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이른바 냉전(Cold War)가 시작됐다. 냉전은 19463월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과 더불어, 1947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하면서 시작됐다.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 선언은 사실상 미국의 신제국주의의 길로 가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행위였다.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에서는 친일세력과 결탁했던 친미제국주의자 이승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로 작용했고, 여운형 암살과 김구의 남북협상 이후 한반도 남부에 자본주의적인 분단정부가 수립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면서 미국은 이른바 그리스 내전에 군사고문단을 투입하는 형식으로 개입하여 그리스의 좌익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학살했다. 또한 1948년에 일어난 제주 4.3 항쟁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신제국주의 앞잡이들을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도륙했다. 이들의 학살극은 말 그대로 광란의 학살극이었으며,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물자 지원을 받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또한 내부의 부정부패와 더불어 온갖 학살극을 국공내전 시기에 자행했다. 이처럼 트루먼의 신제국주의 정책은 친제국주의적 세력을 지원함과 동시에, 그 지역에서 무차별 광란의 학살극을 동반했다.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북한이 침략했다는 이유를 들어, UN군의 형태로 한국전쟁에 아주 신속히 개입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켰고, 1950101일에는 한국군과 같이 북진하여, 북한지역 대다수를 접수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나의 변수가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이었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전쟁은 다시 38선을 중심으로 원점이 됐고, 1951년 여름부터는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됐다.

 

한국전쟁에 대해 단순히 자유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지켰다는 식으로만 배우는 우리사회가 항상 외면하거나 언급을 꺼리려 하는 역사적 진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사회주의 국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은 전쟁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국제연대를 실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일어난 제2차 국공내전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종결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과정에서 유엔군 총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만주지역의 핵공격 계획과 더불어 대만으로 피신한 장제스의 군대를 중국 본토에 상륙시키고자 했다.

 

당시 북한에 지원군을 파병한 마오쩌둥은 1950년 스탈린과 더불어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공식국가로 승인했으며, 수교와 더불어 중월국경지역을 중심으로 베트민에게 물자를 지원했다. 반면 한국전쟁에 신속히 참전했던 미국은 1950년 시점부터 식민주의 전쟁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를 위해 소수의 군사고문단을 사이공에 파병했으며, 프랑스의 전쟁비용을 대신 지불해줬다. 그 결과 1951년 보 응우옌 잡 장군이 홍강 삼각주를 목표로 프랑스군에게 총공세를 가했을 때, 미국이 지원한 네이팜 폭탄이 베트민군을 향해 투하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중국과 북한 그리고 베트남에서 치러진 전쟁은 말 그대로 미제국주의와 그 위시한 제국주의 국가들에 맞선 반제국주의 투쟁이자 반식민주의 투쟁이었다. 거기다 당시 호치민이 치르고 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식민주의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한 민족해방전쟁이었으며, 그런 전쟁에서 미국은 제국주의의 본성을 드러내며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게 무기와 전쟁자금을 지원했다. 거기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군 일부는 19537월 휴전협정이 성사되고 난 이후 베트남으로 가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히기 까지 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는 장제스의 반동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군대를 한반도 전선에 투입하여 중국 본토를 자본주의화 시키려는 야심찬 계획까지 진행했다. 그리고 이런 계획은 미제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하는 것과 비슷한 시점에 진행됐다.

 

지금까지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미국의 정책을 언급했다. 이러한 사실을 들어 생각해 보았을 때, 당시 미국이 치르고 있던 전쟁은 식민주의적이었으며 신제국주의적인 전쟁이었다. 특히나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군이 식민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향했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패하여 포로로 잡혔다는 점에서 이 세 가지 전쟁의 성격이 어떠한 성격을 가진 전쟁인지 아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당시 사회주의 진영이 치렀던 이 세 가지 전쟁은 반제국주의 반식민지주의적 민족해방투쟁이자 계급해방전쟁이었으며, 미국과 그 위성국들의 전쟁은 말 그대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이에 따라 당연히 한국전쟁 또한 제2차 국공내전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더불어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의 해석은 앞으로의 학계가 발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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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7-11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부 수립부터 53년까지 한국은 자본주의 정부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제헌헌법 경제조항만 읽어봐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초기 한국 정부는 국가사회주의와 더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리고 초기 이승만 정부의 정치 이데올로기였던 일민주의 그리고 그 일민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범석 양우정 안호상 등 족청계는 기본적으로 반 자본주의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 강력한 민족주의 이 세 가지가 족청계 그리고 초기 한국 정부를 특징짓는 중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1953년 이후 헌법을 언급하는 것이 그나마 더 적당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비판은 피해야 합니다
자세한 것은 후지이 다케시 <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NamGiKim 2021-07-11 14:24   좋아요 2 | URL
족청계.... 김두한류의 청년단....

이 사람들은 정말 연구 대상이긴 합니다. 민우님이 표현했듯이, 하긴 그들의 성향은 파시즘(비스마르크로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재 복지 보장)으로 상징되는 성향도 분명 있었죠. 하긴 김두한은 뉴딜도 칭찬하고 히틀러도 칭찬하고, ˝아 우리가 빨갱이 때려잡으려면 무상복쥐 해야지˝라는 소리도 했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승만이 그런 족청계를 포함하여 숙청했으니. 안호상도 대표적인 예시고.

이 글을 읽어보았다면 알겠지만, 냉전사적 그리고 식민지 해방전쟁적 측면에서 바라본 관점이죠.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이런 책도 있군요. 한번 찾아봐야겠다.

Redman 2021-07-11 17:30   좋아요 1 | URL
정말 권력마귀 이승만...ㅋㅋ 후지이 다케시는 워낙 주목받았던 연구자고 관점도 참신해서 읽어볼만 합니다

아 그리고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