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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추억의 백골단(어느 님의 블로그에서 무단으로 퍼옴)
 
  난 97학번이다. 막 신입생이 되었던 나를 선배들이 불러서 소위 말하는 의식화 작업을 했다. 96년도 연세대 한총련 사태를 보면서 "쟤네 왜 저러냐?" 생각하던 나에게 선배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위험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 내 마음이 온통 끌렸던 것은 진실이 가지는 힘 때문이었다. 그 두렵고 살떨리는 한양대 앞에서의 한총련 출범식에도 참석했고, 장충동 공원에서의 메이데이 참가 또한 왠만한 결심으론 어려웠던 일이었다. 항상 우리가 가는 곳에는 전경이 있었고 백골단이 있었다. 지금이야 추억의 사진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전경보다 더 무서운 백골단들이 있었다. 골목에 숨어 있다가 운동화에 청바지 차림으로 날렵하게 대열을 치고 들어와 시위하던 이들을 잡아가던 백골단들(지금 체포 전담반과 비슷하지 않을까?)  

  여하튼 그들을 만나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어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심히 가투에 참가했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도 후회하지 않는다. 당연히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내 마음에 힘을 주었던 노래가 바로 노찾사의 이 산하에서였다.  

 

   이 산하에(노래를 찾는 사람들)  

  기나긴 밤이었거든 압제의 밤이었거든 우금치마루에 흐르던 소리없는 통곡이어든
  불타는 녹두벌판에 새벽빛이 흔들린다해도 굽이치는 저 강물위에 아침햇살 춤춘다 해도
  나는 눈부시지 않아라  

  기나긴 밤이었거든 죽음의 밤이었거든 저 삼월하늘에 출렁이던 피에 물든 깃발이어든
  목메인 그 함성소리 고요히 어둠깊이 잠들고 바람부는 묘지위에 취한 깃발만 나부껴
  나는 노여워 우노라  

  폭정의 폭정의 세월 참혹한 세월에 살아 이 한몸 썩어져 이 붉은 산하에 살아
  해방의 횃불아래 벌거숭이 산하에  

  기나긴 밤이었거든 투쟁의 밤이었거든 북만주 벌판에 울리던 거역의 밤이었거든
  아아 모진 세월 모진 눈보라가 몰아친다해도 붉은 이 산하에 이 한 목숨 묻힌다해도 
   나는 쓰러지지 않아라  

 

  역사에 스러져간 민중들의 삶이 손에 잡히는 듯해서 좋았고, 내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좋았고, 이 나라가 바뀔 것이라는 희망이 좋았다. 그 뒤로 10년이 흘렀다. 요즘들어 다시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세상이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말이다. 빈번한 공권력의 투입과 자기편이 아니면 빨갱이라 부르는 독선. 소통을 거부하며 실체없는 민족과 민중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위선. 최루탄과 화염병, 그리고 빠이가 없을 따름이지 그 시절과 도대체 다른 것이 없다. 이것들을 위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피흘렸던가? 이한열, 박종철이 젊은 나이에 산화하였던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이제 돐이 지난 딸 아이에게 왠지 미안했다.  이 모든 일이 내 책임인 것 같았고, 내 죄인 것만 같았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읽었다. 뜨거웠던 6월의 기록들. 영호라는 학생의 집에 있었던 일은 그 당시 어느 집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이야기였고, 우리 집에서도 발견될 수 있던 이야기였다. 젊음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고, 피흘려 얻은 것이 무엇인가? 참정권이며, 투표권이 아니던가?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와 눈물과 빼앗긴 젊음과 생명들
우리는 그것의 댓가로
소중한 백지 한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통받던 이는 고통이 사라지길 바랐고 누울 곳 없던 이는 보금자리를 바랐고 차별받던 이는 고른 대접을...
그렇게 각자의 꿈을 꾸었겠지만  

우리가 얻어낸 것은 단지 백지 한 장이었습니다.

조금만 함부로 대하면 구겨져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잠시만 한눈을 팔면 누군가가 낙서해 버릴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꿈꿀 수 없는 약하면서도 소중한

그런 백지 말입니다. (171페이지 인용) 

 

  그렇다 우리가 얻은 것은 백지 한장이다.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여기고 놀러 가느라 쳐다보지 않는 백지 한장은 수많은 이들의 생명과 피땀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았는가? 백지 한장의 소중함과 무게를 기억할 때이다. 거기에 담긴 생명과 희생을 기억할 때이다. 백지 한장이라고 우습게 여긴다면 그 백지 한장을 얻기 위해 스러져간 생명들을 우습게 여김이요, 그 마저도 빼앗겨 버릴 것이다. 

  요즘 사회가 혼란스럽다. 시민으로부터 분리된 광장, 6.10 민주항쟁 기념을 막아서는 경찰, 권력의 시녀 노릇에 충실한 검찰, 조만간 남산 대공분실이 다시 생길지도 모를일이다. 사회는 우로 돌아가고 있으며, 좌우의 대립이 심하다. 색깔론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만의 정부,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다시 5공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땡박 뉴스가 들려 올 것같다. 도무지 백성을 우습게 여긴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사기와 상벽을 이루는 4대강 정비사업, 녹색 뉴딜 사업을 이야기한다. 교수와 학생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시국선언에 대한 안티 시국선언을 한다. 도대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됐을까? 백지 한장의 소중함과 무게를 무시했던 그 순간부터가 아닐까?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우리의 전부인 백지에 누군가 낙서하는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우리의 백지를 지키지 못한 것일까? 이제 백지 한장의 소중함과 무게를 기억하자. 

  1도를 올리면 끓지만 내버려두면 평생 가도 끓지 않는다. 지금은 99도이다. 세상을 바꾸는데 필요한 것은 많은 것이 아니라 단 1도일 뿐이다. 우리의 아주 작은 노력이 있으면 된다. 민주주의를 끓게 만드는 마지막 1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백지 한장의 무게와 소중함을 기억함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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