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히틀러와 연관된 책(A book from Hitler)


1935년, 이왈드 아멘데(Ewald Ammende) 박사가 ≪압제 러시아의 기근 (Muss Russland hungern?)≫ (1936년 영문판 제목: ≪러시아에서 인간의 삶≫) 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근거 자료는 독일 나찌 출판물, 이탈리아 파시스트 출판물, 우끄라이나 망명집단 출판물, 그리고 ‘여행가들’과 ‘전문가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구체적으로 인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러시아의 실체를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사진들’을 썼다고 주장했다.9) 또한 디트로프(Ditloff) 박사가 가지고 있는 사진도 실었는데, 그는 1933년 8월까지 북 코카서스에서 독일 정부의 농업 허가권의 감독관― Drusag ― 이었다. 디트로프는 1933년 여름에 그 사진들을 찍었고 ‘이 사진들이 기근 지역의 상황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10)


디트로프가 당시 나찌 정부의 관리라면, 어떻게 코카서스에서 우끄라이나로 자유롭게 다니며 사진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디트로프의 사진들 중에서, ‘개구리 같은 자세의’ 아이 사진을 포함해서, 7장의 사진 또한 워커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또 다른 사진은 두 명의 해골 같은 소년들 사진이었으며, 그것은 1933년 우끄라이나의 기근을 상징한다. “러시아”라는 제목을 가진, 피터 유스띠노프(Peter Ustinov)의 텔레비전 연속물에서 똑같은 사진이 방영되었다: 이 사진의 출처는 1922년 러시아 기근에 대한 기록영화였다! 아멘데가 제시한 사진 중 또 다른 것이 나찌 당 기관지인 ≪민족의 관찰자(Volkischer Beobachter)≫지에 실렸는데, 1933년 8월 18일이라고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이 사진 또한 1922년의 책자에서 발췌한 사진으로 밝혀졌다.


아멘데는 1913년 볼가(Volga)지역에서 일했다. 1917년에서 1918년의 내전 동안 그는 에스토니아(Estonia)와 라트비아(Latvia)의 친독일 반혁명 정부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1918년 3월, 독일 군대에 의해 우끄라이나에 설립된 스코로파드스키(Skoropadsky) 정부와의 연락관으로 일했다. 그는 1921년부터 1922년의 러시아 기근 동안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래서 그 기간의 사진들에 정통하다. 여러 해 동안 아멘데는 나찌당과 친밀한, 쏘련에서 망명한 집단을 포함하는, 소위 유럽 민족 회의(European Nationalities Congress)의 총 서기장이었다. 1933년 말에 아멘데는, 러시아 기근 지역에 대한 “제종파 공동의 국제적 구호 위원회”의 명예 서기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단체는 비엔나의 친-파시스트 인사인 인니체르 추기경(Cardinal Innitzer)이 이끌었다. 따라서 아멘데는 나찌의 반쏘비에뜨운동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레이건(Reagan)이 1980년대 초에 반공성전을 시작했을 때,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 제임스 메이스(James E. Mace)는 아멘데의 책을 ≪러시아에서 인간의 삶≫이란 제목으로 재편집하여 재출간 할 적절한 때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1984년이었다. 그래서 워커의 우끄라이나에 대한 허위 보도를 포함하여, 모든 나찌의 거짓말과 위조된 사진 상의 증거가 하버드의 명성과 결합하여 ‘학문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 전 해에, 미국에 있는 극우 우끄라이나 망명자들이 ≪우크라이나의 대기근: 알려지지 않은 대학살≫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더글라스 토틀은 이 책의 사진들에 1921년과 1922년 사이의 날짜가 찍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책 표지 사진은 난센 박사(F. Nansen)의 “러시아 구호를 위한 국제 위원회”의 간행물 ≪Information≫, 22호, 제네바, 1922년 4월 30일자, 6쪽에서 따온 것이었다.11)


전 세계의 신(新)나찌 수정주의는 역사를 ‘수정하여’,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자와 쏘련에 대한 파시즘의 야만적인 범죄를 정당화시켰다. 첫째, 그들은 본인들이 유대인에게 저질렀던 범죄를 부정한다. 신나찌는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던 유대인 학살 수용소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스딸린 동지가 저질렀다는 가상의 ‘대학살’을 날조한다. 이러한 거짓말로, 그들은 나찌가 쏘련에서 저질렀던 잔악무도한 범죄를 정당화한다. 이러한 반공투쟁에서의 역할로 인해, 수정주의(신나찌 ― 역자)는 레이건, 부시(Bush), 대처(Thatcher) 그리고 (CIA 같은 ― 역자) 첩보기관(company)에게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글은 역사학자이자 벨기에 노동당 당수였던 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가 쓴 스탈린 전기인 <스탈린 바로 보기(Another view of Stali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전에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번역한 글을 그대로 옮긴겁니다.)


1. 집산화에 대한 거짓말은 쏘련에 맞선 부르주아계급의 심리전에서 항상 강력한 무기였다.


우리는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거짓말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는데, 그것은 스딸린이 우끄라이나 인민들에게 저지른 가상의 대학살이다. 이러한 상당히 정교한 거짓말은 히틀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1926년 그의 책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그는 우끄라이나가 독일의 ‘국민생활권(lebensraum)’에 속한다고 이미 지적하였다. 우끄라이나에서 볼셰비끼의 ‘대량 학살’에 대해, 1934년에서 1935년 동안 나찌가 벌인 모략은, 우끄라이나의 계획된 ‘해방’에 대해, 인민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거짓말이, 그것을 만든 나찌들보다 오래 생존해서, 미국의 무기가 된 이유를 알아볼 것이다. 지금부터 ‘스딸린주의에 의한 수백만 명의 희생자’가 어떻게 날조되었는지 알아보겠다.


1935년 2월 18일, 미국의 허스트(Hearst)의 출판물은 토마스 워커(Thomas Walker)가 쓴 일련의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허스트는 언론계의 거물이었으며 나찌의 지지자였다.) 위대한 여행가이자 기자라는 워커는 몇 년간 쏘련을 종횡하였다고 한다. 2월 25일 ≪Chicago American≫지에는 이러한 제목(헤드라인)이 실렸다. ‘쏘련에서 기근으로 600만 명이 사망: 농민들의 수확물은 몰수, 그들과 그들의 가축들이 굶어 죽다.’ 그 면의 중간을 보면, 또 다른 제목(헤드라인)이 보인다. ‘기자는 기근을 보여주는 사진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다.’ 그 면의 아래 부분에는 ‘기근 — 인간성에 대한 범죄’라고 쓰여 있었다.1)


그 당시에 루이스 피셔(Louis Fisher)는 미국 신문 ≪The Nation≫지의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완전히 무명인 동료가 낸 이러한 특종은 그에게 상당한 흥미를 자아냈다. 그는 몇 가지 조사를 했고, 그가 알아낸 것들을 신문의 독자들과 공유했다:


‘우리의 정보에 의하면, 워커 기자는 1934년 봄인 “지난 봄에 러시아에 입국했다.” 그는 기근을 봤다. 그는 그 희생자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비통해 했고, 직접 기근의 참화에 대한 기사를 썼다. 이제 러시아의 기근은 “큰 화젯거리” 뉴스(``hot'' news)다. 어째서 허스트 씨는 이렇게 놀라운 기사를 10개월이나 보관한 뒤 보도했을까?...’


‘나는 모스끄바로부터 입수한 공식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쏘비에뜨 당국에 조언을 구했다. 토마스 워커는 쏘련에 한 번 다녀왔다. 그는 1934년 9월 29일 런던 주재 쏘련 영사관에서 통행 비자를 받았다. 1934년 10월 12일, 그는 폴란드에서 기차를 타고 네고레로예(Negoreloye)를 통해 쏘련으로 입국하였다. (그가 말한 것처럼 1934년 봄이 아니었다.) 그는 10월 13일에 모스끄바에 있었다. 그는 13일인 토요일부터 18일인 목요일까지 모스끄바에 머물렀고, 그 다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934년 10월 25일에 시베리아-만주 접경지역에 도착했다.... 10월 13일부터 10월 18일의 5일이라는 시간은, 워커 기자가 직접 경험을 하고 “묘사한” 내용의 1/3을 다루기에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의 추측은, 그가 모스끄바에 오래 머물면서, 그의 위조된 기사를 그럴 듯하게 하는 데 필요했던, 우끄라이나 “지방의 고유한 특성”을, 분개한 외국인들로부터 수집했다는 것이다.’


피셔에게는, 1934년 초에 우끄라이나를 방문했던 린드세이 패롯(Lindsay Perott)이라는 미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는 허스트의 출판물에 언급된 기근에 대해서 어떠한 흔적조차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1933년은 풍작이었다. 피셔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허스트 신문과 나찌가 점점 더 긴밀하게 일을 꾸미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패럿(Mr. Parrott)이 번영하는 쏘비에뜨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야기를 썼지만, 이것을 허스트 신문이 실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패럿은 허스트의 모스크바 특파원이다.’2)


작은 소녀와 ‘개구리 같은 자세의’ 아이 사진 아래에, 워커3)는 이렇게 적었다.


‘소름끼치는 ― 하르호프(Kharhov)(원문대로4)) 남쪽에, 전형적인 농민의 오두막에 더러운 바닥, 짚으로 이은 지붕 그리고 가구 한 점, 벤치가 있고, 아주 야윈 소녀와 그녀의 두 살 반 된 남동생(위에 보인다)이 있다. 이 남동생은 마치 개구리처럼 마루를 기어 다녔고, 그의 가냘픈 몸은 영양 부족으로 기형으로 사람 같지 않았다.’5)


캐나다 노동조합원이자 기자인 더글라스 토틀(Douglas Tottle)은 1934년으로 (워커의 기사에서 ― 역자) 기록되어 있는 ‘개구리 같은 자세의’ 아이 사진과 동일한 사진을, 1922년에 발행되었던 그 해 기근을 다룬 기사에서 발견했다.


또 다른 워커의 사진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죽은 말 옆에 있는 오스트리아 기병대 군인의 사진으로 판명되었다.6)


야비한 워커: 그의 기사는 거짓이었고, 그의 사진도 거짓이었으며, 심지어 그의 이름마저 가짜였다. 그의 본명은 로버트 그린(Robert Green)이었다. 그는 8년의 금고형 중, 2년간 수감된 뒤 콜로라도(Colorado) 주립 감옥에서 탈출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쏘련에 가서 거짓 기사를 썼다.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체포되었고, 법정에서 우끄라이나에 결코 간 적이 없다고 시인하였다.


억만 장자인 윌리엄 란돌프 허스트(Wiliiam Randolph Hearst)는 1934년 늦은 여름에 히틀러를 만나, 독일이 허스트 소유의 International News Service사(社)의 국제 뉴스를 구매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당시에 나찌 출판물은 이미 ‘우끄라이나 기근’에 대한 흑색선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허스트는 그의 위대한 탐험가 워커 덕분에 재빠르게 이 기회를 포착했다.7)


기근에 대한 다른 비슷한 기사가 허스트 신문에 보도되곤 하였다. 예를 들면, 프레드 빌(Fred Beal)이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노동쟁의 이후 20년 금고형을 선고받은 미국 노동자인 그는 1930년 쏘련으로 도망갔으며, 2년 동안 하르코프 트랙터 공장에서 일했다. 1933년에 그는 ≪쏘비에뜨  트랙터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Foreign workers in a Soviet Tractor Plant)≫이란 제목의 소책자를 썼는데, 여기서 쏘련 인민의 노력을 우호적으로 묘사했다. 1933년 말에 그는 실직과 감옥행이 예정되어 있던 미국으로 돌아왔다. 1934년 그는 우끄라이나 기근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고, 곧 그의 금고형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1935년 6월에 그가 ‘실제로 목격한 이야기’가 허스트에 의해서 출간되었을 때, 5년 동안 동일한 하르코프 공장에서 일했던 우리넥(J. Wolynec)이라는 또 다른 미국 노동자가, 빌의 책 전체에 걸쳐있는 거짓말들을 폭로했다. 비록 빌이 많은 대화를 들었다고 했지만, 우리넥은 그가 러시아어 우끄라이나어 어느 것도 구사할 줄 모른다고 지적했다. 1948년에 빌은 맥카시 위원회(McCarthy Committee) 앞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맞선 증인으로서 극우주의자들에게 봉사했다.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남한의 당사자들은 김일성이 소련 여단 군복을 입은 모습을 즐겨 묘사한 반면일본 상급자의 제복을 빌려 입고 찍은 남한 장교들의 사진은 조직적으로 감추었다아마도 1961년부터 1979년까지 남한의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그런 군인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김정일 코드 p.47

 

이 내용은 한국전쟁을 연구한 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저서 김정일 코트(North Korea: Another Country)에 나오는 내용이다북한의 초대 지도자 김일성(Kim Il Sung)은 한국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영역이다그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6.25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라는 단순한 명제로 결론짓는다이 부분에서 더 나아가면 그냥 독재자라는 이미지만을 부각시킨다북한에 대한 체제의 성격과 해석은 우리 사회에서 다양할 수 있다나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하며그러기 위해선 북한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작업도 분명 중요하다 생각한다.

(와다 하루끼의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이미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자료들과 해석은 대한민국 사회에 널려 있다반면북한의 체제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나 지도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한 자료들은 거의 없다더 정확히 말하자면국가 보안법이라는 정치적 영역을 통해 탄압받고 있다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북한을 찬양하고 숭배의 대상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다최소한 현재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흐름 속에서 북한에 대한 다른 평가를 하나의 담론으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따라서 김일성에 대한 평가도 충분히 그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의 역사는 일제시대로 대표되는 식민지 시기이다일제 지배 35년 동안 적잖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나섰고또 많은 이들이 산화했다한국 사회에서는 소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포함하는 우파 민족주의 계열의 활동을 강조한다최근 들어 임정과의 연합을 추진했던 인물 약산 김원봉을 강조하지만편협한 색깔론에 큰 희생양이 되고 있다한국 사회는 조금이라도 사회주의 계열에 있었거나 월북 이력이 있는 인물에 대해선 극도의 발작 증세를 보인다.

(동북항일연군 깃발)

 

이는 잘못된 행보다왜냐하면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 계열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사실 독립운동 세력들 중에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를 추구한 이들이 많았다그리고 이들 대다수가 독립운동가를 이루고 있었으며일제에 끝까지 저항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또한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공내전에 참가하여중국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이런 업적을 달성한 이들이 바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이었다. 1948년에 탄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김일성 또한 독립운동가로서일제시대에는 항일투쟁 그 이후에는 항미투쟁을 전개한 인물이었다물론 한국전쟁 자체는 그가 일으킨 것도 사실이지만3세계적 관점에서 보면항미투쟁으로 볼 수 있다이는 김일성과 그가 이룬 체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리영희 교수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북한에서 묘사한 항일무장투쟁 당시 김일성)

 

김일성은 젊은 시절부터 열혈 반일투사였다그는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시점부터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했다중국 공산당에도 입당했으며중국 공산당과의 국제 연대를 통해 공동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193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백두산을 거점삼아 항일 무장병력을 이끌었다그가 이끌던 항일무장조직의 명칭은 구국군’, ‘왕청 유격대’, ‘동북인민혁명군’, ‘조선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등 다양하다한홍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만주 동부에서 큰 명성과 높은 지위를 지닌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다.

 

개인적으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전투가 있다그 전투는 바로 1940년의 홍기하 전투다홍기하 전투에서 김일성의 부대는 자신들을 추격해온 일본군 100~150명을 사살했고경기관총 5소총 100여 정탄알 1만여 발무전기 1대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이는 아주 큰 전과라 할 수 있다이 홍기하 전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김일성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무것도 안했다.”는 일부 인사들의 주장이 허황된 주장이라는 것이다그 외에도 김일성이 일본군을 상대로 치른 전투는 무수히 많다이는 와다 하루끼의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을 통해 알 수 있다.

(동북항일연군)

 

당시 김일성은 항일투쟁의 빛나는 붉은 별이었다북한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항일무장투쟁에서 찾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이력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러한 김일성의 이력은 국내 교과서에서는 절대 가르치지 않는다왜 그럴까나는 이것이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이 밀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만약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 분야에 있어서 당당하다면홍기하 전투 그 자체를 숨길 하등의 이유가 없다그러니 한국 사회에선 좋든 싫든 임시정부만 언급하는 것이다물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그러나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사에서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해방 이후 북조선분국 지도자일 당시의 김일성)

 

앞서 보았듯이김일성의 항일투쟁은 분명 높게 평가받을 만한 부분이다물론 독립운동사를 김일성 중심으로만 서술해서도 안 될 것이다그러나 그가 항일투사로서 높이 평가받아야 하냐는 문제는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1930년대 만주에서 전개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무장투쟁과 더불어재조명 받고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이력이다그리고 그들이 이후 한국전쟁에서 미국에 대항했다는 사실에서항미투쟁적 성격도 제3세계의 시각으로 볼 가치도 충분히 있다그런 시각을 하나의 담론으로 인정하는 것부터가 진정한 학문의 자유다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공부할 필요가 있다마지막으로 2011년 브루스 커밍스가 인터뷰에서 주장했던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딘 애치슨은 호치민에 대해 언급한 모든 것은 김일성한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참고문헌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김자동(), 일월서각, 1986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와다 하루끼이종석(), 창비, 1992

 

김정일 코드브루스 커밍스남성욱석(), 따뜻한손, 2005

 

한국의 레지스탕스조한성생각정원, 2013

 

간도특설대김효순서해문집, 2014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와다 하루끼남기정(), 창비, 2014

 

중국인 이야기 3김명호한길사, 2014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조행복(), 현실문화, 20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아침 광주의 대학살자 전두환이 죽었습니다.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서울의 봄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광적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광주에서 수백 수천 명을 학살하고, 수많은 민주투사들을 박정희가 했듯이 잡아다 고문하고 반병신 만들고 죽인 그가 그리고 수만 명을 삼청 교육대로 보내 인권유린을 자행했던 그가 오늘 죽었습니다. 그는 끝끝내 반성하지 않았고, 마르지 않는 29만 원으로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전두환의 신군부를 지원해준 세력은 누구인가요?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군사정권을 승인했고, 그 결과 광주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이 광주 학살은 사실상 미국의 직간접적인 지원없이는 일어나지 못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5.18에 미국이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캄보디아의 학살자 폴포트를 지원했고, 니카라과의 대학살 세력인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으며, 대한민국 신군부를 지원했습니다. 광주에서 학살을 벌인 전두환이 죽은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의적절하게 제가 쓴 책의 내용의 일부를 아래에 인용합니다.

카터 정권 시기 미국의 지원을 받던 대한민국에선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났었다. 그것이 바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여기서 카터 정권이 방관한 대한민국의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겠다.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에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유신 독재 그리고 1979년 12.12 쿠데타로 이어지는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이 존재했다. 1979년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게 살해된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하나회 군부가 이른바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부를 수립했다. 이러자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는데, 이는 전라도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P216

전두환 정권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 이른바 폭도 내지는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전두환이 보낸 군대의 잔혹함이 극에 달하자, 광주시민들은 총을 들고 무장하여 계엄군에 맞서 싸웠다. 1871년 당시 파리코뮌에서 압제자에 맞서 봉기했던 파리의 시민들처럼 말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이 대규모의 군대와 탱크까지 동원하면서 아주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그 과정에서 최소 수백 명이(많게는 수천 명)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여기서 미국의 카터 정부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국은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위가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들이 시민군을 진압하기를 원했으며, 신군부 세력의 진압 작전을 지원했다. 우선적으로 미국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하에 있는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해주었다. 또한 미국은 신군부가 광주의 진압 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오키나와 기지에서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 만에 정박 중이던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출동시켰다. - P216

미국에게는 한국의 민주화보다 북한으로부터의 안보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이런 시각은 2005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잘 드러난다. 드라마에서 나온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의 보인 반응을 다음과 같았다.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광주 미문화원으로부터 군인들이 착검한 소총을 사용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미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고 하네요.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저도 광주에서의 군인들의 진압이 무자비하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광주 사태가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군대 투입에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만약 한국 국민이 전국적으로 군부를 반대하게 되면 일이 커지는데...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군부에 대한 저항이 생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계엄군이 사태를 진정시킬 겁니다.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좀 더 지켜보도록 하죠.❞ - P2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범죄는 무엇일까아마도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로 대표되는 고엽제 살포일 것이다. 100~150만 명 이상의 군인과 200~3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한 이 전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았던 주체는 바로 남베트남의 민간인일 것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1965년 2월 중부고원지대에 있던 미군 특수부대 기지가 공격받자, 3월부터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이라 하여 이른바 북폭에 나섰다군사적 교리상 전략폭격이었지만현실은 무차별 융단 폭격이었다따라서 북베트남 전역이 미공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고그에 따른 인명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최소 수십만 이상이 이 폭격으로 죽거나 부상자가 됐다.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고 있는 미군 항공기)

 

남베트남은 북폭 이전부터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됐다그것은 바로 베트남 전쟁에 미군사고문단을 파병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허가한 군사작전 때문이었다그 작전이 바로 랜치 핸드 작전(Operation Ranch Hand)이다랜치 핸드 작전은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대략 10년간 베트남 주둔 미군이 진행한 군사작전이다이들의 목표는 베트콩이 숨어있는 정글을 없애는 동시에베트콩의 군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남베트남 농촌 일대에 고엽제를 투하하는 것이었다제초제를 담은 55갈론 드럼통을 두른 띠 색깔에 따라 에이전트 블루에이전트 화이트 그리고 에이전트 오렌지로 불렸고특히 에이전트 오렌지가 남베트남 농촌과 마을 그리고 밀림에 투하됐다특히나 이 고엽제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에이전트 오렌지였으며이 에이전트 오렌지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독성이 강한 물질이라는 다이옥신이 포함되어 있다.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는 미군 UH-1 헬기)

 

다이옥신은 치사량이 0.15g인 청산가리의 1만배비소의 3000배에 이르는 독성을 가진 맹독 물질로다이옥신 1g이면 2만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수준이다또 이 물질은 잘 분해되지도 않고용해도 되지 않기 때문에 인체에 극히 적은 양이 흡수됐다고 해도 점차 몸속에 축적돼 각종 후유증을 일으키게 되며그 영향은 후세대에게 까지 이어진다폐암후두암전립선암 등 각종 암은 물론말초신경병버거씨병당뇨병 등 각종 질환을 불러일으키며이러한 고통은 노출된 인간에게는 평생의 고통을 주게 된다따라서 인체에 매우 해로운 물질이 바로 고엽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고엽제를 뿌렸지만비극적이게도 고엽제에 노출된 남베트남의 민간인들은 미군의 고엽제 살포를 환영했다왜냐하면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은 1960년대 초부터 베트콩이 있는 곳으로 의심되는 마을에 파괴적인 네이팜 폭탄이 투하됐고이러한 폭격을 남베트남의 농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거기다 1965년 미군이 대규모 지상부대를 파병하면서폭격의 빈도도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일단 고엽제를 뿌리면 나무가 죽는 것은 물론이고적어도 이틀 동안은 미군이 폭격을 중지했다따라서 남베트남의 민간인이 고엽제 살포를 환영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고엽제가 살포된 남베트남 지역)

 

당연히 이러한 독성물질을 살포하는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었다그러나 1954년부터 제네바 협정과 같은 국제적인 약속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던 미국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제정된 제네바 협정을 무시하는 것 또한 손쉬운 일이었다에이전트 오렌지는 대략 10년 동안 총 7,200만 리터가 살포됐다이는 베트남 인민 1인당 2.7kg에 달하는 다이옥신을 투하한 셈이라 할 수 있다이 고엽제는 남베트남 전역의 농촌과 밀림 그리고 베트콩의 보급 역할을 하던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와 라오스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집중적으로 투하됐다. 1962년부터 1971년까지 고엽제 살포로 사망한 남베트남인은 최소 40만 명 이상을 넘는다기형아 사망자를 포함한 각종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를 일일이 따지면그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1995년 기준으로 최소 200만 명 이상의 고엽제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피해자의 숫자가 350만 명 이상이라는 통계도 있으며많게는 400만에서 48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고엽제의 피해자가 된 것으로 확인된다.

(고엽제로 인해 말라버린 남베트남의 밀림)

 

미군의 고엽제 살포가 중심적으로 이루어졌던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의 경우 현지 소수민족들이 이러한 피해를 아주 극심하게 본 것으로 확인된다당시 미군편에서 싸웠던 소수민족들 남성들과 그들의 부족과 마을 주민들은 고엽제로 인한 부작용에 시달렸다태어나는 아이들 중에 절반 이상이 기형으로 태어났으며어떤 아이는 등이 굽은 채 태어나서 걸음걸이를 하기도 전에 눈을 감았다당연하게도 이것은 남베트남에서 살던 베트남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고엽제 피해 1세대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 많은 사산을 경험하였고다이옥신 농도가 높을 때는 아예 아이가 생겨나지를 않았다시간이 지나 체내에서 농도가 조금 낮아졌을 때 아이를 낳지만 거의 기형아가 태어났으며, 2009년 기준으로 베트남 정부 통계에 의하면 1년에 5만 명의 기형아가 태어나고 있다.

(고엽제 후유증을 둔 부모에게서 태어난 기형아)

 

이러한 피해는 단순히 남베트남의 민간인과 베트콩 그리고 북베트남군만 겪는 것이 아니었다베트남 전쟁 당시 고엽제를 살포했던 미군들과 미국을 따라 참전한 한국의 군인들 또한 고엽제로 인한 피해를 보았다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한국의 경우 참전한 병사 31만 명 중에 최소 2만 명 이상이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을 겪게 됐다그 외에도 라오스에서 반공산주의 작전에 이용된 소수민족인 몽족 또한 이 고엽제 피해에 시달렸다한마디로 고엽제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모든 이들에게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줬다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러한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이러한 일을 생각해보았을 때과연 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맹독성 고엽제를 살포한 미국의 전쟁범죄보다 더 끔찍한 범죄가 있을까?

 

참고자료

 

김성모고엽제란?"인류 역사상 최고 맹독 물질 중 하나"조선일보, 2011.05.19.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5/19/2011051901409.html

 

배보람다이옥신에 노출된 350만 명... '그런 전쟁'은 계속 되고 있다오마이뉴스, 2021.04.2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7429&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송필경고엽제 태아 이야기경향신문, 2009.03.02. https://www.gunch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14

 

주영재생태학살도 국제 범죄가 될 수 있을까?경향신문, 2016.11.30.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1611301043001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어깨걸고, 2021

 

황성환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민플러스, 2018

 

위키피디아랜치 핸드 작전, ko.wikipedia.org/wiki/랜치_핸드_작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