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디드니 학살(Wounded Knee Massacre)


1850년대에서 1880년대까지 원주민과 백인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백인세력들이 원주민 문명에 가하는 위협이 점점 커지자, 원주민들도 이에 저항했던 것이다. 원주민들의 공격은 주로 백인들의 공격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 이런 소규모 교전 및 전투가 크게 비화되기도 했는데, 남북전쟁 중에 미네소타 주의 동부 수(Sioux) 부족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던 것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운디드니 전장에서 말을 탄 버팔로 빌 대위, 볼드윈 장군, 넬슨 A. 마일즈 대위, 모스와 기타 인물들)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백인 군대는 서부 원주민들과 여러 전선에서 맞부딪쳤다. 가장 치열하고 장기적인 전투는 몬태나에서 벌어졌는데, 미육군은 당시 와이오밍 주의 래러미 요새(Fort Laranie)와 새로운 광산 중심지를 연결한 보즈먼 도로(Bozeman Trail)를 건설하려던 참이었다. 서부에 있던 수족은 백인 군대가 자신의 땅인 버펄로 방목지 중심부를 침입한 것에 분노했다. 원주민들은 위대한 추장 붉은 구름(Red Cloud)의 지휘로 병사와 건설 인부를 무차별 공격 했고, 이후 그 도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사건 사흘 후의 장면, 전장에 여러 구의 시신 중 일부가 담요에 싸여있다.)


1850년에서 1880년 사이 캘리포니아에서는 민간인이 거의 5000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을 살해했다. 이러한 행위는 가난이나 질병과 더불어 캘리포니아의 원주민 인구가 남북전쟁 이전 15만 명에서 1870년 3만 명으로 줄어들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 1867년에 일련의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인디언과 빚은 갈등은 일시적인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요인이 등장해 또 다시 평화를 깨뜨렸고, 1876년 리틀 빅혼(Little Bighorn) 전투로 이어졌다. 원주민은 약 25000명에 달하는 전례 없는 대부대를 이루어 커스터 대령 휘하 연대를 기습 포위해 몰살시키는 전과도 새웠지만, 단합한 전사를 하나로 유지할 만한 정치조직이나 물자가 없었기에 추적을 피해 무리지어 달아나거나 식량을 찾아 흩어졌고, 미국 군대는 그들을 하나씩 추격했다. 미국 군대는 그들을 다코타로 돌려보냈고, 수족은 이내 힘을 잃고 패배를 인정하여 보호구역에 정착했다.

(운디드니 사망자들의 집단묘지. 사건이 일어난 지 몇일 뒤인 1891년 1월 1일에 묻었다고 한다.)


아무튼 원주민을 대상으로 한 수십 년에 걸친 전쟁과 정부의 탄압은 서부에 남아 있던 원주민 인구를 격감시켰다. 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종교적 대상이기도 했던 버펄로도 원래 6천만에서 1억 마리였으나, 1889년에는 100마리도 안 남을 정도로 그 수가 줄어 원주민과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되었다. 같은 종족의 죽음과 영토의 강탈, 자신들의 파괴된 생활방식을 애도하기 위해 원주민들은 ‘고스트댄스(교령춤)’라는 새로운 영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이 의식은 백인 침략자에게 살해당한 모든 원주민과 버펄로의 부활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원주민의 그런 활동 및 의식행위는 자신들의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에서부터였다.

당연히 미 정부는 이 고스트댄스를 백인 개척민들 두렵게 만드는 야만적 행위라고 낙인을 찍고 이를 금지했다. 수우족의 이 의식을 목격한 사우스다코타의 파인리지 보호구역에 있는 백인 관리인이 “인디언들이 눈 위에서 춤춘다, 그들은 미쳐버렸다. 우리는 보호가 필요하다”는 전보를 워싱턴으로 보냈다. 미 정부는 수우족의 고스트댄서들을 검거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군인들이 두려웠던 350명의 오글라라 수우족들은 식량과 피난처, 말을 주기로 약속했던 추장 레드 클라우드의 보호를 찾아 빅풋의 인도로 배드랜드를 거쳐 가는 242km의 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운디드니 강 근처에 피난처를 마련했는데 이미 500명의 군인들이 이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에서 나온 운디드니 학살.)


운디드니 강 근처에 세운 원주민들의 피난처를 발견한 미군은 그곳을 포위하여 수색했다. 미군은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압수하고자 했는데, 그 총을 내놓지 않던 원주민 한명이 병사 한 명을 사살하자, 미군들은 원주민들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과 대포를 발포했다. 운디드니 학살은 대략 30분 동안 일어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대략 300명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와 유아를 학살했다. 운디드니는 지옥으로 변했다. 죽고 다친 여자들과 어린이, 그리고 아기들이 사방에 널려있었고 포탄에 맞아 갈기갈기 찢긴 사람들도 있었다. 살아남은 원주민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한 아기는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있는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민중사의 저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자신의 책 미국민중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디언들은 서부의 평원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1890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미 육군 병사들이 사우스다코타 주의 운디드니에 있는 인디언 막사를 습격해 300명의 남성과 여성, 어린이를 살해했다. 이 학살은 콜럼버스와 함께 시작된 400년간의 폭력 중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이로써 이 대륙은 백인들의 소유임이 굳어졌다.”

 

학살이 끝난 몇일 뒤인 1891년 1월 1일 민간인으로 구성된 매장반이 시체 매장을 위해 학살 현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눈 속에서 146구의 시신을 찾아 커다란 구덩이 안에 던져버렸고 일당으로 시신 한 구당 2불씩 받았다. 운디드니 학살을 기점으로 마침내 원주민들의 평원은 미제국에 의해 정복되었고 서부의 식민지화는 끝이났다. 하워드 진의 말대로 콜럼버스와 함께 시작된 400년간의 폭력의 정점을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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