1930년 9월 8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이었던 하노이에서 태어났다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참이던 1949년 응우옌 까오 끼는 18세의 나이로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에 있는 프랑스측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즉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식민지군으로 복무했고여기서 만난 인물들 중에는 구정 공세 시기 베트콩 용의자를 즉결처분한 응우옌응옥로안(Nguyễn Ngọc Loan)이나 같이 쿠데타에 참여하게 되는 응우옌반티에우 등이 있었다. 1952년부터 디엔비엔푸 전투가 한참이던 1954년까지 끼는 프랑스령 모로코에서 조종사로 훈련받았으며거기서 중위 계급까지 올랐다마이클 매클리어에 따르면 베트남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조종사가 되었다고 한다아무튼 그 또한 대다수의 남베트남군 군인집단이 그렇듯이 프랑스 식민지 군대에서 복무했었다제네바 회담 이후 베트남으로 귀국하여 즈엉반민 휘하의 남베트남군 공군에서 복무했다.

 

1961년부터는 탄손누트 공항에 있는 공군부대에서 복무했으며소령자리까지 올랐고, CIA와 협력하여 북베트남에 침투시키는 비밀공작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1963년 응우옌반티에우와 더불어 응오딘지엠을 제거하는 쿠데타에도 참가했으며, 1964년에도 즈엉반민 휘하에 놓여 있었다. 1963년 당시 끼는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전투기 조종사였다고 마이클 매클리어는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언급하기도 했다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군벌들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1965년 끼는 티우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내부 쿠데타를 종결시켰다당시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남베트남에 지상 병력을 파병했는데끼는 친미파로서 이를 적극지지했다.

 

1965년 6월 19일 티우와 끼는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는 것과 동시에 미국의 맥 조지 번디(McGeorge Bundy)와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 대사에게 전문을 보냈는데주요 내용은 남베트남 사령관이 타당한 이유로 미군의 지원을 요청할 경우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투에 투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당시 수상이었던 응우옌 까오 끼는 수상임에도 여전히 편대장 시절의 공군 제복을 자랑삼아 입고 다녔으며장식이 하나도 없는 검은색 제복이나 선홍색 작업복에 보라색 스카프를 두른 차림으로 다녔다고 한다당시 남베트남 주둔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하고도 성향이 비슷하여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그 둘은 사이가 좋았는데 당시 수석 보좌관이던 부이 디엠(Bùi Diễm)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한쪽에는 끼 수상과 나(부이 디엠), 그리고 장관 몇 명이 앉았고 반대편에는 테일러 대사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앉았다매주 이렇게 만나 토의하는 내용은 주로 사이공이나 다낭 항에 도착하는 미군들의 환영 방법이었다.”

 

수상이었던 끼는 아주 반민주주의적인 면모도 아주 강하게 보였다그는 대놓고 사람들이 누구를 영웅으로 생각하느냐고 묻는데나한테 영웅은 딱 하나밖에 없다바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라고 할 정도로 형편없었다또한 그는 남베트남에서 민주화 시위를 전개하던 불교도들을 탄압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1966년 4월 그는 다낭 지역에서 집회를 하는 불교도와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4,000명의 남베트남 해병을 파견했고직접 현장에 나가서 진압작전을 지휘했었다이런 과정을 통해서 수천명의 불교도와 시민들을 반정부 시위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몰아 투옥시켰다.

 

또한 그가 집권하던 시기 남베트남의 부정부패는 심하면 더 심해졌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군대의 무능력도 사라지지 않았다. 1966년만 하더라도 12만 4,000명이아 되는 남베트남 병사들이 탈영했으며사실상 미군의 지상병력으로 남베트남을 유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러나 의외로 끼는 현실적인 시각을 가지기도 했었다대표적으로 북베트남과 공산당 그리고 호치민에 대한 입장이 그러했다그는 1965년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과의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남베트남 정권보다 사회정의와 자주독립에 대한 국민의 열망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응우옌 까오 끼는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었다.

 

그는 베트남 인민들에게 존경 그 자체였다그는 프랑스는 물론 다른 외침에 대항하는 투쟁에 언제나 앞장섰다내가 어려서 철이 없었을 때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을 대단한 애국자로 생각했다나도 그를 대단히 칭송했었다.”

 

끼는 1967년 남베트남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도 참여했었고대통령이 되진 않았으나 남베트남 정권의 부통령으로 복무하며 티우 정권의 핵심으로 남았었다그러던 1971년 대선에 도전하고자 입후보하려 했지만후보사퇴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세로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티우와 더불어 미국으로 망명했다혁명군의 탱크가 사이공 대통령궁을 통과하던 4월 30일에 USS 블루리지 호에 올라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미국에 가서는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에 정착했고 거기서 대략 28년 동안 술집을 운영했다.

 

그러던 2004년 남베트남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통일된 베트남으로 귀환하여 현 베트남 정부와 협력하는 방향을 선택했다이에 따라 그의 부인과 자녀들 또한 귀환했다마지막 여생을 현재 베트남 정부와의 협력 및 화해의 길을 선택했기에적잖은 베트남계 미국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특히 현 베트남 정부에 대한 미국측의 투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그리고 그는 2005년 베트남 전쟁 30주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들(반공주의 성향의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지식도 없고 자존심도 없다

 

여생을 베트남에서 다가 2011년 7월 2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 병원에서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고이후 그의 유해는 캘리포니아주 휘티어에 있는 로즈힐스 불교 묘지에 안치되었다향년 80이었다.

 

응우옌 까오 끼는 분명 프랑스군에 복무한 민족반역자였고존경하는 인물이 히틀러라 할 정도로 몰지각한 인물이었다또한 불교도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기도 했다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민중이 공산당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마음속으로는 현재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을 존경했다또한 남베트남 지도자로선 최초로 통일 베트남에 귀국하여 투자에 힘썼다즉 과거에 대한 청산을 본인 스스로 했다는 점에서 나름 개과천선한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따라서 그런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마이클 매클리어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들녘, 2015

 

https://en.wikipedia.org/wiki/Nguyễn_Cao_K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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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역사는 2천년에 걸쳐 중국에 저항한 역사다베트남의 역사를 보면 쯩 자매의 저항부터 1979년 중월전쟁까지 아주 긴 세월에 걸쳐 중국의 침략을 받았는데놀랍게도 중국은 결과적으로 베트남을 완벽히 정복하지 못했었다이는 몽고 제국도 그러했고명나라도 그러했으며청나라 또한 그러했다몽고 제국의 침공이나 명나라의 지배는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 졌지만청나라의 침략은 제법 짧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그러나 중요한건 베트남 민족이 청나라의 침공을 막아냈다는 사실이다.

(응우옌 후에 동상, 현재 베트남에서 청나라의 침략을 무찌른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나라가 베트남과 전쟁을 치른 것은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당시 베트남에서는 떠이선(Tây Sơn)의 반란이 일어나서 내부에서의 세력 다툼이 있었다이 과정에서 베트남 역사에 명성을 떨치는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였다응우옌후에는 자신의 형제인 응우옌반냑과 응우옌반루와 함께 이 반란을 주도했었고베트남 내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떠이선 3형제)

 

1784년에는 300척의 함선을 동원한 태국군 3만 명이 캄보디아 땅을 거쳐 베트남 남서부 해안지대에 상륙했었는데소아이뭇 전투(Battle of Rạch Gầm-Xoài Mút)에서 태국군을 섬멸하는 활약을 펼쳤다. 1785년 1월 20일 태국군에게 휴전을 요청하였으나이에 응하지 않았던 태국군은 떠이산군을 섬멸하려 했으나도리어 자신들이 떠이선군에게 패전했다베트남측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 태국으로 돌아간 병사는 3천 명도 안된다고 한다.

 

그 이후 기세를 몰아 응우옌후에는 응우옌쭈어을 멸하고 북진하여 1786년 7월에는 수도 탕롱(Thăng Long, 현재의 하노이)를 접수했다이로써 응우옌후에는 베트남의 왕이 되었다당시 베트남은 후레 왕조였는데그 후레 왕조의 마지막 왕은 청나라로 달아나 구원을 요청했다이에 따라 청나라의 양광즉 광동성과 광서성 총독이었던 손사의는 황제에게 본래 안남은 우리의 옛 영토이니 레 왕조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고 나중에 병력을 보내 이를 지킨다면 안남을 또다시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상소문을 올렸고청나라는 29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손사의의 지휘 아래 베트남을 침략했다.

(청나라의 베트남 침공, 1788년 청나라는 베트남을 점령하기 위해 2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했다.)

 

베트남을 침공한 청나라군은 광서성과 운남성에서 두 갈래로 출발했고, 1788년 11월에 수도 탕롱에 입성했다청나라군이 탕롱에 입성할 때까지의 군사적 저항은 거의 없었다당시 탕롱을 지키던 떠이선군은 급히 철수해 타잉화(Thanh Hóa)에 진을 치고 퀴논에 상황을 알렸다이 소식을 들은 웅우옌후에는 청나라의 출병이 레 황제 복위가 아닌 베트남 지배에 있다 생각했다따라서 그는 청나라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그해 11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꽝쭝으로 정했으며직접 10만의 수륙 양군과 20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북진했다아이러니 하게도 응우옌후에는 청나라군에 맞서 전격전을 시도했다. 1789년 1월 양국의 대명절인 구정을 이용했다.

(응우옌 후에가 지휘한 전격전을 표현한 인형)

 

1789년 1월 5일 새벽에 떠이선군이 기습을 가하자 청나라군은 대혼란에 빠졌고지휘관 손사의는 말을 타고 간신히 북쪽으로 도망쳤다응우옌후에는 먼저 탕롱으로부터 남쪽으로 90km 떨어진 닌빈에서 후레 왕조의 급조된 군대를 일거에 격파했고청의 주력군이 주둔 중이던 탕롱으로 신속히 이동했다그리고 1월 5일 밤에 탕롱의 외곽 방어거점이던 하호이와 응옥호이 요새를 점형하고다음날 정오 탕롱에 입성했다즉 여기서 청나라군이 대패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손사의가 도망을 치자 운남성 일대에서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는 이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철수했다이렇게 해서 응우옌후에는 불과 12일 만에 청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이렇게 끝난 것이 바로 베트남의 대청항쟁이었다이후 응우옌후에는 청나라에게 낮은 자세를 보였지만청나라는 패배했다는 사실에 굴욕을 느끼고 있었다청 조정은 “50만 대군을 동원해 베트남을 평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막상 실현하지는 않았다.” 결국 청나라는 웅우옌후에를 안남국왕으로 책봉하고 더 이상의 침략을 단념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동다 공원)

 

이렇게 해서 응우옌후에의 대청항쟁은 베트남 저항의 역사에 자리매김했다. 1964년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던 시점에 보 응우옌 잡 장군은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10주년 즈음하여 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그 글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바익당

 

치랑(Chi Lang)

 

동다(Dong Da, Battle of Ngọc Hồi-Đống Đa)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우리는 이제 위대한 시대에 살고 있다네.

 

미래는 우리의 것일세.”

 

참고문헌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02

 

천년전쟁오정환종문화사, 2017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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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분단되었던 국가가 있다. 대표적으로 1910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가 35년 만에 해방을 맞이한 한국이 그랬고, 19세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게 점령당한 뒤, 다시 프랑스가 들어간 베트남(얄타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따라 16도선 이북은 중국이 이남은 영국이 접수)이 그랬다. 냉전 초기에 분단의 모습을 보인 국가가 또 있는데, 그 나라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나라 독일이었다.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동쪽에서는 소련군을 서쪽에서는 미··프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1945년 항복을 선언했을 때는 이미 동과 서로 분단된 상태였다. 독일의 동부는 소련군이 접수했고, 서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이 접수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분할의 베트남이나 한국과는 달리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치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Berlin)도 둘로 나누었던 것이었기에, 소련이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들의 점령 지역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서방 세력에게 국제관계적인 측면에서 세심한 배려를 했기에, 수도 베를린의 분단을 합의 보았다. 그 결과 서베를린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동베를린은 소련이 접수하게 됐다.

 

당시 소련 점령 지역은 독일 총 면적의 40%를 차지했고, 베를린 시의 토지 46%와 인구 28%를 포함했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소련이 서방 세계에게 얼만큼의 배려를 보였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나가던 194565일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 점령 지역을 통치할 최고 기구인 독일관리위원회를 설립했는데, 이 위원회의 위원은 게오르기 주코프와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 그리고 버나드 몽고메리가 맡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이 되고, 이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대립 구도 형성이 점차 보이자, 독일 문제는 보다 냉전의 구도를 띄게 되는데 그 시작은 1946년이었다.

 

19463월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그 유명한 철의장막발언을 했는데,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세 나라가 점령한 독일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자고 제의했다. 당시 프랑스는 미국의 이런 안에 반대했지만, 19471월 독일 내 미국 점령지와 영국 점령지의 경제 통합 협정이 체결됐고 정식으로 두 점령지가 하나로 통합됐다. 이것은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기 2개월 전의 일이었으며,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조치에 스탈린은 강력한 항의 표시를 했었다. 1946915일에 출판됐던 미국무부 보고서에는 독일에서의 사태 전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이 독일을 지배하는 일말의 가능성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영국과, 또한 가능한 프랑스와도 함께 이 지역에서 경제를 회복함으로써 서독의 통일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독일을 동독과 서독으로 분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국무부 보고서에 나온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은 이 시점부터 소련과의 대립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국과 미국이 자신들의 독일 점령지역을 통합하자 프랑스 또한 통합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19482월 미국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서방국가 6개국은 런던에서 회의를 열었고, 여기서 런던 의정서를 통과시켰다. 즉 이에 따라서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세 나라의 점령지에서 서독 정부를 세울 준비를 했었던 것이다. 서방 세력들의 독자적인 움직임에 소련은 당연히 반발했고, 항의의 표시로 관리위원회(앞에서 언급한 1945년에 설립된 위원회)에서 탈퇴하겠다고 선포했다.

 

관리위원회에서 탈퇴한 소련은 이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이에 따라 소련도 동독에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계획들에 착수했다. 스탈린은 소련 점령지에서 ‘D’라고 찍힌 마르크를 발행함과 동시에 동베를린과 소련 점령지에서 통용되는 통화로 삼았고, 624일에는 서베를린을 봉쇄했다. 이것이 바로 냉전 초기 상징과도 같은 사건인 서베를린 봉쇄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소련에 대한 비난의 화포를 열었고, 그와 동시에 막대한 물자를 수송기를 통해 대량으로 서베를린에 투하했다. 이런 시점부터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각을 올렸고, 당연히 이러한 책임에는 미국의 책임이 막중했다.

 

스탈린의 생각과는 달리 서방 세계는 서베를린을 지켜내는 데 여념이 없었고, 19495월 폐쇄했던 도로를 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49523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탄생했고, 5개월 뒤인 107일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탄생했다. 하지만 동독의 탄생에서 알아야 할 사실은 동독이 통일 독일의 목적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1948523일 포츠담 회담에서 선언되었듯이 통일 독일을 만들기 위한 주민투표 요구가 독일 전역에서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점령 지역에서의 투표는 금지가 되었었고, 그 결과 주민투표는 실행되지 못했었다.

 

1949년 분단 정부가 수립 되었지만, 동서독 통일을 위한 움직임은 분명히 있었다. 독일민주공화국에선 집권당이 1952년에 주민투표 안으로 다시 요구했다. 그리고 같은 해 소련의 스탈린은 1952310일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서방 열강 대표자들에게 독일의 재통일과 중립화를 위한 제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안을 서독의 아데나워 정부는 즉각 거절했다. 1개월 뒤 스탈린은 두 번째 노트를 서방측에게 전했다. 여기서 스탈린은 서방측이 주장한 자유총선거를 승인하되 유엔감시하가 아닌 4개국 감시 하에서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서방 세력들은 이런 양보에 가까운 제안들을 모두 다 거절했다.

 

이렇게 되면서 동독과 서독은 냉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에서 대립 구도로 갔다. 1949년 서구 제국주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반공주의적 군사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제국주의 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NATO를 창설했다. 1954104일 이후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은 서구 제국주의의 군사 기지가 되어 있었으며, 이에 따라 1년 후인 195556일에 서독은 NATO에 합류했다. 그렇게 되자 1주일 뒤 소련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군사동맹 체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바르샤바 조약 기구였고, 동독 또한 이 사회주의 대오에 합류했다. 당연히 이것은 서독의 군사기지화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한 맞대응이었다.

 

지금까지 독일 통일 문제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여기에 있는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공동관리위원회를 만들었으나, 독자적으로 이 위원회의 목표를 침해한 세력은 바로 소련이 아닌 서방세력이었다.

2. 1948년 소련이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으나, 이것은 19482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체결한 런던 의정서에 대한 대응이었으며, 이런 과정속에서 미국은 서독을 반공 기지화했다.

3. 동독과 소련의 스탈린은 독일 통일안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이러한 요청을 완벽히 무시하고, 거절한 주체는 서방 세력이었다.

4. 1955년 동독이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한 이유는 서독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사동맹인 NATO에 가입한 것에 대한 맞대응이다.

5. 따라서 독일 분단의 책임은 소련이 아닌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의 책임이다.

 

참고문헌

 

독일사, 맥세계사편찬위원회, 느낌이있는책, 2015

 

1917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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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이른바 냉전(Cold War)가 시작됐다. 냉전은 19463월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과 더불어, 1947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하면서 시작됐다.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 선언은 사실상 미국의 신제국주의의 길로 가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행위였다.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에서는 친일세력과 결탁했던 친미제국주의자 이승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로 작용했고, 여운형 암살과 김구의 남북협상 이후 한반도 남부에 자본주의적인 분단정부가 수립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면서 미국은 이른바 그리스 내전에 군사고문단을 투입하는 형식으로 개입하여 그리스의 좌익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학살했다. 또한 1948년에 일어난 제주 4.3 항쟁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신제국주의 앞잡이들을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도륙했다. 이들의 학살극은 말 그대로 광란의 학살극이었으며,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물자 지원을 받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또한 내부의 부정부패와 더불어 온갖 학살극을 국공내전 시기에 자행했다. 이처럼 트루먼의 신제국주의 정책은 친제국주의적 세력을 지원함과 동시에, 그 지역에서 무차별 광란의 학살극을 동반했다.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북한이 침략했다는 이유를 들어, UN군의 형태로 한국전쟁에 아주 신속히 개입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켰고, 1950101일에는 한국군과 같이 북진하여, 북한지역 대다수를 접수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나의 변수가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이었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전쟁은 다시 38선을 중심으로 원점이 됐고, 1951년 여름부터는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됐다.

 

한국전쟁에 대해 단순히 자유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지켰다는 식으로만 배우는 우리사회가 항상 외면하거나 언급을 꺼리려 하는 역사적 진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사회주의 국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은 전쟁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국제연대를 실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일어난 제2차 국공내전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종결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과정에서 유엔군 총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만주지역의 핵공격 계획과 더불어 대만으로 피신한 장제스의 군대를 중국 본토에 상륙시키고자 했다.

 

당시 북한에 지원군을 파병한 마오쩌둥은 1950년 스탈린과 더불어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공식국가로 승인했으며, 수교와 더불어 중월국경지역을 중심으로 베트민에게 물자를 지원했다. 반면 한국전쟁에 신속히 참전했던 미국은 1950년 시점부터 식민주의 전쟁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를 위해 소수의 군사고문단을 사이공에 파병했으며, 프랑스의 전쟁비용을 대신 지불해줬다. 그 결과 1951년 보 응우옌 잡 장군이 홍강 삼각주를 목표로 프랑스군에게 총공세를 가했을 때, 미국이 지원한 네이팜 폭탄이 베트민군을 향해 투하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중국과 북한 그리고 베트남에서 치러진 전쟁은 말 그대로 미제국주의와 그 위시한 제국주의 국가들에 맞선 반제국주의 투쟁이자 반식민주의 투쟁이었다. 거기다 당시 호치민이 치르고 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식민주의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한 민족해방전쟁이었으며, 그런 전쟁에서 미국은 제국주의의 본성을 드러내며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게 무기와 전쟁자금을 지원했다. 거기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군 일부는 19537월 휴전협정이 성사되고 난 이후 베트남으로 가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히기 까지 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는 장제스의 반동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군대를 한반도 전선에 투입하여 중국 본토를 자본주의화 시키려는 야심찬 계획까지 진행했다. 그리고 이런 계획은 미제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하는 것과 비슷한 시점에 진행됐다.

 

지금까지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미국의 정책을 언급했다. 이러한 사실을 들어 생각해 보았을 때, 당시 미국이 치르고 있던 전쟁은 식민주의적이었으며 신제국주의적인 전쟁이었다. 특히나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군이 식민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향했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패하여 포로로 잡혔다는 점에서 이 세 가지 전쟁의 성격이 어떠한 성격을 가진 전쟁인지 아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당시 사회주의 진영이 치렀던 이 세 가지 전쟁은 반제국주의 반식민지주의적 민족해방투쟁이자 계급해방전쟁이었으며, 미국과 그 위성국들의 전쟁은 말 그대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이에 따라 당연히 한국전쟁 또한 제2차 국공내전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더불어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의 해석은 앞으로의 학계가 발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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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7-11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부 수립부터 53년까지 한국은 자본주의 정부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제헌헌법 경제조항만 읽어봐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초기 한국 정부는 국가사회주의와 더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리고 초기 이승만 정부의 정치 이데올로기였던 일민주의 그리고 그 일민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범석 양우정 안호상 등 족청계는 기본적으로 반 자본주의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 강력한 민족주의 이 세 가지가 족청계 그리고 초기 한국 정부를 특징짓는 중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1953년 이후 헌법을 언급하는 것이 그나마 더 적당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비판은 피해야 합니다
자세한 것은 후지이 다케시 <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NamGiKim 2021-07-11 14:24   좋아요 2 | URL
족청계.... 김두한류의 청년단....

이 사람들은 정말 연구 대상이긴 합니다. 민우님이 표현했듯이, 하긴 그들의 성향은 파시즘(비스마르크로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재 복지 보장)으로 상징되는 성향도 분명 있었죠. 하긴 김두한은 뉴딜도 칭찬하고 히틀러도 칭찬하고, ˝아 우리가 빨갱이 때려잡으려면 무상복쥐 해야지˝라는 소리도 했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승만이 그런 족청계를 포함하여 숙청했으니. 안호상도 대표적인 예시고.

이 글을 읽어보았다면 알겠지만, 냉전사적 그리고 식민지 해방전쟁적 측면에서 바라본 관점이죠.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이런 책도 있군요. 한번 찾아봐야겠다.

Redman 2021-07-11 17:30   좋아요 1 | URL
정말 권력마귀 이승만...ㅋㅋ 후지이 다케시는 워낙 주목받았던 연구자고 관점도 참신해서 읽어볼만 합니다

아 그리고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