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생일에 맞춰 나온 베트남의 포스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지도자인 호치민(Hồ Chí Minh, 胡志明)은 베트남 전쟁 당시 서구 좌파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호치민 서거 3일 뒤인 19699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UC 버클리 대학에선 히피족(Hippie)’으로 대표되는 대학생들이 호치민의 초상화를 들고나와 그를 추모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구정 공세(Tet Offensive)가 한참이던 1968217일 독일의 서베를린에선 국제 베트남 회의가 열려 미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 인민의 승리를 지원하며, ‘! ! 호치민!’을 외쳤다.

 

이처럼 호치민은 1960년대 서구 좌파들에게 있어서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좌파들에게 남아있다. 2019년 칠레에서 반정부 시위가 한참일 때, 거리로 나온 칠레인들 중 일부는 호치민의 노래(Bài Ca Hồ Chí Minh)’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따라서 호치민은 단순히 베트남의 국부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좌파들에게 영웅과도 같은 존재다. 지금까지도 호치민은 베트남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에는 현재 좌파의 영향력도 무시하긴 힘들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한 인물이 이 정도로 유명해진 사례는 아마 20세기에서는 호치민 말고는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 좌파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호치민은 1890519일 베트남 응에안 성(Nghệ An)에서 태어났다. 2016년부터 하노이 일월대학 총장을 지냈던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자신의 저서 호찌민-민족해방과 도이모이에서 그의 출생 년도가 미스터리하다고 밝혔으며, 1891년이나 1893년생일 수 있다고 했다. 후루타 교수에 따르면 그의 생일인 519일도 사실은 1941519일 즉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 Viet Minh) 창설일을 생일로 표기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William J. Duiker)는 호치민의 출생일을 1890년으로 표기했으며, 베트남 측 자료가 제법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호치민의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관리였고, 아버지를 따라 당시 수도였던 후에(Hue)로 가서 공부했다. 17살이 되던 1907년 호치민은 프랑스식 국립학교인 국학에 입학했으며, 거기서 반프랑스 시위를 했다가 퇴학당했다. 19세기 중반부터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당시 베트남에선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로 대표되는 반프랑스 독립운동이 일어났었다. 호치민 또한 판보이쩌우의 학교에서 잠시나마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그러던 1911년 사이공으로 가 프랑스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에 주방보조로 취직했다.

 

19116월 만 21세의 나이에 베트남을 떠났으며, 30년간의 길고 긴 해외 생활을 이렇게 시작했다. 서방에서 베트남 근현대사 1세대 연구자인 버나드 폴(Bernard Fall)이러한 호치민의 행적이 아시아의 사회주의 지도자 마오쩌둥과의 큰 차이점이라 주장했다. 주방보조로 일하게 된 호치민은 그 해 7월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해 처음으로 외국 생활을 체험했고, 알제리, 튀니지 등의 프랑스 식민지와 라틴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등을 돌아다녔다. 젊은 시절 그는 미국에도 있었는데, 뉴욕과 보스턴에도 있었으며 보스턴의 옴니 파커 하우스에서도 일했다고 한다. 1913년에는 미국을 떠나 영국 런던에도 정착했었고, 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7년 다시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호치민은 프랑스사회당에 입당해 안남애국자협회를 조직하고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에 찾아가 8개 항목으로 구성된 안남인민의 요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여기에는 모든 정치범의 석방, 언론자유 보장, 결사와 집회의 자유보장 등, 베트남인과 프랑스읜의 동등한 권리 요구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치민의 청원은 프랑스 당국 인사들과 서구 열강에 의해 철저히 외면받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호치민은 프랑스 파리에서 3~4년간 머물렀는데, 2018년에 밝혀진 문서에 따르면 김규식 조소앙과 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했었다.

 

19207월 프랑스사회당 기관지인 뤼마니테(l'Humanité)에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민족문제와 식민지 문제에 고나한 테제 원안이 게재됐다. 이 글을 읽은 호치민은 레닌에게 감명받아 같은 해 12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호치민은 1960년 그가 쓴 나를 레닌주의로 이끈 길(The Path Which Led Me To Leninism)에서 자신이 어떻게 레닌을 신뢰하게 됐는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논문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복하여 읽고 또 읽었고, 마침내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논문을 통해 위대한 감성과 열정, 계몽, 그리고 자신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방에 혼자 앉아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듯이 외쳤습니다. “순교한 애국자들이여,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해방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완벽하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세포조직 토론에서 주로 이야기를 듣기만 했습니다. 저는 발표자들의 논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었고, 누가 옮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논문을 읽고 난 후부터, 저는 논쟁에 뛰어들었고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비록 제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하여 모든 생각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공격하는 주장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저의 유일한 논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식민주의를 규탄하지 않는다면, 만일 당신이 식민지 인민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도대체 당신이 하고자 하는 혁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호치민은 이 글을 읽고 울고싶을 정도의 기쁨을 느꼈다. 후루타 교수는 호치민이 레닌주의를 애국주의=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수용한 것은 명백하지만 레닌주의의 수용으로 호의 민족주의도 민족독립을 명확히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호치민은 레닌의 논문에서 민족독립을 실현할 수 있는 확실한 전망을 발견함으로써 진정한 독립 전사가 됐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이 억압받던 식민지 민족과 혁명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줬는지다.

 

이후 호치민은 1922년 르 파리아(Le-paria)라는 언론지를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과 베트남 지배를 비판하는 글과 사설 그리고 만화를 게재했다. 그러던 19236월 프랑스에서 도망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갔고, 코민테른 휘하의 기관인 극동국에서 근무하며 그해 12월에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소련 모스크바에 있으며, 호치민은 혁명가로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Nadezhda Krupskaya), 이후 소련의 육군 원수가 되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Kliment Voroshilov)등을 만났고, 여러 인사들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생전의 레닌은 만나지 못했고, 1924년 그의 장례식에 손수참가했다고 한다.

 

1920년 레닌의 논문을 읽은 호치민은 레닌주의자의 삶을 살게 됐다. 소련에서 중국 광저우로 돌아온 그는 베트남 공산당 창당을 향해 전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베트남의 혁명가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1930년 영국 식민지이던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으며, 이 당명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친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이름이 개정된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이후 1930년 베트남 국민당이 단행한 대규모 봉기에 가담했고, 특히 응에안 하틴 소비에트 봉기(Nghe An-Ha Tinh Soviet)를 이끌었다.

 

이러한 활동은 결국 1941년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의 창설로 이어지게 되며,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결정된 강령에 따라 애국적 민족주의자들과의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결성하게 됐다. 실제로 베트민 활동시기 호치민은 팍 보(Pác Bó)동굴에 있으면서, 산봉우리를 카를 마르크스로 시냇물을 레닌으로 이름을 지었다. 레닌주의자가 된 호치민은 이 레닌주의를 소위 베트남의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 점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력이 반제국주의 투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1924년 호치민이 쓴 레닌 추모글인 레닌과 식민지 민족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겠다.

 

레닌은 우리의 아버지이자 스승이고, 동지이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밝게 비춰준 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과업 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참고문헌

 

송필경,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유일상,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하나로에드컴, 2021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호치민, 월든 벨로(서문) 배기현(옮김).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프레시안북, 2009

 

후루타 모토오, 이정희(),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학고방,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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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경 미 국무부는 "공산주의자 호치민이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강력하고 능력있는 인물이고, 그를 배제한 어떠한 해결 방안을 통해서도 확실한 결과를 장담할 수 없으며", 그가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장악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차이나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미국이 "인도차이나 문제를 해결할 실질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무능함"을 개탄했다. 그런데도 미국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공격하는 명분을 지지하면서 프랑스와 합의한 대로 전쟁 비용의 80%를 부담했고, 직접적인 공격을 감행할 계획을 마련했다. - P309

디엠은 아무리 반공주의자라고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반대의견을 억압했는데, 그는 태평양을 건너오는 막대한 달러로 간단하게 이런 일을 해치웠다. 그 돈은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오래전에 축출당할 뻔했던 한 남자에게 권력을 안겨주었다. 디엠의 중요한 지지자들은 자유 베트남이 아닌 북아메리카에 있었다. - P310

전쟁 말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총 사망자 수가 400만 명 이상에 달했고(각주 1), 국토와 사회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각주 1) 폴 퀸저지(Paul Quinn-Judge)는 1965년 이후에 베트남에서 발생한 사망자만 해도 300만 명을 넘어섰을 것이라고 보도했다.(Far Eastern Economic Review, Oct. 11, 1984.) - P313

평화 정착을 성공적으로 좌절시킨 미국과 그 꼭두각시 정권은 수십만 명을 투옥하고 또 그만큼의 인명을 살해하면서 내적인 탄압에 착수했다. 디엠의 지지자이자 고문인 조셉 버팅어(Joseph Buttinger)는 1956년 "대규모 원정대"의 병사들이 "공산당 점령 지역에서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했다"고 설명했지만 이들은 마을을 습격하고 수백 혹은 수천 명의 농민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미국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주요한 탄압 대상은 반프랑스 저항세력과 베트민이었고 1950년대 후반에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그들이 폭력에 의지한 이유는 간단했는데, 이는 많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농민을 규합해서 NLF를 재조직하는 데 성공한 베트민을 견제할 유일한 대응책은 폭력뿐이었다. 미국에게는 활동무대를 취약한 정치 분야에서 무력 분야로 변경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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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점점 인기를 잃어가면서 정부 내부 인사나 정부와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동의의 테두리를 박차고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극적인 예는 대니얼 엘스버그였다.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수학한 엘스버그는 해병대 장교를 지낸 뒤 미국 정부를 위해 주로 기밀사항인 특별연구를 수행하는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에서 일하고 있었다. 엘스버그는 국방부의 베트남 전쟁사 집필을 도왔는데, 같은 연구소에서 일한 적이 있는 친구 앤서니 루소의 도움을 받아 일급 기밀문서를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사이공에서 만났는데, 각기 다른 경험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참사를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이제는 미국이 베트남 국민들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행동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엘스버그와 루소는 근무를 마치고 매일 밤 한 친구의 광고대행사에서 7,000쪽에 달하는 문서를 복사했다. 엘스버그는 이 사본을 여러 하원의원과 뉴욕타임스국방부 문서라 알려지게 된 이 사본의 일부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국적인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닉슨 행정부는 대법원에 출판금지신청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그것이 언론의 자유에 대한 사전 제약(prior restraint)’이며 따라서 헌법에 위배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정부는 국가기밀 문서를 승인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개했다는 이유로 엘스버그와 루소를 방첩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유죄가 인정될 경우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을 상황에 직면한 것이었다. 그러나 판사는 배심원단의 심의가 진행되는 도중에 무효심리를 선고했다. 당시 밝혀지고 있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검찰 측의 부당한 관행이 낱낱이 폭로되었기 때문이었다.

 

엘스버그는 이런 대담한 행동을 통해 정부 내의 반대론자들이 정책상의 작은 변화를 기대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자기 의견을 억제하는 일반적인 행동양식을 깨뜨렸던 것이다. 한 동료는 이제 엘스버그가 접근통로를 가지게 됐으므로 정부를 떠나지 말라고 권했다. “너 자신을 잘라내지 마. 네 목을 자르지 말라고.” 엘스버그는 대답했다. “인생은 행정부 바깥에 존재하는 거야.”

 

반전운동은 성장 초기부터 낯설고 새로운 지지자들을 발견했는데, 가톨릭 교회의 신부와 수녀가 그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민권운동을 통해 각성하게 됐고, 또 다른 몇몇은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 아래 횡행하는 빈곤과 불의를 목격한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경험으로 현실에 눈뜨게 됐다. 1967년 가을, 필립 베리건(Philip Berrigan) 신부(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으로 성요셉 신부회 사제였다)는 화가 톰 루이스(Tom Lewis)와 친구인 데이비드 에버하트(David Eberhardt), 제임스 멘겔(James Mengel)과 함께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병무청 사무실로 가서 징병기록을 피로 흠뻑 적시고는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재판에 회부된 그들은 2~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5월 필립 베리건(볼티모어 사건에서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였다)은 예수회 사제이자 북베트남을 방문, 미국의 폭격이 야기한 결과를 직접 목격한 친형 대니얼(Daniel Berrigan)과 함께 두 번째 행동을 벌였다. 베리건 형제와 다른 일곱 명은 메릴랜드 주 캐튼스빌(Catonsville)에 있는 병무청 사무실에 들어가 기록을 꺼내 나와서는 기자와 구경꾼들이 있는 가운데 징병서류에 불을 질렀다.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들은 캐튼스빌의 9(Catonsville Nine)’으로 유명해지게 됐다. (대니얼의 애칭) 베리건은 캐튼스빌 사건 당시 이런 묵상을 적어뒀다.

 

훌륭한 벗들이여, 순조로운 질서를 깨뜨린 데 대해, 아이들 대신에 종잇장을 불살라버린 데 대해, 납골당 정문을 지키고 있는 당직병들을 성나게 한 데 대해 사죄를 구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는 살인은 무질서이며, 생명과 온화함과 공동체와 이타심이야말로 우리가 인정하는 유일한 질서하고 말합니다. 그런 질서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선량한 이름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공적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순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던 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상고가 모두 기각되어 감옥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됐을 때 대니얼 베리건은 종적을 감췄다. 연방수사국이 추적하는 와중에 대니얼은 자신이 교편을 잡고있던 코넬 대학의 부활절 축제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방수사국 요원 수십 명이 군중 사이에서 그를 찾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무대에 올라섰다. 그 순간 조명이 꺼졌고, 무대에 있던 빵과 인형 극단의 커다란 인형 속에 몸을 숨긴 대니얼은 트럭에 몸을 싣고 인근 농가로 도망쳤다. 대니얼은 4개월 동안 지하에서 머물면서 시를 쓰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극비 인터뷰에 응하고, 필라델피아의 한 교회에 갑자기 나타나 설교를 한 뒤 다시 사라지는 등, 연방수사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나, 한 밀고자가 편지를 가로채 그의 소재를 고발함으로써 결국 체포되어 감옥으로 갔다.

 

캐튼스빌의 9인 가운데 한 명으로 전에 수녀였던 메리 모일런(Mary Moylan)역시 연방수사국에 자진출두하지 않았다. 연방수사국은 모일런을 결코 찾아내지 못했다. 지하에서 쓴 글에서 모일런은 자신의 경험에 관해, 자신이 어떻게 지금의 입장에 다다랐는지에 관해 되돌아보았다.

 

우리 모두는 결국 감옥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두 칫솔을 가지고 갔다.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작은 옷상자를 꺼내 간이침대 밑에 밀어 넣고 침대로 올라갔다. 볼티모어 군 교도소에 있는 여자들은 전부 흑인이었다. 백인이라곤 딱 한 명뿐인 듯했다. 여자들이 나를 깨우더니 물었다. “왜 울지 않지요?”, “왜 울어요?” 여자들은 말했다. “당신 지금 감옥에 있는 거예요.” 나는 대답했다. “, 나도 여기 올 줄 알았어요.”

 

그 여자들 둘 사이에 끼어 잤는데, 매일 아침 일어나 보면 팔꿈치를 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들은 나에게 말하곤 했다. “밤새도록 자더군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눈치였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내 인생에 정치적 전환점이 온 것은 우간다에 있을 때였던 듯하다. 미국 비행기들이 콩고를 폭격하던 와중에 그곳에 있었는데, 콩고 국경과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비행기들이 국경을 넘어 날아와서 우간다의 마을 두 곳을 폭격한 일도 있었다. 도대체 미국 비행기들이 왜 거기까지 온 것일까?

 

그 뒤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 탄자니아의 수도)에서도 조금 머물렀는데 저우언라이가 그곳에 왔다. 미국 대사관에서는 이 사람이 더러운 공산주의자이므로 미국인은 절대 거리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뒤 워싱턴으로 이사를 했고 그곳의 상황, 즉 경찰의 미친 짓거리와 야만행위, 그 도시의 시민 대부분(70%가 흑인)이 영위하고 있는 삶에 마주쳐야만 했다.

 

그리고 베트남, 네이팜탄과 고엽제, 폭격 등이 있었다.

 

나는 약 1년 전에 여성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캐튼스빌 사건 때눈 감옥에 가는 게 의미가 있었는데, 부분적으로는 흑인들이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그토록 많은 흑인들이 항상 감옥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감옥에 가는 게 효과적인 전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감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걸 원치 않는다. 1970년대는 매우 어려운 시기일 것이고, 나는 우리의 자매와 형제들이 감옥에 끌려가고 거기서 신비로운 경험이나 어떤 다른 경험을 하든 간에 그렇게 그들을 소모시키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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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들은 징병명부 등록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소집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일찍이 19645월부터 우리는 가지 않겠다라는 구호가 널리 알려졌다. 징병 등록을 한 젊은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공공장소에서 자신들의 징병카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인 데이비드 오브라이언(David O’Brien)은 사우스보스턴에서 자신의 징병카드를 불태웠다.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고, 대법원은 자신의 행동은 헌법으로 보호받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된다는 그의 주장을 기각했다. 196710월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조직적인 징병카드 반납운동(turn-ins)’이 벌어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만도 300장의 징병카드가 정부에 반려됐다. 같은 달에 국방부 앞에서 거대한 시위가 있기 직전에 수합된 징병카드 한 부대가 법무부에 제출됐다.

 

1965년 중반까지 380명이 징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기소됐고, 1968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그 숫자가 3,305명에 달했다. 1969년 말에는 전국적으로 징병거부자가 33,960명에 이르렀다. 19695월 캘리포니아 주 북부 전역의 징병대상자들이 출두하는 곳인 오클랜드 병무청은 4,400명에게 징병 소집장을 보냈으나 2,400명이 응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1970년 일사분기에는 선발징병제도가 부활된 이래 최초로 할당수를 채우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보스턴 대학 역사학과 대학원생인 필립 서피나(Philip Supina)196851일에 애리조나 주 투산(Tucson)의 병무청에 편지를 보냈다.

 

징병을 위한 사전 신체검사 출두명령서를 동봉해 보냅니다. 나는 그런 신체검사나 징집명령, 아니 베트남 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미국의 행위 자체에 어떤 식으로든 협조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서피나는 스페인의 철학자 미겔 우나무노(Miguel Unamuno)가 스페인 내전 중에 한 말을 인용하면서 편지를 마쳤다. “때로는 침묵이 거짓말이다.” 서피나는 유죄를 평결받고 실형 4년을 선고받았다.

 

전쟁 초기에 대다수 미국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두 사건이 있었다. 1965112일 늦은 오후, 수천 명의 직원들이 몰려나오던 국방부 건물 앞에서 32세의 평화주의자로 세 아이의 아버지인 노먼 모리슨(Norman Morrison)이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3층 사무실 창문 바로 밑에 서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임으로써 전쟁에 저항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같은 해 디트로이트에서는 앨리스 허즈(Alice Herz)라는 82세의 여성이 인도차이나의 참사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했다.

 

놀라운 감정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던 1965년 초에는 보스턴 공원에 100명이 모여 분노를 표출했다. 19691015일에는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보스턴 공원에 모인 사람이 10만 명에 이르렀다. 그날 전국 곳곳의 도시와 마을에서 약 200만 명이 집회를 가졌는데, 이곳들 대부분은 한번도 반전집회가 열린 적이 없는 곳이었다.

 

1965년 여름 몇 백 명의 사람들이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행진을 벌였다. 맨 앞줄에 있던 역사학자 스토튼 린드,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조직가 밥 모지즈, 노련한 평화주의자 데이비드 델린저(David Dellinger)등은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붉은 페인트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1970년에 열린 워싱턴 평화집회에는 수십만 명이 참여했다. 1971년에는 2만 명이 시민불복종을 행동에 옮기기 위해 워싱턴으로 집결, 베트남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살육에 대한 혐오감을 표명하기 위해 워싱턴의 교통을 마비시키려고 했다. 이 때 연행된 1,400명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의 자원자 수백 명도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칠레에서는 평화봉사단원 92명이 단장의 지시를 무시하고 전쟁을 비난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평화봉사단원을 지낸 800명도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시인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은 백악관 행사에 초대받았지만 참석을 거절했다. 아서 밀러(Arthur Miller) 역시 초대받았지만 참석하지 않고 총성이 울리면 예술은 죽는다라는 전보만 보냈다. 백악관 잔디받에서 열린 오찬에 초청된 가수 어사 키트(Eartha Kitt)는 영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모든 참석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대통령상 수상자로 백악관의 초청을 받은 한 십대는 수상식 자리에서 전쟁을 비판했다. 할리우드의 미술가들은 선셋 대로에 18미터 높이의 항의의 탑(Tower of Protest)을 세웠다. 뉴욕에서 열린 전국출판대상(National Book Award) 수상식에 참석한 50명의 작가와 출판인들은 험프리 부통령이 연설하는 도중에 그가 전쟁에서 행한 역할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런던에서는 미국 젊은이 두 명이 미국 대사가 주최한 독립기념일 만찬장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건배를 외쳤다. “베트남에서 죽은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그들은 경비원들에게 쫓겨났다. 태평양에서는 두 명의 젊은 수병이 타이의 공군기지에서 폭탄을 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미군 군수품 수송선 한 대를 납치했다. 두 수병은 배가 캄보디아 해역에 다다를 때까지 잠들지 않으려고 각성제를 먹으면서 나흘 동안 수송선과 승무원들을 지휘했다. 1972년 말, AP통신은 펜실베이니아 주 요크로부터 이렇게 보도했다.

 

오늘 주 경찰이 반전운동가 5명을 체포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되는 폭탄 외피를 생산하는 공장 근처의 철도시설을 파괴했다고 한다.”

 

행동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중간계급과 전문직 종사자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19705, 뉴욕타임스는 워싱턴발로 제도권변호사 1,000, 반전시위에 동참이라는 머리기사를 내보냈다. 대기업들 역시 전쟁이 자신들의 장기적인 기업 이익을 저해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는 전쟁을 지속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가 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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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 51개 주제로 본 우리민족 절반의 이야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4.27시대연구원 지음 / 도서출판 4.27시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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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출판 이후 대학원 준비와 강연 준비로 제법 바쁘지만, 이 바쁜 와중에도 상당히 재밌는 책 한권을 읽었다. 이 책은 소위 북한사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1945년부터 올해인 2021년까지의 현대사를 다룬 책으로, 51개의 주제로 북한사를 정리한 책이다. 책의 이름은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우리에게 있어서 북한이란 존재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북한의 존재란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되고 판단 되어야할 존재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한국인들 내면에 존재하고 있으며, 북한에 대한 긍정성은 결과적으로 종북혹은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십상이다.

 

이 책은 그런 사고관에 대한 전면적인 역사적 반박 내지는 저항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알 수 없는 맹목적인 혐오와 증오 그리고 조롱은 분명히 하나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사고에는 북한은 무조건적으로 나빠야해!” 혹은 북한의 사회는 매머드나 잡는 수준의 사회로 인식해야만 해.”와 같은 무의식적 감각에 심취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은 탈북자들이 나와서 거짓말을 일삼는 어용매체들에 의해 손쉽게 나타난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얼마나 알까? 이러한 질문에는 나 자신 또한 손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워낙 정보와 자료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라는 북한의 특수성 때문에 우리는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보도나 자료들이 추정과 추측이라는 가정으로만 판단을 해야만 하는 부정확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이에 따라 탈북자들의 거짓말과 허위사실이 진실로 포장되기도 한다. 이런 부분에서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H카가 최근 10여 년간(1961년 기준) 영어사용권 나라에서 생산된 소련관계 문헌들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서방의 반공주의 학계를 비판했던 사실이 오버랩 된다. 책은 첫 페이지에서 이를 강조하고 있으며, 그 중 일부를 발췌하겠다.

 

현실은 북을 적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 보거나 심지어 아예 외국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상당하다. 그러다 보니 북의 역사는 아예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고 심지어 왜곡되게 이해한다. 조선일보가 가짜뉴스, 왜곡보도를 일삼아도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모두 분단체제와 국가보안법이 만들어낸 분단의식, 피해의식의 반영이다. 북을 제대로 알려고만 하면 고문하고, 잡아가고, 낙인을 찍었던 역사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p.4

 

북한을 알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었일까? 나는 정치적인 부분에서의 자유왕래와 평화체제 공존 그리고 사상의 탄압을 가로막는 국가 보안법의 전면적인 철폐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외에 필요한 작업은 무엇일까? 나는 소리 높여 주장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북한의 입장에서 북한의 현대사를 바라볼 필요가 분명 있다고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은 북한의 현대사를 북한의 입장에서 재조명한 책이다. 따라서 책의 시작은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개선부터다.

 

1권은 김일성의 귀국부터 시작해서 재일교포의 역사로 마무리 된다. 남한 측 자료와 북한 측 자료가 출처로 인용되었으며, 북한이 어떻게 자신들의 역사를 보는지, “북은 주장한다.” 혹은 “...이 북의 입장이다.”라는 식으로 서술했다. 예를 들면 한국사회에서 6.25전쟁 혹은 한국전쟁이라 불리는 사건을 보자. 11장의 7번째 주제인 한국전쟁은 왜 조국해방전쟁인가?라는 주제제목을 달고 있다. 책에 따르면 북한은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전쟁 시기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 맞서 투쟁을 벌인 점 그리고 미국이 먼저 전쟁을 시작한 점을 근거로 든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북한의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입장과는 분명 다르다. 왜냐하면 북한은 한국전쟁을 경제난을 통해 미국이 조선반도에서 1950625일에 전면적인 침공을 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나는 냉전 이후 공개된 소련측 기밀문서 자료를 통해 북한이 먼저 시작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시작점을 바라보는 나와 북의 입장이 다르다 하더라도, 북한의 조국해방전쟁론은 근거가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조국해방전쟁론을 입증할 근거가 분명 있다고 본다.

 

우선 한국전쟁은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와는 상관없이,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 저항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탈식민주의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띄기도 했다. 이것은 한국 군대의 장성들이 친일 세력들이 많은 반면, 북한의 정체성은 항일독립투쟁에서 중심을 두었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 민족해방전쟁 그리고 계급해방투쟁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책에서는 북한이 한국전쟁을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는지 요약하고 있다.

 

북은 이렇듯 미국의 부정의의 전쟁에 맞선 자기들의 행위를 두고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은 물론, 민족해방전쟁, 반제민족해방혁명, 인민민주주의혁명, 계급투쟁 등 다양한 개념으로 성격을 규정하고 해설하고 있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p.73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의 경제력을 뛰어 넘었다는 사실은 반공주의로 무장한 한국사람들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북한의 전후 재건은 신속했다. 북한은 과거 소련이 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따라 사회주의 기초 건설은 목표를 초과 달성하며 크게 성공했다. 이 시기 공업 총생산은 1957~1960년 기간에 3.5(목표 2.6, 1957년 기준)로 증가했고, 농업부문도 식량 생산에서 1956년 대비 32% 증가하였고, 1959년 농업 총생산이 140%로 확대됐으며, 소비재 영역에서도 발전과 초과를 이룩했다. 책에 따르면 북한이 전후 재건과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선진적인 발전과 완비된 사회제도를 실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생산수단의 사회주의화(소유의 집단화)가 빠르게 이뤄진 것은 해방후 반제반봉건 민주개혁과 전쟁을 거치면서 개혁에 반대하는 친일매국노, 지주와 자본가들이 대부분 숙청되거나 월남하여 사회주의화에 반대할 세력이 없어진 상황을 환경적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전시 상황에서 파괴된 농업산업 시설들의 복구를 위한 당과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과 인민대중의 협동화 필요성에 대한 공감과 협력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게 더 주된 요인이라고 보겠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p.139

 

개인적으로 책 1권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북한의 국제연대 사업이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제3세계에 대한 북한의 지원과 반미연대는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주장들은 아직까지도 북한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심한 한국에서는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책에 따르면 북한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와 호치민의 북베트남 그리고 제3세계 진영에 있던 이집트를 지원했다. 이집트에는 북한에서 보낸 고문단이 이집트군을 훈련시켰으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도 쿠바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표명했으며, 북베트남에서는 북한이 보낸 공군 조종사가 미군 전투기 26대를 격추시켰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리영희 교수는 베트남 전쟁을 호치민의 독립투쟁 혹은 민족해방전쟁으로 해석했다. 그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김일성과 호치민은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사이였다. 책의 내용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북과 베트남민주공화국은 1950년에 국제관계를 맺었고 한국전쟁과 베트남 독립전쟁에서 상대의 입장을 지지하고 연대를 보냈다. 19577월엔 호찌민 주석이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북은 답례로 이듬해인 195811월 김 주석이 베트남을 방문해 호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는 등 두 나라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인민의 단결과 우애를 강조하였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p.200~201

 

그 외에도 이 책에서 언급된 여러 내용들은 우리 사회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내용들이 대다수다. 따라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는 이런 점에서 아주 큰 의의가 있다. 어쨌든 북한 입장에서 북한의 현대사를 보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이 이 책의 내용에 다 동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책에서 언급되는 북의 조선인민혁명군 한반도 해방 주체설이나 박헌영 미제 간첩설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북한에 대한 논쟁을 파고들면 정말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세부적인 논쟁 및 입장이 다르다 하더라도 나는 이 책이 이제야 출간된 사실에 더 중점을 두고 싶다. 이제야 북한의 입장에서 북한 현대사를 바라보는 책이 나왔다는 것도 내가 가지고 있는 반북주의 한국 사화에 대한 큰 문제의식이다.

 

많은 부분에서 북한 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준책이었다. 분명히 얻어가는 점도 많은 책이다. 아직 1권 밖에 읽지 못했지만, 2권도 읽는 대로 서평을 작성할 예정이다. 2권을 읽는 대로 2권에 대한 감상과 문제의식 등을 2권 서평에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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