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칼집
한홍 지음 / 두란노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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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합도라는 검술이 있다. 검술의 한 분파로 쉽게 말해서 발도술이라고도 불리운다. 검집에 들어 있는 검을 뽑음과 동시에 공격을 가하는 초스피드의 검술이다. 이 발도술이 가능하려면 가장 중요한 요건은 검이 검집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도술의 요체이다. 만일 발도술의 대가와 겨루기를 할 때에 검이 이미 검집 밖으로 나와 있다면 최소 30%는 이기고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거합도에 있어서 검집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검이 더 위력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정말 잘 벼려진 칼이란 칼집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칼집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칼집의 역할이란 단순하게 칼을 가지고 다니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칼을 보관하고, 보호하며,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칼에 칼집이 없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이다. 칼로서의 가치가 그리 크지 않다든지, 칼을 사용하는 사람이 목숨을 버릴 정도로 막장을 생각한다든지. 어느쪽이 되든간에 칼집이 없다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사람을 칼에 비유해 본다면 마찬가지로 사람이 가장 빛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정말 제대로 된 칼집이 있을 때이다. 사람에게 잘 맞는 칼집이라 함은 절제력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절제력이 없다면 이미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헤픈 사람, 실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고수들은 함부로 자신의 실력을 남에게 보여 주지 않는다. 어설프게 초단을 딴 입문자들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내 보이고 싶을 뿐이지, 진정한 실력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친구들 가운데에도 그런 친구가 있다. 태권도가 4단이다. 승단 심사에서 5단으로 승단한 친구이다. 나중에 밥벌어 먹고 살 것이 없다면 태권도장 차린다고 농담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친구인데 도장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시비가 붙고 화가 날 때에도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다. 겁이 난다고 하더라. 잘못 때리면 어떻게 될까봐 겁이 난다고 하더라. 이게 진정한 실력자들의 모습이다.

  진짜 리더는, 진짜 실력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 대하여 끔찍할 정도로 엄격하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지만 자신에게 대해서만은 엄격하다. 자신을 한자루의 잘 벼려진 칼로 만들고 있지만 결코 함부로 내보이지 않는다. 자기 절제라는 칼집안에 자신을 담아 두고 있다. 그러다가 꼭 필요한 순간에 자신을 드러내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이것이 진짜 리더의 모습이요, 진짜 실력자의 모습일 것이다.

  세상에서 진짜가 많이 사라지고 있다. 음식도 진짜로 만드는 음식점은 망해가고 있다. 명품도 이미 짝퉁이 판을 치는 시대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이다. 진짜 실력자들이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빈수레가 판을 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빈수레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굴러가고 있는 시대에 조용히 자신을 갈고 닦으며 절제라는 칼집 안에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진짜배기들은 어디에 있을가? 언제나 진짜 배기들이 대접받는 시대가 올까? 실력 지상 주의 시대에 성품과 절제라는 아름다운 칼집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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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권력
아서 제이 클링호퍼 지음, 이용주 옮김 / 알마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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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보면서 커다란 보물 찾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자의 의도는 명백하다. "독자들이여 보물을 찾아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지도는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릴 때 배운 세계지도를 메르카토르 기법에 의하여 작성된 것인데 우리는 어릴 적 부터 이것을 보고 배워왔기에 원래 세계는 이렇게 생겼나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원래 세계는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세계지도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도가 항해를 위해 만들어진 대항해시대의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항해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되고 있다는데 있다. 만병통치약처럼 국경을 나눌 때, 인구의 분포와 문화의 영역을 나눌 때에도 이 지도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잘못된 시각을 갖게 해준다.

  몇 배이상으로 크기가 과장된 유럽, 남반구는 항상 북반구의 밑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서로 갈라져서 전혀 만날 것 같지 않은 지도의 양끝, 상대적으로 크기가 줄어든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아메리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진 유럽, 북아메리카, 러시아를 포함한 중앙 아시아는 사실이 아니라 힘의 크기, 영향력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또한 중앙에 배치된 유럽은 유럽 중심주의를 심어주는 아주 좋은 교보재가 된다. 물론 이것이 메르카토르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대항해시대에 유럽에 필요한 지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되는 왜곡이요, 유럽중심주의일 것이다. 이 지도를 만든 메르카토르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문제는 무엇이냐? 이 지도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말이다. 메르카토르 도법이 항해에는 유리함은 이미 말했다.그러나 항공이나 기타 다른 면에는 불리함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 없이 단순하게 이 지도를 사용하여 교육을 하면서 우리에게 이지도가 진실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오늘의 모습을 보면서 그 불손한 의도를 발견하게 된다. 지도의 이면에 숨어 있는 유럽 중심주의,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야욕 등 여러가지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렇게 선명하게 알 수 없었을 사실들이다.

  믿기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지도를 펴보라. 그리고 그 지도를 중심으로 각 국가들의 정치와 이슈들을 살펴보라. 미국의 아프간과 이라크 침략, 한국과 일본에서의 군사동맹 강화, 대만을 향한 지지, 유럽과의 동맹이 과연 어디를 겨냥하여 이루어지고 잇는지 살펴보라. 유럽과의 동맹은 냉전 시대에는 소련을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고 미국의 독주가 이루어지면서도 여전히 유럽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는 아프가니스탄을 빈 라덴을 잡는다는 이유로 들어가 아직도 철수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량학살 무기가 없다고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에 엉덩이 깔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중국이다. 중국을 포위하는 전술이다. 이러한 것들을 지도를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전술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는 메르카토르도법의 가장 큰 문제점일 것이며, 오늘날까지 이 지도가 살아남아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가끔 독도문제를 이야기할 때에 옛날 지도를 찾았다고, 독도가 한국 땅임을 표시하는 지도를 찾았다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는 기사를 본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도는 단순하게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작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과 다른 지도를 보여주면서 일본의 주장이 틀리고 우리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다. 이렇듯 지도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담겨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도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다.

  지도는 객관적인 산물이 아니다.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고 사용된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지도는 한국의 의치를 세계의 중심에 놓고 있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국가주의적 전략을 계속 심기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여기에 휩쓸려 맹목적인 애국, 국가에의 충성, 권위에의 복종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하지 않겠다.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의 국민이라면 이 정도의 국가에 대한 애국심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너무 깊이 빠져든 나머지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이라는 사고에 물들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적 사고를 우리에게 심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제국주의적 사고에 젖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학대하고 3류 인종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도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라. 아니 지도에 숨겨진 야욕과 정치적인 계산을 찾아라. 그리고 거기에 물들지 않도록 유의하라. 지도를 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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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 - '88만원 세대'를 넘어 한국사회의 희망 찾기
우석훈.지승호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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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만원 세대"를 정말 재미있게 본 사람이다. 그 책 한권은 나에게 우석훈이라는 이름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던져 주었다. 우석훈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기에 고민을 하다가 샀다. 책 제목도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이기에, 그리고 부제로 88만원 세대 해설서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사게 되었다. 나름 기대를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이 과연 다작이 좋다지만 이렇게 다작을 내는 것이 바른 일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왠지 사기를 당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달까?

  일단 책이 무척 쉽다. 보통 사회과학 서적들은 읽기가 난해한 경우가 많이 있다. 번역서들은 번역자체가 어려워서 일테고, 국내 학자들의 저서는 대개 자신들의 학식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알량한 자만심 때문에 어려운 것일게다. 그런데 이 책에는 그런 것이 없다. 정말 쉽다. 중고등학생이 읽는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전혀 없을 정도로 쉽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들을 쉬운 말로 풀기 위해 노력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지승호씨의 질문 또한 날카롭다. 두 사람이 공통의 시각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현 상황에 대하여 거침없이 난도질을 했달까? 있는 그대로 까발렸달까? 이런 면에서 이 책의 가치는 별 하나를 더 줘도 될 것이다. 원래는 3개릐 별점을 주려고 했지만 책이 쉽게 읽히고 소설책 넘어가듯이 쭉쭉 넘어간다는 그 이유만으로 별 한개를 더 매겼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더 이상 나가지 못한다. 자세히 뜯어보면 날카롭다. 이야기 꺼리도 많다. 우리 사회의 워낙 여러가지 분야를 총망라하기 때문이다. 정치 하나만 해도 많은데, 거기에 경제에 문화에, 생태까지 모든 부분들을 망라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보니 정말 이야기 꺼리는 많은데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의 이야기들이 계속 열거 되고 있다. 이 글의 서평을 쓰면서 드는 생각이 딱 맥가이버 칼이다. 위에 사진으로 올렸는데 일명 맥가이버 칼로 통하는 다용도 칼은 정말 여러가지 공구가 다 들어 있다. 포크에, 칼에, 가위에, 펜치에, 톱에, 어떤 경우는 도끼까지 있기도 하다. 칼 하나를 샀는데 여러가지 공구가 들어 있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이것 하나만 가지면 무인도에 가서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여러기지를 신기하게 만져보지만 그것도 며칠이다. 며칠지나면 시들해진다. 칼만 주로 사용하게 되는데 칼을 사용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왜 이렇게 투박하지? 너무 무겁다. 이런 것들 다 없고 칼만 있었으면." 대체로 맥가이버 칼이 이렇다. 이것저것 많은 것 같은데 정작 사용할 것은 없다. 이책이 그렇다. 이것저것 많은데, 담론도 많고, 꺼리도 많고 날카로운 질문도 많은데 정작 쓸만한 건 없다. 다 합쳐 놓으니 군살이 너무 많이 붙었다. 꺼리의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또 문제는 명확한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꺼리가 많다보니 한가지 타이틀에 십여개의 질문과 답변이 전부다. 그 개개의 질문들도 족히 책은 한권 쓸법한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이렇게 모아놓으니 명확한 결론이 없다. 그저 주절거리는 것 같은 글이다. 예전에 선배들이 술먹고서 하는 이야기들을 듣는 것 같다.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술에 취해서 던지는 이야기들은 정말 들을만한 것들이 많았다. 신학에서부터, 철학, 사회학, 맑스에서 사구체, 소비에트 연방까지 온갖 이야기들을 총망라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들으며 밤을 샌것이 며칠인지 모른다. 그런데 들을 꺼리는 많은데 왜 그리 설득력이 없던지. 워낙 주제가 많다보니 그저 주절거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들이다. 한가지들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몇날 며칠을 밤새도 그거 겉에만 머물러 있을텐데 그것들을 하룻밤만에 훑어 버리는 것이다. 수박 겉핥기라고 할까? 솔직하게 드는 생각은 우석훈이라는 이름값에 기댄 평균이하의 책이라는 것이다. 넓기는 한데 깊이가 없다. 지식이 습자지라고 할까? 넓기만 하고 깊이는 극히 얇은 지식. 그래도 저자가 다음에는 인터뷰를 안한다니 한번의 실수였겠거니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가 책의 주제인데, 솔직히 희망을 찾지 못했다. 온갖 절망적인 이야기들은 다 해놓고 대안이라고 제시한 것들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다. 서울 시내 미세먼지를 조절하기 위해서 2년 동안 공사를 전면 중단하고 앞으로 공사 총량제를 시행하는 것이란다. 본인도 이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알고 있다고 차선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이기에 들었지만 대체로 이렇다. 무엇인가 비판을 많이 해놓는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대안이 없다. 현실적인 고민이 필요하단다. 과연 무엇으로 희망을 말하는 것일까? 희망이 있기는 한가 생각이 든다. 오직 눈에 절망만이 들어온다. 차라리 안봤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본걸 어쩌란 말이냐? 희망이 없는 상황을 다 보여주고 이제부터 우리 희망을 말해야하지 않겠냐 그러는데 무엇인 희망인지 보이지도 않는데, 아니 희망이 있는지조차 의심이 가는데 희망을 말하라고 한다. 새장에 갇힌 새에게 자유를 노래하라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음 속의 근심이 더 깊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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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정옥자 지음 / 현암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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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雪上) 삼척 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곱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이를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만,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  하고 벼르더란 이야기가 전하지만 ,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사실로 졌지만, 마음으로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안 쬔다는 지조,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활 신조였다.

                                                                                         이희승<협동(1952)>

  예번 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에 들었던 수필이다. "선비=딸깍발이"라는 등식을 나의 머릿 속에 각인 시켜 준 수필이다. 이 수필 때문에 선비는 고고한 존재, 현실적인 능력이 없을지라도 여기에 굴하지 않고 무릎 꿇지 않는 곧은 사람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만일 옛날에 태어났다면 나도 선비가 되었을텐데."라는 생각을 품기도 한 적이 있었다. 나에게 잇어서 선비는 고고함과 진실과 시대의 양심이었다. 이 시대에는 선비가, 진정한 양심이 없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어 갔다. 선비들이 한 일이 과연 무엇인가? 지식이라는 틀 안에 갖혀서 자기 만족이라는 가면을 쓰고 다른 이들을 착취하던 모습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고고하다고 말하지만 그 실상은 무능한 자기에 대한 오만이요, 딸깍발이 보다는 양반전에 등장하는 양반과 양반 신분을 산 졸부의 모습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능력없는 신분, 현실과 괴리된 이상, 철학 없는 물질, 돈으로 고귀함까지 살 수 있다는 졸렬한 정신,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도 찬양하던 과거 선비들, 양반들의 모스비 아니었던가?

  선비를 옹호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양반과 선비는 다르다. 선비는 고귀하지만 그 이름에 먹칠하고, 호가호위 했던 사람들은 썩은 관료들이었다."고. 그러나 양반과 선비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게 고고함의 상징인 이이, 율곡, 송시열 선생이, 사대부의 첫 출발점으로 이야기 되는 정도전이 과연 다른 존재들인가? 아니다. 이들은 선비이면서 관료요, 고고함의 상징이자 부패의 상징이다. 선비의 꿈이 무엇인가? 입신양명 아닌가? 입신양명을 꿈꾸고 관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이상 선비와 관료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라는 책과 동시에 "선비의 배반"이라는 책을 샀다. 두 권을 비교하면서 읽어보았다. 이 책은 선비에 관한 긍정적인 면을, 다른 책은 부정적인 면을 바라 본 책이다. 물론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신기하게도 다른 작가에 의해서 씌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물이 나오더라.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선비라는 책의 제목답게 선비의 업적에 대해서 개략적인 기록을 해 놓았다.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역사책을 넘기다가 몇 년전에 보았던 그 책이 나오기에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서평을 작성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꼭 한번 읽어 보면 좋은 책일 것이다. 그러나 꼭 선비의 배반이라는 책과 함께 보라. 긍정과 부정의 면을 모두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선비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선비는 고귀함의 상징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천함의 상징도 아닌 이 시대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엄청난 착각 가운데 빠지게 될 것이다.

  한 시대를 구성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 가운데에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의도와 이익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아니라 변명하지 마라. 그들의 삶을 살펴본다면 이것은 극명하게 나타난다. 대체 청과 명을 섬기는 문제가 우리에게 무슨 하등의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삼학사가 왜 생겨났는가? 시대의 산물이요, 절개의 상징이라 말하는가? 아니다. 사육신은 절개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삼학사는 시대를 알지 못하고 사대주의에 빠져 자기 아집을 주장한 사람들이 아닌가? 당시 조정을 가득메우고 있던 이들의 면면이 이렇다. 명을 위한답시고, 자기 나라에게 불이익을 주는 존재가 조정의 대신이다. 명을 섬긴답시고 청나라 군에 들어가 촉 없는 화살을 날리던 현실 감각 없던 사람이 조선의 선비요, 대장이다. 이 정도면 무식이요, 매국노이다. 바른 것을 돌린다는 반정 또한 마찬가지이다. 뭐가 바르단 말인가? 자기들의 이익에 반대하면 그릇된 것이요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는 오만함이 선비의 전유물이 아니던가? 택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국의 선비들의 정신적인 지주 송시열 선생은 과연 어떠한가? 정치에 얼마나 많은 폐해를 끼쳤던가? 왕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아니 성인으로 만든다는 명분 하에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려는 사상적인 주입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렇게 고고하다던 남인들, 사림들 또한 어떠한가? 정권을 잡자마자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았던가?

  선비는 고고함의 상징이 아니다. 봉래산의 낙락장송이 아니다. 정몽주가 아니라 이방원에 가까운 사람이다. 단지 그것을 정몽주같은 모습으로 가리고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을 꿰뚫어보지 못했기에 그 피해를 고스란히 민초들이 겪지 않았던가?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비를 고고함의 상징으로 보고, 물질, 정치, 이권 이런 것들과 무관한 사람으로 오해하였듯이, 오늘날 지식인들, 대학교수들, 이들을 우리는 가치 중립적인 이야기들, 자기 양심에 따르는 이야기들만 하는 지성인으로 착각하고 있다. 여기에서 오는 피해들을 고스란히 우리가 떠맡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들"을 읽으면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에 관한 진실"도 기억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사육신 중 성삼문의 시를 인용하고자 한다. 조선시대의 진정한 선비 정신이라 함은 사육신의 정신 정도가 아닐까?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 성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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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와 선택
서병훈 지음 / 책세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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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사이에 우리나라는 두가지의 커다란 선택을 했다. 대선과 총선이라는 두 가지의 선택은 향후 5년간 우리나라의 미래를 결정할만큼 커다란 선택이다. 그런데 지난 대선도 그렇고 이번 총선도 그렇고 인물이 없고, 정책이없고, 이유가 없었다. 여전히 네거티브 전략이 판을 치고 있으며, 지역주의와, 감정에 호소하는 모습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망령이 살아 있다. 한나라당의 대선후보 경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느 싸이트 포스터에 올라와있던 영화 옹박을 패러디한 그 문구가 정확할 것이다.

 "박정희는 죽었다. 박근혜는 약하다. 개발의 후예 명박"

  많은 대선후보들이 대권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들 모두는 높은 경제성장율과 실업대책, 경기 부양이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많은 정책들이 나왔지만 내가 보기에 정책이 없었던 것은 하나같이 "실현불가능한 정책"이기 때문이요 뭉뚱그려진 정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포퓰리즘의 특성으로 꼽는 정책들이 지난 대선에 고스란히 나왔던 것이다. 일자리 수십만개 창출, 경제 7%성장 등 내가 보기에 "저건 분명히 공수표구만1"이라는 정책들이 쏟아져나왔다. 그 중에 단연 으뜸은 허경영 후보의 정책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허경영 후보가 떠올랐다. 카리스마와 거침없는 말투, 공허한 공약 등등 파퓰리스트의 전형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파퓰리스트라고 말하지만 허경영 후보에 비하면 새발의 피요, 보름달 앞의 반딧불일 것이다.

  결혼 수당 1억원지급, 산삼 뉴딜 정책으로 국민 실업 완전 해결, 유엔본부 판문점 이전, 왕정 부활, 국회의원의 무급화 및 옥석 가리기, 당선 후 박근혜씨와의 결혼, 현실적인 노인수당 등 바라보기에도 화려한 그리고 황홀한 공약들이다. 자신의 IQ가 430이요,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요, 이병철 회장의 양자라 주장하는 그는 특유의 입담과 카리스마, 신선함으로 2007 대선의 돌풍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누리꾼들은 그를 일컬어 "허본좌"라 칭하고 연예 프로그램들은 그를 출연섭외 우선 대상자로 올려 놓았다. 이상한 인기와 관심은 허경영 후보를 더 우쭐하게 만들었고 천만표가 사라졌다는 황당하면서도 대담한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정책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이 책을 읽어간다면 포퓰리즘이 무엇인지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책없이 국민의 감성을 자극하고, 눈 앞의 이익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표를 행사하라 말하는 이들, 강력한 카리스마로, 그리고 친숙한 말로 국민의 주권을 국민에게 돌려 주겠노라 말하는 이들, 한번만 뽑아 준다면 국민을 위해서 이 한몸 다바치겠다고 하는 이들이 넘쳐 난다. 이미 몇개의 정당이라는 체제는 사라져 버린지 오래요 선거철 마다 새로운 정당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고 있다. 투표하는 것마저 헷갈리는 시대이다. 공약은 넘쳐 나고 모든 사람들은 장미빛 미래를 보여준다. 자신을 선출하면 장밋빛 미래를 주겠노라 말하지만 말그대로 텅 빈 약속이다. 국민의 눈과 귀를 끌기 위한 온갖 사탕발림들이 가득한 약속들이 넘쳐난다. "국회의원 수를 1/3로 줄이겠다. 고졸 출신에게는 법을 유하게 적용하겠다. 결혼에서 금혼식까지 부부 백년해로 축하금을 지급하겠다. 자기 선거구 아이들을 100% 서울대에 진학시키겠다. 젊은이를 위한 댄스파티를 열겠다. 과외 공부를 금지시키겠다. 강화군을 단독 선거구로 만들어 강화민국을 건설하겠다."는 공약들이 나왔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도 아니고, 동네 통장 선거도 아니고 황당무계한 공약들이 나왔다. 도대체 이것을 보고 이들에게 투표를 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다. 대운하라는 사탕을 제공한 이명박 대통령은 어떠한가? 대운하 하나로 나라 경제가 살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던지고 이것이 사명인양 밀어붙이는 모습은, 그리고 여기에 대하여 투표라는 형태로 표를 던진 대다수의 국민들은 누구인가? 민주주의, 자유주의, 인민주권, 엘리트에 의한 민주주의, 대중 민주주의 등등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사는 시대의 정치체제를 규명하고자 하지만 그 어디에도 우리나라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직 대중영합주의를 통한 정권창출만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말한다. 한국에 포퓰리즘을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그러나 어려운 이유가 우리 나라에는 대중 영합주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대중 영합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모두 검은 것이데 그 중 어느 것이 덜 검은가를 구별해 낸다고 할까? 이번처럼 열심히 투표한 적이 없지만 이번처럼 또 그렇게 허탈해하고 속상하고, 걱정스러운 선거는 없었던 싶다. 앞으로 5년이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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