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
최세진 지음 / 메이데이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

  우선 첨바원바의 "텁섬핑"이라는 노래를 지식채널에서 복 난 후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어보리라 다짐했다. 읽기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책 제목인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라(If i can't dance, it's not my revolution!)이라는 엠마 골드만의 이야기를 따온 것이라 한다. 부제로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제목만으로로 예전에 금지목록이 되었을 빨간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책을 아무런 걱정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 그자체가 이미 한국 사회의 발전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우리나라에 이미 소개되었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것들에 대하여 에세이 형식으로 기록한 것들이기에 쉽게 읽으면서도 이러한 것들이 이러한 의도로 이렇게 변형되었구나를 알게 되었다. "역사란 사실을 열거할 수 없다. 다만 오늘날에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다."라는 해석의 모습을 여기에서 보게 된다.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민중에게 전해줄 것인가?"를 고민했던 미술가들의 생각(특히 소련을 중심으로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계열)을 이 책에서는 설명하고 잇다. 이들의 모습은 좀은 과격하고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내지만 솔직하다. 오히려 이들을 비난하는 자본의 논리는 더 교묘한 모습으로 이 사회에 숨어서 자신들의 체제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남미 투쟁의 상징적 인물인 체 게바라를 상품화 하는 모습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 책의 내용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첨바웜바의 이야기이다. 철의 여인 대처라는 영광 밑에 눌려 신음하던 항만 노동자들의 모습을 지지하던 첨바웜바의 모습. "이것은 배신자의 몫이다." 당당히 외치던 첨바웜바의 멤버의 모습은 투쟁이 무엇이며, 혁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솔직하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다. 그들의 첫 음반의 표지에 기록된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의미를 던진다.

"우리의 음악이 단지 즐거움만 주고 행동을 고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음악은 실패한 것이다."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선택한 노래이기에 이 노래는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사람들을 움직이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한가지 생각을 해본다. 나는 그렇다면 어떤가? 기독교인의 삶을 고민하는 나는 어떤가? 첨바웜바의 이야기를 살짝 바꾼다면 "내 신앙이 단지 가치관과 사유의 영역에 머무르고 삶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면 나의 신앙은 실패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중적 잣대를 들이밀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말하는 모습은 되지 않을까? 세상은 세상,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의 일에 무관심하다는 것이 한국 교회의 기형적인 신앙임을 고민하는 나에게 있어서 이 말은 나를 향한 격려요, 포효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들을 느꼈지만 아쉬운 것들이 몇가지 생각나서 끄적거려본다.

  하나는 이 책이 운동권을 위한 책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이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이책은 좌파를 지향한다. 운동을 지향하고 공산주의를 지지한다. 물론 북한의 전체주의적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그것은 공산주의도 아닌 파시즘이요 나치즘일 뿐이다. 그러나 박정권과 전정권, 노정권이라는 군사독재의 시기를 겪으면서 우리나라도 파시즘과 나치즘을 겪어왔다. 극우를 달려온 우리 나라에서 이 책이 과연 얼마만큼의 설득을 얻을 수 있을까? 다수에게 읽히기 보다는 아는 사람들을 통하여 알음알음읽히다가 잊혀지는 것은 아닐까? 아쉬움이 남는다.

  둘째는 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좌파라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오는 것이다. 지금부터 10년 전 스무살에 집회를 따라다닌 경험이 있었다. 물불 안가리고 다녔다. 그것이 정의이고 진실인양 다녔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진실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었다. 그저 헤게모니 다툼으로 비춰졌다. 오늘의 모습도 이렇게 비춰지는 것은 아닐까? 더 비정치화되고 무관심을 갖게되는 오늘에 이데올로기와 학습이라는 것은 과연 얼마만의 효과와 영향력을 가질까? 아무런 영향력이나 도움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갈등할 것이다. 미선이 효순이 광화문 촛불집회는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운동권은, 좌파는 헤게모니 다툼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들이 선동하고 자신들이 이끌어가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자신들이 권력을 쥐고 투쟁을 지휘해야 한다는 헤게모니 주장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오늘 많은 침묵하는 다수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민주노동당을지지하면서 권영길씨에게 투표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셋째 이 책을 지은 사람은 물론, 운동을 이끌어가는 사람들, 소위말하는 지도부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엘리트주의가 마음에 걸린다. 공산당 선언에도 언급이되지만 프롤레타리아의 각성은 이탈한 지식인들에 의하여 시작된다. 이들에 의하여 시작되고 이들에 의하여 주도된다. 자칫잘못하면 민중은 도구가 되어버릴뿐이다.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소모품이 될 뿐이다. 오늘날 많은 공산권 국가의 몰락의 이유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민중을 섬김의 대상이 아닌, 역사의 주체가 아닌 소모품으로, 조종할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각성시킬 대상으로 바라보고 무지몽매한 대중으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마지막 4부 인터네에는 아주 명확하게 이 이야기가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엘리트 주의, 선동주의에 입각해서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선동할 수 없다면 좌파가 아니다."

  이들이 이러한 생각을 버리지 않는한 이 땅에는 소수의 이탈한 지식인과 이들을 거부하는 대다수의 민중이 존재할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요구하고 싶다. 깃발을 내려라. 단상에서 내려와라. 선동하려 하지 말아라. 그들과 하나가 되어라.

  오랫만에 쉽게 보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내가 즐겁게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언젠가 갑자기 천지가 개벽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즐기는 이 순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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