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혁명사
서진영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949101일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인 마오쩌둥은 수십만이 모인 군중 앞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1949년에 일어났던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은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은 냉전초기에 접어든 미국사회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고, 역으로 미국사회의 반공주의를 강화시켰다. 당시 미국의 공화당측 정치인들은 우리는 중국을 잃었다.”며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과 민주당에게 강력한 책임을 물었고, 미국사회는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 반공주의가 극에 달했다. 따라서 미국 민주당과 트루먼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던 공화당 세력과 반공주의에 심취했던 미국인들은 중국이 공산화 되었다는 현상에만 집중했을 뿐, 어떻게 해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는지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았다. 미국의 영향을 적잖게 받았던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일까?

 

1, 19세기 중국과 신해혁명

 

책의 시작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고도의 생산력과 기술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부터 시작한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청나라 군대를 굴복시킨 서구 열강들은 1841년 남경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청나라에게 체결하게 하고, 승리자 영국은 홍콩을 점령한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들의 침략이 확대되었고, 항구를 기점으로 서구 열강들의 자본이 중국대륙을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서구 열강들이 중국 대륙을 잠식해가는 과정에서 중국 내부에선 혁명운동이 일어나는데, 그게 바로 태평천국운동이다. 1850년대에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은 초반에는 많은 인원들을 끌어 들였지만 조직 내에서 갈등을 겪으며 분열되었고, 1864년에 지도부가 체포되어 처형당하면서 끝난다. 태평천국운동 이후 청나라에선 개혁의 목소리가 나왔고 동치중흥과 양무자강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중국 전통사회의 기본적 가치와 제도에 대한 개혁이 아닌 서구의 선진기술문명의 수용하는 쪽의 운동에 가까웠고, 이홍장과 같은 청나라 관료들이 중심이 된 운동이었다. 결국 양무자강운동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패하면서 추진력을 잃게 되었다. 1898년에는 강유위(캉유웨이)라는 인물이 이끌었던 변법운동이 발전하여 입헌군주제 체제가 실현될 뻔 했으나 서태후의 지원을 받은 보수파의 궁정쿠데타로 인하여 이 또한 몰락하게 된다. 중국 대륙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이 극심해지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지만,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은 8개국 연합국을 파견하여 수도 베이징을 단숨에 점령해버리는 바람에 이 또한 진압 당했다. 의화단 사건 이후 위기감을 느낀 중국의 관료들은 개혁을 실행한다.

하지만 개혁이 청조의 운명과 중국의 위기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1911년 중국에선 혁명 지도자 손문의 주도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지방자치운동과 혁명운동이 전개되면서 191111월 말에는 청조가 와해되었고, 1912년 새해에는 손문을 지도자로 하는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2. 중국 공산당의 창당 배경과 제1차 국공합작

 

신해혁명을 시작으로 들어선 중화민국 정부는 명목상으로만 민국이었고, 사실상 위안스카이와 같은 군벌들 집합체였다. 이 과정에서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가 등장했고, 더 나아가 군벌세력인 위안스카이는 공화제까지 폐지하면서 전제정치를 부활시키려는 시도까지 보였다. 1차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중국 대륙은 군벌들 간의 분쟁이 일어났고, 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중국 대륙에 대한 일본제국의 경제적인 점령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선 의식 있던 지식인 진독수를 중심으로 신문화 운동이 전개되었고, 1차세계대전이 종결된 191954일에는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일본제국주의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항일 운동은 반제반봉건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5.4운동은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끝났고, 1차대전 이후 서방 국가들에게 실망한 지식인들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특히나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이 그러했다. 이를 기점으로 중국의 사회주의 운동도 성장했고, 아나키즘 및 여러 진보계열 운동들이 더욱 활발해졌다. 1919년 혁명 러시아에서 창설된 코민테른은 중국의 사회주의 운동을 지원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19217월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이 창설된다. 마오쩌둥 또한 중국 공산당을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아시아의 상황에선 민족해방운동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따라서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에게 국민당과의 합작을 수립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중국 공산당도 국민당과 합작하여 민주주의 연합전선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또한 국민당의 지도자였던 손문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1924년에 제1차 국공합작을 실행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1926년 중국 국민당은 군벌세력 무력화를 위한 북벌을 단행하게 되고, 1927년에 제1차 북벌을 마무리 한다.

 

하지만 1925년 손문이 사망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도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손문 밑에 있던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19263월 중산함 사건을 일으켜 중국 광저우 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산주의자들 소탕에 나섰다. 북벌과 동시에 상해를 비롯한 몇몇 지역을 접수한 장제스의 국민당은 19274월에 공산당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 및 혁명가들이 살해된다. 또한 장제스가 난징을 수도로 하는 난징 정부를 구축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은 와해된다.

 

3. 1차 국공내전과 대장정

 

1927년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장제스는 제2차 북벌을 감행하는 동시에 공산당 토벌에 나선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에 맞서 구추백과 같은 노동자 혁명 세력들은 도시 중심의 노동자 투쟁을 전개했지만 27년의 남창봉기를 시작으로 추수봉기, 광주봉기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고, 도시 위주의 소비에트는 결국 1928년 중국 국민당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 당했다. 결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주장한 농촌 혁명을 기반으로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국민당에 맞서 투쟁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소비에트들은 자체적으로 진보적인 정책들을 실행하였다. 또한 1928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의 홍군은 정강산을 중심으로 토지혁명을 추진하면서 농민들을 동원했고, 국민당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맞서 투쟁했다. 이후 농촌혁명근거지가 확대되면서 1931년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된다.

 

하지만 농촌혁명근거지가 확대됨과 동시에 장제스의 공산당 토벌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이에 맞서 마오쩌둥의 홍군은 정강산 투쟁이라 하여 1928년 부터 게릴라전으로 맞섰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이들을 토벌 및 섬멸하기 위해 193010월부터 193410월까지 총 5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포위공격을 감행하였고, 1931918일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해 나갔음에도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심지어 장제스는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1933년 나치독일의 군사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를 군사고문으로 초빙했고, 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까지 했다. 어쨌든 국민당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로 인하여 마오쩌둥의 홍군은 193410월 강서소비에트를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를 탈출한 10만 명의 홍군은 국민당군에 맞서 대장정을 전개하게 된다. 대장정 당시 홍군은 193410월부터 19359월까지 대략 10000km를 걸었고, 온갖 자연환경과 싸웠으며, 계속되는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국민당군과 추격해오는 수백 대의 전투기에 맞서 싸웠다. 11개의 성과 18개의 산맥을 통과했던 홍궁 정규군은 대장정이 끝날 때 쯤 8천 명 만이 살아남았다. 대장정을 감행했던 마오쩌둥과 홍군은 대장정이라는 신화를 창조해냈고, 이 사건은 중국 혁명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 중국 공산당에서 보다 확고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국민당은 계속되는 토벌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하여 점차 민심을 잃었고, 이는 결국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4. 시안사건과 중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부터 중국 대륙을 점령해 나가던 일본 제국주의의 노골적인 침략에도 불구하고 장제스가 공산당 토벌에 앞장서자 장제스 밑에 있던 일부 부하들은 그를 구금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1936년에 일어난 시안사건이다. 이후 풀려난 장제스는 중일전쟁 한참이던 1937년에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하게 된다. 이때 마오쩌둥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에 편입됐다.

 

하지만 일본의 중국 침략은 이미 노골적으로 드러난 상태였다. 19377월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중국 전역에서 진격하였고, 193712월 중국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여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3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도륙했다. 일본군은 19383월 태아장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제외한다면 중국 전선 곳곳에서 승승장구하여 193810월엔 국민당의 임시수도인 우한을 점령했다. 전쟁 초기에 승승장구했던 일본은 전쟁이 길어지자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고, 1941년에 태평양 전쟁까지 일어나면서 교착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홍군 또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19408월부터 1941년까지 백단대전을 단행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백단대전에 놀란 일본은 화북과 화중지역을 치안구와 비치안구로 나누고 치안구에서 공산당을 색출하는 작업을 강화했다. 이유는 중국 공산당군이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 공산당측을 토벌하기 위해 3광작전을 전개하여 모조리 전멸시키는 전멸작전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산당은 화북 지역을 포함한 지역에서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해 나갔는데, 이에 불안감을 느낀 국민당은 공산당측의 신사군을 포위 공격하여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는 치졸한 짓을 하기도 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킴에 따라 미국은 중국 국민당에 대한 지원을 늘렸고, 운남 곤명성에 플라잉 타이거스와 같은 미국 공군부대도 보냈으며, 랜드 리스라 하여 13억 달러나 되는 물자를 제공했다. 그리고 미국은 조지프 스틸웰이라는 장군을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부터는 중일전쟁 또한 연합국이 참가하는 세계전쟁의 일부가 된 것이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했고, 1943년 이후 부터는 중국 전선에서도 진격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일본은 19458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 하게 됐고, 중국 또한 2차대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5. 국공내전과 공산당의 승리

 

19458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1937년부터 1945년 까지 약 8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중국은 대략 150만 명의 군인과 1천 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전쟁의 공포는 2차대전이 승리로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유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갈라져 다시 전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지쳤던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국민당과 협상 및 협력 그리고 평화적인 정부 수립을 추구했고, 초반에는 이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또한 미국은 이들을 중재하기 위해 조지 마셜 장군을 특사로 파견했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이견조정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국제 정세는 점차 미국과 소련 혹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로 변모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국공합작은 점차 분열되었던 것이다. 19465월 미군사고문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정예부대를 대거 투입하여 만주지역의 대도시를 점령했고, 19467월부터는 공산당의 거점지역에 대한 국민당군의 대대적인 군사적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19467월부터 12월 사이 중국의 국민당군은 공산당이 지배하던 수많은 해방구 영토를 점령했고, 19473월에는 인민해방군의 중심지인 연안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국민당군에겐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극심한 부정부패와 빈약한 민중의 지지였다. 결과적으로 공산당에 비해 민심을 바로잡지 못한 국민당군은 1948년에 들어서면서 군사적인 규모면에서 중국 공산당과 큰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또한 부정부패와 전쟁 수행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국민당 정부의 붕괴를 재촉했다. 심지어 194810월 미국의 조지 마셜 장군은 미국이 아무리 많은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현 국민당을 구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국민당 정부가 이와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을 때 중국 공산당은 19489월에 전면적인 군사적 공세를 전개했다. 1941131일 중국 공산당군은 베이징을 점령했다. 19494월에는 중국 공산당군이 양자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남경을 함락시켰으며 5월 말에는 상하이까지 점령했다. 승기를 잡은 중국 공산당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194912월에는 대만을 제외한 중국 전 지역을 해방시켰다. 1949101일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6. 맺음말: 중국혁명은 반제국주의 항쟁이다

 

아편전쟁으로 시작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선포로 끝이 난 중국혁명은 그 후에 설립될 체제가 어떤 체제였든 간에 지속되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에서 시작되어 사회주의 국가 수립으로 나선 반제국주의 항쟁이었다. 20세기 초 중국에 사회주의 사상이 소개될 당시 사회주의 노선을 놓고 중국 공산당 내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이라 하여 중국 현실에 맞게 적용하여 반제국주의 항쟁을 전개했다. 물론 신민주주의론은 정통석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해서 보면 분명 바로잡아야할 사상일 수도 있지만, 중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선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기에 적합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 혁명은 도시 혁명에서 보단 농촌 위주의 소비에트 건설을 통해서 민중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반혁명분자인 장제스에 맞서 저항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게릴라전 위주의 전략전술로 국민당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궁극적으로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부정부패한 장제스 정권에 왜 맞서야 하는 지를 민중들에게 잘 접근하였다.

 

‘1949년 이후 중국에 어떤 사회가 등장했는가?’와는 별개로 중국 혁명사는 분명히 많은 이들에게 귀감을 줄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서방제국주의의 침탈 속에서 피어오른 혁명과 공산당 건설, 국민당에 맞선 영웅적인 투쟁과정은 읽는 이에게 나름의 감동과 흥미를 유발시킨다. 무엇보다 이 책은 1990년대 초에 기존의 반공주의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집필된 책이기에 일반적인 중국사 서적보다 더욱 재밌게 읽힌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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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

사회주의에 대해 음해하는 자들은 ‘사회주의는 가진자에 것을 뺐는 사상‘이다라고 이상한 잣대로 왜곡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상은 가진 것을 뺏는 사상도 독재를 추구하는 사상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한 집단이나 개인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어떠한 견제세력 없이 흔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인민들 누구나가 일한 만큼 받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고 능력에 따라 일하며, 고도의 착취를 당하지 않고, 계급없는 사회라는 목표를 향해 이행되는 과도기적 단계다. 그 나머지 시간엔 문학을 읽고, 운동을 하고, 시를 쓰며 사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다. 따라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리고 블라디미르 레닌이 추구했던 세상은 모두를 다 똑같게 만들지도 똑같게 하는 세상도 아니었다. 이론또한 마찬가지다.

지난 20세기 사회주의 민족해방투쟁이나 혁명 당시,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세력들이 지주나 자본가와 같은 대 부르주아 세력들의 재산을 몰수했던 것은 절대로 이유없이 몰수한 것이 아니다. 가진자들은 자신들의 인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즉 그 시기에도 자본가라고 해서 무작정 몰수만 했던 것이 아니다. 어떤 사회든 국가를 유지하는데 있어선 돈이 필요하다. 근데 모든 부자들의 재산을 어떤이유없이 뺏었다는건 그냥 반공분자들이 만들어낸 피해망상적인 선전선동일 뿐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대해 오해를 하고있고, 한편으로는 매우 몰지각하다. 이게 다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반공주입식 교육과 미제국주의자들의 선전선동 때문이다. 지금같이 자본주의가 겨우 살아남은 세계에선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다시 공부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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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5-12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해‘일까요? 사실 대충이라도(혹은 대단히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모른 체 하고 있거나, 혹은 진짜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따위는 애시당초 중요치 않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아닐까요?

어차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빨갱이‘라는 굴레를 씌울 수 있는 능력일 뿐인데요.

NamGiKim 2019-05-13 00:23   좋아요 0 | URL
모르거나 양심이 없거나 아니면 수꼴이 되어 흑화했거나 이것들 중에 하나겠죠.
 

CIDG(Civilian Irregular Defense Program) 계획

1960년대 초 미국의 존F케네디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있던 군사 고문단의 수를 증강했다. 그들은 남베트남 정권의 군대를 지원했고, 베트콩에 맞서 싸우도록 했다. 또한 미국은 베트콩에 맞서 소수민족들을 포섭하는데, 그게 바로 라오스쪽의 몽족과 베트남 중부고원 지대의 몬타냐드족(영어로는 montagnard 에데족, 참파족, 바나족)이라 불리는 고산족이었다.

베트남 역사를 보다보면 그곳은 근대까지만 해도 기존에 참파왕국의 존재하던 곳이었고, 베트남 사회하고는 좀 거리가 있던 사회였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인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쪽 영토가 베트남 영토로 편입된 것은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남진정책을 하며 참파 왕국의 정복을 마친 18-19세기 쯤이었다. 따라서 19세기 프랑스가 점령했을때도 이를 분할통치로서 이용했었고, 마찬가지로 미국도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면서 이를 이용했다. 비슷한 예로 이라크 전쟁 당시 제국주의자들의 압잡이가 되었던 쿠르드족을 예로 들 수 있다.

프랑스가 물러나고 난 뒤, 정권을 잡은 응오딘지엠은 중부고원지대를 베트남화 시키는 강제적인 동화정책을 실시했지만, 이는 중부고원지대 소수민족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상황에서 중부고원지대에 들어간 것이 미국이었다. 남베트남과는 달리 북베트남의 호치민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그랬듯이 소수민족을 잘 포섭하여 해방전쟁에 잘 협력하도록 했고, 이대로 가면 중부고원 지대 소수민족이 베트콩에 협력할께 분명했다.

따라서 이를 두려워한 미국은 CIDG라는 계획을 실행하여 라오스쪽의 몽족과 중부고원 지대의 몬타냐드족들을 포섭하여 베트콩에 맞서도록 군대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남베트남의 일부 소수민족들은 미국의 그린베레(Green Beret)와 마이크 포스(MIKE Force)팀에 합류하여 베트콩에 맞서 싸웠다. 미국이 이들을 설득했던 방법으로는 자치국 수립 혹은 자치권 부여를 주장했지만, 사실은 이들을 꼬득이기 위한 분할통치의 방식이었다. 물론 이들 중에도 베트콩과 북베트남군 편에 서서 싸웠지만,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가 퍼뜨린 농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이들은 피닉스 작전과 같은 대학살극에 참가하여 민간인을 학살했고, 해방전선 전사들의 목을 자르며 들고 다니는 것을 즐겼다. 마치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그랬듯이 말이다.

무튼 이들은 미국에게 이용당했고, 쉽게말해 베트남판 간도특설대가 되어 베트콩들에 맞서 싸운다. 결국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할 때 이들을 철저하게 버렸고, 이들은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말 그대로 사회주의 베트남에게 목숨을 빌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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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러시아 제국 통치하에 있던 폴란드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이사 가게된 어린시절의 로자는 거기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5살이 된 로자는 유대인 혁명 서클과 폴란드 프롤레타리아당에 가입해 총파업 주도 등의 반정부 활동을 벌였다가, 탄압받자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했다.

망명후 로자는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경제학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공부했다. 그녀 그곳에서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 ‘레오 요기헤스‘를 만났고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혼 덕분에 독일 시민권을 취득한 로자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활동한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에서 있던 사건에 참여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돌아가 폴란드 사민당을 창당하고 폴란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게 되는데, 이 당시 계급 투쟁보다는 반러시아 운동과 폴란드 독립을 먼저 주장하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했다. 이는 당시 그녀가 민족주의에 대해 매우 경계했기 때문이다. 로자는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대의명분아래 계급투쟁을 방해하고, 이게 결국 국가주의에 기반한 이기주의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는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는 등, 본격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로자는 1907년 베를린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자본의 축적˝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사민당으로 활동했던 것도 이 시기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당시 로자는 독일의 빌헬름 2세를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갔고, 대략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16년 풀려난 그녀는 자신이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실망 했다. 제2 인터내셔널에 있던 사민당들이 조국 방위라는 개념을 내세워 제국주의간의 영토전쟁 혹은 패권전쟁을 맹목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이다. 독일 사민당을 떠난 로자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 등과 함께 인터내셔널단(Die Internationale)을 결성하고, 투쟁을 이어갔다. 이때 로자와 그들은 어떤 단체를 조직하는데, 그게바로 스파르타쿠스단이다. 이때 로자는 다시 한번 독일 제국에 의해 체포되어 또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된다.

로자가 감옥에 있을 당시 1917년 러시아에선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로자는 볼셰비키의 혁명을 환영하면서도 독재화를 우려하기도 했었다.

1918년 독일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뒤, 11월 혁명으로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의 기관지인 ˝적기(Die Rote Fahne)˝를 창간하고 사민당을 수정주의라고 격렬히 공격한다. 그해 12월 스파르타쿠스단과 다른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1919년 1월 1일 독일공산당을 창당하고 혁명(1월 봉기)을 일으켰으나, 독일 사민당의 비겁한 배신과 독일 자유군단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봉기는 실패로 끝났고, 로자는 체포당한다. 체포된 로자는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다 어떤 병사가 휘두른 개머리판에 맞고 사망했다. 당시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이어, 단결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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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풋은 네스 호의 괴물, 렙틸리언, 오고포고와 더불어 유명한 크립티드(미확인 생물)중 하나다. 히말라야에 산다고 알려진 예티의 친척으로서 직립보행을 하는 빅풋은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언어로 사스콰치라고도 불리는 빅풋은 원주민들의 이야기속은 물론이고,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부터 목격담들이 있었고, 현재도 간혹 목격담이나 몇몇 포착 영상들이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빅풋이 최초로 영상에 포착된 것은 1967년이다. 1967년 10월 20일 북캘리포니아 산악지대인 블러프크리크강을 지나가던 로저 패터슨은 밥 김린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다가 갑자기 검은색 생물체가 걷는 것을 목격했는데, 로저 패터슨은 자신의 카메라로 영상을 찍었고, 이게 결국 빅풋이 있다는 증거물로 여겨졌다. 로저 패터슨이 찍은 몇 분짜리 영상을 본 사람들은 이에 열광했다.

그 외에도 빅풋을 봤다는 목격자들은 넘쳐난다. 1964년에서 1970년까지 미국에서 빅풋을 봤다는 사람은 약 25회에 걸쳐 총 300명에 달했다. 1924년 캐나다 농부 알버트 오스트만은 자신이 빅풋 가족에게 납치당했다가 탈출했다고 주장했으며, 빅풋이 자신의 집을 습격했다거나 빅풋을 총으로 쐈다는 사람, 심지어 미확인비행물체(UFO)가 빅풋을 내려주고 갔다는 목격자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빅풋의 발자국이나 몸의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목격된 빅풋이 10만년전 지구상에 존재하던 영장류중 하나인 ‘기간토피테쿠스’가 아니냐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신비동물학(cryptozoology)’이라 하여 빅풋과 같은 미확인 생물체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말이 학문이지 이를 확실하게 입증할만한 증거자료가 있지는 않기에, 전적으로 신뢰할 부분은 아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지금까지 생포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빅풋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7월 2일 '영국왕립학회보B'에 실린 빅풋의 DNA를 검사한 논문은 "'빅풋'의 털은 하나같이 현존하는 종과 완벽하게 일치해 지금까지 발견된 빅풋의 털이 모두 가짜"라고 주장했다. 이를 가짜라 입증한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논문에 토대가 된 샘플 30개 가운데 10개는 곰, 4개는 말, 4개는 늑대나 개, 하나는 인간, 나머지는 소, 너구리, 사슴 등으로, 해당 샘플이 발견된 지역에 원래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포유류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1967년에 포착되었다는 빅풋의 필름 또한 조작으로 밝혀졌다. 사실 로저 패터슨은 한 영화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회사에서 내려온 지시와 함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비디오를 제작한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에는 “당시 자신이 털옷을 입고 빅풋 흉내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즉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빅풋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고, 증거 자료로 제시한 샘플들 또한 빅풋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간혹 포착되기도 하는 빅풋의 사진이나 영상들이 대부분 조작되었다 하더라도 과연 그 자료가 다 거짓이냐는 의문 말이다. 즉 목격을 했던 사람들 중에는 빅풋관련 다큐멘터리에 나와 자신이 빅풋을 본 것을 매우 생생하게 증언했고, 이러한 것들이 다 거짓 혹은 기억에 의한 착각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냐는 것이다. 따라서 빅풋의 존재를 확실하게 확신 할 수 없는 나로선 그저 확실한 물증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추가적으로 더 얘기하자면, 빅풋이 포착된 것은 미국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잘아는 히말라야의 예티도 있고, 중국, 러시아, 카프카스 지대를 끼고 있는 과거 구소련권 국가들에서도 빅풋과 같은 동물이 포착된 기록이나 목격담이 있다. 포착 영상들 중에는 최근에 촬영된 것들도 있다. 진실은 잘 모르겠지만, 만약 빅풋이 존재한다면 과거에 존재했던 기간토피테쿠스 같은 동물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참고자료
http://news1.kr/articles/?2062633
https://namu.wiki/w/%EB%B9%85%ED%92%8B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9109&cid=58943&categoryId=58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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