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전쟁, 20년간 치른 제2의 베트남 전쟁

(메달오브아너 티어 1, 이 게임은 2010년 미국 EA 게임 회사에서 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의 전투를 다루고 있다. 게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군의 활약상을 주로 다룬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있기 2년 전 군사적인 침공을 개시했던 또 다른 나라가 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이다. 2020년 현재까지도 미국과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최빈국이자, 외세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고,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대략 40년간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다. 20세기 당시 영국의 지배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했던 아프가니스탄은 1973년까지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했었다. 1970년대부터 아프가니스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며, 그들을 대상으로 한 아프간 정부의 유혈진압과 폭력이 나타났다. 1978년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성공시켜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들은 남녀평등이나 토지 소유 제한 및 재분배와 같은 진보적인 정책들을 추구했고, 이것은 도리어 극보수적인 아프간 민중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반발이 아프간 내부의 유혈사태로 번졌고,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세력인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12 솔져스, 2018년에 국내에도 개봉했던 이 영화는 소위 애국주의로 가득차 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은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공격 헬기를 동원하여 전쟁을 전개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고전했던 것처럼 고전하기를 바랐고, 소련군에 맞서 저항하던 무자헤딘 세력들을 지원했다. 미국의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이 무자헤딘 세력을 돕고자 했고, CIA는 영국제 소총인 리엔필드 소총과 중국제 AK-47 소총, 알라의 요술봉이라고 불리는 RPG-7 대전차 로켓과 미국산 지대공 미사일인 스팅어 미사일까지 지원했다. 따라서 무자헤딘은 미국이 지원한 무기와 장비로 소련군에게 맞서 싸웠고, 소련군은 미국이 바랬듯이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이 전쟁에는 이후에 미국의 적이될 오사마 빈라덴도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소련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다.

(치누크 헬기에 탑승하는 미군)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에서 지쳐갔다. 1980년 6월 아프가니스탄의 팍티야주에선 소련군 1개 대대가 무자헤딘에게 섬멸당했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그랬듯이 수많은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공격헬기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포화 속에서 사라졌다. 1986에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병력이 11만 5000명까지 늘어났지만, 고르바초프는 철수를 발표했다. 1987년 한 해에만 소련 항공기 270대가 격추되었을 정도다. 결국 소련군은 연방이 해체되기 2년전인 198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자 당시 소련에 지원받던 공산주의자들과 더불어 1990년대에는 민족 갈등이 대두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내전이 발발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던 무자헤딘은 1990년대를 거치며 탈레반으로 거듭났다. 즉 그들이 탈레반이 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한 것이다. 1998년 탄자니아와 케냐에서 벌어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주동자로 빈 라덴이 지목되면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알카에다 근거지에 미사일 공격을 명령했다. 이를 시점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반미정서가 불붙기 시작했다.


21세기가 시작되던 2001년 미국에서는 충격과 공포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번지기 시작했다.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Al-Qaeda)가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항공기 테러를 가해서 최소 3000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게 만들자, 미국은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라덴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착수했다. 9.11 테러 2일 뒤인 9월 13일 미국의 부시 정부는 파키스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에게 탈레반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의 지원중단, 파키스탄 영공 통과와 이-착륙 백지 위임장을 요청했고, 파키스탄 대통령은 고심 끝에 이를 수락했다. 미국은 아프간 탈레반 정권에게 숨겨 놓은 오사마 빈라덴을 인도하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탈레반은 이를 거부하며 미국에게 증거를 제시하라 요구했다. 미국은 탈레반과의 협상은 불가하다는 견해만 거듭했고,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도널드 럼스펠드는 "아프간 동굴 속 테러리스트 수백 명을 찾아내겠다"라고 말했다.

(북부동맹,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반탈레반적 소수민족들과 군벌의 연합체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당시 몽족이나 산악부족 같은 소수민족을 이용했듯이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들을 이용했다.)


2001년 10월 7일 미국은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을 개시하여 아프가니스탐 침공을 시작했다. 미군은 폭격기와 미사일로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있는 탈레반의 주요 시설에 대규모 공습을 단행했고, 특수부대인 그린베레(Green Beret)는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반탈레반 소수민족 연합체인 ‘북부동맹(Northern Alliance)’과 연합하여 군사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조브레이커 팀이 이끄는 CIA 특수행동국 소속의 군사요원 110명, 미국 그린베레 특수부대원 300명 그리고 이들과 동맹을 맺은 수만 명의 북부동맹 병력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동원되었다. 10월 21일부터는 카불 북부에 위치한 탈레반 주둔지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었고, 11월까지는 대형 폭탄을 동원한 공습이 이어졌다. 즉 그러는 사이 북부동맹이 탈레반을 압박하여 수도 카불로 밀고 내려왔다.

(탈레반, 과거 이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소련군에 맞서 싸웠지만 2001년부터는 미국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2001년 12월 13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접경 산악지대인 토라보라에서 미군 특수부대가 오사마 빈 라덴 일행을 추적 중이었다. 미군이 토라보라 지역에서 급습하여 전투를 전개했을 때, 오사마 빈라덴과 그지지 세력 다수는 탈출하면서, 미국은 오사마 빈라덴을 체포하는 데 실패했다. 미군은 12월 4~7일까지 사흘간 폭격기를 동원하여 총 300톤가량의 폭탄을 투하했지만, 얻은 것은 없었다. 미국이 북부동맹과 연합하여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탈레반 세력이 약화되자 아프가니스탄은 혼란 상태에 빠지면서 군벌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다. 즉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 자신들에게 협력하는 정부를 세웠고, 미 공군은 수도 카불 북쪽에 있는 바그람에 공군기지를 세웠다. 그 정부의 병력들에게 무기를 지급했지만, 무기를 수령하자마자 언제 받을지 모르는 급여를 기다리지 않고 탈영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이런 상황을 틈타 세력 재건에 나서 3월엔 1000명이 넘는 병력 규모를 형성했다.

(아나콘다 작전 지도)


(아파치 헬기)


(메달오브아너 티어 아파치 헬기)


2002년 3월 2일 미군은 소위 ‘아나콘다 작전(Anaconda operations)’을 전개하여 탈레반과 알케에다 잔존세력을 섬멸하고자 했다. 아나콘다 작전을 미군이 전개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군벌들이 이 전투에 참여하였고, 미군은 아파치 공격헬기와 같은 최신식 전투 헬기를 사용하여 탈레반과 알카에다를 공격했다. 3월 18일에 아나콘다 작전은 끝이났는데, 샤히코트 계곡에 숨어든 800~1500명 이상의 탈레반과 알카에다 병사들이 전사했다. 미군 지휘부가 실제로 확인한 탈레반과 알카에다 병사 사살 숫자만 600명이 넘었다. 아나콘다 작전 이후 탈레반은 다시 미군의 공격에 대비해 세력을 모았다. 아프간 파슈툰주를 중심으로 탈레반의 소규모 훈련캠프가 꾸려졌고, 200명 정도였던 캠프의 규모는 점점 더 확장되었다. 거기다 미국은 2003년에 있을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문제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미군이 이라크에서 고전하고 있던 2005년 아프간에서는 군벌들이 지방을 완전히 장악해 중앙 정부의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2007년 탈레반 활동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미군)


(2010년 당시 아프가니스탄 파티카 지역에서 근무하는 미군병사)


2004년 미국의 예산지원 하에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35000명 정도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투능력은 지극히 의심스러운 수준이었고, 추가적으로 파키스탄에서 8만 명의 병력을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배치했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경계작전만을 수행했기 때문에 실제 탈레반이 파키스탄 국경을 통과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2004년 이후 수백여 건이 넘는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의 피해가 늘어나는 것과 동시에, 소위 알카에다 조직원이 은신하고 있는 이슬람 학교와 모스크를 공습하는 등, 전장의 모습은 악화되어갔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자살 공격은 2004년에 3건이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는데, 2005년에는 21건, 2006년에는 131건, 2007년에는 150건 2008년에는 142건이나 발생하며 숫자가 증가했다.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 병력 비교표)


탈레반 또한 세력을 확장하여 2007년이 되었을 때는 병력이 최소 1만 명까지 늘어났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다국적군의 공세가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은 조직 규모를 확장한 것이었다. 2007년 당시 추가적으로 3500명을 파병한 미국은 이라크 파병 숫자의 증가함과 더불어 아프가니스탄에 추가적인 병력 파병을 증가시켰다. 2007년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미군의 병력 숫자는 2만 6000명이었는데, 20008년 6월에는 4만 8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2008년 9월이 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파키스탄 영토까지 번졌다. 2008년 미군의 사망자 수는 113명을 기록했고, 탈레반은 나토의 전쟁물자와 자금을 공급하는 통로를 공격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주둔군 그래프)


2008년 선거운동에서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조속히 종결짓겠다고 공약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과는 달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필요한 전쟁(War of Necessity)’라고 평가했다. 2009년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추가공습을 승인하고, 지상전투 병력의 수를 늘렸다. 또한 그는 파키스탄에 대한 무인폭격기를 이용한 폭격과 기습공격을 확대해나갔다. 이렇게 해서 2013년까지 12년 동안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600역 달러라는 전쟁비용을 사용했다.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2009년 8월까지 4만 7000명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력은 6만 8천 명으로 확장했다. 다음해인 2010년에는 1월부터 7월에 걸쳐 3만 3000명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면서 아프가니스탄 미군 병력은 10만 명을 넘겼다. 미국 오바마 정부가 10만 명까지 병력을 증가하던 2010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가 격렬하게 일어났고, 그해에만 최소 5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지 9년이 지났음에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넵튠 스피어 작전 전개도)


 

(드론 전투기)


2011년 5월 1일 미국 특수부대인 네이비 씰(Navy Seal)은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 소재의 한 주택에 기습 작전을 실시해 9.11 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 2011년에 전개된 오사마 빈라덴 암살 작전인 ‘넵튠 스피어 작전(Operation Neptune Spear)’은 대통령 오바마를 포함한 미국 정치 인사들과 각료들이 생중계로 보면서 진행되었고, 그들은 오사마 빈라덴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작전을 승인한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전쟁지역이 아닌 파키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암살하는데, 사전에 파키스탄 정부에 어떠한 얘기나 허가 없이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파키스탄 정부의 체면을 망가뜨렸고, 파키스탄 국민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다. 2004년부터 2007년 그리고 2008년까지 부시 행정부는 파키스탄에서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대상에게 최신식 살상 무기인 드론을 이용한 공습을 실시했었는데,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드론 공격의 횟수는 급증했었다. 이 때문에 파키스탄의 사람들은 반미감정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에게 아무런 허락도 받지 않고, 오사마 빈라덴을 암살했으니 파키스탄 사람들 입장에선 미국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와 아프가니스탄, 부시 행정부에서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트럼프 집권기 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사마 빈라덴이 암살된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군 압력은 더더욱 높아졌다.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2011년 7월을 철수 개시 시점으로 하여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종결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점진적으로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2014년까지 전쟁을 종결시키지는 못했다. 거기다 2015년 10월 15일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철군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했다. 2015년 12월 22일 미군 사령부가 있는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자폭테러로 미군 6명이 전사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2016년 말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미군을 1000명까지 축소한다는 공약을 지키지 못했고, 8400명의 미군병력을 주둔시킨 채,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게 넘겼다. 2017년 6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놓고 고심 끝에 4000명의 병력을 증원하기로 해버렸다.

(2020년 도하합의, 결국 미국은 탈레반과 협상한 뒤 철수하기로 했다.)


미국이 지원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무능했다. 2018년 1월 기준으로 국토의 30%만 통제하고 있었고, 나머지 70%는 탈레반이 장악하거나 정기적으로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2018년 2월 8일 비행기 공습을 강화하려 탈레반에 화력을 집중했지만, 1주일 뒤인 2월 15일 탈레반 측에서 아프간 정부측에게 평화회담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 정부는 “미국은 탈레반이 평화회담에 나오는 것을 환영하지만, 그 전에 끔찍한 테러공격부터 중단해야 한다.”라고 밝혔기에 평화회담이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2018년에도 아프가니스탄 내에서의 전투는 계속되었고, 201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2019년 9월 미국과 탈레반은 협정을 조건부로 체결했고, 2020년 2월 29일 대략 20년간의 전쟁을 종지부를 찍는 ‘도하 합의’를 성사시켰다. 이 합의에서 미국은 “135일 이내로 아프가니스탄 주둔 병력을 8600명까지 줄인다는 것”과 “14개월 안에 미군을 포함한 국제동맹군을 모두 철군”하기로 합의를 봤다. 현재(2020년 2월 기준) 아프가니스탄에는 대략 13000명 정도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결국 미국은 탈레반과 협상하여 완벽히 철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20년간의 전쟁에서 미국이 최빈국인 아프가니스탄에게 패배한 것이다.

(킬 팀 사건, 2010년 5명의 미군은 민간인 3명을 죽인 것으로 재판을 받았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또한 미군의 전쟁범죄나 폭력이 존재했다. 2005년에는 2002년 바그람에서 아프간 포로 2명이 군검사관에게 가혹행위들 당한 채 숨졌지만, 미군범죄수사대가 이를 은폐하려 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었다. 2010년엔 ‘킬 팀 사건’이라 하여 재미삼아 민간인을 죽이고, 손가락을 전리품으로 보관하는 만행을 저지른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사들이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이 미군병사 5명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최소 3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는데, 이들은 증거인멸을 위해 현장에서 불을 지르는가 하면 반군을 정당하게 사살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한 희생자의 시체 옆에 AK-47 소총을 놓아두기도 했다. 2012년 1월에는 미해병대원 5명이 피흘리는 탈레반 시신 3구를 향해 집단으로 방뇨하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촬영되었었다. 2012년 3월 11일에는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주의 판지와이 구에서 미 육군 부사관 1명이 총기를 난사하여 어린이 9명을 포함한 16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201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 16명을 살해한 미 육군 소속 로버트 베일스 하사관의 사진.)

 

(탈레반 시신에 방뇨하는 미군 병사들)


그리고 20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죽어나갔다. 2001년 10월 16일 카불 시내에 위치한 국제 적십자사 구호소와 와지르 아크바한 병원이 미군의 폭격을 받았는데, 입원 중인 어린이 환자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미군의 폭격으로 최소 400명 이상이 사망했는데, 이 수치는 9.11 테러로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서 사망한 민간인 숫자를 상회하는 수치다. 유엔은 아프간에서 지난 2017년 동안 무장세력의 폭탄 공격과 미군 등의 공습으로 민간인 1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고 밝혔는데, 최소 수만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페이퍼, 1971년 대니얼 엘즈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 처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추악한 민낯이 2019년 이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이자 사회운동가 라폰, 2011년 20살의 나이로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이후 공산주의자가 된 뒤 불명예 재대를 하고 사회운동가가 되었다. 그는 2019년 아프가니스탄 페이퍼 관련해서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며 미국은 최소 2400명 이상이 전사하고 15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7천600억 달러를 사용했다. 2019년 12월 미국에서는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펜타곤 페이퍼(The Pantagon Papers)’를 전 세계에 공개하여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 밝혀졌듯이,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소위 ‘아프가니스탄 페이퍼(Afghanistan Papers)’라는 문건이 밝혀짐으로써 그 추악한 전쟁의 민낯이 드러났다. 대략 2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기밀 보고서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여했던 핵심 인사들을 포함한 400여명을 인터뷰한 내용이 담겼는데, 대부분이 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실패라고 인정했다. 또한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통계 조작 등의 방법으로 자국민들을 속였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희생은 “미국인들이 계속 속고 있었다는 결과”라고 보도했다. 과거 베트남에서 침략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그랬듯이 미국의 지배층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과 자명한 증거들을 숨겨가면서 장밋빛 전망들을 늘어놓았다”라고 워싱턴 포스트는 아프가니스탄 페이퍼를 폭로하면서 보도했다. 2019년 워싱턴포스트가 폭로한 아프가니스탄 페이퍼가 증명하듯이 아프가니스탄 전쟁 또한 베트남 전쟁처럼 미국 지배계급들의 거짓과 위선이 가득차 있다. 이렇게 추악한 미국의 침략전쟁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나서 끝나게 됐다. 결국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제2의 베트남 전쟁을 치르고 패배했다. 이것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의 교훈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는 역사적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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