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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 The Human Stai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그러니까, 생각해 보자. 나는, 태어난 운명과 환경속에 그렇고 그렇게 살아야할 운명이라면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살아야하는 것인가? 그것도 인간의 삶의 모습이긴 하겠지만, 인간은 운명을 거부하고 살 유전자도 얼마간은 있기도 하다. 그것은 대체로 타고난 여러 가지 속성과 그 사람의 의지가 그것을 가능하게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인 규범에 맞든지 안 맞든지 간에 말이다.
인간에겐, 나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랬을 것이라고 하는 몇몇 가지 상황들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태생과 연관이 되어 있다면 그것을 이용해 사회에서 좀 더 유리하게 살아보고자 하는 것은 선택이전에 본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원래 태어나기는 흑인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몇백만 분의 일로 백색의 피부로 태어났다면 흑인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노예는 해방되었으나 대신 인종차별이 극심한 시대를 살았다면 더 더욱. 그 시절 사회 모든 부분에서 흑인은 불리한 차별을 받고 있다. 백인의 외모로 태어나기도 쉽지 않은데 흑인으로 살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 사회는 백인의 응집을 원하고 있고 그런 와중에 실제로 흑인인 것을 밝혔다가 실연의 아픔을 당한다. 훗날 또 한번의 사랑을 맞고 결혼을 하려할 때 가족에게 등을 돌렸다. 그가 가족에게 등을 돌리니 가족이 절연을 선언을 했다. 가족을 버리니 가족이 나를 버리는 상황이 됐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콜먼 실크의 젊었을 적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은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타인의 삶을 보고 수긍하는 것과 한 개인의 개인사를 아는 것은 명백히 다른 차원이다. 그 개인이 때론 그 사회를 말해주기도 하니까.
이 이야기는 젊은 시절의 콜먼과 노년의 콜먼을 교차해서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콜먼은 빌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 스키와 섹스 스캔들이 일어나던 즈음이다. 그 즈음 노년의 콜먼이 대학교수가 되어서 수업시간에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교수회의에서 징계를 받는다. 말하자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섹스 스캔들이 일으킨 것에 비하면 자신의 별 악의없는 발언이 인종차별적이라고 하는 건 콜먼으로선 너무 억울한 처사라고 항의하고 싶은 것이다. 말하자면 콜먼이 젊었을 때와는 사회는 다른 양상이다. 인종차별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말 실수하다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아내를 잃는 아픔도 겪는다. 하지만 콜먼은 자신이 이러한 일을 겪는데는 뭔가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고 믿고, 어느 날 작가인 레스에게 이것을 파헤쳐 달라고 부탁을 한다. 또한 그즈음 상처속에 살아가는 퍼니아와 불안하고도 욕정 깊은 사랑을 하기도 한다. 콜먼에게 있어서 퍼니아는 젊은 시절 그의 사랑하는 연인을 투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 영화는 약간의 스릴러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눈덮인 설원일 것이다.
계절 배경이 겨울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유독 이런 장면을 즐겨 사용한 것엔 나름 감독의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많은 성공과 부를 낳은 나라다. 지금도 부동의 세계 1위의 강대국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저 눈이 걷히고 나면 맨땅이 드러나듯 미국은 여전히 인종차별로 몸살을 앓고 있고 많은 위선과 음모로 불안에 떨고 있다.
보는 장면처럼 저런 단단히 언 강에 톱으로 구멍을 뚫고 낚시 바늘을 드리우고 낚시를 할 수도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사람의 오점을 들추어 손가락질하고 음모에 이용하기도 한다.
사실 콜먼은 미국 사회가 낳은 사생아다. 그리고 미국은 그런 콜먼을 이용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콜먼의 입장에선 모욕당하고 수치를 당한 희생양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콜먼은 사회적으로 볼 때 국가에 대해선 피해자이지만 그의 가족들에겐 가해자가 아니던가?
그뿐인가? 평생 불타는 집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 하는 퍼니아는 미국의 불안한 신경증을 상징하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문제 많고 불안한 미국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레스는 작가이긴 하지만 처음엔 콜먼의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글로 써달라는 것을 거절 했었다. 그러나 콜먼의 지난 삶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그가 갑자기 불의의 교통사고로 퍼니아와 함께 죽자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저 장면은 불타는 집에서 아이를 구하지 못한 퍼니아를 끊임없이 원망하는 그녀의 남편과 작가 레스가 만나 이야기하는 엔딩장면이다. 한때 콜먼과 퍼니아의 교통사고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증거가 없어 풀려나고 저렇게 한가하게 얼음낚시를 즐기는 것이다.
대화 내용은 인간의 오점에 대해서 쓸 것이며 책이 출판이 되면 한 권 보내주겠노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온 책은 '휴먼 스테인'일 것이다.
영화의 분위기는 시종 음울하고 동시에 육감적이다. 퍼니아 역의 니콜 키드먼은 이 역에서 상당히 노력을 많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젊은 콜먼 역의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프리즌브레이크>의 히로인 웬트워스 밀러가 배역을 맡았다. 그에 비해 노년의 콜먼은 명배우 안소니 홉킨스가 맡았는데 그도 참 많이 노쇄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배역이 좀 달려 보인다고나 할까? 보는 내내 서글펐다.
모르긴 해도 원작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러닝타임도 비교적 짧은 것 같고. 아쉬운대로 볼만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