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역사학자이자 벨기에 노동당 당수였던 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가 쓴 스탈린 전기인 <스탈린 바로 보기(Another view of Stali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전에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번역한 글을 그대로 옮긴겁니다.)


1. 집산화에 대한 거짓말은 쏘련에 맞선 부르주아계급의 심리전에서 항상 강력한 무기였다.


우리는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거짓말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는데, 그것은 스딸린이 우끄라이나 인민들에게 저지른 가상의 대학살이다. 이러한 상당히 정교한 거짓말은 히틀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1926년 그의 책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그는 우끄라이나가 독일의 ‘국민생활권(lebensraum)’에 속한다고 이미 지적하였다. 우끄라이나에서 볼셰비끼의 ‘대량 학살’에 대해, 1934년에서 1935년 동안 나찌가 벌인 모략은, 우끄라이나의 계획된 ‘해방’에 대해, 인민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거짓말이, 그것을 만든 나찌들보다 오래 생존해서, 미국의 무기가 된 이유를 알아볼 것이다. 지금부터 ‘스딸린주의에 의한 수백만 명의 희생자’가 어떻게 날조되었는지 알아보겠다.


1935년 2월 18일, 미국의 허스트(Hearst)의 출판물은 토마스 워커(Thomas Walker)가 쓴 일련의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허스트는 언론계의 거물이었으며 나찌의 지지자였다.) 위대한 여행가이자 기자라는 워커는 몇 년간 쏘련을 종횡하였다고 한다. 2월 25일 ≪Chicago American≫지에는 이러한 제목(헤드라인)이 실렸다. ‘쏘련에서 기근으로 600만 명이 사망: 농민들의 수확물은 몰수, 그들과 그들의 가축들이 굶어 죽다.’ 그 면의 중간을 보면, 또 다른 제목(헤드라인)이 보인다. ‘기자는 기근을 보여주는 사진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다.’ 그 면의 아래 부분에는 ‘기근 — 인간성에 대한 범죄’라고 쓰여 있었다.1)


그 당시에 루이스 피셔(Louis Fisher)는 미국 신문 ≪The Nation≫지의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완전히 무명인 동료가 낸 이러한 특종은 그에게 상당한 흥미를 자아냈다. 그는 몇 가지 조사를 했고, 그가 알아낸 것들을 신문의 독자들과 공유했다:


‘우리의 정보에 의하면, 워커 기자는 1934년 봄인 “지난 봄에 러시아에 입국했다.” 그는 기근을 봤다. 그는 그 희생자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비통해 했고, 직접 기근의 참화에 대한 기사를 썼다. 이제 러시아의 기근은 “큰 화젯거리” 뉴스(``hot'' news)다. 어째서 허스트 씨는 이렇게 놀라운 기사를 10개월이나 보관한 뒤 보도했을까?...’


‘나는 모스끄바로부터 입수한 공식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쏘비에뜨 당국에 조언을 구했다. 토마스 워커는 쏘련에 한 번 다녀왔다. 그는 1934년 9월 29일 런던 주재 쏘련 영사관에서 통행 비자를 받았다. 1934년 10월 12일, 그는 폴란드에서 기차를 타고 네고레로예(Negoreloye)를 통해 쏘련으로 입국하였다. (그가 말한 것처럼 1934년 봄이 아니었다.) 그는 10월 13일에 모스끄바에 있었다. 그는 13일인 토요일부터 18일인 목요일까지 모스끄바에 머물렀고, 그 다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934년 10월 25일에 시베리아-만주 접경지역에 도착했다.... 10월 13일부터 10월 18일의 5일이라는 시간은, 워커 기자가 직접 경험을 하고 “묘사한” 내용의 1/3을 다루기에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의 추측은, 그가 모스끄바에 오래 머물면서, 그의 위조된 기사를 그럴 듯하게 하는 데 필요했던, 우끄라이나 “지방의 고유한 특성”을, 분개한 외국인들로부터 수집했다는 것이다.’


피셔에게는, 1934년 초에 우끄라이나를 방문했던 린드세이 패롯(Lindsay Perott)이라는 미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는 허스트의 출판물에 언급된 기근에 대해서 어떠한 흔적조차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1933년은 풍작이었다. 피셔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허스트 신문과 나찌가 점점 더 긴밀하게 일을 꾸미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패럿(Mr. Parrott)이 번영하는 쏘비에뜨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야기를 썼지만, 이것을 허스트 신문이 실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패럿은 허스트의 모스크바 특파원이다.’2)


작은 소녀와 ‘개구리 같은 자세의’ 아이 사진 아래에, 워커3)는 이렇게 적었다.


‘소름끼치는 ― 하르호프(Kharhov)(원문대로4)) 남쪽에, 전형적인 농민의 오두막에 더러운 바닥, 짚으로 이은 지붕 그리고 가구 한 점, 벤치가 있고, 아주 야윈 소녀와 그녀의 두 살 반 된 남동생(위에 보인다)이 있다. 이 남동생은 마치 개구리처럼 마루를 기어 다녔고, 그의 가냘픈 몸은 영양 부족으로 기형으로 사람 같지 않았다.’5)


캐나다 노동조합원이자 기자인 더글라스 토틀(Douglas Tottle)은 1934년으로 (워커의 기사에서 ― 역자) 기록되어 있는 ‘개구리 같은 자세의’ 아이 사진과 동일한 사진을, 1922년에 발행되었던 그 해 기근을 다룬 기사에서 발견했다.


또 다른 워커의 사진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죽은 말 옆에 있는 오스트리아 기병대 군인의 사진으로 판명되었다.6)


야비한 워커: 그의 기사는 거짓이었고, 그의 사진도 거짓이었으며, 심지어 그의 이름마저 가짜였다. 그의 본명은 로버트 그린(Robert Green)이었다. 그는 8년의 금고형 중, 2년간 수감된 뒤 콜로라도(Colorado) 주립 감옥에서 탈출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쏘련에 가서 거짓 기사를 썼다.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체포되었고, 법정에서 우끄라이나에 결코 간 적이 없다고 시인하였다.


억만 장자인 윌리엄 란돌프 허스트(Wiliiam Randolph Hearst)는 1934년 늦은 여름에 히틀러를 만나, 독일이 허스트 소유의 International News Service사(社)의 국제 뉴스를 구매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당시에 나찌 출판물은 이미 ‘우끄라이나 기근’에 대한 흑색선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허스트는 그의 위대한 탐험가 워커 덕분에 재빠르게 이 기회를 포착했다.7)


기근에 대한 다른 비슷한 기사가 허스트 신문에 보도되곤 하였다. 예를 들면, 프레드 빌(Fred Beal)이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노동쟁의 이후 20년 금고형을 선고받은 미국 노동자인 그는 1930년 쏘련으로 도망갔으며, 2년 동안 하르코프 트랙터 공장에서 일했다. 1933년에 그는 ≪쏘비에뜨  트랙터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Foreign workers in a Soviet Tractor Plant)≫이란 제목의 소책자를 썼는데, 여기서 쏘련 인민의 노력을 우호적으로 묘사했다. 1933년 말에 그는 실직과 감옥행이 예정되어 있던 미국으로 돌아왔다. 1934년 그는 우끄라이나 기근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고, 곧 그의 금고형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1935년 6월에 그가 ‘실제로 목격한 이야기’가 허스트에 의해서 출간되었을 때, 5년 동안 동일한 하르코프 공장에서 일했던 우리넥(J. Wolynec)이라는 또 다른 미국 노동자가, 빌의 책 전체에 걸쳐있는 거짓말들을 폭로했다. 비록 빌이 많은 대화를 들었다고 했지만, 우리넥은 그가 러시아어 우끄라이나어 어느 것도 구사할 줄 모른다고 지적했다. 1948년에 빌은 맥카시 위원회(McCarthy Committee) 앞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맞선 증인으로서 극우주의자들에게 봉사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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