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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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반공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194592일 하노이의 바딘광장에서 50대 중년 남성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빛을 바랜 카키색 양복과 고무 슬리퍼 차림이었지만 대중 앞에서 자신이 준비한 독립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가 읽은 베트남 독립선언문의 시작은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의 작성한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시작과 같았다. 소수를 제외한 일반 대중들은 그의 연설을 듣기 전까지 그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한 애국자 응우옌 아이 쿠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연설을 통해 자신이 베트남의 전설의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응우옌 아이 쿠옥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바로 호치민이다.

 

68혁명 당시 베트남의 독립영웅 호치민은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체게바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과 더불어 신좌파들의 우상이었다. 19685월 프랑스 파리의 젊은이들은 호치민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고 서독, 영국, 이탈리아, 미국의 깨어있는 젊은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호치민은 한때 서구의 젊은이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68혁명시기 체게바라 마오쩌둥과 더불어 신좌파들의 우상이었던 호치민은 과연 어떠한 인물일까?

 

1.호치민 일대기

 

호치민은 1890519일 킴리엔에서 응우옌 신 삭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1살이 되던 해인 1901년 어머니는 병으로 사망했다. 1907년 호치민은 프랑스의 국립학교인 국학에 들어가 공부했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기에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착취당했다. 이에 부조리를 느끼게 된 호치민은 1908년 조세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국학에서 퇴학당했다. 국학에서 퇴학당한 이후 호치민은 베트남을 돌아다니다가 19116월 사이공에서 프랑스의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를 타고 베트남을 떠나 2년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1911년에는 프랑스에서 정원사로 일하기도 했었고 1912년에는 미국에 머물면서 노동자로 일하며 흑인 활동 조직에 참가했다. 1914년 호치민은 런던에 거주하면서 청소부 요리사 보조 등 온갖 일을 하며 노동조합 활동에 관여했다. 그러다 1917년 파리로 돌아와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일을 하기도 했었다. 1919년 호치민은 파리강화회의 때부터 베트남 독립을 청원했고 안남애국자연합을 결성하여 19196월 베르사유 회의 당시 베트남 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나 강대국들은 호치민의 청원을 무시했고 이는 호치민이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호치민은 코민테른에 가입했고 1922년에는 <르 파리아>를 창간 한 뒤 프랑스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했다. 그러던 19236월 모스크바로 넘어가 코민테른 극동국에서 근무했고 12월부터 스탈린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92411월 호치민은 중국 광저우로가 1925년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한 뒤 교사로 활동했다. 1926년에는 <혁명의 길>을 집필했다. 19275월에는 중국국민당의 공산주의자 숙청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피했다가 11월 파리 베를린에서 머물며 12월 반제국주의 동맹 집행위원회에 참석했다. 1928년에는 태국 방콕에서도 활동했다. 1930년 호치민은 베트남의 사회주의 조직을 합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다. 1930년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착취에 반대하여 통킹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통킹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독립운동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심지어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는 비행기까지 동원했다. 1931년 호치민은 홍콩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코민테른 요원의 도움으로 1932년에 석방되었다. 1934년 호치민은 다시 모스크바로 건너갔다. 모스크바 레닌 대학에 입학했고 1935년 스탈린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1938년에는 중국 팔로군 지역본부에서 기자 일을 하면서 보건 담당 간부로 일하기도 했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에는 프랑스가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했다.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다. 1940년 호치민은 운남성에서 팜 반동과 보 응우옌 지압을 만났다. 1941년 호치민은 30년 만에 베트남으로 돌아와 비엣 박에 베트민 사령부를 만들었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하자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 세계적으로 반파시즘 전선이 형성되었다. 호치민은 1942년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스파이로 오인 받아 중국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감옥생활을 하면서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오인으로 인한 체포였기에 호치민은 19439월에 석방됐다. 1944년 호치민은 중국 남부에 혁명 운동 기지를 만들었고 12월에는 베트남 해방군을 창설하여 일본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45년 호치민은 미국의 OSS와도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일본과의 전면전을 준비했었다. 19458월 일본이 항복 한 뒤 호치민은 전국적으로 총봉기를 일으켰고 9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독립을 선언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한다는 명분으로 북에는 중국 국민당군이 들어왔고 남에는 영국군이 들어왔다. 중국군은 그냥 철수 했지만 영국군은 프랑스를 앞세운 뒤 철수 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려고 했다. 1946년 호치민은 평화회담을 통해 프랑스를 몰아내려 했지만 194611월 하이퐁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민군이 충돌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군이 유리했다. 194710월 프랑스군은 비엣 박을 공격함으로써 베트민 본부를 점령했으나 호치민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1949년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다. 중국이 베트민군을 도우면서 전세는 베트민군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19509월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군을 공격했고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었다. 1951년 베트민군은 프랑스 군에게 총공격을 가했지만 프랑스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탄을 동원하여 총공격을 막아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프랑스군이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 비엔 푸에서 보 응우옌 지압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대패하면서 호치민의 승리로 끝났다.

 

디엔 비엔 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2년 이내 통일을 위한 선거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안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통일을 불발로 끝내버렸다. 결국 호치민과 공산당은 1956년 토지개혁이 마무리한 뒤 1959년 남부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1960년 남베트남에서 응오딘지엠의 독재에 맞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자신이 가톨릭이라는 이유로 가톨릭만 우대하며 민중의90%라 할 수 있는 불교도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636월 사이공에서 틱광둑이라는 스님이 소신공양을 했다. 이를 계기로 응오딘지엠 정권은 전 세계적으로 비난 받았고 결국 CIA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무너졌다. 아이젠하위 정부 때부터 남베트남을 지원해오던 미국은 케네디 정부에 와서는 군사고문단을 파견했고 1964년 린든존슨 정부시기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전에 전면적으로 개입했다.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남베트남에 더 많은 군대를 파견했고 1968년이 되어서는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숫자가 50만을 넘었다. 1965년부터 67년까지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약 2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현재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런 미국의 거짓말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1968년에 발생했다. 구정공세가 바로 그것이다. 19681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총공세를 가했다. 구정공세 당시 사이공의 미 대사관 1층이 공병과 자살특공대에게 점령당했고 구정공세 1달 동안 미군 2천명 이상이 사망했다. 구정공세 이후 미국 내에서 반전 분위기가 높아졌고 결국 그해 11월 북폭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파리에서 평화회담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992일 호치민이 사망했다. 미국은 1969년부터 베트남에서 군대를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1970년에는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1971년에는 라오스를 침공했으며 1972년 마지막 수단으로 크리스마스 폭격이라 하여 대규모의 폭탄공세를 퍼부은 뒤 19731월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1975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3월부터 남베트남을 공격했고 430일 사이공을 함락시키면서 통일을 이룩했다.

 

2.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스탈린이 물었다. “호치민 동지, 여기 의자 두 개가 있소. 하나는 민족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요. 동지는 어디에 앉고 싶소?” 그러자 호치민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스탈린 동지, 나는 두 의자에 다 앉고 싶습니다.” (p621)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통해 자신을 부양하고, 여러분과 싸우는데, 여러 동지들은 왜 식민지를 무시합니까?” (p174)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나를 이끈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심이었다.”

 

호치민에 대한 평가 중에 가장 논란이 많은 평가는 그가 민족주의자냐 혹은 사회주의자냐 하는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의 견해를 얘기하자면 호치민은 사회주의자성향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호치민이 과거 프랑스 공산당과 모스크바 극동국 그리고 공산당을 이끌었던 이유는 베트남 독립오직 그거 하나였다.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라면 자본주의 국가와 협력할 생각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호치민과 베트민이 미국의 OSS와 협력하여 대일전을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거기다 2차 대전 당시 호치민을 만난 미군들(찰스 스펜, 아키메데스 패티, 토마스)은 처음에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의심했다가 그를 민족주의자이자 애국자로 평가했다.

 

호치민은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할 당시에도 공산주의 사상보다는 식민지해방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마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조선독립의 방향을 사회주의에서 찾았듯이 말이다. 즉 호치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식민지해방운동에 기반을 두었던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호치민이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호치민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았던 건 베트남 독립과 통일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지 일부의 주장대로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J듀이커는 호치민을 반은 간디 반은 레닌이라 했다. 책의 저자 말대로 호치민은 간디처럼 민족주의 성향도 있었고 레닌처럼 사회주의 성향도 있기에 반은 간디 반은 레닌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호치민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에 맞서 이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지 그가 민족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하는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호치민이 민족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하는 논쟁은 그다지 의미 없는 논쟁이다.

 

3.호치민의 한계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나 성인군자라 해도 사람은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다. 호치민 또한 마찬가지다. 호치민도 한계가 있었다. 그의 한계를 얘기하자면 하나는 1954년부터 56년까지 북베트남에서 진행되었던 토지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일 것이다.

 

호치민이 토지개혁에 대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던 건 1950년대 부터였다. 호치민과 공산당이 토지개혁을 실행에 옮긴 것은 1954년 부터였고 1954년부터 56년까지 토지개혁의 여파로 북베트남에 거주하던 80만 명(이들 중 60만 명은 가톨릭 교도였다)이 월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토지개혁을 너무 급진적으로 추진한 결과 대략 15천에서 2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부르주아로 몰려 처형당했다. 물론 이런 상황을 호치민이 바랬던 건 아니었기에 호치민은 1956년 당내에서 철저한 자아비판을 했다. 분명한 사실은 월남한 60만 명의 가톨릭교도들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가 내세운 꼭두각시 바오다이 정권과의 커넥션이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그렇지 않은 가톨릭들도 적잖게 있었으나 토지개혁시기 그들도 북베트남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도 토지개혁시기 월남하지 않고 북베트남에 남아있던 90만의 가톨릭교도들은 토지개혁 이후 신앙의 자유를 북베트남 공산당으로부터 보호받았다.

 

어쨌든 1950년대 북베트남에서 진행되었던 호치민의 토지개혁은 무자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월남했으며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래도 호치민은 자신의 실책을 자아비판을 통해 철저히 인정했다. 따라서 높은 지휘에 있음에도 자신의 실책을 인정한 호치민은 훌륭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은 호치민의 최대 실수인 토지개혁을 가지고 그를 악랄한 인물로 평가하는데 이는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설사 호치민이 토지개혁이라는 실책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호치민의 또 다른 한계인 트로츠키주의자 탄압 밑 숙청은 또 하나의 비판의 대상의 될 수 있다. 베트남 내에서 트로츠키파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곳은 사이공을 비롯한 코친차이나 지대였지만 베트남 독립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었다. 1930년대는 소련에서 스탈린이 정권을 잡으면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이단취급을 받게 되던 시기였다. 호치민도 공산당이나 베트민을 이끌면서 베트남 내에 있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탄압했지만 스탈린이 소련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하던 방식(대숙청)대로 아주 비열하고 무자비하게 했던 건 아니다. 1930년대 호치민과 공산당은 일국사회주의를 천명하는 스탈린과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따라서 호치민 또한 소련의 눈치를 어느 정도 봐야했기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배척했던 것이다. 물론 탄압과 배척 숙청 그 자체는 옳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930년대의 상황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호치민이 토지개혁과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비롯한 한계가 있었지만 그 한계가 호치민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될 수는 없다. 즉 이런 한계가 있더라도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영웅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다.

 

4.한국과 베트남전쟁 그리고 월남패망

 

호치민 하면 우리나라 얘기도 빼 놓을 수가 없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전면전에 돌입한 미국을 따라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보냈다. 32만 명이 참전했고 전쟁기간 동안 한국은 남베트남에 항상 5만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한국의 경제성장은 어마어마했다. 좋든 싫든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엄청난 외화를 벌 수 있었고 그 대가로 엄청난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의 지원한 남베트남 정권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시기 프랑스에 부역하여 민족을 배반한 민족반역자 정권이었고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정권이었다. 심지어 남베트남의 관료들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장비와 무기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게 팔아먹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했다. 남베트남은 정통성에서도 북베트남에게 밀렸다. 그에 비해 미군의 적이었던 호치민을 비롯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지도자들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항불 애국지사들이었다.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은 빈호아, 퐁니 퐁넛, 하이마을과 같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고 약 1만 명에서 3만 명이나 되는 라이따이한들이 전쟁기간 동안 태어났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 혹은 반공성전으로 미화했다. 사실상 국회에서도 여야 할 거 없이 베트남 전쟁의 참전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었다. 1975430일 사이공이 함락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의 승리는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긴급초지 9호를 발동했고 민주주의를 탄압했다. 따라서 한국군의 만행과 한국군이 상대했던 적이 자유와 독립 그리고 민족해방이라는 기치아래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세력이자 민족해방 세력이었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 동안 철저히 감춰졌다.

 

당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리영희 선생은 1976년 반공법에 의해 구속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정부가 제시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관점과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오랜 시간동안 대한민국에서는 호치민을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인식해 왔고 베트남 전쟁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 혹은 돈이 되는 전쟁으로 인식되어 왔다. 2003년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이라크 전쟁을 제2의 베트남 전쟁으로 인식하며 이라크전 한국군 참전을 강하게 주장했던 한나라당의 의원들만 봐도 한국사회가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에 대한 수준이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베트남 전쟁>을 집필하여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리영희 선생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한국인들이 베트남전쟁을 이해할 때 허심탄회한 심정으로 대해야 할 일이에요. 미국과 한국정부나 국민들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라며 어떤 동질감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사이 공정권의 모든 분야의 지배세력과 개인들은, 100년에 걸쳤던 불란서 식민지 시기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지배 아래에 있던 4년 동안, 그리고 그 후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시기에, 거의 예외 없이 불란서 식민당국과 일본 식민당국에 빌붙었던, 한국식으로 말하면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이었어. 실례로 200만 사이공정권의 소위 자유반공 군대의 장교단에서, 과거 불란서와 일본 식민지시대에 민족독립해방운동을 한 사람은 육군 중령 한사람이 있었을 뿐이야. 이 중령에 관한 얘기를 미국 극비문서 속에서 봤는데, 지금 그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구먼. 어쨌거나 남베트남 군대는 실질적으로 외세의 용병이나 괴뢰 군대였어.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흔히 남베트남의 저항세력을 베트콩이라고 부르는 민족해방전선’(FLN)군과 호지명 휘하 베트공 세력의 중추 지휘부인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 31명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항불·항일 그리고 물론 현재의 항미 독립투사였어! 그 인적 구성을 보면, 정통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교수, 여성운동가, 간호사, 각급학교 교사 등 지난날의 민족해방투사들뿐이에요. 그들 31명의 경력을 보면 한 사람도 식민지시대에 형무소를 가지 않은 사람이 없어!

 

이 사실 하나만을 두고 보더라도, 베트남 인민이 소위 외세의존, 반공주의 사이공정권과 민족해방세력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민족적 동질감을 느끼며, 어느 쪽에 더 충성을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어요?"

 

글을 마치며

 

호치민은 프랑스 독립운동, 사회주의 운동, 항일투쟁, 1차인도차이나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까지 20세기 역사의 격동의 현장 속에서 베트남 민중들을 위해 그리고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사회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다. 비록 토지개혁에서의 숙청과 트로츠키주의자 탄압이라는 한계도 존재하지만 호치민은 사심 없이 한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바쳐왔다. 무엇보다 호치민은 자신이 높은 위치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독재자로 흑화하지 않았다. 이것이야 말로 호치민의 가장 위대한 점일 것이다.

 

필자는 윌리엄J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인 작년 추석 때 읽었었다. 그리고 이번 달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었다. 호치민 평전을 읽으면서 한국의 역사와 베트남의 역사가 굉장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에 맞서 싸웠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이끄는 사람들이 프랑스 식민지 시기부터 꾸준히 독립운동을 해온 애국지사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살아온 호치민의 일대기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필자가 위에서 쓴 한국과 베트남 전쟁 그리고 월남패망에서도 얘기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한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호치민에 대한 중립적인 평가가 이단 취급 받았었다. 최근 태극기 집회에서는 박원순 서울 시장이 호치민을 좋아하는 종북좌파 빨갱이라는 근거 없는 인신공격을 하기도 했다. 이런 태극기 집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 사람들이 내리는 호치민에 대한 평가는 반공이데올로기적인 색채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필자는 이런 이데올로기적 관점이야 말로 호치민에 대해 전반적인 평가를 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매우 잘못된 관점이자 편향된 관점이라 얘기하고 싶다.

 

지난 3월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묘와 호치민 주석 집무실을 들리며 호치민 주석은 전 인류를 통틀어서도 위대한 인물이라며 매우 극찬했고 베트남 방문에서 한국군의 만행에 대해 유감의 표시를 밝혔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은 정말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이 더 와 닿았던 것 같기도 하다. 무튼 내 주변 사람들에게 정말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호치민을 아는데 있어서 이 책은 필수일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앞으로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더 좋아져 호치민에 대한 양심적인 평가가 국내에서 전반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반공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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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4-10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념이라는 카테고리에 사람,사상들을 가두려는 것은 오래된 수구주의자들의 악의라 하겠죠.
그 카테고리에 민중적 적의를 씌워서 꼼짝 못하게 하려는... 이젠 이런 구태의연한 이념적 잣대에 매몰되어서는 공동체가 함께가는 세상을 열어가기 힘들거예요. 좋은 책 추천 정말 감사드립니다~

NamGiKim 2018-04-10 17:2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봅니다. 이 책 정말 좋은 책입니다. 비록 넘사벽 분량이라 읽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겠지만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30년간 이 책을 쓰기위해 보인 저자의 노력이 보이는 명저에요.

jinkd 2018-05-19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남기님
잘 읽었습니다. 저는 60대입니다. 정년퇴직후 인생 3막을 전남강진에서 다산의 심부름꾼으로 알하고 있습니다. 저역시 베트남에 처음갔을때 너무나 역사가 왜곡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말하자만 호치민은 우리나라의 김구 같았습니다. 2016년 다산초당에서 다산과 만나면서도 너무나 우리가 역사에 대해서 소홀히 하고 너무나 모르고 산다는 생각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중 우연히 강진군 다산기념관 다산교육담당관으로 일하게 되면서 다상 정약용 선생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미래 대한민국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산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할수 있는 기회가 있길 바라면서 다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봐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전남 강진에 오시면 연락주십시요.
010-9120-0295 진규동 박사입니다.

NamGiKim 2018-05-19 09:44   좋아요 0 | URL
긴 글인데도 불구하고 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강진에 계시는군요. 제 이모와 이모부가 강진에서 농사지으며 삽니다. 가끔씩 강진 내려가는데 잘됐습니다.ㅎㅎ 나중에 강진 내려가게 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삼화령 2021-02-24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찰스 펜이 짓고 김기태가 옮긴 《호치민 평전》을 읽고 있습니다. 다음에 읽을 책이 정해졌습니다.^^

NamGiKim 2021-02-24 23:54   좋아요 0 | URL
네 찰스 펜의 책을 읽고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