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는 농업 국가이자 후진 자본주의 국가였다. 러시아 제국은 1890년대에 이르러 세계 자본주의의 제국주의화 추세와 연관하여 큰 변화가 일면서 자본주의적 비약적인 성장을 달성했다. 그러면서 농업 국가 러시아에선 새로운 사회계급이 대두되었는데, 그게 바로 자본가와 노동자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도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작업환경 속에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 파업과 투쟁을 이어나갔지만, 차르 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부터 러시아에서는 차르 체제에 맞선 크고 작은 투쟁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05년 1월 9일 대략 20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시위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차르의 겨울 궁전으로 몰려들어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차르 정부는 총으로 무장한 근위병들과 코사크 기병대를 투입하여 시위대를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최소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게 바로 ‘피의 일요일’이다. 1905년 러일전쟁이 러시아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노동자 파업 및 투쟁은 더 격해졌다. 그해 10월과 12월까지 대략 50일에 걸쳐 20만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동자 대표 평의회가 러시아 수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모스크바에서는 12월 무장봉기로 경찰국가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확실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며 노동자들이 지침에 따라 세력이 약화되자 차르 정권은 이를 진압하여 수많은 노동자를 살해했다. 따라서 1905년에 일어난 노동자 봉기는 실패로 끝이 났다. 하지만 1905년 혁명은 노동자들이 봉기하여 차르 정권을 전복시키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다시 한번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바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자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투르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영국의 동맹국인 일본도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를 도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 제국의 허황된 꿈인 ‘슐리펜 작전’이 실패함에 따라 장기전에 돌입했고, 점차 참호를 중심으로 한 장기전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국에 맞서 전쟁을 치렀는데, 독일과의 전투에서 많은 전사자와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 측의 경제난은 지속되는 가운데, 러시아 제국의 지주와 자본가들의 횡포와 부패가 극심해지면서, 러시아에선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게 바로 1917년에 일어난 2월 혁명이다. 1917년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 시위를 시작으로 수많은 민중이 혁명에 동참했다. 물론 차르 정부가 발포를 명령했기에 그 과정에서 대다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시민들을 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병사들은 노동자들과 거리로 나와 총과 붉은 깃발을 들고 행진했고, 시위 시작 5일째 되던 날 니콜라이 황제는 자진사퇴 하게 되었다. 이로써 차르 체제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2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는 케렌스키와 부르주아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새로운 임시정부는 분명 부르주아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농촌 혁명을 부르짖던 사회혁명당 계열의 일부 인사들과 멘셰비키들이 참가했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민중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러시아 민중이 간절히 원했던 독일과의 전쟁 중단을 실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선에서 무모한 반격을 가하는 바람에 수많은 러시아 병사들이 전투에서 죽어 나갔다. 그러는 사이 1917년 4월 3일 볼셰비키당을 이끌던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레닌은 전차 위에서 열 번을 토했고, 다음날인 4월 4일 볼셰비키 집회와 사회민주당 연합집회에서 〈당면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를 발표했다. 그것이 바로 4월 테제다. 레닌의 ‘4월 테제’에서 “즉각적인 전쟁 중단,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국제혁명조직 창설” 등을 주장했다. 돌아온 레닌은 러시아에서 혁명을 준비하던 중 레닌의 예상보다 빨리 민중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그게 바로 7월 봉기다. 그러나 그해 일어난 7월 봉기는 임시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했고, 이 때문에 레닌 또한 러시아를 잠시 떠나야 했다.
당시 핀란드로 도망간 레닌은 <국가와 혁명>을 집필했는데, 그해 8월 러시아에선 반혁명의 시도가 일어났었다. 그게 바로 코르닐로프의 반란이다.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시도가 일어나자,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케렌스키 정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병사들이 코르닐로프의 반란 진압에 동참하면서 반혁명은 무마되었다.
이런 가운데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와 민중들 사이에 혁명의 기운이 치솟음을 깨닫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다시 내걸며 혁명을 준비했다. 10월 초 레닌은 핀란드 은신처에서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무장봉기의 준비를 직접 지휘하게 되었다. 준비를 마친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10월 25일 페트로그라드의 중심 지역에서 전함 오로라호의 발포와 동시에 반혁명파들을 분쇄했고, 10월 26일 겨울 궁전까지 접수하면서 수도에서의 봉기를 완료했다. 10월 26일 레닌은 즉각 ‘평화에 대한 포고’,를 시작으로 ‘토지에 관한 포고’와 그 외의 포고령을 발포했다. 이후 레닌과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혁명은 단기간 동안 맞은 것들을 성취해냈다. 초창기 볼셰비키 러시아에선 지주의 모든 토지가 몰수되어 무상으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노동자들에게 식량이 우선 공급되었고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다. 지주 소유의 토지가 사라졌으며, 신분과 호칭이 완전히 폐지되고 모든 러시아 주민이 인민이 되었다. 인종차별과 같은 악법은 폐지되었고 혁명 이후로 인종차별이 웬만큼 사라졌다. 여성은 사회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했다. 사형제가 폐지되었고 심지어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다. 또한, 여성의 보육을 담당해주기 위한 탁아소도 설치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918년 3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으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빠졌다. 이렇듯 레닌과 볼셰비키의 러시아 혁명은 많은 것들을 성취해냈다. 이와 같은 정책들은 러시아 10월 혁명을 통해서 성취해낸 결과물이었고, 따라서 러시아 혁명은 진보적인 가치를 전적으로 실행시킨 위대한 혁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