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과 이승만, 본인 스스로 백두산 호랑이라 칭하던 김종원은 이승만과 각별한 사이였다. 이승만이 말하는 애국이란 이런 학살자들과 친일파들을 앞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과 우익들이 저지른 양민 학살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10만 명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했고, 한국전쟁에서만 대략 70만 많게는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국민 보도연맹 학살만 하더라도 최소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이승만과 그 지지 세력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는 지리산에서는 1948년 여순항쟁 시점부터 소위 빨치산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여순항쟁 이후 빨치산이 게릴라전을 벌인 이유는 분명했다. 이승만과 미국이 여수와 순천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대량 학살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파푸아뉴기니 전투에 참전했던 김종원은 1948년 여순항쟁 당시, 진압군을 지휘한 김종원은 여수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 민간인들을 뫃아놓고 온갖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 그는 직접 나서서, 일본도로 민간인의 목을 즐겨 벳고, 베다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민간인들을 쏘아 죽였다. 당시 증언자의 말에 따르면, 김종원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들을 했었던 것이다.
(최덕신, 광복군 및 중국 국민당군 출신으로 1951년 거창양민 학살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 시절 독재정권에 반대했으며, 더 나아가 1980년대에 월북했다.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같은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전역에서는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우익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이후 서울을 탈환하고 나서도 소위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분하에 이승만 정부는 또 다시 천인공노할 학살을 자행했고, 38선을 돌파하여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도 양민 학살을 저질렀다. 이러한 양민 학살은 한국전쟁 기간 내내 발생했으며, 특히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지리산 지역에서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자행됐다. 1951년 중공군과 인민군이 서울을 다시 재점령하며, 한국군과 유엔군에게 반격을 하던 시기, 또 다른 양민학살이 한국군과 우익들에 자행됐다. 그것이 바로 거창양민 학살 사건이다.
(거창양민 학살 당시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의 시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지리산 일대로 숨었고, 노령산맥의 줄기를 따라 순창·정읍·남원·장성·구례등 호남일대와 거창·산청·함양·합천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한국군의 단독적인 38선 돌파 이후 이승만 정부는 10월 2일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육군 제11사단을 창설했고, 빨치산 출몰 지역에서 토벌에 나섰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자, 숨어있던 빨치산들은 신원지서를 습격했었으며 이에 따라 경찰과 군인 몇 명이 사살되기도 했다.
(학살을 나타낸 박물관에 있는 모형)
이에 따라 한국군은 거창과 함양·산청 등 지리산 남부지역에서 이른바 공비소탕작전을 펴기로 했고, 2월부터 본격적인 토벌에 들어갔다. 1950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한국군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빨치산을 소탕한다며 진입했고, 인근 지역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에 집결시켰다. 여기서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모두 박산골로 끌고 가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 죽은 시체 위에는 솔가지를 덮고 휘발류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 동시에 마을 집들도 모두 불태웠다. 놀랍게도 이러한 전략은 만주에서 일본군이 했던 전략이고, 그리스에서 미군사고문단과 왕당파들이 했던 전략이며, 제주 4.3 항쟁 당시 한국군이 했던 전략이다. 또한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했던 전략이기도 하다.
거창에서만 719명이 학살당했다. 학살당한 이들은 전부다 죄없는 민간인들이었으며 아이, 노인,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심지어 1~2살짜리 갓난아기들도 학살당했다. 학살당한 이들의 인적구성을 보면 여성이 51.3%였고, 어린이와 청소년 45.3%, 60세 이상 노인 5%였다. 이외에도 산청·함양에서도 705명이 학살당했으며, 총 1,424명이 학살당했다. 학살을 자행한 한국군은 이 학살 사건을 은폐하려고 피해 현지와 외부의 왕래를 차단하고 생존주민에게 실상을 발설하는 자는 공비로 간주,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학살을 주도한 인물은 바로 최덕신이었다. 그는 이후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다가, 천도교 교령으로 활동하다가, 1986년에 월북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현재 경남 거창에 있는 희생자들 묘비)
그러나 한 달 후인 1951년 3월 학살 소식을 들은 신중목은 국회 본회의에서 “빨갱이 잡으라고 보낸 토벌대가 죄 없는 양민 500명을 살육했다.”고 폭로했으며, 조사단이 4월 6일 현지에 파견됐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는 이 사건을 덮으려고 했지만, 결코 덮지 못했다. 여순항쟁 당시 양민 학살에 앞장섰던 김종원도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병력을 빨치산으로 위장하여, 조사단에게 따발총(PPSH-41 소련제 기관단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철수하게 만들기도 했다.
진상조사 초기 이승만은 이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지만, 결국 진상조사를 실시했고, 오익경, 한동석 그리고 김종원에게 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총 책임자인 최덕신은 처벌받지 않았으며, 김종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됐으며, 징역을 선고받은 이들 모두 1년 내로 석방됐다. 이 사건이 다시 조명 받은 것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유족회가 결성되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한 번 침묵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며, 민주화 이후에 다시 조명됐다.
참고문헌
김삼웅, 『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0
임기상, 『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 인문서원, 2015
임종금, 『대한민국 악인열전』, 피플파워, 2016
손호철, 「'작전명령 5호'로 시작된 어린이·여성·노인 무차별 학살」, 『프레시안』, 2021.03.24.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2318150663165#0D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