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폐지 운동과 남북전쟁

  

 

노예제는 고대부터 존재했던 제도였다. 고대 로마시대에도 있었고, 동양권 국가들의 역사에도 존재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흑인 노예들이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였다. 그 시기에 북미대륙으로 온 흑인들은 노예라기보단 계약 하인제에 가까웠지만, 현 미국의 남부지대에서 농업이 번창하면서 미국 남부지역은 노예제가 필요하게 되었고, 식민지 미국 또한 대다수 흑인들을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고 오게 된다. 미국 건국 이후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했던 데에 비해 남부는 농업 위주의 경제가 발전하였는데, 당시 상당한 부를 축적한 남부의 대지주들은 노예들의 착취를 통해 생산한 면화를 영국과 유럽에 수출했고, 그들의 산업기반의 핵심은 흑인 노예를 통한 생산이 바탕이 되었다.

 

남부에서의 노예는 인간이라기보단 하나의 재산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남부사회에서 흑인 노예들은 사고 팔렸고, 저당에 잡히기도 했으며, 빚을 갚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남부사회의 입장에선 노예제가 필요했고, 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은 사실상 재산을 버리는 것이었으며, 남부사회의 경제체제가 무너지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당시 미국에 살던 흑인들 대다수가 남부에 있었다.

(도망 노예를 잡아온 도망 노예 사냥꾼들)

  

하지만 이런 남부사회의 노예제는 점차 비인도적인 문제로 간주되며 이를 반대하고 저항하는 목소리가 생겼는데, 남부와는 달리 주로 흑인 노예제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던 북부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 외에도 흑인들은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소극적인 저항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물론 그런 반란의 경우는 기나긴 세월 동안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미국의 노예제 문제가 정치적인 영역으로 옮겨가게 된 것은 1840년 자유당이 출현하면서부터였다. 윌리엄 게리슨 같은 인물들은 노예제를 폐지하고자 하였고, 자유당은 연방에 편입되는 영토와 주에서 노예제를 금지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내의 노예무역을 금지시킬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노예제 폐지 운동에 흑인들이 가담하기도 하였다. 북부에 거주하던 소수의 흑인들은 도망 노예들을 구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830년 당시 북부에는 자유를 얻은 약 13만 명의 흑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20년 후에는 20만 명으로 증가하면서 대략 7만 명 이상이나 되는 자유 흑인들이 북부에서 살게 되었다.

(1850년대 당시 도망노예의 체포를 요구하는 호소문)

  

그러나 1848년 멕시코 전쟁 이후 미국 정부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하여 새로 얻은 영토에 대해 비노예주(enslave state)로 규정했고, 그 대가로 1850년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Act)을 통과시켜주었다. 이 법은 탈출한 노예들을 다시 소유주에게 되돌려주기 위한 법으로, 이미 북부로 탈출하여 살고 있는 노예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정부는 남부에게 유리한 법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노예해방을 원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노예제 문제의 갈등을 북부와 남부가 빗게 된 사건은 1857년 드레드 스콧 사건이었다. 1857년 연방대법원은 드레드 스콧이라는 노예가 자유 지역에서 한동안 지내왔는데도 그가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이유는 그를 인간이 아닌 재산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사건에서 남부와 북부의 갈등이 있었다. 1860년 가을 에이브러햄 링컨이 신생 공화당의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 남부가 연방에서 탈퇴하게 된 이유에는 국민적인 충돌이 아닌 엘리트 집단 간의 충돌이었다. 당시 북부는 자유토지, 자유노동, 자유시장등의 경제적인 팽창에서 남부와 갈등하다가 생긴 사태였지, 북부가 노예제 폐지를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과거 노예해방론자로 알려진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13월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남부와 탈퇴한 주들을 회유하는 발언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남부 주들에 존재하는 노예제도에 대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섭할 의사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내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없으며 또 그렇게 할 의향도 없습니다.”

(1863년 게티즈버그 전투. 이 전투는 남북전쟁의 전황을 바꾸었다. 그 결과 북군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남부와의 갈등은 돌아설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18614월 남부연합이 북부측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며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흑인 노예 해방론자로 알려진 링컨 대통령은 전쟁이 4개월째 이어지면서 프레먼트 장군이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저항하는 노예주인들의 노예는 자유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링컨은 이 훈령을 철회했는데, 그는 여전히 메릴랜드, 켄터키, 미주리, 델라웨어 등 4개 노예주를 연방에 묶어두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점점 격화되면서 사상자가 급증하고, 승리에 대한 절망감이 고조되고, 노예폐지론자들의 비판이 링컨을 떠받치는 너덜너덜한 연합세력을 갈가리 찢어 버릴 태세를 보이자, 링컨은 그제야 비로소 노예제를 반대하는 행동에 착수했다.

(흑인인권운동가 프레드릭 더글라스)

 

남북전쟁의 전황은 초반엔 남군 중심으로 유리하게 돌아갔다. 18617월에 치른 제1차 불런 전투(Battle of Bull Run River)1862년 제2차 불런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18637월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를 중심으로 전황은 북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전쟁에서 승기를 잡음에 따라 링컨은 186411월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고, 186543일 북군이 남부 연합의 수도 리치먼드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었다. 대략 4년이라는 남북전쟁 기간 동안 미국에서 65만 명 이상이나 되는 인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는 앞으로 미국이 참전하게 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미군 전사자보다 훨씬 더 많은 수치였다.

 

아직도 사람들은 링컨 하면 노예해방론자로 알지만 그는 엄연한 연방주의자에 인종차별주의자이기 까지했다. 실제로 그는 노예 상태에 있던 흑인들을 보며 그들이 행복해 보인다.”라는 식으로 글은 쓴 적이 있었다. 어쨌든 남북전쟁 이후 흑인 노예들은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방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흑인을 대상으로 한 백인 세력들의 엄청난 인종차별과 테러가 남부에서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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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5 23: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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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6 13: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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