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 전쟁사 1941~1945
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지음, 윤시원.남창우.권도승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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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19399월부터 일본이 항복하는 19458월까지 대략 6년간 전개되었던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대략 5500만에서 70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이들 중 절반 이상이 민간인 사망자였다. 기존의 한국 사회에선 제2차 세계대전하면, 주로 영미 연합군이 중심이 된 서부 연합군의 공로만 강조해 왔다.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 시절 텔레비전에선 <전투: combat>, <게리슨 유격대>, <지상 최대의 작전>, <패튼 대전차 군단>, <벌지 대전투: Battle of the Bulge>, <배틀 오브 브리튼>, <켈리의 영웅>, <머나먼 다리> 등을 방영했었고, 이후에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Saving Private Ryan>, <진주만: Pearl Harbor>, <퓨리: Fury> 그리고 2년 전 인기를 끌었던 <덩케르크: Dunkirk>처럼 주로 미국이나 영국을 중심으로 한 2차 세계대전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Band of Brothers><더 퍼시픽: The Pacific>을 보면 알 수 있듯이 2000년대 나온 미국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영화들과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영미 연합군이 아니라 19416월부터 19455월까지 아돌프 히틀러의 야만적인 침략에 맞서 영웅적으로 투쟁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등이 지휘하는 소련의 붉은 군대였다. 위에 상술한 영화들 때문이라고는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지만, 한국 사회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역할이 등한시되어온 측면이 있었다. 서구 중심의 매체와 문서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을 바라본다면,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승리를 쟁취한 소련군의 역할을 쉽게 무시하게 되고, 중요치 않게 여기게 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관점을 배척하기 위해 이번에 미국의 군사 전문가인 데이비드 글랜츠(David M. Glantz)가 쓴 <독소전쟁사: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를 읽게 되었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소련군은 어떤 방식으로 히틀러의 침략을 막아냈던 것일까?

 

1.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업화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맞서 1921년까지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적백내전을 치러야 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내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에 시달렸다. 1928년 소련의 서기장 자리에 오른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초강대국을 건설하기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했는데, 고도의 생산력을 달성함과 동시에 군사력을 증강했고, 군의 현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같은 소련군 이론가들은 종심 전투 이론에 대한 전술적 개념을 완성 시켰고, 장갑차와 전차를 위주로 한 육군 전술을 발전시켰다. 1932년 소련은 사상 최초로 2개의 기계화 군단을 편성했는데, 이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최초의 기갑 사단을 창설하기 3년 전에 달성한 성과였다. 어쨌든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업화를 기반으로 하여 군사력을 발전시켰고, 대숙청이 진행 중이던 193861일 붉은 군대의 평상시 전력은 대략 150만 명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1930년대 스탈린이 진행한 공업화로 인하여 소련 전역에는 수많은 공장이 건설되었고, 그 공장들은 19416월 히틀러의 독일이 침략하자 19417월부터 11월까지 우랄산맥을 거쳐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전하여, 소련군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탱크나 비행기 소총과 기관총 등을 대량으로 생산해냈다. 물론 전쟁 초기 독일군의 진격이 워낙 신속하게 전개되었기에, 일부 중요한 생산 지역이 독일군 수중에 넘어가 버리기도 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군수 물자 생산은 스탈린의 공업화가 기반이 됐기에 가능했고, 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하는 데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2. 미국의 랜드리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다면,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있다. 그게 바로 미국의 랜드리스(무기 대여법). 랜드리스 배경에 관해 얘기하자면,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사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그랬듯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도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따라서 미국은 1941년 히틀러가 유럽의 75%를 장악하고 소련까지 침공했을 때도 유럽 문제에 간섭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이 있은 지 6개월이 지나서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히틀러의 동맹국인 일본 제국이 하와이에 있는 미군 기지를 공습했기 때문이었다.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이 있자 미국은 일본 제국에게 선전포고했고, 이로부터 4일 뒤인 1211일 히틀러는 동맹국 일본을 돕겠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그게 결국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1942~1943년에 미국은 영국과 중국을 지원하는 것과 동시에 소련에도 물자를 지원했는데, 이는 상당한 양의 물자 지원이었다. 미국은 3400만 벌의 군복과 1450만 켤레의 군화, 420만 톤의 식품 그리고 11800대의 기관차와 다수의 차량을 제공했다. 무기 대여법에 의해 소련에게 제공된 트럭이나 지프는 독일과의 전쟁에 있어서 소련군의 기동력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은 소련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만약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의 경제는 전쟁으로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소련에게 지원한 전차나 항공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특히 소련군들이 미국으로부터 쓰레기 무기를 받고 있다고 의심까지 하게 만들 정도였다. 전차를 예로 들자면 영국군의 주력인 마틸다 전차나 미군의 주력은 M4 셔먼 전차의 경우 독일군의 중전차들보다 성능이 좋지 않았고, 소련의 주력 전차인 T-34보다도 성능이 못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미국의 랜드리스가 소련군의 무기 체계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는 없다.

 

3. 쿠르스크 전투

 

많은 사람이 독소전쟁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독소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전투를 생각한다면 아마 19428월부터 19432월까지 볼가강 근처에서 전개됐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일 것이다. 물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승리하는 데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소련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독소전쟁의 전환점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보단 19437월부터 8월까지 전개되었던 쿠르스크 전투라 생각한다.

 

양측 합쳐서 대략 1만 대 이상의 탱크와 3만 대 이상의 대포 그리고 5~6천 대 이상의 항공기가 총동원되었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탱크 손실은 독일군의 5~6배를 능가했었다. 당시 독일군의 주력 전차는 3호와 4호 전차였지만, 독일군이 새로 개발한 티거라 불리는 6호 전차는 소련군의 T-34 전차의 성능을 훨씬 압도했고, 이는 티거 1대가 T-34 10대를 잡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렇듯 최신식 전차로 무장한 독일군에 맞서 소련군은 다수의 병력을 투입하여 피로스의 승리를 이루어 냈다. 통계에 따라선 쿠르스크 전투에서 파괴된 소련군의 탱크가 대략 7000대 이상이라고도 하는데, 소련군이 이루어 낸 피로스의 승리는 절대 헛된 승리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을 상실했고, 더 이상의 대규모 공격 계획을 소련군을 상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중앙 러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소련군의 수중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었고, 독일군이 더 이상 대규모의 공세를 소련군을 상대로 하지 못하게 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전투이자 소련군의 승리였다.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사를 아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투다.

 

4. 정말 이오시프 스탈린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는가?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과연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있어서 공로가 있는지에 대한 의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업적을 부정하는 측에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그가 대대적으로 감행했던 대숙청으로 인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기 때문에, 1939년의 겨울 전쟁과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의 서기장 자리에 오르게 된 흐루쇼프 서기장은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격하하는 연설을 하며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했는데, 당시 흐루쇼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없었어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하며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로를 강하게 부정했었다. 1930년대 스탈린이 감행했던 대숙청에 관해 얘기하자면, 대숙청 시기 군사적으로 유능한 장교들이 죽거나 굴라그에 보내졌던 것도 사실이고, 겨울 전쟁에서 핀란드 측보다 많은 사상자를 냈던 것도 사실이며, 독소전쟁 초반에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 때문에 후퇴를 거듭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의 소련군을 보면 소련이 보낸 전차대대가 파시스트 세력에 의해 격파되기도 했었다.

 

19416222300대의 전차와 3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300만 대군의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소련군은 기습공격을 받았고,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한 당일에 대략 1200대의 주력 항공기를 지상에서 잃었었다. 그 바람에 194111월 말에는 모스크바 외곽까지 밀렸고,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도 독일군에 의해 포위당했었으며, 1942년에는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까지 독일군이 진입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왜 스탈린은 독일군의 침공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느냐는 것인데, 독소전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스탈린이 내렸던 판단은 생각보다 가능성이 있던 얘기였다.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는데, “영국과의 전쟁을 완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여 두 개의 양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독일 입장에서도 불리한 일이니 영국을 굴복시키지 않는 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이런 스탈린의 관점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망상에 빠져있던 히틀러가 스탈린의 예상과는 달리 정말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1941년부터 1942년 혹은 1943년 초까지의 소련군이 처해있던 상황은 굉장히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를 거치면서 스탈린의 소련도 점차 독일군에 맞서 반격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스탈린 또한 게오르기 주코프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등의 의견을 적절하게 받아들이며, 전략을 세워 독일군에 맞서 싸웠으며, 점차 효율적으로 군대를 투입하여 독일군을 차례차례 박살 냈다. 1943년과 1944년 그리고 1945년부터는 스탈린의 세운 몇몇 작전들이 보기 좋게 성공하여 독일군이 후퇴하기도 했다.

 

독소전쟁 시기에 있어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또 한 가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그의 행동은 바로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그가 보인 모습이었다. 194111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점차 진격해 오는데도 불구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수도 모스크바를 탈출하지 않았고, 러시아 혁명 기념 퍼레이드를 진행하였으며,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 남아 끝까지 크렘린 궁전을 지켰다. 이는 전쟁 초기 이오시프 스탈린이 자신의 목숨이 독일군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며, 수많은 러시아 인민들에게 히틀러 파시스트의 침략을 무찌르게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됐다. 책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그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4년에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 50주년 기념일에 미국의 어느 잡지는 표지에 아이젠하워 장군의 사진을 게재했는데, 거기에는 아이젠하워가 히틀러를 패배시킨 장본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명칭은 사실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그리고 아마도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더 어울릴 것이다. 좀 더 일반화하면 1941년에서 1945년 까지 독일에 대항한 소련군과 다민족인 소련 인민들이 전투에서 가장 큰 몫을 해냈다. 일본으로부터의 공격에 1931년부터 계속 시달려 온 중국 정도가 소련의 시련과 노력의 정도에 견줄 만하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보자면 중국의 기여는 소련에 비해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소련은 독일군의 거의 절반과 계속 전투를 했었다.”

 

출처: 독소전쟁사 p.355

 

정리하자면 2차대전의 승리에 있어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기여한 공은 분명히 있으며, 그가 2차대전 승리에 이바지한 공은 미국의 아이젠하워나 프랭클린 루스벨트 중국의 장개석 그리고 영국의 처칠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5. 소련군의 승리

 

1943년 쿠르스크 전투를 승리로 끝낸 소련군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그리고 발트 3(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다. 1944년 초 소련군은 과거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레닌그라드(러시아 제국 시절과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해방시켰고,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19446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감행하여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에서 독일군을 몰아냈으며, 1945년 초에는 헝가리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독일 국경지대를 돌파했고, 430일 나치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여 제국의 심장인 국회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세웠다. 베를린 전투는 5월 초까지 계속되었지만, 그해 58일 독일이 무조건 항복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히틀러 군대를 궤멸시키고 승리를 쟁취한 소련은 19457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다. 그 전쟁은 바로 추축국의 마지막 세력이던 일본 제국과의 전쟁이었다. 1938년 하산호와 1939년 노몬한에서 소련군하고 붙어봤던 일본은 1941년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1945년 초 소련은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고, 그해 7월부터는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었다. 1945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와 팻맨이라는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89일 소련군은 만주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 결과 소련은 사할린 남부와 만주지역 그리고 북한까지 접수했고, 일본군을 대패시켰다.

 

소련군의 만주 전역 공격은 오히려 1944년과 1945년 당시 독일군을 상대로 전개했던 전술보다 더 효과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이후 소련군의 군사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6. 결론: 2차 세계대전 연합국 승리를 이끈 나라는 바로 소련이다.

 

지금까지 소련이 어떻게 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는지를 설명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소련이 지불한 대가는 매우 컸다. 대략 1000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16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다. 소련군의 전사자를 당시 미군 전사자에 비교하자면 대략 25배 이상이다. 194112월에서 194211월까지 독일과 소련 양측을 합하여 900만 명의 병력이 동부전선에서 격전을 치렀는데, 당시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의 군대를 상대하고 있던 영국은 추축국에 6만 명의 손실을 입혔다.

 

19437, 독일군과 소련군 200만 명이 쿠르스크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500만 명이 스몰렌스크에서 흑해 연안에 이르는 600km의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서방 연합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해서 6만 명의 독일군을 몰아냈다. 전쟁 시작부터 1945430일까지의 독일군의 전체 손실은 대략 1100만 명이고 그중에 부상자가 600만 명인데, 이들 중 900만 명의 인명 손실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했다.

 

그뿐만 아니라, 19446월 서방 연합군이 제2 전선을 프랑스에 형성할 때까지 소련군은 대략 3년간 동부전선 전역에서 나치독일에 맞서 싸웠다.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치른 소련의 노력은 서방 국가들보다 훨씬 컸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는 소련과 러시아 측 자료와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영미 중심의 관점으로 봐왔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다만 읽기 전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순수히 군사적인 입장에서 소련의 업적을 재조명했기에, 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군사적인 지식 없이는 힘들다. 하지만 데이비드 글랜츠의 책은 읽음으로써 잃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많을 것이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해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는 명저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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