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탄생 - 다빈치에서 파인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전에 읽었던 책 중에 이어령씨의 "디지로그"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표지에 적힌 문구를 보면서 왠지 이어령씨의 디지로그가 떠올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어령씨가 추천을 한 책이었더라. 약간은 두껍고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개념,예술적인 개념을 결들여 설명하는 책이기 때문에 상당히 난해하다고 느낄 법도 하다. 아마 외국에서 일반인들이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교육이 문제일 것이고, 외국인들도 이 책을 쉽게 읽지 못하고 일부 지성인들에게 읽혀지고 있다면 이 글을 쓴 작가의 문제일 것이다.  

  여하튼 이 책의 논지는 간단하다. 지금까지 역사는 비범한 천재들에 의하여 발전해 왔는데 천재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천재는 자기 분야에만 똑똑한 편협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도 아니요, 논리적인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천재는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인 사람이며, 음악과 예술과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그 창조성을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저 우연히, 혹은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과학이든, 수학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어느 한 분야로 나가게 되었지만 그들의 관심이 약간만 다른 분야로 나갔어도 그들은 그 분야에서 성공하지 않았을까? 문학 전공자가 조각가가 되고, 과학 전공자가 시인이 되며, 집에서 땅을 파고 놀던 아이가 시인이 되고, 곤충학자가 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애초에 말라 비틀어져 버린 천재들의 대열이 왜 외국에선 가능한 것인가? 교육의 문제가 아닐까? 

  이 책에서 진정한 천재, 창조적인 사람은 자유로운 생활과 사고, 그리고 호기심 탐구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음악적인 사고, 수학적인 사고, 과학적인 논리성 등, 다방면에 걸친 사고의 틀이 직관을 통하여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데 과연 이러한 직관과 창조가 한국에서 가능할까?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교육은 대입을 최고의 목표로 둔다. 대입을 위해서는 국어 한자, 영어 한 단어,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풀어야 하지만, 체육과 음악과 미술은 무시해도 좋을 그런 과목이 되어 버렸다. 음악은 학교 종이 땡땡땡만 외우면 되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음악을 전공할 사람이 가곡을 즐기고, 기타 연주를 즐기는 순간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미대 입시생이 아닌 이상은 미술을 깊이 파고 들면 안된다. 체대 입시생이 아닌 이상은 구기 종목도, 과외 활동도 모두 포기해야 한다. 이게 한국의 교육이 아니던가? 이시에 성공해서도 그림 하나 못그리는 대학생, 문학하나 모르는 지성인, 소크라테스와, 맑스 조차 모르는 학사 석사들이 두루 넘쳐나는 세상이 아니던가? 단순 무식한 일꾼을 만들어 내는 교육 속에 우리들의 창조성은 메말라 비틀어 죽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것도 BK21이라는 허울 좋은 지식 산업이라는 타이틀 하에서 말이다. 돈이 되지 않으면 학문으로조차 여겨지지 못하는 아주 이상한 세대를 살아가면서 이 당에 천재가 태어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절대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내 현실이 너무 슬플 뿐이다. 

  21세기는 창조성의 시대다. 더 이상 포디즘이 먹히지 않는 포스트 포디즘의 시대에 포디즘에 적합한 교육을 고집하고, 그 교육을 강화하는 오늘의 어처구니 없는 교육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부에 목을 매고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공부하는 한국 학생이 주말에 파티를 즐기면서 공부하는 외국 학생들에 비하여 창조성과 능율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번쯤은 깊이 생각해 봐야할 문제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분명 통합적인 사고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구조로 변하게 될 것이다. 기존에 있는 것들을 통합하여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는 유형의 창조가 사회를 변화시켜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두말하면 자소리가 될 것이다.  

ps. 차라리 각주를 달아라. 각주를 달지 않고 책의 측면에 기록했기 때문에 집주하기 어렵고 지저분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짐 

  요즘은 B급이 트렌드인가 보다. 우석훈씨도 그렇고, 봉준호 감독도 그렇고, 김규항씨까지. 무엇인가 책을 내 놓을 때 자신들은 A급이 아니라 B급이라고 한다. 그런데 왠지 그 모습이 그렇게 좋아보 이지만은 않는다. 뭐랄까? 사회적으로 팽배해 있는 겸양의 분위기에 자기도 모르게 물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자기 생각에 대해서 일정부분 채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론 마케팅의 일환으로 느껴지기도 해서 말이다. 여하튼 B급 좌파 김규항이라는 말에 이 책을 살짝 머뭇거렸다. 몇 번의 고민 끝에 책을 사서 읽게 되었는데, 글쎄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왜 센세이션을 일으켜야 하는지 모르겠고, 이 책이 왜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질타와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는 한 이 책은 상당히 가볍게 쓴 책이다. 인간의 예수만 부상시켰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게 부상시킨 것도 아니다. 이정도면 인간예수를 논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하다 싶은데. 오히려 양호하달까? 인간의 예수를 조명하는 책이라면 적어도 한국기독교 연구소에서 나오는 역사적 예수시리즈들을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이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적절한 마케팅과 얇은 분량과 기독교 비판이 적절하게 만나서 이루어진 우연의 산물이 아닐까? 학적으로도, 그렇다고 논리적으로도 다른 책들에 비하여 많이 빠진다는 것은 일단 집고 넘어가자. 저자가 스스로 B급이라고 하지 않던가?(절대 저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단지 다른 책들에 비하여 떨어짐을 지적하는 것일뿐!) 

  예수에게는 두 가지 측면의 모습이 공존한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원자인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즉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예수이다. 다른 하나는 200년 전 갈릴리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피억압민족의 아들로서 살았던 역사적인 예수이다. 전자가 그리스도라면 후자는 예수요, 전자가 믿음의 대상이라면 후자는 따라감의 대상이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 이 바른 신앙의 모습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예수를 믿기는 쉬워도 예수를 살기는 어렵다. 전도의 초기 이제 막 탄생한 한국 교회는 두 가지를 모두 지고 갈 수 없었을 것이고, 포교에 조금은 더 쉬운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것만으로 부족한지,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복신앙마저 함께 내세웠다. 그 결과 만들어진 구호가 “예수를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지만, 복의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들을 무시했고 산업시대를 겪으면서 삼박자 축복을 통하여 활짝 꽃을 피웠다. 그리고 산업화가 정리되어 가는 지금에 와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지금에 와서 한국 교회는 포기하였던 예수 살기의 모습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이르렀다. 누가 봐도 답은 뻔하다. 예수 살기를 다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앙의 매몰비용이라고 할까. 아니면 신앙의 경로 의존성이라고나 할까? 지금까지 따라왔던 B급 신앙을 버리지 못하면 이 땅의 한국 교회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 것임에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방을 비난하는 오만을 보면서 절망을 느끼는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더군다나 장로 대통령이라는 미명하에 친정부적인 설교를 행하고 정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더 절실히 예수 살기에 대하여 갈망하게 된다. 

  예수는 분명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당에 왔고 십자가를 졌다. 이러한 모습을 비난해서는 안될 것이다. 종교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타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면 기독교를 비판하는 그 사람들도 자신들의 주장과는 달리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기 쉽다. 그러나 이것을 포기하라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차라리 죽으라는 것과 같다는 것임을 분명히 기억하라. 이슬람에게 알라를, 불교도에게 부처를, 일본인에게 천황을 부인하라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임을 기억하라. 그러나 기독교인들 또한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반복음적이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 놓을 것이 아니라 약자들과 함께 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기억해내고 따라가야 할 것이다. 단지 이것만이 B급 신앙에서 A급 신앙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10년 후 한국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 약자와 호흡하는 교회, 세상의 빛과 소금인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이 시대의 구레네 시몬이 많아지길 소원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6-20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굉장히 공감가는 서평이네요!
이책은 참...기독교인으로서 보기엔 너무답답하더라구요..

saint236 2009-06-23 10:01   좋아요 0 | URL
답답하죠. 이 책이 파장을 일으키는 사실도, 또 기독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당연한 이야기가 힘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답답하죠.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를 리뷰해주세요.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
권진.이화정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 

  왠지 그 남자 작사, 그 여자 작곡, 혹은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를 연상기킨다. 그래서 책을 열기 전에는 서울이라는 공간 안에서 뉴욕 출신의 남자와 도쿄 출신의 여자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식의 스토리를 기대하고 책을 열었다. 그러나 낚였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그냥 서울에서 살고 있는 몇몇들의 신변잡기적인 삶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을 빌려 기록하고 있을 뿐 새로울 것이 없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류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되어, 그것도 이정도의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하게 이해가 안된다. 아마 서평 도서가 아니었다면 나로서는 절대로 사보지 않았을 책일 것이다. 일단 나와는 너무나 취향이 다른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평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마지막까지 책을 넘겼고, 그 가운데에서 얻은 것이 몇 가지가 있어서 적어본다. 내가 볼 때 이 책은 위에서 이야기한 딱 두가지의 단어로 정리가 된다. 첫째 한없이 부러움을 느껴본다. 어찌되었던 용기를 가지고 낯선 곳에 가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다. 나는 과연 어디를 가봐던가? 외국은 고사하고 이렇게 훨훨 날아다녀봤던 적이 있었는가? 삶에 매리고, 책임감에 매여서 자유를 상실하고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고국을 떠나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한없이 부러움 자체다. 

  그러나 동시에 서글픔을 느낀다. 한국에서 몇 년을 살건 여전히 타자요, 이방인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의 현실이 참 서글프다.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일을 위해 열심히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 문화를 익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한국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에 대하여 조금 잘 알고 있는 이방인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한국 사회의 특징이 있지 않을까? 창조성과 자유를 끊임없이 억압하여 획일하하느 획일주의. 그리고 이방인을 포용하지 못하는 편협한 폐쇄주의. 21세기 세계화 시대를 세계화를 외치며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이다. 진정한 세계화와 개방을 위해서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는 많은 이드, 그리고 한국에 시집온 많은 여인들, 한국에서 뿌리내리고 살고,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많은 이방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들을 이방인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 나도 아직 세계화 하기엔 멀은 것 같아 서글픔을 느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이준구) - 이준구 교수의, 이념이 아닌 합리성의 경제를 향하여
이준구 지음 / 푸른숲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일 한나라당 당사에서 국토 해양부 장관이 4대강 정비사업을 보고하고 있다.
 

   어제 뉴스를 보다가 깜작 놀랐다. 요즘 워낙 시절이 하 수상하고 강아지들이 판치는지라 뉴스를 며칠 끊었다. 그러다가 둘째 녀석 잠을 자지 않는 관계로 뉴스를 보게 되었다. YTN 뉴스를 시청하다가 돌발 영상이 나오길래 관심을 갖고 보게 되었다. 이미 한번 없어졌다가 다시 부활한 코너인지라 열심히 보고 있었다. 한나라당의 쇄신안을 논의하는 자리였기에 "얘네가 이번에는 무슨 짓을 하려나?" 관심을 갖고 보던중 왠 이상한 아저시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 밥에 그 나물이라 생각하면서 관심을 갖지 않아서 어제 뉴스를 보고 이 양반이 국토 해양부 장관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왠지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것이 "이 형님도 한건 지대로 해 드시겠군."생각하며 썩소를 날리던 중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3조원이 더 추가로 편성된 4대강 정비 사업을 한다고 한나라 당에 보고를 하러 온 것이다.  

  국민들이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반대가 만만치 않은 사안인지라 피가 터지게 머리를 싸매고 토론을 벌여도 시원찮을 판에 정말 간략하게 보고를 하더라. 오죽하면 보고할 수 있는 시간을 줘서 고맙다고 장관이 감사했을까? 당쇄신안을 논의하는 그 자리에서 국민들이 그렇게 반대하고 논의하자고 이야기하는 그 중요한 사안을 그렇게 날림으로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쇄신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가야하냐?"를 물어 보면서 보고하는 그 시간에도 딴짓하는 한나라당 의원을 보면서 화가 났다. 도대체 저 양반들이 이런 마음으로 무엇을 쇄신하겠단 말인가? 그리고 왜 대화하겠다고,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안하겠다고 말하던 정부에서 4대강 정비 사업을 3조나 더 추가 편성해서 밀어 붙이고 있는가? 도무지 녹색 뉴딜이란 무엇이며, 그 정책의 골자가 되는 4대강 정비 사업이란 무엇인가? 다른 나라에서는 있던 것도 듣어 내는 판에,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몇 년전에 덮었던 청계천도 뜯어내시던 판에 4대강 정비라는 말은 무슨 넌센스란 말인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답답함을 느끼던 차에 4대강 정비사업의 뉴스는 내 마음을 꽉 막아 버렸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토목 건설로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시대적인 발상을 아직도 하는 분들이 청와대와 여의도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황당했다. 당장 예산이 없어서 빈곤층 정부 보조그미 줄어드는 마당에, 복지 정책을 실행할 자금마저 줄이고 있는 마당에 저게 무슨 뻘짓이라는 말인가? 역시 건설사 CEO를 역임하셨던 분이라 이리도 삽질에 도통하신 분이었던가?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작년 쇠고기 파동 이후로 얼마나 딸에게 미안했던지. 이제 막 태어난 그 녀석이 무한 경쟁의 시대로 들어가게 만든 것이 마치 나인양 미안했는데. 그래서 침대에서 뒤집기를 하던 어린 녀석의 손을 붙잡고 "아바가 미안해."를 얼마나 외쳤던가? 이번엔 뒤집기도 못하는 둘째에게 딱 1년만에 "아빠가 미안해."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권을 아마추어 정부라 이야기하던 현 정권의 실세들이 이처럼 아마츄어리즘의 선두주자가 될 줄은 몰랐다. 소통이 없고, 국민은 그저 때리면 맞나보다 생각하고 있는가? 맘에 안들면 빨갱이라 말하면서, 시장 지상주의를 외치지만 시장의 원리를 무시하는 이분들의 모순과 무책임은 누가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내 자식들은 도대체 무슨 죄로 앞으로 그렇게 큰 재앙을 당해야 한는가? 그저 이 땅에 태어났고, 사회가 전반적으로 오른쪽으로 돌아간 시기에 태어난 죄밖에 없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얼마나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을 것인가? 

  어릴적 사회를 배우면서 배웠던 시장에 관한 정의가 생각이 난다. "시장은 시장의 원리에 의하여 움직인다. 정부는 야경 국가에 머무르는 것이 최상이다." 작은 정부론이다. 그땐 그것이 최선인줄 알았다.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학설을 달달 외우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지면서 작은 정부는 사실 무한 경쟁과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선진국들은 반대의 방법을 사용하여 자국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 또한 마찬가지의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철지난 신자유주의를 들고 나와 이것이 정답이라 외치는 정부를 보면서 "돌아이 아니가?" 생각하는 마당에 이건 뭐. 병진도 아니고... 

  시장은, 경제는 오른쪽이 아니라 옳은 쪽으로, 합리적인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100% 동의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보수적인 저자로부터 듣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내가 보기에 분명 보수적인 저자가 빨갱이요, 좌파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사회가 미쳐 돌아간다는 생각도 그래서 하고. 

  정부는 한번쯤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경제는 오른쪽이 아니라 옳은 쪽으로 향해야 하며, 이념이 아니라 합리성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안혹 무시된다면 아마 나도 한국을 떠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답답한 마음에 여기에 끄적끄적댄다. 

  "쿠오바디스 도미네"를 외쳤던 베드로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쿠오바디스 한국 경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0℃>를 리뷰해주세요.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추억의 백골단(어느 님의 블로그에서 무단으로 퍼옴)
 
  난 97학번이다. 막 신입생이 되었던 나를 선배들이 불러서 소위 말하는 의식화 작업을 했다. 96년도 연세대 한총련 사태를 보면서 "쟤네 왜 저러냐?" 생각하던 나에게 선배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위험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 내 마음이 온통 끌렸던 것은 진실이 가지는 힘 때문이었다. 그 두렵고 살떨리는 한양대 앞에서의 한총련 출범식에도 참석했고, 장충동 공원에서의 메이데이 참가 또한 왠만한 결심으론 어려웠던 일이었다. 항상 우리가 가는 곳에는 전경이 있었고 백골단이 있었다. 지금이야 추억의 사진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전경보다 더 무서운 백골단들이 있었다. 골목에 숨어 있다가 운동화에 청바지 차림으로 날렵하게 대열을 치고 들어와 시위하던 이들을 잡아가던 백골단들(지금 체포 전담반과 비슷하지 않을까?)  

  여하튼 그들을 만나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어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심히 가투에 참가했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도 후회하지 않는다. 당연히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내 마음에 힘을 주었던 노래가 바로 노찾사의 이 산하에서였다.  

 

   이 산하에(노래를 찾는 사람들)  

  기나긴 밤이었거든 압제의 밤이었거든 우금치마루에 흐르던 소리없는 통곡이어든
  불타는 녹두벌판에 새벽빛이 흔들린다해도 굽이치는 저 강물위에 아침햇살 춤춘다 해도
  나는 눈부시지 않아라  

  기나긴 밤이었거든 죽음의 밤이었거든 저 삼월하늘에 출렁이던 피에 물든 깃발이어든
  목메인 그 함성소리 고요히 어둠깊이 잠들고 바람부는 묘지위에 취한 깃발만 나부껴
  나는 노여워 우노라  

  폭정의 폭정의 세월 참혹한 세월에 살아 이 한몸 썩어져 이 붉은 산하에 살아
  해방의 횃불아래 벌거숭이 산하에  

  기나긴 밤이었거든 투쟁의 밤이었거든 북만주 벌판에 울리던 거역의 밤이었거든
  아아 모진 세월 모진 눈보라가 몰아친다해도 붉은 이 산하에 이 한 목숨 묻힌다해도 
   나는 쓰러지지 않아라  

 

  역사에 스러져간 민중들의 삶이 손에 잡히는 듯해서 좋았고, 내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좋았고, 이 나라가 바뀔 것이라는 희망이 좋았다. 그 뒤로 10년이 흘렀다. 요즘들어 다시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세상이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말이다. 빈번한 공권력의 투입과 자기편이 아니면 빨갱이라 부르는 독선. 소통을 거부하며 실체없는 민족과 민중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위선. 최루탄과 화염병, 그리고 빠이가 없을 따름이지 그 시절과 도대체 다른 것이 없다. 이것들을 위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피흘렸던가? 이한열, 박종철이 젊은 나이에 산화하였던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이제 돐이 지난 딸 아이에게 왠지 미안했다.  이 모든 일이 내 책임인 것 같았고, 내 죄인 것만 같았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읽었다. 뜨거웠던 6월의 기록들. 영호라는 학생의 집에 있었던 일은 그 당시 어느 집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이야기였고, 우리 집에서도 발견될 수 있던 이야기였다. 젊음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고, 피흘려 얻은 것이 무엇인가? 참정권이며, 투표권이 아니던가?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와 눈물과 빼앗긴 젊음과 생명들
우리는 그것의 댓가로
소중한 백지 한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통받던 이는 고통이 사라지길 바랐고 누울 곳 없던 이는 보금자리를 바랐고 차별받던 이는 고른 대접을...
그렇게 각자의 꿈을 꾸었겠지만  

우리가 얻어낸 것은 단지 백지 한 장이었습니다.

조금만 함부로 대하면 구겨져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잠시만 한눈을 팔면 누군가가 낙서해 버릴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꿈꿀 수 없는 약하면서도 소중한

그런 백지 말입니다. (171페이지 인용) 

 

  그렇다 우리가 얻은 것은 백지 한장이다.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여기고 놀러 가느라 쳐다보지 않는 백지 한장은 수많은 이들의 생명과 피땀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았는가? 백지 한장의 소중함과 무게를 기억할 때이다. 거기에 담긴 생명과 희생을 기억할 때이다. 백지 한장이라고 우습게 여긴다면 그 백지 한장을 얻기 위해 스러져간 생명들을 우습게 여김이요, 그 마저도 빼앗겨 버릴 것이다. 

  요즘 사회가 혼란스럽다. 시민으로부터 분리된 광장, 6.10 민주항쟁 기념을 막아서는 경찰, 권력의 시녀 노릇에 충실한 검찰, 조만간 남산 대공분실이 다시 생길지도 모를일이다. 사회는 우로 돌아가고 있으며, 좌우의 대립이 심하다. 색깔론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만의 정부,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다시 5공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땡박 뉴스가 들려 올 것같다. 도무지 백성을 우습게 여긴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사기와 상벽을 이루는 4대강 정비사업, 녹색 뉴딜 사업을 이야기한다. 교수와 학생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시국선언에 대한 안티 시국선언을 한다. 도대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됐을까? 백지 한장의 소중함과 무게를 무시했던 그 순간부터가 아닐까?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우리의 전부인 백지에 누군가 낙서하는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우리의 백지를 지키지 못한 것일까? 이제 백지 한장의 소중함과 무게를 기억하자. 

  1도를 올리면 끓지만 내버려두면 평생 가도 끓지 않는다. 지금은 99도이다. 세상을 바꾸는데 필요한 것은 많은 것이 아니라 단 1도일 뿐이다. 우리의 아주 작은 노력이 있으면 된다. 민주주의를 끓게 만드는 마지막 1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백지 한장의 무게와 소중함을 기억함에 달려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