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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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당신들을 1명 죽일 때 당신들은 우리 10명을 죽일 것이다. 하지만 먼저 지치는 쪽은 당신들이 될 것이다.”

 

 

1946년 호치민이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인 장 생트니에게 했던 말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5년부터 사이공이 함락 당했던 1975년 까지 베트남은 약 10000일간 전쟁을 치렀다. 승리를 위해 베트남이 지불한 대가는 매우 컸지만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미국에게 유일한 1패를 남겼고 인간의 의지가 최신식무기를 굴복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필자는 1년 전부터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호치민과 베트남 전쟁 관련한 책 몇 권을 읽었었다.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 중에 필자가 가장 처음이자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은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었다. 작년 5월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쯤이었던 것 같다. 무튼 이 책의 감격을 잊지 않았기에 지난 1월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게 됐고 읽고서 알게 된 사실을 오늘 글로 쓰게 되었다.

 

1.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서막

 

이 책의 시작은 1945OSS에서 근무했던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이 근무지를 베트남으로 파견되면서부터 시작한다. 패티 소령은 베트남에서의 임무수행을 위해 매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패티 소령은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상륙 살레르노 전투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계속 전개되었던 이탈리아 전투까지 약 3년간 유럽에서 싸웠다. 그러던 중 OSS의 총 책임자 윌리엄 도노반을 만났고 패티의 근무지는 아시아로 바뀌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근무지가 바뀐 패티 소령은 1945430일 중국 국경의 어느 찻집에서 나이 50먹은 어르신을 만난다. 그가 바로 호치민이다. 당시 호치민을 만난 패티 소령은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일 까봐 걱정했지만그와의 회담을 가진 뒤 호치민을 존경하게 되었고 그를 공산주의자가 아닌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애국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살아온 호치민은 1940년 팜반동과 보 응우옌 지압을 만나 무장 단체 베트민을 창설하여 대일전을 전개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일본군 점령 하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베트민을 훈련시켜 대일전에 활용하고자 했다. 19452차 대전이 끝나가던 막바지에 미국의 OSS는 호치민의 베트민 조직에게 무기와 탄약을 지원하고 군사훈련까지 담당했다. 실제로 OSS가 지원했던 베트민 부대가 소규모의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여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베트민이 대일전에 제대로 참전하기도 전에 일본은 항복했고 미국 OSS는 그들을 더 이상 이용할 이유가 사라졌다. 2차 세계대전 시기 미국도 베트남도 그리고 베트민의 지도자들도 20년뒤 미국과 전쟁을 치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2.프랑스의 재침과 디엔 비엔 푸

 

19458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베트남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했고 194592일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항복 날짜에 맞추어 호치민은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다. 호치민이 낭독 했던 독립선언문의 시작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였다. 이는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내용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명분으로 북쪽에는 중국군이 남쪽에는 영국군이 들어왔다. 중국군은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베트남에서 철수했지만 영국군은 프랑스군을 앞세운 뒤 철수 했다. 사실 프랑스는 19세기 중반부터 1940년 일본에게 인도차이나 반도를 빼앗길 때 까지 베트남을 통치하였다. 프랑스가 베트남에 다시 들어온 이유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기 위함이었다. 1946년 프랑스의 도발에도 호치민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진행하였지만 1946년 베트민군과 프랑스군이 베트남 항구 도시 하이퐁에서 충돌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기 전황은 프랑스가 유리해 보였다. 그러나 베트민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전쟁 초기에는 베트민에게 불리했지만 1949년 중국의 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베트민군은 중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지원으로 세력이 강해진 베트민 군대는 1951년 총공격을 가했지만 네이팜탄까지 동원한 프랑스군을 상대해야 했다. 1954년 베트민은 라오스 국경지대인 디엔 비엔 푸를 포위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프랑스를 베트남에서 몰아냈다. 1차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군은 7만 명 이상이 사망 했고  디엔비엔푸 전투에서는 3천명에서 5천명이 죽고 1만 명이 베트민 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베트남이 치른 희생은 당연히 프랑스군보다 훨씬 많았고 베트남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25천명 이상의 병사가 사망했다. 수많은 희생과 투쟁으로 베트남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자신들 땅에서 몰아냈다.

 

3.남북분단과 미국의 개입

 

1954년 베트남은 프랑스를 몰아냈지만 제네바 협약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된다. 제네바 협약에는 베트남을 남북으로 나눈 뒤 2년이내의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라고 되어있었다. 북베트남에 있던 호치민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2년 이내의 통일을 위한 총 선거를 즉각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1949년 중국 공산당 통일과 한국전쟁을 경험 했던 미국은 총 선거를 실시할시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할거라 예상했고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남베트남의 친미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지한다.

 

남북분단이 기정사실이 되자 호치민은 북베트남에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사회주의 정책들을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60만명의 가톨릭교도들을 포함한 8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월남 했고 악질지주 부르주아 혹은 민족반역자로 몰려 죽은 사람이 약1만에서 5만명정도 된다.(현재 서방 학계에서는 토지개혁시기 죽은 사람이 약 1만5천에서 2만명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결국 호치민은 처참했던 토지개혁의 실상을 인정하고 당내에서 철저한 자아비판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호치민에 대한 민중의 의식은 여전히 다정다감하고 친근감 있는 호아저씨였다.

미국의 지원으로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가족정치를 했고 카톨릭 신자만을 우대한 반민중적인 정책만 펼쳤다.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펼쳤다. 거기다 남베트남 대부분의 관료들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린 민족반역자들이었고 대통령 응오딘지엠은 독재정치를 펼쳤으며 베트남 민중의 5%도 안 되는 카톨릭은 우대하면서 95%의 불교도들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당시 응오딘지엠의 반공 정책으로 수많은 사찰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감옥에 갔다. 응오딘지엠의 반공정책으로 약 7만 명 이상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응오딘지엠의 카톨릭 우대 정치와 가족정치 그리고 민족반역자들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남베트남 민중들은 분노했고 그 결과 1960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결성하게 된다. 1963년 응오딘지엠의 불교도 탄압에 견디지 못한 승려 틱광둑이 시위도중 소신공양을 했다.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을 본 응오딘지엠의 동생 와이프인 마담 누는 그 중이 바비큐가 된 것인데 무엇이 난리냐라고 공개언론에서 말했고 이는 결국 미국의 지원을 잃게 되었으며 친미파계열의 군사쿠데타로 이어졌다. 응오딘지엠 타도로 시작된 군사쿠데타는 1965년 응우옌 반 티우가 정권을 잡으면서 끝이 났지만 약 2년 동안 10번이나 되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었다. 응우옌 반 티우 정권도 역시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었다.

 

4.베트남 전쟁의 시작과 구정공세

 

1950년대부터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오던 미국은 1959년 북베트남에서 호치민 루트를 통해 훈련된 요인들이 남파되자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부터 존F케네디 그리고 린든존슨으로 이어졌다.

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만든 조작이었고 북베트남은 어뢰로 공격한 적도 없었다.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최신식 폭격기를 동원하여 북폭을 감행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면서 베트남 전쟁은 확전 되었다. 미국을 따라 한국과 호주 뉴질랜드가 베트남 전에 참전하였다. 베트남 전을 바라보는 시각은 소련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도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권도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은 베트남 전을 단기간에 끝낼수 있다는 군사적 오만감에 빠져 전쟁을 지속하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호치민이 이끄는 월맹군은 라오스와 캄보디아 까지 연결된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하했고 남베트남 내부에서 활동하던 베트콩은 미국에 맞서 싸웠다. 1965년 미국의 첫 지상군이 다낭항에 상륙했다. 미군과 베트남군이 처음으로 전투를 치뤘던 곳은 남베트남의 이아드랑이라는 지역에서 였다. 이아드랑 전투는 미군300명이 죽고 북베트남군 1700명이상이 죽으면서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베트남 전쟁은 사실상 전선이라는 것이 무의미한 전쟁이었다. 베트콩과 북베트남 군은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을 폈고 따라서 미군은 수색과 섬멸작전을 이어갔다. 거기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의 전면적인 개입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으로 북진하지 않았고 비행기로 폭격만 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사이가 안 좋았지만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그들과의 줄타기 외교를 함으로써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모두 받아냈다. 중국과 소련은 북베트남에게 AK47을 비롯한 소총과 탱크 전투기 트럭 SAM미사일과 같은 장비와 무기를 지원해줬고 이 무기들은 북베트남이 미국과 싸우는데 있어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전선 없는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을 계속 해나갔고 주둔 병력도 지속적으로 늘렸다. 1967년이 되면 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이 40만을 넘었고 1968년에는 베트남 주둔 미군병력 총 549천명이 된다. 1965년부터 1967년 사이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병사가 2만 명이 넘었음에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우리는 베트남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선전했다.

1968년 미국의 희망 없는 선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베트남의 대명절인 구정에 있었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대공세인 구정공세가 바로 그것이다. 구정공세가 시작되면서 케산의 미군기지는 몇 달 동안 포위되었고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미대사관1층이 베트콩 기습부대에게 잠깐 점령당하기 까지 했으며 베트남의 전통도시 후에는 1달 동안이나 북베트남이 점령했었다. 구정공세 1달 동안 미군 2500명이 죽었고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35천명 이상이 죽었다. 군사적으로 봤을 땐 구정공세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이 밀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 착각한 미국국민들은 구정공세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생생히 봤고 이는 반전운동으로 이어졌다.

 

5.전선은 미국으로 그리고 호치민의 사망

 

구정공세는 미국국민들은 분노했고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베트남 전쟁은 전쟁 초기부터 미국 자본주의의 빈부적 계급적 불평들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미국은 징병제도였다. 미국의 징병제도로 인하여 가난한 백인의 자식들과 노동계급의 자식들 그리고 흑인의 자식들은 지옥의 베트남으로 가게 됐지만 대학을 다니는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 엘리트 계층들은 학업을 핑계로 징병을 언제든지 피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베트남으로간 흑인군인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주둔 미군의 총 병력 13%를 흑인이 차지했고 이는 미국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과 비슷한 수치였다. 즉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미국 징병제도는 계급과 빈부 그리고 인종간의 불평등이라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반전운동이 일어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반전운동을 대하는 미국정부의 방식은 생각보다 무자비하고 거칠었다. 시위대가 반전운동을 하면 거리에 있는 미국의 경찰들은 곤봉을 돌고 시위대를 서슴없이 후려치기까지 했고 반전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소화기와 물대포가 동원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는 주방위군을 동원하기 까지 했다.

 

심지어 1970년 미국의 오하이오 주의 켄트주립대학교에서는 반전성향이 강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주방위군이 발포하여 10명이상이 죽거나 다치기도 했었다. 1968년 구정공세 이후 반전시위가 격화되면서 린든존슨은 재선에 실패하고 그해 11월 일시적으로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그 외의 도시 폭격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문제는 결국 공화당의 닉슨대통령에게로 까지 넘어가게 되었다. 1969년부터 미국은 단계적인 미군철수를 생각하게 되었음에도 남베트남 안에서의 전투는 계속 되었다.

196992일 호치민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한평생을 베트남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바쳐온 위대한 지도자의 사망으로 북베트남 인민들은 애도와 슬픔을 표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단결하게 되었다.

 

6.미군 철수와 남베트남의 몰락 그리고 승리

 

1969년부터 전투가 지속되면서 북베트남을 향한 미군의 폭격도 재개되었지만 이때부터 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닉슨 정부는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생각하면서도 베트남에서의 전투를 계속했다. 1970년에는 베트콩이 활동한다는 이유로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1971년에는 남베트남군을 앞세워 라오스를 침공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하면서 동시에 대규모 병력의 미군 철수도 이루어 졌고 북베트남과의 협상도 이루어 졌다. 미국의 라오스 캄보디아 침공은 사실 미국이 협상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따내기 위해서 벌였던 협박이었다. 북베트남 정권은 이에 굴하지 않고 완강히 미군철수를 주장했다. 닉슨 정부는 마지막 협박으로 19721218일부터 29일 까지 약 11일간 대규모의 폭격을 하노이와 하이퐁에 감행하였다. 수많은 북베트남 민간인이 사망했고 미국의 B-52폭격기도 30~40대 이상 파괴되었다.

 

결국 1973년 미국의 키신저와 북베트남의 레둑토가 파리에서 만나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은 베트남에서 완전 철수했다. 비록 미국이 완전 철수 하긴 했지만 군사고문단 50명 정도는 남겨두었고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은 계속 되었다. 197412월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남베트남에 대한 총공격을 계획하게 되었다. 19751월 북베트남군은 실험삼아 남베트남군이 있는 푹롱 성을 공격했고 3주 만에 점령했다. 그해 3월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을 향해 총 공세를 펼쳤고 430일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끝냈다. 당시 남베트남의 지도자 응우옌 반 티우는 월남이 패망하기 전 금괴 2~3톤을 들고 미국으로 도망갔다. 이로써 10000일간 지속되었던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7.베트남 전쟁이 남긴 것

 

전쟁은 본질적으로 추악하고 잔인하다. 베트남 전쟁은 유난히 그 잔혹함과 추악함을 제대로 증명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19683월 미군은 남베트남의 미라이라는 마을에서 베트콩을 죽인다는 명분으로 약500명이나 되는 양민들을 학살했다. 학살당한 양민 중엔 0세 유아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미군은 수색과 섬멸 작전을 펼치면서 수많은 양민들을 죽였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양민학살과 범죄로 물들여져 있었고 미군의 잔혹함이 잘 들어났던 전쟁이다. 미군의 뿌린 고엽제로 인한 환경피해 또한 어마어마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전에 개입한 미국은 57천명의 전사자와 26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항공기3700(그중1000대는 북베트남 상공에서 격추됐다.)와 헬기4800(베트남군의 지상포화로)가 격추당했다. 전쟁비용으로 2400억 달러를 지불하였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부었던 화력 4배에 달하는 8백만 톤을 베트남전에 쏟아 부었다. 사실상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핵무기를 제외하고 쓰지 않은 무기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했고 패배했다. 그에 비해 베트남이 가진건 낡은 소총과 정신력이었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150만명의 병사를 잃었지만 승리했다. 위대한 승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다음과 같은 말을 책에 남겼다. “인류 역사는 베트남 민족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 재통일을 이룩한 것보다 더 위대한 본보기가 이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저자의 주장대로 역사는 베트남의 승리를 불굴의 승리 정신력의 승리로 기록할 것이다.

 

8.글을 마치며

 

필자는 개인적으로 호치민 아저씨를 존경하고 베트남 민중의 투쟁을 높게 평가한다. 아쉽게도 국내에 출판된 호치민 관련 서적이나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들은 많지가 않다. 국방부 쪽에서 나온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이나 자료들은 반공적인 시각에 맞추어져 있어 정상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있어서 객관적인 사실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있을 것이다. 최근 유튜브 영상을 보는 도중 수구세력의 앞잡이 정규재가 이 책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 자신들 멋대로 이상하게 해석하고 결론짓는 영상을 보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은 정규재를 비롯한 국내의 수구세력들의 입장과 역사관을 반영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월남정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호치민의 인간성과 그의 일대기롤 나름 긍정적으로 보며 미국은 어떻게 해서 명분 없고 전선 없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는지 혹은 미국 정부는 어떻게 해서 한 가족의 소중한 자식을 미라이 학살과 같은 학살 주범으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미국은 왜 철수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서술한 책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이라는 명분아래 베트남 전에 한국군을 파병했다. 베트남 전에 간 한국군 덕분에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고자이 마을 학살사건, 퐁니 퐁넛 학살사건 그리고 빈호아 학살사건과 같은 일도 일어났다. 군사독재 시기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외치던 군사정권이었기에 수많은 한국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으로 치부하게 되었고 현재의 박사모나 수구세력들이 틈만나면 월남 패망을 운운하는 행태를 봤을때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다고 본다. 리영희 선생이 주장하듯이 베트남 전쟁 당시 호지명을 비롯한 31명이 이끈 월맹은 민족해방세력이었고 반공정권인 월남은 친불민족반역자 정권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르치지 않던 베트남 전의 진실이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은 이와 같은 진실을 아는데 있어서 아주 좋은 서적일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무조건 읽어보기를 매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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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6-08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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