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문제적 인간 1
장 마생 지음, 최갑수 머리말, 양희영 옮김 / 교양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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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월 자유한국당(현재는 미래통합당) 대표인 홍준표가 대통령인 문재인에 빗대어 한국판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가 폭주하는 세상을 언제까지 계속 방관해야 하는지 자문해 본다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홍중표는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들먹이며 경제정책도 로베스피에르가 취했던 방식 그대로 시장의 기능을 무시하고 국가 갑질 경제, 국가 간섭 경제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프랑스 혁명 정부가 폭망한 그 길을 그대로 가고 있다라는 망발에 가까운 주장을 했었다. 더 나아가 그는 프랑스 혁명의 귀결이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온건 보수파가 완성했듯이, 한국판 로베스피에르가 폭주하는 세상을 언제까지 계속 방관해야 하는지 자문해 본다라는 막말로 입장을 마무리했다.

 

안 좋은 의미로 사용된 사례지만 수구세력의 연합체인 자유한국당 그것도 그 당의 대표를 맡는 사람 입에서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써 로베스피에르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인 로베스피에르는 매우 안 좋은 의미로써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명가 로베스피에르가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이유가 있다. 그는 1789714일 민중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됐을 때부터,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기요틴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오로지 민중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출판된 세계사 교과서를 보면 로베스피에르에 관한 서술은 그리 자세하지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민중이 봉기했다는 사실에는 강조하지만, 로베스피에르와 그가 이끌던 자코뱅에 대해선 독재나 처형이라는 수식어로 일괄하는 것이 한국에 나온 대다수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이다. 이것은 소위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반영받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봉건 귀족에 반감을 품고 있던 부르주아 세력들이 주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봉건 귀족에 반대한 이유에는 본인들의 부르주아적 이익을 확장하기 위함이라는 주목적이 있었다. 이런 부르주아의 열망에 찬물을 제대로 끼얹은 사람이 바로 로베스피에르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지금 기준으로 봐도 매우 진보적인 가치들을 지향했다. 그는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이 절대적으로 금기시했던 흑인 노예제와 식민지화에 대한 구제국주의적 움직임에 분명히 반발했고, 소위 소수민족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인권과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유럽 전역에 국가 없이 떠돌며 살고있는 유대인들의 권리를 주장했고, 옹호했다. 17929월 의회에서 식민지 문제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식민지 탄압에 대해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1752년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연설은 그가 노예제와 식민지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법령 중 하나에서 여러분이 노예라는 단어를 말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스스로 명예를 훼손하게 될 것입니다. 국민과 식민지들의 최상의 이익은 여러분이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는 것, 그리고 자유의 토대를 여러분 자신의 손으로 뒤엎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복, 여러분의 영광, 여러분의 자유를 대가로 치르며 분투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식민자들이 우리를 위협하여 강제로 자신들의 이익에 가장 적합한 것을 법령화하게 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나는 의회의 이름으로 헌법의 전복유 원하지 않는 의원들의 이름으로, 자유록기를 원하는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우리가 식민지 대표들을 위해 국민도, 식민지들도, 인류 전체도 희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출처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152~153

 

자코뱅 독재 시기 로베스피에르는 생쥐스트가 주장하던 방토즈 법 즉 유죄를 선고받은 반혁명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는 방토즈 법을 통해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반혁명 분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자 했다. 아쉽게도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업적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우선 당대로서는 보기 드물 만틈 아주 대담하게 모든 사람의 노동권을 주장했다. 그는 권리의 평등을 원했고, 지나친 재산 축적이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노동권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권리의 평등을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자유도, 사회적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재산에 대해서는, 일단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노동을 통해 생필품과 식량을 확보할 수만 있게 해준다면 자유의 벗들은 재산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티테스는 크라수스의 보물들을 시샘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수하고 성숙한 사람들에게 아리스티데스는 크라수스의 보물들보다 훨씬 더 소중한 재산이다. 재산은 흔히 타락으로 이어지므로 그것을 잃은 사람들보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해로운 것이다.”

 

출처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278

 

노동권에 대한 그의 발언은 그가 부르주아나 봉건 왕조로부터 착취받던 민중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사설이나 교과서들은 프랑스 혁명이 결과적으로 봉건세력의 잔재인 루이 16세와 그 일당들을 숙청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루이 16세를 처형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라는 점을 크게 강조하지는 않는다. 로베스피에르는 철저히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괴롭히는 루이 16세를 처형하고자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로 루이 16세와 그 일당들이 처형당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몸소 증언한다.

 

인류의 눈으로 볼 때 그보다 더 파렴치한 자도 없습니다. 그는 오직 그보다 더 비겁한 자들에게만 경외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의 유용성입니까? 그것은 더 서둘러 그를 처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 왕이라는 이 비루한 개인이 민중에게 왜 중요합니까? 의원 여러분, 민중에게 중요한 것, 여러분 자신에게 중요한 것, 그것은 민중의 신뢰가 여러분에게 부과한 임무를 여러분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었습니까? 공화국, 그리고 루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나는 이 치명적인 진실을 마지못해 선언하지만, 조국이 살아야 하므로 루이는 죽어야 합니다.”

 

출처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368~369

 

1793421일 그는 자코뱅 클럽에서 자신이 작성한 인권 선언 초안을 낭독했는데, 그가 낭독한 36개 조항에는 19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의 헌장이 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하고, 그가 얼마나 진보적인 가치들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36개 조항을 다 옮기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들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이 지닌 자연적이고 시효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 자연권의 유지와 인간의 모든 능력의 발전이다.

 

2조 인간의 중요한 권리들이란 그의 생존과 자유를 보존할 수 있게 해주는 권리들이다.

 

5조 자유는 인간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자신의 뜻대로 행사하는 힘이다. 자유는 정의를 모범으로, 타인의 권리를 한계로, 자연을 원칙으로, 그리고 법을 보호자로 삼는다.

 

10조 소유권은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의무에 의해 제한된다.

 

11조 소유권은 우리 동포들의 안전, 자유, 생존, 재산을 해칠 수 없다.

 

13조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든가, 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존 수단을 확보해줌으로써,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생계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18조 민중은 원한다면 자신의 정부를 바꾸고, 자신의 수임자들을 해임할 수 있다.

 

35조 자유와 진보를 방해하고 인간의 권리를 소멸시키기 위해 한민족에게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예사로운 적이 아니라 살인자이자 반도로 기소되어야 한다.

 

이처럼 로베스피에르가 작성한 인권 선언은 진보적인 가치들을 담고 있다. 처음에 상술한 홍준표와 같이 일각에서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비판하며 그의 시기를 폄하한다. 그러나 1793년 그와 자코뱅 세력들이 소위 혁명재판소를 창설하여 민중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과 부패한 이들을 단두대로 보내 처형한 행위는 순수히 민중의 염원을 따르고자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열망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민중과 하층민 가진 것 없는 이들 추방 당한 이들, 유대인과 노예를 위해 싸웠다. 책에서 나온 그의 연설들 대다수가 민중을 생각고자 하는 바람에서 나온 발언들이었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숙청되고 목숨을 잃은 건 사실이다. 소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기 수천 명이 단두대로 보내져 목이 잘렸다. 그러나 그의 공포정치 시기 로베스피에르는 자신과 지지세력들이 설정했던 목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소위 반혁명적 사상을 가진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에게 단두대라는 형벌을 끊임없이 내리기도 했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행동에 분노한 이들은 결국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생쥐스트, 쿠통과 더불어 그를 단두대로 보내 처형했지만 말이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은 민중을 위해 헌신한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의 열정과 혁명정신이 아주 많이 느껴지게 한다. 그가 했던 연설 곳곳에 민중에 대한 그의 휴머니즘적 사랑이 담겨있다. 자유주의자들이 독재자 혹은 악인으로 왜곡해온 로베스피에르의 진실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명저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혁명과정에서 민중을 위해 고군분투할 때, 혁명을 두려워했던 유럽의 봉건 국가들이 혁명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소위 대프랑스 동맹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영국 등은 프랑스를 대상으로 전쟁을 벌였다. 여기서 프랑스는 이 반동의 무리들이 저지르는 침략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정복전쟁을 하기 전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전시 상태에 있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휴머니스트 로베스피에르의 진심어린 혁명정신과 민중애를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많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마지막으로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한 연설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여러분의 주권자는 민중입니다. 끊임없어 그들을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는, 야만적이며 타락한 존재로 부름으로써 그들을 중상하고 모독하는 일을 그만둡시다. 정의롭지 않고 부패한 자들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민중의 권력을 부유한 특권계급에게 넘겨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선량하고, 인내심 강하고, 관대한 것은 민중입니다. 우리의 혁명이, 그리고 적들의 범죄가 그것을 입증합니다. 민중에게는 자연스러울 뿐인, 최근의 수천 가지 영웅적인 행동들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민중은 단지 평화, 정의, 그리고 생존권을 요구할 뿐입니다. 권력자들, 부자들은 차별, , 쾌락만을 갈망합니다. 민중의 이익과 소망은 천부의 것이며 인류의 것입니다. 그것은 보편적 이익입니다. 부자들의 이익과 소망은 야심, 탐욕, 기괴한 망상, 그리고 사회의 행복에 가장 치명적인 열망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민중의 비탄에 빠뜨린 폐해는 언제나 부자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민중에게는 재난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누가 우리의 영광스러운 혁명을 수행했습니까? 부자들입니까? 권력자들입니까? 민중만이 혁명을 열망할 수 있었고 혁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민중만이 한결같은 이성에 의해 혁명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민중이 다시 쟁취한 권리를 민중으로부터 강탈할 것을 우리에게 제안한단 말입니까?

 

사람들은 국민을 두 계급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그중 한 계급은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는 다른 한 계급을, 오직 그 계급을 제압할 목적으로만 무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첫 번째 계급은 모든 독재자들, 모든 압제자들, 모든 공공의 흡혈귀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계급은 민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민중이 자유에 위협이 된다고 말합니다. ! 여러분이 만약 민중에게 자유를 맡긴다면 민중은 자유의 가장 튼튼한 벋짐목이 될 것입니다. 부당한 힘으로, 말하자면 민중을 절망에 빠뜨려 그들이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대의를 배신하도록 만들려는 자들은, 잔인하고 야심에 찬 궤변가들인,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니 인류의 신성한 권리에 대한 요구를 결코 중단하지 않을 민중을 더는 비난하지 마십시오!”

 

출처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13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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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 볼셰비키가 줄곧 그 필요성을 역설해 왔던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완수되었습니다. 이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특히 이 격변의 의의는, 우리가 부르주아의 참여 없이 소비에트 정부를 우리 자신의 권력 기관으로 갖게 되리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피억압 대중이 스스로 그들의 권력을 창출할 것입니다. 옛 국가 기구는 철저히 파괴될 것이며, 새로운 행정 기구가 소비에트 조직의 형태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 연설은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스몰니 대학교에서 레닌이 했던 연설이다. 1917년 10월 혁명을 통해 인류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위대한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혁명 러시아에서 여러 가지 진보적인 업적들을 달성했다. 비록 잠깐이긴 했지만, 10월 혁명 이후 혁명 러시아에선 매우 진보적인 정책들이 행해졌다. 노동자들에게 식량이 우선 공급되었고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다. 지주 소유의 토지가 사라졌으며, 신분과 호칭이 완전히 폐지되고 모든 러시아 주민이 인민이 되었다. 인종차별과 같은 악법은 폐지되었고 혁명 이후로 인종차별이 웬만큼 사라졌다. 여성은 사회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했다. 사형제가 폐지되었고 심지어 동성결혼이 합법화 되었다. 당시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 혁명 러시아에선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했던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룩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1918년 백군 반동들을 돕기 위해 제국주의 열강이 침략을 감행하면서 레닌과 볼셰비키는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과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은 그 전쟁에서 보인 사민당과 제2 인터내셔널의 배신적 행위에 실망하여 그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했지만, 적백내전의 경우 달랐다. 이것은 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하고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볼셰비키로써는 당연히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일각에서는 적백내전 당시 레닌과 볼셰비키가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창성했던 경찰조직 ‘체카(Cheka)’의 폭력성을 지적하며, 레닌의 무자비함과 잔인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적백내전 시기 볼셰비키가 맞서 싸우던 백군은 분명히 반혁명·반동세력이었다. 이들은 로마노프 왕조 이래로 300년간 민중을 착취해오고 탄압해오던 반동들이었다. 거기다 백군반동들은 러시아 곳곳에서 볼셰비키를 축출하기 위한 백색테러 행위에 착수했다. 당시 지도부에 있던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등을 포함한 볼셰비키 인사들은 그러한 테러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레닌 또한 총에 맞아 총알이 몸에 박히는 불행을 겪었다.

따라서 체카는 이런 반혁명적 반동세력들에 맞서 싸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볼셰비키의 노력으로 혁명군대 적군은 러시아 전역에서 백군 반동 세력들과 제국주의 세력들을 몰아낼 수 있었고, 1920년에서 1921년에 사실상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전이 불러온 피해는 크론슈타트 수병의 반란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동반했다. 여기서 레닌은 ‘전시 공산주의(War Communism)’를 포기하고 소위 신경제정책(NEP)를 실행했다. 사실 레닌이 집권하던 시기 러시아의 경제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특히 적백내전 시기에는 제정 러시아의 경제 상황보다 더 안좋았다. 내전에서 발생한 기근으로 수백만이 아사했다.

비록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이 집권하던 1920년대는 참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궁극적으로 레닌이 민중에게 심어준 진보와 혁명사회를 향한 꿈은 지금도 사회주의를 꿈꾸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의 착취와 인권유린에 반대하여 일어난 혁명이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는 자본주의적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보여주듯이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미국은 전세계의 경제를 달러를 통해 휘어잡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돈이 없으면 치료나 진료검사를 받지 못하는 사회다. 소위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바로 그러한 사회다. 이런점에 있어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레닌 동지가 혁명 러시아를 탄생시키며 추구했던 민중을 위한 정책들은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진보적인 정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이 블라디미르 레닌 동지의 사상을 공부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오늘로써 블라디미르 레닌 동지가 탄생한 지 150년이 됐다. 우리 역사로 보자면 그는 신미양요가 일어나기 1년 전인 조선 말기에 태어난 인물이다. 그때문인지는 몰라도 일각에서는 그의 사상이 나이브하다고 하며 마치 현재 사회에는 적용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치부한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를 진리인냥 받들어 모신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위에서 상술한 자본주의 국가 미국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탄생한지 150주년인 오늘은 참으로 의미있는 날이다. 오늘따라 블라디미르 레닌 동지가 너무나도 보고 싶다. 4년 전 모스크바를 방문하며 내 두 눈으로 직접 봤던 그가 생각이 난다. 혁명가 레닌을 다시 생각하며, 그가 꿈꾸던 세상을 이루겠노라고 다시 한번 다짐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블라디미르 레닌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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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제국주의 침략과 학살의 역사

  

1492년 소위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알려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er Columbus)는 미국인들에게 있어 영웅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통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했고, 그 결과 미국이 탄생했다는 믿음을 미국인들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콜럼버스의 이미지는 세계사 교육이 미약한 한국인들에게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경우가 다분하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보면 미국인들이 찬양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무수히 많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에로 삼았던 침략자이자 제국주의자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난다.

 

1451년 이탈리아 제노바 근처에서 양모 직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행적은 1477년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장인이 선장이었던 콜럼버스는 바다 지도를 제작하는 일에 종사했고, 그 과정에서 항해술을 배웠다. 1484년부터 콜럼버스는 동생과 함께 항해에 들어갈 비용을 댈 후원자를 찾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후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격던 중 스페인으로 건너가 이세발 여왕(Queen Isabel)을 만났고, 비록 몇 번의 거절을 당했지만, 1492년에 뜻을 이루게 됐다. 당시 스페인의 이세벨라 여왕은 해외 진출에 관심이 많았기에 콜럼버스를 후원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소위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는데, 이계약이 바로 산타페 계약(Santa Fe)’이다.

 

149283일 스페인 팔로스 항을 출발한 콜럼버스 일행은 120명의 선원과 3척의 배를 동원했다. 이들은 1년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양의 보급품도 실었고, 인도를 찾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서쪽으로 향해 계속했다. 14921012일 항해를 시작한 지 약 70일이 지났을 무렵 그들은 바하마 군도에 상륙했다. 바하마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그 섬의 이름을 서인도제도(West Indies)라고 붙였고, 거기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인도사람이라고 하여 인디언(Indian)’이란 의미에서 인디오(Indio)’라고 붙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들에게 보답해 준 것은 학살과 노예화 뿐이었다. 그는 원주민을 보았을 때부터 그들을 노예로 삼을 생각을 했다. 아라와크족(Arawaks)이 마을에서 나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들을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그들은 앵무새와 솜뭉치, 창 외에도 많은 물건을 가져와서 유리구슬이나 매종(사냥용 매의 다리에 묶는 종)과 바꿨다.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물건들을 기꺼이 교환했다. 그들은 탄탄한 체구에 잘생긴 외모를 지닌 건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무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내가 칼 한 자루를 보여주자 아무 생각 없이 칼낳을 쥐다가 손을 베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철이 없다. 이들의 창은 막대기에 불과하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 50명만 있으면 이들 모두를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미국민중사 I p.15

 

당시 콜럼버스가 무엇보다도 원했던 정보는 황금의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기에 맨손으로 갈 수가 없어 원주민들을 납치하고 포로로 붙잡아 배에 태운 뒤,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스페인 마드리드 궁정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터무니 없는 과장된 내용을 보고했다. 콜럼버스는 이사벨라 여왕에게 아시아와 중국 연안의 한 섬에 도착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허구였고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런 과장 및 왜곡 보도를 하면서 자신들이 포로로 붙잡았던 원주민에 대해서도 보고를 올렸고, 그 대가로 다음 항해에서 필요한 만큼의 황금과 원하는 만큼의 노예를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다음항해에서 콜럼버스는 17척의 배와 200여 명의 선원을 투입하여 노예와 황금을 가져오기 위해 서쪽으로 항해를 했다. 그들은 카리브 해의 섬들을 차례로 돌며 원주민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콜럼버스의 선원들은 무리지어 돌아다니며 황금을 약탈하고 여자와 어린이들을 성적 노리개와 노예로 사로잡았다. 현재 아이티 섬 근처에 근거지를 마련한 콜럼버스는 1495년 대규모 노예사냥에 나섰다. 그들은 아라와크족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 1500명을 스페인인들과 개들이 지키고 있는 우리 안으로 몰아넣은 뒤,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500명을 골라 배에 실었다. 이들 가운데 200명이 항해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훗날 콜럼버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팔 수 있는 모든 노예를 계속 잡아 보냅시다라고 하며 기록을 남겼다.

 

콜럼버스와 선원들은 거대한 금광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아이티의 시카오 지방에서, 14세 이상의 원주민 모두에게 석달마다 일정한 양의 금을 모아오라고 명령했다. 금을 발견하면 구리표식을 달아줬지만, 그게 없는 원주민들은 발견되는 즉시 두 발이 잘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곳에도 황금 덩어리는 없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도망쳤으며, 그 과정에서 사냥개를 대동한 선원들에게 붙잡혀 죽어갔다. 이에 분노한 아라와크족은 저항군을 모아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스페인인들에 맞섰는데, 스페인인들은 사로잡은 포로의 목을 매달거나 불태워 죽였다. 이런 콜럼버스의 학살과 수족절단으로 인해 아이티의 원주민 25만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498년과 1501년 콜럼버스는 다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제3, 4차의 항애세서 트리니다드섬과 베네수엘라 해안 그리고 파나마 일대를 탐색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의 북미대륙을 다녀온 이후로부터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는 아메리카 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원주민들이 서양인들에 의해 탄압받고 학살당했고, 지배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미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으며, 스페인 왕실에 거짓 보고까지 해간 인물이었다.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신대륙 개척자로 인식되고 있는 인물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토착 원주민들에게 있어서 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2009년 당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었던 우고 차베스(Hugo Chavez)콜럼버스의 날로 지정된 1012일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꿈으로써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았었다. 신대륙 발견 이후 무수히 많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일삼았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제는 그가 저질렀던 잔혹한 침략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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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기를 들고 행진하는 일본군)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정복 야욕을 드러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777일 베이징의 서남 교외의 노구교에서 총성이 울렸는데, 일본은 이를 빌미로 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중일전쟁을 시작하게 된 일본은 자국의 군대를 중국 대륙에 파견했고, 그해 813일에는 상하이까지 전쟁이 확대됐다. 당시 중국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내전을 중단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지만,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난징에 입성한 일본군 탱크)

 

그해 11월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도자 장제스는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이전하고, 일본군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에 도달한 일본군은 19371213일 난징의 청부청사가 함락되면서 일본군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난징을 완벽히 점령한 일본군은 이 시점부터 약 2개월 동안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거나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잔인한 학살과 강간등의 전쟁 범죄를 자행했다. 당연히 이러한 전쟁범죄는 당시 일본군의 주도로 이어졌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난징에 입성하여 행진하는 일본군)

 

당시 일본군이 했던 전쟁범죄들중 대표적인 것을 언급하자면 중국군 포로나 민간인들의 목베기 시합을 들 수 있다. 당시 일본군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가 10명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나 재는 시합, ‘100인 참수경쟁을 한 사실이 있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은 이러한 전쟁범죄가 당시 일본의 언론에 의해 스포츠 특보마냥 대서특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외에도 300인 베기에 도전한 다나카 군키치라는 범죄자도 존재했고, 이런 식으로 무수히 많은 전쟁 포로와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목베기 시합에서 희생됐다.

(파놓은 땅에다 몰아넣고 중국인을 학살하는 일본군)

  

2개월간의 과정속에서 일본군의 전쟁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런 피해에 있어서 중국인 여성들 또한 무수히 많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다. 수만 명에 달하는 중국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고, 이에 반항하면 일본군들은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난징 지역 곳곳에서 일본군의 강간과 살인 학살 그리고 방화가 지속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기 전 전투기들로 난징 전역을 무차별 폭격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만들었다

(목을 배놓고 기뻐하는 일본군)

 

이러한 학살이 계속되자 당시 나치당원이던 존 라베(John Rabe)를 포함하여 난징에 있던 외국인들은 난징 국제안전지대를 설정하여 일본군의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존 라베와 같은 외국인 선교사, 기업과 그리고 외교관들은 이미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상하이 안전구를 본떠서 안전지대를 형성했고, 대략 25만 명 이상이 중국인이 이 피난처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보도된 중국인 목베기 시합 기사)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이른바 도쿄 재판 판결에 따르면 중일전쟁 초기 일본군이 저지른 난징대학살로 인해서 살해된 사람은 비전투원 12000,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 시민 5만 명 등을 합하여 13만 명이 살해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최소 20~3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결론내려졌다. 수치의 정확성을 떠나서 수십만명의 중국인이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에 의해 죽었고, 이러한 전쟁 범죄에 대해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난징 대학살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중국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을 전개했다. 이 결과 총 150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중일전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얘기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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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단상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공부하면, 일각에서 알려진 수천만명 학살자의 이미지는 지극히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과장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2천만을 죽였네˝, ˝4천만을 죽였네˝와 같우 소리가 인터넷과 유튜브에 떠돌고 하루에 4천명 혹은 한달에 4만명씩 학살했다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도 들리지만, 지극히 악마화된 수치다.

1980년대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공개된 자료들에 따르면 1939년 당시 노동수용소와 이주지, 구치소에 수용된 인원은 약 200만 명이었고 그중 실제 정치범은 45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937년에서 1939년 사이에 노동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은 영미권 보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300만에 훨씬 못 미치는 16만 명이었으며, 그 기간에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도 수백 만이 아닌 약 10만 명이었다. 굴라그 수감자도 최대가 250만이었고, 이것은 1990년대 미국의 감옥보다 300만이나 적은 수치다. 즉 솔제니친 같은 허장성세들이 거시적인 측면에서 최소 10배 이상은 과장한 것이다.

물론 스탈린 또한 대숙청 도중 과오도 있었고, 무고한 희생도 있었다. 근데 왜 이러한 과오가 있음에도 우익들과 수꼴들은 만족하지 않는걸까? 그것은 본인들이 얘기하고 싶어하는 ˝악마새끼 스탈린˝의 이미지에는 뭔가 부적합한 수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평가는 그렇다 쳐도 그가 이룩한 무상 복지체제만큼은 세계적인 업적이고 재평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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