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1950 미중전쟁 - 한국전쟁, 양강 구도의 전초전
KBS 다큐 인사이트〈1950 미중전쟁〉 제작팀 지음, 박태균 감수.해제 / 책과함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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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냉전(Cold War)1990년에 구소련과 동유럽이 붕괴되며 끝났다고 한다. 1991년 구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전 세계 패권은 미국을 중심으로 흘러갔다고 할 수 있는데, 소말리아 침공이나 유고슬라비아 내전 개입 및 코소보 내전 개입 그리고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까지 미국은 세계 패권국가로서 막강한 무력을 타국을 침공하고 공격하는 데 사용했었다. 그러던 2000년대 미국의 새로운 라이벌로 등장한 국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국이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덩샤오핑은 이른바 흑묘백묘라 불리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가속화되었고, 1989년에는 중국 내에 있던 사회주의 세력과 반체제 세력이 천안문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일이 생겼었다. 소위 천안문 항쟁이라 불리는 이 집회는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이 탱크와 군대를 동원함에 따라 잔혹하게 진압됐다. 당시 서방언론은 천안문 시위에 대해, ‘중국의 민주화라는 구호로 미화했으나, 사실 천안문 시위에는 적잖은 마오주의자들 그러니까 중국의 수정주의화 내지는 자본주의화에 반발한 사람들도 많았었다.

 

물론 서방이 홍보했던 중국의 서방식 민주주의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 경제를 성장시키는 방향을 선택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경제는 성장세를 달렸고, 2000년대에 들어서 경제규모로만 세계 2위에 도달했다. 심지어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중국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고 성장세를 달렸다. 중국은 1인당 GDP2010년대 후반에 1만 달러를 돌파했다. 더 나아가 중국은 2012년 시진핑이 집권하며 대외팽창 그러니까 미국의 아시아 대중국라인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몇몇 이들인 현재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New Cold War)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신냉전이라는 표현이 어떤 면에선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의 경우 미국과 소련의 경제관계가 그다지 깊지 않았던 반면, 현재 미국과 중국은 좋든 싫든 때기 힘든 경제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런 사실을 보았을 때, 이러한 시각도 틀린 주장은 아니다. 영화 강철비2를 보면, 미국과 중국의 분쟁을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역학관계를 통해 잘 설명하고 있다. 영화의 첫 시작은 센카쿠 열도(중국 댜오위다오)를 놓고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 대립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여기에는 군사적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도 그 운명에 휩쓸리게 되며, 남북 평화회담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은 20세기 들어서 전쟁을 치렀던 적이 있다. 그것은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한국 현대사를 전공한 박태균 교수가 감수한 책 <1950 미중전쟁>은 현재 미중분쟁의 기원을 1950년 한국전쟁에서 찾고 있다. 책은 1946년 미국이 소련을 위협하기 위해 스폰지밥의 고향으로 유명한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냉전 초기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과 반공주의적인 대소전략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며, 1950년 한국전쟁을 얘기한다.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이 치른 전투를 심도 있게 설명한 뒤, 중국과 미국이 또 다시 대립했던 베트남 전쟁과 1972년 데탕트를 얘기하며, 마지막으로 미중분쟁이 현재 지속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에 따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책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초기에는 남북한의 내전의 성격을 띄었다가 중국이 참전하면서 사실상 국제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이 적으로 부딪히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주장이 아주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냉전이라는 분쟁적 성격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냉전이라는 분쟁은 반식민주의 대 제국주의라는 대립의 성격도 다분했기 때문이다. 책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1950년 미국의 전략은 특히 베트남에서 식민주의적 성격을 띄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후 미국에 맞선 베트남인의 독립투쟁인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중국과 미국의 대립은 1950년에 정점을 찍었다. 사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자 미국의 반공 전략은 소련 핵개발의 영향과 더불어 전면적인 수정을 거쳤는데,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전술적인 면에서도 변했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북진하지 않고 단순히 남베트남을 지키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하려고 했던 점은 1950년 한국전쟁 시기 북진의 실패에 기반을 둔 것이다. 또한 호치민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전면전인 남진을 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통해 50만의 미군을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뜨린 것도 한국전쟁의 교훈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과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비록 교전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공식적인 부분에서 적이었다. 그러나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만나면서 데탕트가 시작됐는데, 이러한 미중 데탕트는 미국의 대소전략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국이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하고 2000년대에 강대국이 되면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필연적으로 발생했고, 그 분쟁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분쟁의 기원은 1950년 한국전쟁이었고, 실제로 중국은 유사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고려할 가능성도 있다. 2010년 연평도 포격 당시 중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니 빈말은 아니다.

 

<1950 미중전쟁>2020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에 KBS에서 방영했던 3부작짜리 다큐멘터리다. 즉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만든 것이다. 책의 감수는 한국 현대사 전공자인 박태균 교수가 감수했다.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학자의 검증을 받았다. 현재의 미중분쟁은 한국 내의 갈등도 초래하는 것 같다. 일부는 중국을 매우 혐오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다른 일부는 중국과의 협력을 주장한다. 앞으로 우리가 어떠한 길을 선택할 지는 말 그대로 우리의 몫이다. 책에서 주장하듯이 분명한 것은 단순히 적대적인 감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미중분쟁에 대한 우리의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미중분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한번쯤은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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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중국관행 연구총서 18
후루타 모토오 지음, 이정희 옮김, 인천대 중국학술원 중국·화교문화연구소 기획 / 학고방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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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을 여행가면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 한 인물의 초상화와 동상, 사진, 공산당 측의 선전 포스터 등을 볼 수 있다. 그는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80노인이 되기까지 평생을 투쟁으로 살아온 인물이었으며, 베트남 인민들 대다수가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호치민(Ho Chi Minh)이다. 196992일에 79세의 나이로 서거한 그는 현재까지도 베트남의 남녀노소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깊은 존경의 대상이다. 대다수의 베트남인들은 그를 조국 베트남의 국부로 생각하고 있고, 깊은 존경을 표하고 있다. 비록 호치민의 유언과는 거리가 있는 부분이지만, 1945년 그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던 바딘광장에는 호치민묘(Ho Chi Minh Mausoleum)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시신이 보존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비판을 피하기는 다소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까지도 베트남인들이 호치민을 그만큼 잊고 싶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이런 비슷한 문제는 현재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문제와 다소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레닌이나 호치민묘에 대한 찬반과는 별개로 나 또한 러시아와 베트남 여행을 갔을 당시 레닌묘와 호치민묘를 관람했었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고개 숙여 진심으로 인사드렸을 뿐이었다.

 

호치민은 20세기 세계사와 혁명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인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무찌르고 조국의 통일을 이룩한 인물이었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침략행위와 잔학성에 맞서 투쟁하는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서방사회에 크게 각인된 인물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일본 등 자본주의 진영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났었는데, 당시 젊은이들은 호치민과 체게바라의 초상화를 들고 ! ! 호치민! ! ! 체게바라!”를 외치며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호치민은 이른바 68혁명(68 Revolution)의 상징이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호치민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 책은 베트남 역사를 전공한 학자이자, 베트남국가대학 하노이교 일월대학 총장인 후루타 모토오 교수가 1996년에 집필한 호치민, 민족해방과 도이모이를 번역한 책이다. 저자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소위 호치민 사후 그를 계승한 후계자들이 어떻게 해서 호치민의 사상을 계승했고, 이것을 도이모이라는 과정에서 해냈는지를 분석했다. 사실 이런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궁금증들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현재 도이모이 과정에서 태어난 베트남 세대들에게 어떻게 해서 좋게 인식되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의 경우 대체로 젊은이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지는 않지만,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은 중국 내부에서도 결코 약하지 않다.

 

그에 반해 호치민에 대한 국민적 비판은 사실상 없는 수준에 가깝다. 굳이 찾자면 호치민을 강력하게 비판(사실상 근거 없는 비난에 가까운)하는 존재는 베트남 전쟁 이후 배를 타고 미국이나 호주 등으로 망명한 이들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망명자들이 하는 호치민에 대한 비판은 건전한 비판이 아닌 근거 없는 비난과 조롱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리고 목적이라는 부분에서도 상당히 불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호치민을 비난하는 이유는 패망한 남베트남에 대한 영혼 없는 옹호를 하기 위한 목적에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호치민 비난 및 조롱은 신념화된 뒤틀린 반공주의적 말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치 쿠바의 반카스트로주의자들이 쿠바에 대해 흑색선전을 하는 것과 똑같다고 볼 수 있다.

 

학계에서 호치민에 대한 비판으로 가장 많이 드는 사례를 굳이 뽑자면 토지개혁(Land Reform)의 문제일 것이다. 사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였던 1953년부터 베트민은 토지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준비를 했고,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근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다소 억울한 희생자가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략 2,500명에서 15,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처형당했는데, 이들 중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베트민에 협력했던 지주들이나, 혁명투쟁 가담자들도 있었다. 즉 이런 부분에 대해 호치민의 실책을 묻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 호치민에 대해 비판만 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 호치민은 당 내에서 강도 높은 자아비판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실행했다. 또한 토지개혁 책임자였던 쯔엉찐(Trường Chinh) 해임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했고, 억울한 피해자들의 재산도 일정부분 돌려받는 조치가 베트남에서 실행됐다. 또한 호치민과 공산당이 실행한 토지개혁은 성공적이었다. 이 토지개혁을 통해 새로운 계층들이 혜택을 보았고, 더 이상의 토지문제가 최소한 북부지역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식량문제도 해결되어 적어도 미국의 살인적인 폭격이전까지 먹고사는 문제가 상당히 해결됐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을 생각해 보았을 때, 오히려 토지개혁을 통해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인격적인 측면에서 지도자적인 측면에서 훌륭한 자질은 갖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지개혁 당시 호치민이 했던 발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는 민주가 빠져 있어서 타인의 의견을 듣는 것이 적고, 현실을 보는 것이 적었다. 이렇게 폭풍이 불고 있는 때 나는 책임 질 각오가 되어 있다. 모든 중앙위원은 이처럼 타인의 의견을 듣고 현실을 직시하여 책임을 져야만 한다.”

 

출처: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p.159

 

전반적인 그의 인생사를 따져 보았을 때, 호치민이라는 인물은 상당히 호감이 생기는 인물이다. 그의 인품이나 부패하지 않은 청렴함 그리고 혁명투사로서의 이미지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하고, 나 또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기에 호치민을 존경한다. 이번에도 이 책을 읽으며, 호치민의 인생을 통해 그의 감동적인 삶이 다시 한 번 깊게 다가왔다. 젊은 시절부터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그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의 길과 상당히 비슷하다. 하지만 가장 다른 점은 호치민이 성취한 것에 있다.

 

호치민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는 시점에서 총봉기를 일으켜 베트남 전국을 단기간에 장악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또한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했다. 비록 그는 1969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미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침략자들을 축출하고 통일을 이룩했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호치민이라는 혁명가의 위대함을 느끼게 되는 한편, 우리 역사에는 그 정도로 승리한 독립운동사가 없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게 느껴진다.

 

호치민의 또 다른 매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그의 행보에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동남아시아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일본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었다. 버마의 아웅산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물론 이들도 나중에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성을 알고 이에 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지만, 베트남의 호치민은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한 시점부터 항불항일투쟁을 외치며 전개했다. 19415월에 그가 창설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도 항불항일투쟁을 목적으로 창설됐다. 1955년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는 응오딘지엠이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호치민은 상당히 현명한 지도자였다.

 

호치민의 후계자들이 그를 얼만큼 잘 계승했는지는 많은 논쟁과 논란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975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베트남은 많이 어려웠다. 이들의 반미투쟁은 혁명사적인 입장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 이후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성과가 별로 없었다. 거기다 1978년 캄보디아 폴포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은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확산되어 베트남은 미국과 손을잡은 캄보디아와 중국에 맞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캄보디아에 대다수의 병력을 진격시켜 폴포트 정권을 전복시킨 것은 분명히 올바른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다. 거기다 통일 이후 공산당 정책에 대한 남부인민의 반발도 심했다. 이에 따라 베트남은 1986쇄신이라고 하는 정책을 발표했고, 그것이 바로 도이모이(Đổi mới)였다.

 

도이모이 정책은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고, 국제적인 고립을 타개하며, 지금까지 경제성장의 원천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과거 소련 사회와 비슷한 문제를 앉게 되기도 했다.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문제는 과거보다 더 증가했고, 과거에 미약하지만 유지했던 무상의료나 무상교육 시스템이 붕괴됐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이러한 문제점들이 사회 내부로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과정을 통해 베트남은 호치민 사상이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강조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현명하게도 베트남 공산당은 현재도 자아비판과 당내의 민주주의만큼은 아주 잘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점은 1970,80년대 한국보다 더 민주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점만큼은 나는 베트남이 호치민의 유지를 잘 받들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은 25년 전 후루타 모토오 교수가 쓴 호치민, 민족해방과 도이모이를 번역한 책이다. 현재 베트남 사회에서 호치민 정신이 강조되고 있는 한편, 이 책에 대한 인기도 결코 적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저자의 서문에 나온 설명과 같이, 역사학계는 호치민에 대한 또 다른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대표적으로 2018년에 공개된, 프랑스 경찰 당국의 문서다. 이 문서를 통해 호치민이 프랑스 파리에 있을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깊게 교류한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런 최신의 연구를 담지 못했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이 책을 통해 호치민 사상이 어떻게 베트남에서 수용되었는지를 알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호치민의 사상과 정신을 통해 앞으로 베트남이 어떻게 나아갈지는 베트남에게 달렸을 것이다. 나 또한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을 존경하는 한 사람으로서 좋은 방향으로 갈거라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 생각과 거의 비슷한 저자 후루타 모토오 교수의 발언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필자는 호찌민을 인류사적 시점에서 볼 때 20세기의 위인이라고 단언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지만, 호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운동인 민족해방운동의 기수였다는 것은 호가 베트남을 탄생하게 한 민족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찌민 주석은 영원히 우리들의 사업 속에 살아있다.’ 이 말은베트남 공산당 만세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만세라는 말보다도 베트남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표현이다. 호찌민의 평가가 베트남의 발자취와 한 몸이라고 한다면, 필자는 이 말이 베트남인들의 사상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인류적 과제를 향해 확대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 바꿔 말하면 호찌민의 이름에 의해 호찌민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정당화하는 방향이 생성되기를 염원한다.”

 

출처: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p.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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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20년 만에 끝나가고 있다현재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미군은 거의 다 철군을 한 상태다사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력을 철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그러나 2015 10월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고아프가니스탄 문제는 결국 트럼프 행정부로 넘어갔다트럼프 행정부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 및 병력 감축을 추진했으나임기까지 대략 수천 명의 미군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 남겨두고이 문제는 다시 민주당의 조 바이든 행정부로 넘어갔다.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위치)

 

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예상보다 오래갔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빈라덴의 알카에다 소탕을 외치며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미국은 20년 동안 이 전쟁을 치렀다. 2,400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1만 9,000명 이상의 미군이 부상당했으며미국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또한 2~3만 명이 전사했다미군 다음으로 병력이 많던 영국군 또한 500명이 전사했다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게릴라전으로 미군에 맞서 전투를 치렀던 탈레반 또한 최소 4만에서 5만 많게는 10만 가까이가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민간인 또한 1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 복장을 한 로버트 베일스 하사, 그는 2012년 3월 11일 16명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을 혼자서 학살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초기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을 토대로 탈레반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고 장악했다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도널드 럼스펠드(올해 고인이 됨)는 아프간 동굴 속 테러리스트 수백 명을 찾아내겠다.”라고 큰소리를 쳤다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이 병력을 증강하던 2008이 전쟁은 현재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아이언맨(Iron Man)이 영웅으로 탄생하는 곳으로 영화에서 등장하기도 했다영화상에서 보면 아이언맨은 미국의 적인 탈레반을 최신식 무기를 장착한 로봇으로 괴멸시킨다심지어 이들이 가진 탱크까지 미사일 한방으로 격파한다. 2008년에 개봉한 영화 아이언맨을 본 이라면 이 장면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미국 헐리우드사는 이런 장면을 통해 미국이 침략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합리화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로버트 베일스의 사진, 이 사진은 군감옥에 수감중 찍은 사진이다.)

 

그렇다면 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가려진 이면은 무엇일까베트남 전쟁 당시 손미 지역과 미케 지역에서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과 비슷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일어났다미라이 학살에 비하면 학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미국의 폭격과 군사작전으로 죽은 민간인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 중 하나가 바로 2012년 3월 11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났던 칸다하르 학살(Kandahar massacre)이다.

(칸다하르 학살 증거인멸 시도 현장, 로버트 베일스 하사는 학살을 저지르고 나서 시신을 불태워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당시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소속의 로버트 베일스(Robert Bales) 하사는 2012년 3월 11일 새벽 3시 경에 M203유탄 발사기를 장착한 M4 소총과 M9권총으로 무장했다야간투시경까지 착용한 로버트 하사는 중무장 상태로 부대를 빠져나와 부대에서 약 1.6km 떨어진 발란디와 알코자이 마을의 농가 세 곳을 습격하여민간인들을 학살했다새벽에 급습을 받은 마을 주민들은 로버트 하사에게 끌려나와 사살 당했으며총 16명의 민간인이 로버트 하사의 총탄에 살해됐다로버트 하사는 자신이 죽인 민간인들의 시체를 구석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증거인멸까지 시도했다한 마디로 학살을 저질러 놓고그 증거까지 없애려는 치밀함을 보여준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과 통화중인 버락 오바마, 이 사건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오바마가 직접 사과해야 하는 상황까지 갔었다.)

 

그러나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일부 주민들은 아프가니스탄 당국과 미군에게 알렸고로버트 하사 또한 복귀하여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자수했다이후 로버트는 쿠웨이트를 거쳐 본국으로 이송됐고영창에 수감당한 상태에서 군사재판을 받게 됐다당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미국 정부와 미군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으며대통령인 오바마 또한 책임자에 대한 엄중 처벌을 요구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는 시민들이 반미 시위를 벌이며 미군들에게 돌을 던질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졌다이 소식을 들은 탈레반 또한 미군에게 보복 혹은 테러를 감행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012년 12월 재판에선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으나, 2013년 6월 로버트 하사 본인이 유죄를 인정하면서 사형은 불가능해졌다대신 그는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남은 생애를 교도소에게 보내게 됐으며지금도 균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현재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과거 남베트남의 절차를 밟고 있다미군은 사실상 거의 다 철수한 상태고탈레반이 현재 아프가니스탄 영토 70%를 접수한 상황이다뿐만 아니라 미국과 NATO에 협력했던 인사들을 대상으로 보복도 벌어지고 있다탈레반 세력의 잔혹함과는 별개로 현재 이들이 승기를 잡고 있는 것은 그만큼 아프가니스탄 내에 반미감정이 극심하다는 반증이다아프가니스탄인들의 반미감정이 심해진 이유에는 당연히 이런 민간인 학살 사건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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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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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1950625일 북한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1953727일까지 대략 3년간 전개되었던 이 전쟁의 영향은 2021년인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분단 7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분단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움직임은 분명 있었지만, 그 구조는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한반도를 냉전의 마지막 보루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많은 피해와 영향을 주었다. 현재 북한이 강력한 반미주의 국가가 된 것이나, 한국이 강력한 반공주의 국가가 된 것도 이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을 통해 설명이 가능할 정도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미소냉전시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쟁이기도 하다. 비록 스탈린이 이 전쟁에 정규군대를 보내지는 않았으나, 북한의 김일성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전쟁 초기부터 신속히 군사개입을 했으며, 50만 가까이 되는 병력을 한반도에 파병하기도 했었다. 이에 따라 한국전쟁은 미국의 대외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왔었다. 한국전쟁이 또 다른 의미에서 특수한 전쟁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전선의 급반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 북한은 남한 땅 90%를 점령했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과 유엔군은 북한땅 90%를 점령했었다. 서로가 거의 먹힐 뻔했던 상태에서 전세를 역전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은 내전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나 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에 의해 자행된 국민보도연맹 학살이나 서울 수복 이후 남한지역에서 벌어진 부역자 학살이나 북한지역에서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그 규모나 잔인성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했다. 1951년에 발생한 거창양민학살 사건의 전개를 보면 김종원이 지휘하는 한국군에 의해 총 1,400명이 학살당했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여성, 아이, 노인이었다. 미군에 의한 직접적인 민간인 학살도 일어났고, 그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이었다. 노근리 학살에서 미군은 최소 300명에서 600명의 민간인을 전투기 기총소사와 기관총과 소총 난사로 학살했다. 전쟁 초기 우익 군경에 의해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30만의 민간인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이승만은 대학살자 혹은 코리안 킬링필드(Killing Field) 주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분명 냉전(Cold War)이라는 시대사적인 배경에서 일어났다. 이 냉전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미국의 핵공격 계획이다. 미소냉전은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과정이기도 했는데, 당시 미국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핵무기를 투하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특히 이 계획은 유엔군 총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적극 추진하려 했었다. 그러나 소련의 참전과 이에 대한 스탈린의 맞대응이 무서웠던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공로를 쌓았단 매슈 리지웨이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다. 아마도 1949년 소련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수소폭탄을 우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사회에서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기억되는 한국전쟁(Korean War)은 과거 매카시즘적인 반공주의 국가였던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되기 매우 힘든 주제였다. 브루스 커밍스나 박명림, 정병준, 박태균 등 그 외의 여러 학자들이 한국전쟁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를 단행했고, 여러 연구 성과물을 만들어 냈지만,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아주 편협한 틀에 박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반공주의라는 영역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과 국가 보안법이라는 일제 치안유지법의 후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55주년에 맞춰 박태균 교수가 집필한 책 <한국전쟁>은 학계의 여러 평가 및 분석을 다루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 이전의 통일 운동이나, 민간인 학살, 미국의 정책, 이승만 암살 시도, 미국의 세균전, 박헌영 숙청, 남북한 정권의 강화 등 여러 가지 주제를 다뤘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다소 힘든 학술서가 아닌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중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탈반공주의화를 위해 여러 부분에서 시도한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박태균 교수가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모든 시각을 전부다 동의한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 내 생각과 다른 부분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맥락에선 일치하는 부분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저자 또한 반공주의를 벗어던지려는 여러 노력들을 책에서 보여줬다. 북한은 무조건 나쁜놈과 같은 과거 반공주의 프레임을 최대한 많이 벗어던지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이 책을 읽으면서 만족스러웠다. 한국전쟁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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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간의 냉전시기 대규모의 열전이었던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북한과 베트남이 미국에 맞서 전쟁을 치른 사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 것이다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를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라는 국한된 개념으로만 접근하는 한국사회에서 당시 북한과 베트남의 국제연대는 객관적인 평가를 하기 쉽지 않은 구조다그러나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따지고 보면 이는 상당히 일리가 있으며반식민지투쟁이라는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전략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막고 친미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고다른 한편 베트남에서 식민지 전쟁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를 지원하여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다.

(호치민과 김일성, 1950년대 호치민과 김일성은 직접만나 반제국주의 투쟁의 기치를 다졌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개입한 이 전쟁(한국전쟁중국-대만 분쟁1차 인도차이나 전쟁)들은 엄밀히 따지자면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주의적 모순에서 비롯된 전쟁이었으며미국의 적대세력들은 엄밀히 따지자면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것이었다이러한 사실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남한의 이승만 정부를 지원했던 미국과 프랑스가 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의 독립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기 위한 식민지 전쟁을 치렀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1년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은 국제여성동맹 조직을 통해 북에 조사단을 파견했었다또한 북한은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선 호치민의 투쟁에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연대를 표명했으며베트남의 방북조사단 활동에 감사를 보냈었다. 1952년에는 베트남은 조선전쟁(한국전쟁기념대회를 열어 북의 입장을 지지했으며한반도에서의 미제국주의 군대 철수를 주장했었다또한 호치민은 1950년대 당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한국전쟁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었다.

 

조선반도에서의 경험이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지요미국과 미국을 추종하는 40개국이 모두 힘을 합쳤지만정작 그들이 침략한 국가에 눌려 패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략한마디로 반동 제국주의 진영이 패배하고 평화와 민주주의 진영이 기필코 승리할 것입니다베트남은 민주 진영에 속해 있으며현재 미국이 이끄는 반민주진영에 대항하는 반제국주의의 요새입니다.”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평전에서도 이러한 맥락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쇼트에 따르면 중국의 마오쩌둥은 동료들에게 만약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승리하면 침략 욕구가 더 커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으며어쩌면 미 공군이 만주와 중국의 동부 해안 도시를 폭격할 수도 있고타이완의 국민당 군대가 중국 본토로 상륙작전을 시행할 가능성도 있으며심지어 호찌민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이 미군과 합동으로 중국 남부와 베트남 국경 지역에서 침공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라고 책에서 언급했다마오쩌둥의 이러한 우려는 당시 국제적 정세에서 중국이 만주 국경일대에서는 북한을 돕고 운남성이 있는 남부에서는 베트민을 도왔다는 사실에서 전혀 틀리지 않은 우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에 파병됐던 북한의 공군 조종사들)

 

1954년 호치민의 혁명군대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 최정예 부대 11,000명을 포로로 붙잡으면서 100년간의 식민통치를 종결시키는 위대한 혁명사적 업적을 남겼다그러나 이 위대한 승리 이후 제국주의적 패권과 망상에 휩싸여 있던 미국이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단시키며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이라는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세웠다이것을 결국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우리가 흔히 아는 베트남 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이에 따라 북한은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부 편에 섰으며, 1957년 7월에는 호치민 주석이 북한의 수도 평양을 방문했고, 1958년 11월에는 김일성 주석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방문하며 양국의 회담을 가졌었다그리고 이런 친선관계를 통해 두 국가는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제를 통해 인민의 단결과 우애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었다.

 

1964년 미국의 통킹만 사건 공작으로 베트남을 침략하자 북한은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에 지지와 연대를 보냈으며소수의 공군병력과 군수물자를 보냈다북한은 베트남에 무기 10만 정과 군복 100만 벌 등의 군수물자를 호치민 정부에게 제공했고, 1973년까지 대략 4,180만 루블의 경제원조까지 했다그리고 대략 200명 정도의 병력을 보냈는데이 중 87명은 공군 조종사였다고 한다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북한 조종사들 중 14명이 전사했고, 26대의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켰다당시 전사한 북한 공군 조종사의 묘지는 현재 삼성과 같은 한국 대기업공장들이 들어가 있는 박장성에 있다.

(베트남 박장성에 있는 북한 공군 조종사 묘비, 이는 현재도 베트남에 있으며 2019년 북미 정상회담때 국내에서도 여러 채널이나 뉴스를 통해 보도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전쟁에서의 북한과 베트남의 국제연대에 대해 이야기 했다냉전이라는 흐름에서 반식민지 투쟁과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양국이 연대와 지지를 표명했다는 사실에서이들의 투쟁은 식민지 해방 투쟁사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점에서 북한의 북베트남 지원은 미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맞선 국제연대의 일환이었으며역사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일련의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호치민 평전윌리엄J.듀이커정영목(), 푸른숲, 2003

 

식민주의를 타도하라호치민윌든벨로(옮김), 배기현(서문), 프레시안북, 2009

 

마오쩌둥 2필립 쇼트양현수(), 교양인, 2019

 

냉전의 마녀들김태우창비, 202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김동원 안광획 이정훈(공저), 4.27시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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