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세트 - 전10권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이문열이라는 작가를 꽤 좋아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나에게 한국 현대사에게 대해서, 사람의 아들은 내가 믿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삼국지를 삼국지 중 최악의 작품이라고 일컫지만 한국 작가 중에 삼국지를 꽤 재미있게, 그리고 자신의 비평을 곁들이면서(거기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기록한 이들 중에 대중들에게 이만큼 인지도를 얻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나도 그의 삼국지를 통하여 평역이라는 장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서 역사 소설이라는 것을 이렇게 읽는 것이 의미가 있는 거이구나 생각을 했다. 중고등학생 때 삼국지를, 조금 더 커서는 사람의 아들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여러번 읽었고, 끝까지 읽는 것이 고문이리만치 힘들었던 선택이라는 책, 그외에도 수호지를 비롯하여 틈틈히 그의 책들을 읽어 왔으니 나를 이문열 키드라고 불러도 그렇게 큰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문열 키드라고 자칭한 것처럼 그의 책은 내 사고 형성에 꽤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서두에서 밝혔듯이 선택이라는 책은 그에 대한 나의 긍정적인 생각들을 많이 퇴색시켰다. 그래도 이문열이 실수했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 대한 기대를 거두지 않았지만, 몇년전 그의 극우적인 발언들은 그가 실수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한가닥 희망만큼은 잃지 않았기에 이문열 책 장례식을 펼치는 이들을 보면서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비판했었다.

 

  그러다가 이문열의 초한지가 나왔고 초한지와 이문열이라는 조합에 한번 사볼까라는 생각으로 품었다. 그러나 반값 할인을 했던 기회를 놓치고 난 후에 정가를 주고 사기 아깝다는 생각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막내 동생에게 생일 선물로 받아냈다. 책박스 채로 않고 그대로 두길 몇 주... 20권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두번째로 이 책을 읽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기대감으로 책을 폈다가 괜히 폈다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책은 삼국지에 비해서 진도가 안나가긴 하지만 이문열의 글솜씨가 쇠퇴해서가 아니다. 여전히 이문열이구나, 썩어도 준치구나라는 감탄사를 내뱉게 만들 정도로 꽤 재미있다. 다만 삼국지에 비해서 스토리 자체가 가지는 힘이 많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괜히라는 후회를 했던 이유는 한가지다. 그의 서문 때문이다. 서문의 내용을 정리하기 보다는 그 대목들을 있는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 같아서 간략하게 옮겨본다.

 

  5년이 넘는 중국사 장정이 드디어 끝났다. 돌이켜 보면 이 장정은 내 문학의 어둡고 쓸쓸했던 한 계절을 어렵게 헤쳐 나온 궤적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내 문학을 조여 오던 묵살(默殺)의 카르텔은 1990년대 말에 이르러 일방적인 단죄의 선고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판 홍위병들이 그 선고의 어설픈 집행자로서 내 문학의 장례식을 되풀이 거행하자 나도 격렬하게 응전하였다. 그러나 득세하는 인터넷 대자보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며 나날이 괴물이 되어 가던 나는 갈수록 더 흉흉해지는 전의(戰意)만큼이나 주체 못할 피로와 무력감에 빠져 들었다.  ....(중략)...

  한입 가득 불평을 물고 앙앙불락 지내는 사이에 한 시대가 가고 새해가 밝았다. 바라노니, 이제 더는 시대의 아이들과 불화하고 싶지 않구나.(이문열의 서문 중에서)

 

  그의 생각이 나와는 다를 수도 있다. 그가 극우에 서 있을 수도 있다. 그의 발언을 가지고 그의 문학적인 성과들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의 문학적인 성과들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면 논리적인 평을 하던지, 그것도 아니면 요즘 힙합 뮤지션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디스를 하던지 하면 될 것을 그의 책들을 모아서 불태우는 것은 도가 지나치지 않았는가 싶다.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이문열의 분노가 이해가 안될 것도 없지만 문제는 그의 홍위병 발언이 자기의 책을 불태운 이들에 대한 분노라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부모에게 받은 소중한 머리칼을 자르느니 차라리 내 목을 베라."는 말이 단순히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겠다는 멋쟁이의 고집이 아니듯이 그의 홍위병 발언은 자기 문학적 성과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다. 그의 발언은 이것과는 상관없는 정치적인 발언이다. 이미 홍위병 발언은 그 전에 있었고, 전라도 발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여러번 있었다. 이 사실을 간과하면 일의 전후가 뒤집어지게 되며 이문열은 억울한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일의 전후를 뒤바꾸어서 자기를 억울한 희생양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과 다투지 않고 홀로 독야청청하는 탈속한 사람으로 만드는 기술을 보면 이 사람의 글솜씨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의 서문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할말이 많지만 이 정도에서 줄이고, 왜 하필 고전, 그 중에서도 초한지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뜬금없다 여기지 말라. 모든 일에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가 있고, 그 의도라는 것이 글솜씨가 좋은 사람일수록 더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서 술렁술렁 넘어가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고심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초한지는 이미 말했듯이 삼국지에 비해서 재미가 없다. 삼국지가 수많은 등장인물과 전략과 전술, 계략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면 초한지는 무협지라고 해도 무방하다. 항우라는 걸출한 절대 지존이 등장한다. 그는 초반부터 넘사벽이다. 그의 주변에는 기막히 스펙을 자랑하는 그의 부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런데 그의 반대편에 출신도 미천하고 가진 것도 별로 없는 하층민이 등장한다. 그가 어울리는 친구들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개장수, 곡소리꾼, 건달, 하급관리 등등 뛰어난 능력도 든든한 배경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넘사벽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의 주인이 된다. 아마도 이문열은 이런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 시대에 우리를 이끌어갈 영웅을 간절히 소원했는지도 모른다. 일반 시민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현실 앞에서 이건 아니라면서 우리를 이끌어줄 영웅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문열의 기다링 때문일까? 그 영웅이 등장했다. 물론 그 영웅이 진짜 영웅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만 일단 이것은 뒤로 젖혀두고 이문열이 기다리던 영웅의 행적에 대해서 살펴보고 싶다. 아마도 이문열은 항우형보다는 유방형을, 가능하면 항우형과 유방형을 섞은 타입의 영웅이었으면 생각했을 것이다. 이문열은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서 모든 보수 세력을 아우르고 진보진영과 한판의 싸움을 벌리고 최후에 권력의 승자가 되는 영웅을 기다렸을 것이다. 물론 가능하면 이 영웅의 출신이 운동권도 아니고, 장돌뱅이도 아니고 둘째가면 서러워할 그런 가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문열의 기다림이 결실을 맺었던 것일까? 이에 부합하는 한 인물이 등장했고 권력 쟁투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겉보기는 이문열의 바람대로 된 것 같지만 그 실상은 이문열이 제일 꺼려하던 형태로 나타났다. 유방을 베이스로 하여 항우의 스펙이 뒤덮인 것이 아니라, 항우를 베이스로 하여 유방의 교활함이 가미된 것이다. 유방의 교활함과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도 끊임없이 외연을 확장하고 인재를 받아들이고, 몇번을 실패해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전제가 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다. 비교할 수 없는 항우와 유방의 싸움에서 유방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외연의 확장 능력 때문임을 기억한다면 이것이 지도자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에게, 한 진영을 이끌고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사람들에게 맹박이, 쥐박이, MB라는 명칭으로 조롱을 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소통의 부재가 아닌가? 명박 산성이라는 컨테이너 차폐물이 그의 소통 방식의 상징이 아니던가? 그것을 의식해서인지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과의 소통을 많이 거론했지만 수첩공주라는 그의 별명이 의미하듯이 그 또한 소통에 취약하다. 페북을 하고, 여러가지 SNS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소통을 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이란 다른 이의 말을 듣고 반응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타작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이것도 소통이라고 한다면 항우는 소통의 달인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중심으로 자기의 생각을 타자에게 전달하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초한지를 읽으면서 여러모로 생각할 만한 사안들이 많았다. 이게 고전이 가지는 힘인가 보다. 아마도 이것이 이문열이 고전으로 피했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쉬운 것은 홍위병 운운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스탠스와 변명을 저자의 서문에 실어 놨다는 것이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꼰대 정신으로 똘똘 뭉쳐 나는 시대의 피해자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가 정말로 작가의 자존심이 있다면 초한지 서문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나는 시대를 잘못만난 피해자다 주장할 것이 아니라 작가다운 다른 방법을 택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차라리 안도현처럼 절필 선언이라도 했다면 논란은 있겠지만 덜 구차하지 않았을까?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는 서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변신은 김지하의 변신만큼이나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3-09-0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문열 초기작들이 좋습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등등..근데, 진짜 <아가>부터는 뭐랄까, 욕먹어도 뭐라 할말이 없을 정도..이후 저도 이문열 작품에서 멀어져갔지만, 이문열은 확실히 작가로서의 아우라는 있습니다. 요즘 신인작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죠. 그런 포스를 가진 사람이 정치적 행보, 것두 우리나라 보수의 기수로서 발언하는 걸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말씀하신 논의들에 공감 만빵~~이구요, 단지 저는 이문열의 초한지는 아직 읽지 않아서, 재밌는지 살짝 여쭤봅니다.^^

saint236 2013-09-07 15:58   좋아요 0 | URL
이문열인지라 기본은 합니다. 수호지 정도의 레벨은 되는 것 같구요. 다만 삼국지보다 처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같은 평역이긴 하지만, 레벨차이가 나기는 하네요.

마태우스 2013-09-07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욕을 많이 했지만, 젊은 날의 상당부분을 그에게 빚진 것도 맞죠. 그는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였어요. 그 이후의 행적으로 인해 존경심은 싸그리 없어졌지만요. 그가 정말 이해 안되는 게요, 몇백만부의 책을 판 사람이 시대와의 불화 이러고 앉았으면 몇천부 판 작가는 시대의 저주, 뭐 이렇게 말해야 하는 건지요.

saint236 2013-09-08 20:21   좋아요 0 | URL
몇백만부의 책을 팔았기 때문에 자신이 특별하다 생각한게 문제죠

transient-guest 2013-09-11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방을 베이스로 하여 항우의 스펙이 뒤덮인 것이 아니라, 항우를 베이스로 하여 유방의 교활함이 가미된 것이다"는 명문인 것 같습니다.
이문열은 어릴 때 참 좋아했었죠. 그의 독단과 독선이 시원하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고, 나름대로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그의 비판적인 논리도 좋아했었죠. 그래서 한때, 이문열은 좌/우 모두에게서 환영받지 못하는, 솔직한 비판을 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삐진' 그는, 점점 더 그 속으로 빠져들어가다가 이제는 돌아올 수도 없을만큼 그 사람 자체가 바뀐 것 같습니다. 물론 글에서 교묘하게 자기 집안과 자기를 포장하는 것은 전부터 좀 싫었지요.ㅎㅎ 아마도 '변경'을 전후로 해서, 필력이 떨어지고, 이 시점에서 진보를 비판하는 것으로 부족한 글솜씨를 때워가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나저나 무려 '마태우스'님이 댓글을 남기는 것을 보니 saint님이 마구 존경스러워집니다.ㅎㅎ

saint236 2013-09-11 11:0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문열씨는 누구라도 댓글을 달고 싶어 할만한 사람입니다.
 

  국정조사가 실시되고 있다. 국정원의 직원이(댓글녀, 국정원 여직원이라는 호칭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그녀를 국정원 직원이라는 신분으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게시판에 박근혜 당시 후보에게 우호적인 댓글을 달면서 촉발된 사건이다. 국가의 공직에 있는 사람이 개인의 정치적인 의견을 밝히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에서 그 직원은 상사로부터 임무를 하달받고 지속적으로 그 일을 담당했다. 이것만 해도 문제인데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한두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데 있다.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국정원의 조직적인 선거 개입은 과거 중정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시작된 국정원의 선거 개입은 쌩뚱맞게 NLL포기 논란으로 이어졌고, 이는 또 남북 정상회담으로, 그리고 국가기록원에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있는지 유무로 변질되었고, 이는 또 사초논란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언뜻보면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개개로 떼어 놓고 면밀히 살펴보면 그다지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혹시 국정원의 선거개입이라는 대형 이슈를 또 다른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이슈들로 덮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물타기가 아닌가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여하튼 간에 국정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얼마나 정확하고 철저하게 진행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오히려 적당한 선에서 덮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어두운 전망을 해본다. 국정조사를 열기 위해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해야한다는 정청래 의원의 설명도 있었지만 이는 무엇을 위한 국조인지를 잊어버린 실책이 아닐까? 국조를 여는 것보다, 국조의 방향을 초반부터 확실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민주당은 국민의 힘을 믿지 못하는가 보다. 그간 민주당의 전투력이 낮은 것이야 주지의 사실이고, 김한길 체제의 민주당은 유사 이래 최약체가 아닐까? 도대체 뭘했다고 출구전략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원....

 

  여하튼 이런 문제들은 뒤로 미뤄두고, 요즘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막말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요즘들어 막말이라는 헤드라인을 뽑는 것이 대세인가보다. 더군다나 그 막말이라는 것이 대개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특정 언론사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특정한 의도가 있다고 의심하게 만든다. 대충 뽑아보면 "이해찬의 당신 논란", "홍익표 원내 대표의 귀태 논란", "박영선 의원의 저게 국정원장이야 논란"이다. 이외에도 많지만 중요한 이슈가 되었고, 거의 모든 신문사들이 톱으로 다루었던 내용들이다. 새누리당은 이 발언들을 문제 삼으면서 야당을 공략했고, 민주당은 이 공격앞에 무력하게 넘어지면서 국민들의 마음에 실망감을 심어 주었다. 그런데 말이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여당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도 만만치 않다. 아니다. 그보다 더하다는 것이 맞겠다.

 

  대통령을 향하여 당신이라 부르는 싸가지가 어디있는가라는 말은 환생 경제하나로 올킬이다. 홍익표의 귀태논란도 물론 환생 경제 하나로 올킬이다. 왜 환생경제를 들먹이냐고? 이만큼 확실한 물증이 어디있는가? 노무현 대통령을 향하여 종북논란, 경포대 운운했던 것은 귀태보다 더 못한 것이 아닌가?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이들이 귀태발언을 문제 삼는 것은 철저한 로맨스 입장이 아닌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 정신 말이다. 박영선의 저게쯤이야 찜쪄먹는 발언들이 과거 한나라당에 많았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홍준표 도지사가 의원 시절에 "이대 계집애" "패 죽이고 싶다." 박희태 전 의원의 "개자라도 꺼내는 놈은 개패듯이 패줘야 한다.", 강용석 전의원의 "다 줄 생각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되고 싶으냐?" 등등 너무 많아서 생각도 안난다. 나는 지금 민주당을 편들고 싶어서 이러는게 아니다. 다 막말을 했고, 그 막말 때문에 파장이 컸고, 정치인들이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번 막말 파장은 일부터 키운 낌새가 있다는 것이다.

 

  생각을 해보자. 막말 논란이 있을 때마다 중요한 정치적인 사안들이 얽혀왔다. 특별히 귀태 논란과 저게 논란은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과정 속에서 나온 말이다. 국정 조사가 "바른말 고운말"은 아니지 않는가? 철저하게 공격과 방어가 논리와 증거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논리와 증거는 사라지고 모르쇠와 오리발로 일관하다가 막말 쓴다고 품위가 없다고 공격한다. 그렇게 품위 따지시는 분들이 소화기 들고 서로에게 뿌려댔던가? 논리와 이성, 증거만 있으면 된다. 아니면 증거로 반박하면 된다. 괜히 말꼬리 잡지 말고...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다. 말꼬리 잡는 놈 치고 떳떳한 놈 없다는 것 말이다. 논리가 궁색하니까, 말꼬리 잡고, 이성적으로 안되니까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결국 처음의 논의는 사라지고 개싸움만 남게 되는 것, 이것이 말꼬리 잡기가 밟아가는 수순이 아닌가? 국정원 조사를 그런 식으로 개싸움장으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된다.

 

  문득 김병만의 개그가 생각이 난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랜 세월 모르쇠와 오리발로 내공을 닦아오시고, 이번 국조를 맞이하여 하산하신 말꼬리 잡기의 달인, 모든 논리와 이성을 개싸움으로 변모시키는 언어의 마술사 "어휘 신세계 선생"이십니다.

 

  이런 전개가 아니길 기대해보지만, 기대란 놈이 참 묘해서 자꾸 배반을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ransient-guest 2013-08-14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말하면 잔소리가 되는거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선을 넘었다고 봅니다, 지금의 정국은 말이죠. 따라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이슈제기로는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구요. 촛불이 10만이 모여도, 저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혁명은 피를 수반해야 한다는 말이 진리라고 생각이 드네요. 그런걸 보면 어느 순간, 체념하고, '그만하면 됐다'로 끝을 보는 대다수의 우리들은 참 어리석고 약한 것 같아요. 씁쓸합니다.

saint236 2013-08-15 23:45   좋아요 0 | URL
그래도 아직은 광화문에 촛불이 밝혀지네요. 이 촛불이 꺼지면 혹시 또 모르죠. 누가 초를 살 돈을 줬는지 조사해보라는 명령이 내려질지.

transient-guest 2013-08-16 01:05   좋아요 0 | URL
정부수장 인선을 보면 과거 독재시절의 공안파들이 속속 입성하는 것을 보는데요, 아마 뒷조사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겁니다. 민주주의의 후퇴가 아니라 지난 부정선거를 계기로 60년대로 돌아간거에요. 사실상 독재인거죠. 언론장악만 봐도 그렇잖아요. 한숨만 나네요.

saint236 2013-08-16 21:24   좋아요 0 | URL
어제 광화문을 지나가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곳에 다시 탱크가 깔리는 것은 아닐까? 요즘 들어서는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7년 12월 13일 알라딘을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리뷰를 작성했던 책은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 그 이후로 만 6년이 되어가네요. 그동안 많은 분들을 만났고, 많은 분들을 떠나보냈네요. 그래도 오래오래 여기 눌러앉으신 알라디너들의 글을 볼 때마다 반가움에 알라딘을 떠나지 못하네요. 화이팅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 18세기 조선경제학자들의 부국론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국사 시간에 실학에 대해서 배웠을 것이다. 이론을 가지고 박터지게 싸우는 성리학에 반발하여 실사구시라는 명목하에 실생활과 밀접한 내용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학파라고 말이다. 이 학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즈음에 태동하여 정조 시대에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세도 정치 때문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가 조선 말에 젊은 개혁가들을 통하여 새롭게 부상하게 되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수면 밑에서 실학은 꾸준하게 연구되었으며, 이 학문의 사조가 조선 개항시에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그러니 굳이 이름도 어렵고 용어도 생소한 외국 경제학자들을 끌어들이지 말고, 그들 때문에 주눅들지도 말 것이며, 한국의 실학자들(저자는 이들을 경제학자라 지칭한다.)을 연구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라. 이게 320페이지의 분량으로 13명의 경제학자들의 삶을 살펴본 저자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내개 글의 서두에서 이렇게 책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고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꽤나 이 책에 대해서 불편함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이다. 물론 한번은 읽어보면 좋은 책이라는데는 동의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후하게도 이 책에 별점을 세개를 주었다. 13인의 실학자들이 이런 학문적인 흐름 속에서 이러한 것들을 연구했구나 정도 아는 데에는 꽤나 도움이 된다. 더군다나 생소했던 여성 실학자에 대한 부분은 꽤나 참신하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그마치 "조선을 구한"이라는 타이틀에는 동의할 수 없다. 바로 이 부분이 내가 이 책을 삐딱하니 바라보는 이유이다.

 

  실학! 이 글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좋은 것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정약용을, 어떤 이는 조선의 근대화를, 어떤 이는 허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난 실패를 떠올린다.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난 실학을 실패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학문의 방향이 잘못되어서 실패했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 실사구시는 당시 조선이 나아갈 방향은 맞다. 다만 왕조국가(입헌군주제가 아니라)에서 이념이 아닌 실리를 추구하는 학문이 결실을 맺고 정착되기 위해서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바로 이 부분에서 실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세종이라 불리는 정조의 시대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떤 이들은 영정조를 조선 후기 중흥의 대명사로 지칭하지만 난 이덕일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에 진정한 중흥기는 영정조시기가 아니라 정조의 시기라고 본다. 영조는 터무니 없이 왕위에 오래 앉아 있으면서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이념 투쟁으로 그의 치세를 소진하지 않았던가?

 

  맹자가 왕도론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하늘의 때는 땅의 이득만 못하고, 땅의 이득은 인화만 못하다." 그렇다 실학이 실패한 이유는 실학이 요구되는 시대적인 요청이 있었고, 여러가지를 연구할만한 외적인 여건이 구비되어 있지만 단 한가지 이들이 뜻을 자유롭게 펼 수 있도록 지배층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데 있다. 이들 또한 정조 사후에 복잡한 정치 속에서 남인이 숙청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지 않았던가? 오랜 세월이 흘러 조선이 망하고 대한민국이 건국된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들을 재조명하게 된 것이 솔직하게 실학의 현주소가 아니던가?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실학이라는 이름은 들었고, 유명한 학자들의 이름은 시험에 나와서 공부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연구했는지, 그들의 연구서는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더군다나 그들의 학문을 깊이 연구해서 현대에 경제학으로 되살린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게다가 설령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멜서스, 아담 스미스, 칼 맑스를 지껄이기도 힘든 오늘날 이러한 학문적인 성과가 얼마나 대중들에게 읽혀질 것인가? 여러가지를 고려한다면 실학은 새로운 시도였지만, 안타깝게 꽃을 피우지 못한 학문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감히 조선을 구했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해도 조선을 구했다는 말은 과하다. 차라리 부제로 씌여진 18세기 조선 경제학자들의 부국론이 이 책의 제목으로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끔 역사를 즐겨 공부하는 이들 중에 이상한 사람들을 본다. 대표적인 예로 환빠를 들 수 있는데 세상의 모든 민족과 역사가 한민족을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심지어는 유태교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는 우리나라의 고대 설화 속에 등장하는 여와에서 파생되었다는 식의 억지 주장은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 우려는 금치 못하게 된다. 최초의 금속 활자가 구텐베르그보다 훨씬 더 전에 발명되었다는 것을 가르치며 자랑스러운 문화 유산을 강조하지만 그것가지고 뭐했는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 않는가?

 

  역사는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한다. 어느 한면만 바라보고서 내 입맛을 고집하면 NLL 발췌 발언을 일삼은 모모모 당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저자에게 솔직하게 묻고 싶다. 정말 다각적인 면에서 판단해서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인가? 혹 사람들의 기묘한 애국심을 자극해서 책을 팔기 위해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은 아닌가? 꽤 괜찮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열받아서 열대야가 한창인 이밤에 뜨거운 방에서 끄적거려 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13-07-31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왕도론의 천-지-인 등급이 사실 현실보다는 이상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천운이 없으면 무엇인가 큰 일을 이루는 것이 매우 어렵지요. 오죽하면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천운은 타고 나는 것이기에, 지나 인을 얻으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많은 것을 이룰 수는 있겠지요. 큰 부자도 그렇고,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고 하잖아요.

위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크게 공감합니다. 수정주의적인 역사인식이 사실 참 위험한 것이 있어요. 어떤 시각을 가지고, 역사책을 쓰면 또, 결론을 정해놓고, 자료를 취사선택하여 왜곡하게 되는 경우도 (작가의 본의와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발생할 소지가 높다고 봅니다. 그저 하나의 시도로써, 또는 심하게 기울어진 축을 땡겨오는 방편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조금 잠잠해졌지만, 환빠의 시작도 그러했지요.

saint236 2013-07-31 21:53   좋아요 0 | URL
환빠는 어찌나 당황스럽던지요...역사는 공부할수록 어렵네요 팩트를 근거로 합리적 해석을 내린다는 것이요. 그래서 과거에 식자층들이 그렇게 역사를 살폈는지도 모르겠네요
 
코스모스 - 특별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 윤동주 시인을 참 좋아한다. 자기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자기의 내면을 바라보며 갈등하는 그의 치열한 시가 좋고, 소년처럼 수줍게 세상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그의 동심이 좋다. 그런 그의 시 가운데 내가 유달리 좋아하는 시가 있다.

 

  서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그 한 구절에 내 마음이 콱 박힌 것이다. 별을 노래 하는 마음이라...어떤 이는 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어떤 이는 우주를 향한 꿈을 키워가고, 어떤 이는 사랑을 속삭인다. 별을 동경과 신비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대하는 것, 그리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윤동주가 말했던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세이건의 책을 보면서 윤동주의 서시를 얼마나 읊조렸는지 모른다. 세이건이 비록 방법은 다르지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책 읽는 자세를 고쳤던 것이 몇번인지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라면서 수도 별을 봤다.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우리 인류의 이야기이다. 인류가 생긴 이래 밤 하늘의 별을 안 본 사람은 없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저 별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별의 역할은 무엇이지, 누가 저 별을 저 곳에다 가져다 놓았을까 등등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 것이다. 이 질문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문학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신화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노력했을 것이다. 물론 과거에는 신화적인 설명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고, 오늘날에는 과학적인 설명이 주를 이룬다는 차이는 있지만 최대한 성실하게 진심을 담아서 설명했다는 것에는 동일하다.

 

  칼세이건은 이 책을 통하여 과거의 비과학적인 점성술들을 비판한다. 별들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비과학적인 것에 집착하기 보다는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별은 어떤 과정을 밟아가면서 탄생하고 성장하고 소멸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과학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모토를 신봉하던 그 시대이니만큼 그는 자기의 신념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폄하하던, 그리고 깎아 내리던 별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법들 또한 진심으로 별의 신비에 대하여 경의와 경건함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거칠게 다루자면 세이건의 방법과 그가 비판했던 방법들이 방향만 다르지 자세에서는 동일하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철저하게 과학자의 시각으로 우주를 분석하는 세이건의 모습을 보면서 이정도면 또 다른 종교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은 원래 텔레비전 다큐프로그램으로 제작되었던 것을 책으로 풀어 놓은 것이다. 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교양서적으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 중 앞 머리에 위치한 책이다. 어떤 이는 기대감으로 이 책을 읽지만 재미 없다고 덮어버리고, 어떤 이는 새로울 것이 없다고 덮어버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들이 우주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여러 잡지를 통하여 접했을 것들이기 때문이다. 코스모스가 첫 방영된지 벌서 30년이 흘렀으니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우주 과학 분야에서 이 시간은 거의 기원전과 같이 먼 시간이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이건의 이 말에 그 이유가 담겨 있다.

 

  너와의 만남은 신의 축복이다. 수십 억, 수백 년의 우주 시간 속에 바로 지금,  그리고 무한한 우주 속에 같은 은하계, 같은 태양계, 같은 행성, 같은 나라,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당신을 만난 것은 1조에 1조배를 곱하고 다시 10억을 곱한 확률보다도 작은 우연이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시선이 흔히 생각하듯이 날카롭고 차갑지 않고 이렇게 뜻할 수도 있다니! 우주라는 거대한 세계를 탐색하는 그의 눈은 우주 이외의 것들을 하찮다고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그들을 우주처럼 무겁게 여긴다. 우주가, 더 나아가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최고의 선물인 우리의 이웃에 대하여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세이건의 모습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가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우주 산업이란 이름 하에, 나로호를 쏴올리기 위하여 그렇게 애를 쓰지만, 그것이 순수해 보이지도 않고, 경이스러워 보이지도 않고 신비해 보이지도 않는 이유 또한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세이건의 책을 덮었지만 난 여전히 오늘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밤하늘을 바라본다. 그런데 별이 보이지 않는다. 시대가 별을 볼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가 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3-08-17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제가 좋아하는 스탈은 아닌데, 읽을 때 큰 감동을 얻었던건 기억이 나네요.

'너와의 만남은 신의 축복이다.' 위에 인용하신 글, 너무 좋아요.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 오늘 내일 모레 이 이야기 써 먹어야겠어요.

너와의 만남은 신의 축복이다.

saint236 2013-08-17 12:14   좋아요 0 | URL
칼 세이건이 우주를 대하는 태도는 경건하다 못해 종교적이라고 할 수도 있더군요. 한용운이 말했던 것처럼 칼 세이건에게는 우주가 님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