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서전쟁과 제국의 팽창

 

19세기 미국의 역사는 영토 팽창의 역사이기도 하다.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사들인 루이지애나를 시작으로 1810년대에는 플로리다 1840년대에는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현재 미서부 일대까지 확장했다. 1867년에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알래스카를 저가에 매입하는데 성공한 미국은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팽창에 나서게 된다.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 따르면 1798~1895년 사이에 대략 103차례나 미국이 다른 나라의 문제에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 스페인의 식민지 쿠바도 그러했다.

(알프레드 머핸. 제국주의적 사상을 담은 저서로 미국 각계에 영향을 미친 군인 겸 역사가다.)

미 동부 해안과 인접하다는 지리적인 이점은 물론 풍부한 노동력과 농업에 적합한 기후조건 등을 갖춘 쿠바는 19세기 초부터 미 제국이 눈독을 들여온 곳이었다. 멕시코를 침략하여 그들의 영토를 강탈했던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포크는 쿠바를 빼앗기 위해 무장게릴라를 침투시키는 등의 공작을 벌이기도 했었다. 1895년 쿠바인들이 스페인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쿠바를 통치하고 싶어 했다. 즉 미국은 쿠바를 독립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닌 지배하고 싶어 했다. 1898년 쿠바의 수도 아바나 항에서 일어난 폭발로 미국 전함 메인 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메인 호 침몰로 대략 268명이 죽자 미국의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고, 쿠바에 병력을 파견했다. 미서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898년 미국 전함 메인 호가 쿠바의 아바나 항구에서 격침당했다.)

사실 미서전쟁은 이전에 미국이 치렀던 독립전쟁이나 남북전쟁 그리고 그 이후에 치르게 될 제1차 세계대전이나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하면, 전쟁의 규모도 작았고, 전쟁을 치른 기간도 짧았다. 대략 400명 이상의 미군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총 4개월간 전개되었다. 미서전쟁 당시 미군의 총 사망자가 2500명인데 그중에 2000명 이상이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스페인군 또한 마찬가지여서 사망자 대부분은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 전쟁은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일까?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바로 미국이라는 국가가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로 확실히 변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테어도어 루스벨트. 영화 박물관의 살아있다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했던 그는 전형적인 미제국주의자였다.)

미서전쟁 당시 미국 국민들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 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영화 박물관의 살아있다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미국의 대통령 테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다. 그는 전형적인 전쟁광으로써 “모든 위대하고 훌륭한 민족은 싸우는 민족이었다. 어떠한 평화로운 승리도 전쟁을 통한 최후의 승리만큼 위대하지 않다”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제국주의자 다운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아주 악질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미서전쟁 당시 엘케니 전투에서 흑인 출신 병사들이 스페인 병사들을 격퇴하고 요새를 점령했는데, 그는 흑인들의 공로를 가로챘고, 산후안 전투에서 같이 싸웠던 흑인 병사들을 등지고, 그 전투의 공로를 오직 자신들(백인) 만의 공로로만 치켜세웠다.

(마닐라 만 전투. 미서전쟁이 일어남과 동시에 미국은 필리핀을 침공했다.)

미서전쟁은 1898년 7월 17일 미군이 산티아고에 있는 총독궁에 성조기를 게양하면서 끝났고, 쿠바를 미국의 보호령으로 만들며, 쿠바에 대한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형식적으로 독립시켰다고 주장하지만, 미제국주의의 일방적인 쿠바 식민지화 정책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스페인의 통치에서 벗어났던 쿠바는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1959년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쿠바혁명으로 자주적인 국가를 세울 때 까지 미국의 식민통치는 대략 60년간 지속됐다.

(미서전쟁 당시 흑인 병사들. 그들은 전장에서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와 같은 백인들에게 멸시당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서전쟁이 벌어짐과 동시에 미국은 1898년 필리핀을 침공했고, 식민지화했다. 미국의 필리핀 침공이 끝났을 때, 최소 20만 명이 넘는 필리핀 사람들이 미국에 의해 죽었다. 미서전쟁 이후 미국의 대통령이 된 테어도어 루스벨트는 1905년 가츠라 테프트 밀약을 일본과 체결함으로써, 조선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차지하도록 허용했다. 이처럼 미국은 19세기 영국 프랑스와 같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랬듯이 제국주의 국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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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서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서방 연합국이 독일군을 향해 제대로 된 반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작전이 있었다. 이 작전은 이후 <지상 최대의 작전>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 <마이웨이> 그리고 <밴드 오브 브라더스>등에서도 묘사되는데, 그 만큼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그 작전이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Invasion of Normandy)이다.

 

1940년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전격전(Blitz Krieg)을 개시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를 단기간에 점령했다. 당시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을 막지 못한 연합국(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등)은 프랑스의 덩케르크(Dunkirk)에서 대규모의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이후 영국은 1940년부터 1943년까지 독일군의 공습에 맞서 싸웠다. 1941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1달 뒤 스탈린은 영국의 처칠에게 제2전선을 구축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194112월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도 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제2 전선의 구축 문제는 영국과 미국이 해결해야 할 숙제가 됐다.

1942년과 1943년 사이 미국과 영국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작전을 수행했는데, 2 전선은 형성되지 않았고 스탈린이 요구했던 제2 전선의 구축은 자연스럽게 미뤄졌다. 19428월 영국과 캐나다군이 프랑스에 있는 디에프라는 해변을 급습했지만, 어디까지나 정식적인 상륙작전이 아니었기에,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이에 분노한 스탈린은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각각 불만을 드러내는 서신을 보냈다. 결국 194311월에 열린 이란의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은 19445월에 서유럽 상륙작전을 진행하기로 하는 데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실제 상륙작전은 약속했던 것보다 1달 정도 지나서 개시되었다.

 

1944년에 들어서자 연합군은 상륙정과 보급품을 충분히 갖추게 되었다. 1월에는 사령부를 편성하고 최고사령관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을, 그리고 지상군 사령관에는 사막의 쥐라 불렸던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을 임명했다.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는 독일군이 해안 일대를 요새화하고 있었으므로 해안을 침공하는 데는 독일군의 허점을 이용하고 기만하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 필요하다 결론 내렸다. 상륙해안은 영국에서부터 전투기 사정거리 내에 있는 곳으로 대체로 네 군데가 고려되었다. 그 가운데 네덜란드 해안은 영국 항구에서 너무 떨어져 있고 브리타니 해안은 독일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었다. 해협에서 가장 가까운 파드칼레 해안은 독일군의 최대 방어가 예상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연합군 사령부는 비록 정박시설이 없는 약점을 지닌 곳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방비가 허술한 노르망디 해안을 상륙지점으로 선정했다.

당시 독일군은 60개의 사단을 가지고 프랑스 지역을 수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10개 사단은 전차와 장갑차를 위주로한 기갑사단이었다. 영미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하기 위해 독일 측에게 역정보를 흘려보내고, 기만책을 사용했는데, 당시 노르망디를 방어하고 있던 상당수의 독일군은 도버 해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로써 노르망디 상륙을 위한 서방 연합국의 준비는 끝이 났다.

194466일 새벽, 연합군은 사상 최대 규모의 육해공군 합동작전을 개시했다. 연합국은 6,500척의 선박과 12,000대의 항공기를 가동시켜 첫날 17만 명의 병력을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켰다. 101 공수사단을 비롯한 미군 공수부대가 새벽에 노르망디 지역으로 침투하여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했고, 상륙부대는 오마하 해변과 유타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그리고 푸앙트 뒤 오크 지역에도 상륙하여 작전을 개시했다. 이 중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치러졌던 곳은 오마하 해변이었는데, 상륙 당일난 미군은 최소 3000명에서 5000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상륙에 성공했다. 특히 오마하 해변에 상륙한 미군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했던 것은 수십 대의 탱크가 썰물로 인하여 수장당했고, 상륙한 보병들은 각종 장애물과 철망에 1700개의 대인지뢰가 깔린 곳에서 MG-42의 집중 사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4466일 서방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고, 대략 43일 동안 노르망디 인근 지역에서 독일군에 맞서 전투를 치렀다. 1944725일부터 미국과 영국군이 독일군을 공격하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프랑스 쟁탈전으로 바뀌었다. 연합군은 한 달에 걸쳐 브르타뉴 반도의 일부 항구를 제외한 프랑스 서북부 전체를 점령했다. 그리고 825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까지 입성하게 됐고, 독일 국경을 향해 진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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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05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
개시로 서부전선에 대한 압박이 상대적
으로 줄어 들지 않았을까요.

캉 전투와 빌라 보카주를 필두로 해서
SS부대들이 미영 연합군을 상대로 지연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NamGiKim 2019-09-05 14:26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소련군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더 이상 힘을 잃었고, 1944년에는 레닌그라드까지 잃었습니다.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를 읽어보면, 서방 연합군보다 소련군의 역할이 더 크죠.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9년 9월 2일 베트남의 위대한 혁명가는 미국과의 전쟁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사망하기 24년 전인 1945년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던 날이었고, 그는 사망하기 직전에는 독립기념일 축하 연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80평생을 베트남의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의 삶을 살아왔던 호치민이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세계에서 여러 논평이 쏟아졌다. 세계 주요 국가에서 조문을 했으며, 북베트남 정부는 121개국으로부터 2만 2천 통의 조문을 받았다.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들 나름대로 추모식을 열었으며, 우호적인 사설들을 게재했다. 소련은 공식 성명을 통해 호치민을 “영웅적인 베트남 인민의 위대한 아들이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뛰어난 지도자이며, 소련의 훌륭한 친구”라고 찬양했다.

 

당시 서방의 종군기자로서 호치민 장례식에 참가했던 기자이자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저자인 마이클 매클리어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비탄과 감동, 혼란이 함께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이 행동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정치 지도자를 잃고 애도하는 그런 슬픔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을 꾹 참고 견디는 모습이었다. 호치민의 인민들은 ‘호 아저씨’가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순간들이었다”라고 기사를 썼고, 미국 방송국인 CBS의 월터 크론카이트는 호치민 사망 소식을 톱 뉴스로 보도하면서 상업 광고 없이 7분을 할애했다. 이처럼 호치민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상관없이 많은 관심을 받은 전 세계적인 인물이었다. 호치민 주석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며 그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호치민은 1890년 5월 19일 베트남의 킴 리엔에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났을 당시 응우옌 신 꿍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는 10살이 되던 해 응우옌 탓 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그는 아버지와 함께 고전 공부를 하며, ‘삼국지’나 ‘서유기’같은 책들을 읽었지만, 17세가 되던 1907년 베트남의 옛 황궁 도시 후에에 있는 프랑스식 국립학교인 국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반프랑스 시위에 참여하는 바람에 국학에서 퇴학당했고, 베트남을 떠돌다가 1911년 6월 사이공에서 프랑스의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에 취직함으로써 베트남을 떠났다. 즉 그는 20대 초반부터 50대까지 대략 30년간 해외 생활을 하게 되었다.

 

호치민은 프랑스의 파리와 미국의 뉴욕과 보스턴 그리고 영국 런던에서 알바생으로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에도 관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7년 그는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작업에 관여했다. 1919년 그는 파리강화회의 때부터 ‘응우옌 아이 쿠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베트남의 독립을 강대국들에게 청원했고, 안남애국자연합을 결성하기도 했었지만,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이를 무시했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 사람들과 교류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과정에서 호치민은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1920년부터는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했다. 1921년 호치민은 국제식민지연맹을 결성하기도 했으나, 베트남 식민지배에는 반대하지만 베트남 자체에는 무관심 했던 프프랑스 공산당하고 많이 갈등했다고 한다. 1922년 호치민은 ‘르 파리아’를 창간하고 편집인으로써 활동했다. 르 파리아의 신문사는 주로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비판했다. 이런 신문이었기에 프랑스 당국은 이 신문사를 탄압했고, 호치민을 체포하려 했었다. 그 외에도 호치민은 파리에서 발행되는 다른 좌파 신문이나 정기간행물에도 꾸준히 글을 썼다.

 

1923년 6월 ‘르 파리아’에서 활동하던 호치민은 프랑스 당국의 감시를 피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호치민은 코민테른 극동국에서 근무하였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 모스크바에서 생활할 당시 그는 아쉽게도 만나고 싶어 했던 레닌을 만나 뵙지는 못했다. 1924년 12월 호치민은 중국 광둥 성에 있는 광저우로 갔고, 거기서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하여 교사로 활동했다. 국공합작과 국공내전을 겪으며 호치민은 1927년에 중국을 떠났다. 1930년 호치민은 베트남 사회주의 조직들의 분파 싸움을 해결함으로써,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했다. 그게 바로 현재 베트남 공산당의 전신이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창설되기가 무섭게 베트남의 통킹과 안남 지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는데, 그 봉기는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고, 호치민 또한 1931년 홍콩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고문을 받다 석방된 호치민은 1934년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대학에 입학했고, 코민테른 제7차대 회에 참가 했고, 스탈린 대학교에서 교사로도 활동했었다. 이 시기 그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좌익 소아병’을 베트남어로 번역했다. 1938년 호치민은 모스크바를 떠나 중국으로 들어갔고, 중국 구이린 성에 있는 팔로군 본부에서 보건 담당 간부로 일했다. 1940년 호치민은 중국 쿤밍에서 팜반동과 보 웅우옌 잡 장군을 만나 베트민 창설을 위해 노력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 30년 만에 베트남으로 돌아와 팍 보 동굴에서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을 창설했다. 그리고 그때부턴 그는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0년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일본은 인도차니아 반도를 접수했는데, 당시 베트남 사람들은 일본군을 해방자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잘 알고 있던 호치민은 일본을 “프랑스와 다를게 없는 제국주의 침략자”로 간주하며, 그들과의 투쟁을 전개했다.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국민당측으로부터 스파이로 오인받아 대략 1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그가 감옥에 있을 시기 집필한 것이 바로 ‘옥중일기’다. 1943년 석방되고 난 뒤 호치민은 중국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중국 남부에 혁명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막바지이던 1944년 12월 보응우옌지압의 지휘하는 베트남해방군을 창설했다. 또한 그는 미국 CIA의 전신인 OSS와 접촉하여 대일전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1945년 중반에 베트민은 대략 1만 명 이상의 군대를 가지게 되었고, OSS와 협력하여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세계연합국에게 항복하자 베트남 전역에서 총봉기를 일으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고, 그해 9월 2일에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연합국들은 베트남을 16도선으로 분단시키기로 했고, 남쪽에는 영국군 북쪽에는 중국국만당군이 입성했다. 중국국민당군은 결국 내전이 격해지며 그냥 철수했지만, 영국은 프랑스를 내세운뒤 철수하는 바람에 호치민과 베트민 지도자들은 프랑스를 상대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6년 11월 23일 프랑스군이 북베트남의 항구 도시인 하이퐁을 군함으로 무차별 포격하여 6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 프랑스는 레아 작전을 전개하여 베트민의 본거지를 접수했지만, 1949년 중국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의 승리로 끝난 뒤, 전선에서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마오쩌둥의 중국은 호치민의 베트남을 물적 인적으로 지원하며 도왔고, 1950년 소련의 스탈린 또한 호치민의 베트남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했다. 호치민과 공산당 지도자들은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섬멸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략 23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하고, 10000명 이상이나 되는 프랑스군이 포로로 붙잡힌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23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프랑스 식민지 통치를 종결시키고,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베트남과 프랑스가 디엔비엔푸에서 전투를 치르는 동시에 제네바에선 평화회담이 열렸다. 결국 베트남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17도선을 기점으로 북과 남으로 나뉘게 되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분단 이후 2년 이내에 남북을 아울러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했고, 호치민과 북베트남은 처음에는 제네바 협약을 기초로 한 통일정부를 위한 2년 이내의 선거를 주장했다. 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때부터 반공주의적인 관점에 따라 베트남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해오던 미국은 만일 총선이 치러지면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할거라 예상했다. 따라서 미국은 통일선거를 치르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그와 동시에 호치민과 북베트남 공산당 지도자들은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호치민 자신도 인정했듯이 유혈사태가 있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베트남 인민들이 더는 지주 계급의 횡포를 겪지 않게 되었다. 토지개혁을 잘 마무리한 호치민의 북베트남과는 달리 남베트남은 부패와 혼란의 연속이었다. 당시 미국의 내세운 제국주의 하수인 응오딘지엠은 가족정치를 일삼고 반대파들을 숙청하며 민중의 90%인 불교를 탄압했기 때문이다. 그런 지엠정권의 통치는 1960년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을 창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북베트남은 이 사태를 지켜보며 호치민루트를 통해 베트콩을 물적 인적으로 지원했다. 미국은 남베트남 정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대대적으로 지원했지만,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의 기대에 못미쳤다. 1963년 틱광둑 스님이 소신공양 하는 일이 있자,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암살하여 새로운 정부를 만들었지만, 그 정부 또한 무능했기에 남베트남의 혼란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미국은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을 침략했다.

 

베트남을 침략한 미국은 ‘롤링썬더 작전’이라 하여 베트남 전역에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고, 수많은 민간인을 도륙했다. 미국이 참전함에 따라 대한민국과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미국은 자신들이 베트남에서 이기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런 믿음은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의 숫자를 점진적으로 증강시켰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1967년이 끝나갈 때쯤에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은 50만 명을 돌파했다. 1967년까지만 해도 미국은 베트남에서 이기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그것은 미국만의 믿음이었다. 그런 미국의 믿음은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감행한 구정 공세가 깨뜨려버렸다.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한 구정 공세는 사상자만 놓고 보았을 때 미군의 승리였다. 정공세 1달 기간 동안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3만 명 이상이 죽었던 데에 비해 미군 2천 명 이상이 사망하고 3천 명이 부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미국이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공세 초기에 사이공에 있던 미대사관 1층이 잠시나마 베트콩에게 점령당했고, 그런 장면들이 미국 전역에 보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정 공세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라는 미국의 선전이 구정 공세를 통하여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미국국민들은 분노했다. 이후 미국에서 반전운동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구정 공세 이후 미국의 대통령 린든 존슨은 1968년 11월 하노이에 대한 폭격을 일시적으로 멈춰야 했고, 결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호치민의 일과는 대국민 연설 및 중국을 오가며 요양하는 것이었지만, 1966년 7월 호치민이 남긴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는 말은 북베트남인들과 베트콩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주제, 구호가 되었다는 점에서 크나큰 의의가 있다. 이런 호치민의 일상은 196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망하는 해에도 몇 차례 연설을 했고, 심장마비로 죽게 되는 날에도 베트남 독립기념일 연설을 준비했었다. 1969년 9월 2일 그가 사망하자 베트남은 큰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호치민이 사망한 해인 1969년에는 베트남 전쟁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구정 공세 이후로 미국에서는 대규모의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이 일어났고, 미국의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화 정책을 발표하여 단계적으로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었으며, 미군에 의해서 저질러진 최악의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인 미라이 학살의 진상이 전세계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호치민을 따르던 북베트남 공산당 지도자들은 호치민의 정신을 이어받아 1973년 미군을 베트남에서 철수시켰고, 1975년 남베트남 괴뢰 정권을 전복시키고 자주적인 통일을 이룩했다. 이로써 베트남은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침략을 무찌르고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민중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당연히 이 과정에는 베트남의 위대한 지도자 호치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서방 기자로서 호치민의 장례식을 지켜본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한 세기에 걸친 외국인의 지배가 그들을 연옥으로 몰아넣었고, 또 다른 한 세기의 전쟁이 그들을 질곡으로 이끌었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부활했다. 인류 역사는 베트남 민족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 재통일을 이룩한 것보다 더 위대한 본보기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http://mlkorea.org/v3/?p=8876&fbclid=IwAR1Gjq19B-kcRFbYIaVgYhv7g5nG5WRIOcF9Vytdv4yufhkN0ELwolmXpb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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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대한 오보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 그리고 서방제국주의자들이 북한에 대해 잘못된 보도를 거리낌 없이 해왔다. 그래서 오늘은 한번 진보위키에 있는 북한 오보 관련 내용들을 나열해볼까 한다.

1. 김일성 가짜설

해방 이후 소련군과 함께 귀국해서 북한 최고 지도자가 된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의 ‘그 김일성‘이 아니라 이름만 빌린 가짜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가짜설은 한국학계에서도 논파된 주장이다. 보천보 천투의 김일성은 그 김일성이 맞다.

2. 김일성 사망설

1986년 11월 18일 〈조선일보〉가 호외로 김일성의 사망을 보도했다. 그러나 그 김일성은 1994년 7월에 사망했다.

3. 금강산댐 수공설

북한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금강산댐을 건설한다는 주장이 1980년대 돌았었다. 국가 단위의 사기극이었다. 금강산댐 폭파 시 63빌딩 1/3이 잠긴다며 국민 상대로 공갈을 치던 전두환 일당은 이에 그치지 않고 평화의 댐 짓는다고 애들 코 묻은 돈까지 긁어갔다.

4. 성혜림 망명설

1996년 2월 13일 〈조선일보〉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던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이 서방으로 망명한 사실을 보도했다. 조선일보사는 이를 ‘세계적 대특종‘으로 홍보하며 기사를 작성한 〈월간조선〉의 우종창 기자에게 2000만원의 특종 상금까지 줬으나, 결국 오보로 밝혀졌다.

5. 길재경·염진철 망명설

2003년 5월 17일 ‘연합뉴스‘가 ‘외교소식통‘을 인용, 조선로동당 서기길의 길재경 제1부부장 및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염기순의 아들 염진철의 서방 망명을 보도했으나, 바로 다음날 사실무근임이 드러났다

6. 고난의 행군 300만 명 아사설

북한 경제가 최악의 위기였던 1996-2000년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의 인구 손실은 43만 5천여 명으로 밝혀졌다. 그 기간에 감소한 인구의 사망 원인이 아사 한 가지일 리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사자는 백만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7. ˝북한 학자들이 유니콘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는 보도

2011년 12월 30일 영국의 한 매체가 북한의 학자들이 유니콘의 서식지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는 보도를 했으나, 이는 고구려 동명성왕 전설에 나오는 ‘기린굴‘을 발견했다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여기서 기린이란 아프리카에 사는 목이 긴 그 동물이 아니라 중국 신화에 나오는 뿔 달린 상상의 동물을 일컫는 것이다. 북한을 바보로 만들기 위한 뉴스였겠지만, 실은 본인들이 바보였던 셈. 어쩌면 본인들이 바보라기보다는 그런 걸 믿는 바보들이 많으니까 많이 배우고 똑똑한 기자들이 그런 짓거리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거짓말에 잘 속는 바보들은 한국에도 얼마든지 있다.

8. 탈북 청소년 총살설

2013년 5월 라오스에서 붙잡혀 북한에 송환된 청소년 탈북자 9명이 총살되거나 수용소에 끌려갔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2014년 12월 7일 북한의 대외 선전 매체인 ‘우리 민족끼리‘에 그 중 5명의 근황이 공개됨으로써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곧이어 북한 당국은 나머지 4명의 모습도 공개했다. 애초에 북한 당국은 탈북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처벌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9. 현송월 총살설

2013년 8월 29일 남한의 조선일보 기레기들은 현송월이 포르노를 찍다 총살되었다는 헛소리를 했으나, 다들 잘 알다시피 현송월은 살아있다. 총살된 현송월은 2018년 김정은과 문재인 앞에서 노래까지 불렀다.

10. 김경희 독살설

2015년 5월 11일 미국의 CNN은 한 탈북자의 말을 인용해 김정은이 자기 고모이자 장성택의 부인인 김경희를 독살했다고 보도했으나, 김경희는 살아있다.

11. 리영길 총살설

2016년 2월 10일 연합뉴스의 속보로 알려졌으나, 총참모장 리영길은 살아있다.

12. ˝북 주민 30%가 마약 중독자.˝라는 보도

2016년 12월 1일 (사)북한인권정보센터(NKDB)의 이관형 연구원은 한국프레스센터가 주최한 ‘북한 주민의 마약 사용 실태 현황과 과제 세미나‘에서 북한 인구의 최소 30%가 마약을 소비한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는 아무런 검증 없이 국내 수많은 언론에 의해 인용·보도되어, ‘이제 만나러 갑니다‘ 류 북한 관련 예능과 더불어 북한 사회에 마약이 만연해 있다는 인식을 남한 대중에게 퍼뜨리는 데 혁혁한 공헌을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정말 생각이란 걸 단 몇 초만 해봐도 터무니 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당 발표에서 북한 사회에서 ˝성별·연령별·계층에 무관하게˝ ˝일상화됐다˝고 하는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일명 ‘히로뽕‘)은 대개 0.03g 기준인 1회 투약분이 국내에서 10만-20만 원에 거래될 정도로 아주 비싼 마약이기 때문이다.[1] 1인당 GDP가 많이 쳐줘 봐야 2천 달러 내외[2]인 북한 사회에서 평범한 서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거기 사람들한테 부담 없는 가격으로 팔 거라고? 그럴 거면 왜 국제 마약상들이 엄격한 통제 사회의 위험(예: 총살)을 무릅쓰고 굳이 거기 기어 들어가나? 대외적으로 훨씬 개방화되어 있고 마약 사범에 대한 처벌이 적어도 공산 독재 국가에 비하면 매우 널럴하며 무엇보다도 구매력이 비교불가 수준으로 압도적인, 대한민국이라는 이상적인 시장이 바로 옆에 있는데 말이다. 실제로 탈북자인 최승철 씨는 2011년 1월 21일 ‘오마이뉴스‘ 기고문을 통해 ˝(북한에서) 옥수수 100kg과 맞먹는 마약을, 그것도 마치 전 국민이 흡입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에 불과˝하고, 자신이 북한에서 목격한 마약 사용자는 ˝대부분 먹고살 걱정이 없는 부유층의 일부 극소수 사람˝이었다며, 북한 주민 다수가 마약에 중독되었다는 보수 매체의 과장·왜곡 보도를 비판한 바 있다.

2019년 4월 22일에 방영된 ‘문화방송‘ 시사·교양 프로그램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에서 이 가짜뉴스를 다뤘다. 이 방영분에서 마약상 출신인 탈북자는 이관형의 주장과는 달리 북한의 마약 중독자 비율이 0.2-0.5%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추정했고, 마약 재활치료 전문의인 천영훈 박사는 전 인구 30%는커녕 단 3%만 필로폰 중독자라 해도 그 사회는 작동할 수 없다며 이관형의 주장을 일축했다. 방송을 통해 이씨가 연구자로서 자질이 의심되는 면이 드러나기도 했는데, 예컨대 자신과 동일한 주장을 북한 당국자가 사실로 확인해 줬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으니 본인의 설이 ‘교차검증‘되었다며 자신만만하게 제시한 기사에서 정보의 원출처는 다름아닌 본인의 발표문이었다.

13. 김일성 가면 사건

2018년 2월 10일, 평창 겨울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종목의 코리아 팀과 스위스 팀 간 경기에서, 남북한 단일 팀인 코리아 팀을 응원하던 북한 응원단이 쓴 가면을 일부세력이 김일성 가면이라고 주장하며 생긴 해프닝이다. 결과적으로 이 가면은 김일성 가면이 아니었고 지도자를 최고존엄으로 여기는 북한의 정서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가짜뉴스에 의한 해프닝이었다.

14. 풍계리 갱도 폭파에 대한 오보

2018년 5월 24일 벌어진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갱도 폭파에 대해, ‘TV 조선‘ 온라인 뉴스 팀이 그것이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속보로 보도했으나, 불과 수 시간만에 오보로 밝혀졌다

15. 국민연금 200조 북한 증여설

2018년 8월부터 일베저장소 등을 중심으로 남북 정권의 최고위층이 국민연금에서 200조 원을 떼서 북한에 넘기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작된 증거조차도 내세우지 않은, 그야말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가짜뉴스다. 하도 황당하다 보니 조중동조차 물지 않았다.

16. 북한 헬기 남하설

2018년 12월 14일 한 보수 성향 유튜브 채널이 북한군 헬기가 용인까지 남하... 아... 파주, 연천도 아니고... 하여튼 그랬단다. 그걸 믿는 머저리가 어디 있냐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있다. 얼마나 혹하는 인간들이 인터넷에 많았으면 포털에 연관 검색어까지 생겼을 정도였고, 모바일로도 카톡 등을 통해 ‘긴급 속보‘라며 전파되었다. 물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고, 헛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인 문제의 유튜브 채널 운영자 손상대 씨는 JTBC와 인터뷰에서, 제보자가 의무 수송 헬기의 적십자 마크를 인공기로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의 해명을 내놨다.

17. 김여정 징계설

일단 웃고 시작하자. 김여정이 징계를 당했다니 이게 무슨 개 짖는 소린가. 김여정은 다들 알다시피 북한의 절대권력자 김정은의 최측근이자, 현 시점에서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냥 최측근, 계승자 후보도 아니고 친동생이다. 자신의 유일한 외국 체류 시기인 스위스 유학 시절을 같이 하기도 했으니 김정은으로서는 상당히 애뜻한 마음이 있을 터이다. 그러한 인물이면 어지간한 중대 범죄가 아니고서는 견책을 당할 리가 없다.

이러한 기본 상식조차 저버린 〈동아일보〉·〈조선일보〉등 국내 보수 언론은 2019년 5월 말부터 하노이 북·미 회담의 실패를 책임지고 국무위원회 대미 특별 대표 김혁철은 총살, 조선로동당 통일선전부장 김영철은 숙청당했다는 설을 보도하면서 조선로동당 제1 부부장 김여정의 ‘근신‘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이러한 보도는 무비판적으로 재인용·확산되었다.

다행히 이런 웃기는 소리가 거짓임이 밝혀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단 ‘혁명화 조치‘를 당했다는 김영철은 보도가 나간 지 불과 수일 만에 김정은과 함께 군 부대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이 포착되어 건재가 확인되었다. 바로 그 다음날인 6월 4일에는 김여정도 김정은을 수행하여 집단체조 관람을 한 사실이 밝혀지며 국내 최대 계란판 원료 공급처인 〈조선일보〉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처형되었다는 김혁철도 국정원의 확인으로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유력해진 상황이다.

이 희극의 정점은 6월 25일에 국정원에서 김여정의 서열이 국가지도자 급으로 격상되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무슨 듣보잡도 아니고 김여정 정도 인물에 대해서 당시에 본인이 실제로 겪은 것과 완전히 정반대 상황을 그린 국내 언론의 대북 보도를 신뢰할 가치가 있을까?

18. ˝괴뢰가 보내온 귤은 전리품.˝이라는 주장

2019년 7월 28일 일본의 〈도쿄신문〉은 북한 치안기관에 하달한 내부 문건이라는 문서를 소개하며, 문서 중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트럼프 놈˝이라고 했다든가, 2018년 9월의 제5차 남·북 정상회담 시에 김정은에게 받은 송이버섯에 대한 답례로 문재인이 같은 해 11월에 북측에 보낸 귤 200t을 두고 ˝괴뢰가 보내온 귤은 전리품이다˝라고 표현했다는 등의 언급을 했다. 이는 국내 보수 세력이 문재인 정권을 상대로, 북한이 한국을 호구로 여기느니 한국이 북한에게 [패싱]을 당하고 있느니 하는 식의 정치적 공격을 펼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도쿄신문〉이 소개한 문건은 정보당국, 북한 전문가 및 탈북자들의 분석 결과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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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9-09-02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꼴들은 이거보고 반성해라!!
 

운디드니 학살(Wounded Knee Massacre)


1850년대에서 1880년대까지 원주민과 백인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백인세력들이 원주민 문명에 가하는 위협이 점점 커지자, 원주민들도 이에 저항했던 것이다. 원주민들의 공격은 주로 백인들의 공격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 이런 소규모 교전 및 전투가 크게 비화되기도 했는데, 남북전쟁 중에 미네소타 주의 동부 수(Sioux) 부족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던 것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운디드니 전장에서 말을 탄 버팔로 빌 대위, 볼드윈 장군, 넬슨 A. 마일즈 대위, 모스와 기타 인물들)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백인 군대는 서부 원주민들과 여러 전선에서 맞부딪쳤다. 가장 치열하고 장기적인 전투는 몬태나에서 벌어졌는데, 미육군은 당시 와이오밍 주의 래러미 요새(Fort Laranie)와 새로운 광산 중심지를 연결한 보즈먼 도로(Bozeman Trail)를 건설하려던 참이었다. 서부에 있던 수족은 백인 군대가 자신의 땅인 버펄로 방목지 중심부를 침입한 것에 분노했다. 원주민들은 위대한 추장 붉은 구름(Red Cloud)의 지휘로 병사와 건설 인부를 무차별 공격 했고, 이후 그 도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사건 사흘 후의 장면, 전장에 여러 구의 시신 중 일부가 담요에 싸여있다.)


1850년에서 1880년 사이 캘리포니아에서는 민간인이 거의 5000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을 살해했다. 이러한 행위는 가난이나 질병과 더불어 캘리포니아의 원주민 인구가 남북전쟁 이전 15만 명에서 1870년 3만 명으로 줄어들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 1867년에 일련의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인디언과 빚은 갈등은 일시적인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요인이 등장해 또 다시 평화를 깨뜨렸고, 1876년 리틀 빅혼(Little Bighorn) 전투로 이어졌다. 원주민은 약 25000명에 달하는 전례 없는 대부대를 이루어 커스터 대령 휘하 연대를 기습 포위해 몰살시키는 전과도 새웠지만, 단합한 전사를 하나로 유지할 만한 정치조직이나 물자가 없었기에 추적을 피해 무리지어 달아나거나 식량을 찾아 흩어졌고, 미국 군대는 그들을 하나씩 추격했다. 미국 군대는 그들을 다코타로 돌려보냈고, 수족은 이내 힘을 잃고 패배를 인정하여 보호구역에 정착했다.

(운디드니 사망자들의 집단묘지. 사건이 일어난 지 몇일 뒤인 1891년 1월 1일에 묻었다고 한다.)


아무튼 원주민을 대상으로 한 수십 년에 걸친 전쟁과 정부의 탄압은 서부에 남아 있던 원주민 인구를 격감시켰다. 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종교적 대상이기도 했던 버펄로도 원래 6천만에서 1억 마리였으나, 1889년에는 100마리도 안 남을 정도로 그 수가 줄어 원주민과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되었다. 같은 종족의 죽음과 영토의 강탈, 자신들의 파괴된 생활방식을 애도하기 위해 원주민들은 ‘고스트댄스(교령춤)’라는 새로운 영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이 의식은 백인 침략자에게 살해당한 모든 원주민과 버펄로의 부활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원주민의 그런 활동 및 의식행위는 자신들의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에서부터였다.

당연히 미 정부는 이 고스트댄스를 백인 개척민들 두렵게 만드는 야만적 행위라고 낙인을 찍고 이를 금지했다. 수우족의 이 의식을 목격한 사우스다코타의 파인리지 보호구역에 있는 백인 관리인이 “인디언들이 눈 위에서 춤춘다, 그들은 미쳐버렸다. 우리는 보호가 필요하다”는 전보를 워싱턴으로 보냈다. 미 정부는 수우족의 고스트댄서들을 검거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군인들이 두려웠던 350명의 오글라라 수우족들은 식량과 피난처, 말을 주기로 약속했던 추장 레드 클라우드의 보호를 찾아 빅풋의 인도로 배드랜드를 거쳐 가는 242km의 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운디드니 강 근처에 피난처를 마련했는데 이미 500명의 군인들이 이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에서 나온 운디드니 학살.)


운디드니 강 근처에 세운 원주민들의 피난처를 발견한 미군은 그곳을 포위하여 수색했다. 미군은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압수하고자 했는데, 그 총을 내놓지 않던 원주민 한명이 병사 한 명을 사살하자, 미군들은 원주민들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과 대포를 발포했다. 운디드니 학살은 대략 30분 동안 일어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대략 300명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와 유아를 학살했다. 운디드니는 지옥으로 변했다. 죽고 다친 여자들과 어린이, 그리고 아기들이 사방에 널려있었고 포탄에 맞아 갈기갈기 찢긴 사람들도 있었다. 살아남은 원주민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한 아기는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있는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민중사의 저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자신의 책 미국민중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디언들은 서부의 평원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1890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미 육군 병사들이 사우스다코타 주의 운디드니에 있는 인디언 막사를 습격해 300명의 남성과 여성, 어린이를 살해했다. 이 학살은 콜럼버스와 함께 시작된 400년간의 폭력 중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이로써 이 대륙은 백인들의 소유임이 굳어졌다.”

 

학살이 끝난 몇일 뒤인 1891년 1월 1일 민간인으로 구성된 매장반이 시체 매장을 위해 학살 현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눈 속에서 146구의 시신을 찾아 커다란 구덩이 안에 던져버렸고 일당으로 시신 한 구당 2불씩 받았다. 운디드니 학살을 기점으로 마침내 원주민들의 평원은 미제국에 의해 정복되었고 서부의 식민지화는 끝이났다. 하워드 진의 말대로 콜럼버스와 함께 시작된 400년간의 폭력의 정점을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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