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은 절판됐지만 내가 이 표지의 책을 살 때는 작가가 맨부커 상을 받고 난 직후였다. (지금은 작가가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새로운 표지의 책이 다시 나왔다.) 그제야 난 이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하지만 난 이 책을 사고 난 후에도 쉬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농담이지만) 결국 난 맨부커상만으로도 안 되는구나. 노벨문학상은 돼야 읽는구나 했다.

사실 노벨문학상도 나에겐 언제부턴가 그렇게 큰 의미로 와닿지는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큰 문학상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건 남의 나라 문학상이라고 생각했다. 더 정확히는 우리나라와는 인연이 없고 후보로만 만족해야 하는 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되었다고, 정말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나는 노벨문학상을 배출한 나라의 국민이 되어 있었다. 처음엔 솔직히 얼떨떨했다. 내가 수상한 것도 아닌데 이 느낌은 뭐지? 우리나라는 노벨문학상과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런만큼 노벨문학상은 한강 작가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온 나라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무엇보다 수상 작가의 작품을 원어로 읽는다는 호사와 자긍심을 갖게 했다. 모르긴 해도 세종대왕님도 뿌듯해하셨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긴 하다. 막상 읽어보니 노벨문학상은 문학상이고, 작품은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그랬다. 처음 읽는 작가의 작품치고 좀 센 작품을 읽은 거라고. 좀 늦었지만 <소년이 온다>나 <흰 > 또는 <작별하지 않는다>부터 읽어보길 추천했다. 확실히 진입 장벽이 느껴지긴 했다. (이게 다 맨부커상 때문이다. >.<;;) 하지만 나도 좀 미안하긴 했다. 난 이 책이 단순히 작가의 소설집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보니 연작 소설집이었다. 그러니까 난 그것도 모르고 샀던 것이다. 적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는 거 아닌가.

작품이 좀 당혹스럽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효과인 건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인지 읽고 난 후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지 모르겠는데 '아, 작가가 이렇게 쓰는구나.' 작가가 먼저 보였다. 무엇보다 문체가 상당히 안정적이다. 그냥 단순히 글을 잘 쓴다는 말이 아니다. 그 사건 또는 에피소드를 상당히 잘 구축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건 또 뭔가 끝까지 쓰겠다는 작가의 결기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솔직히 같은 주제라도 좀 쉬운 방법으로 쓸수도 있지 않았을까? 일부러 어려운 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고, 왠지 그것은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작가가 일부러 어려운 또는 흔치 않은 방법으로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고집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솔직히 그 과정에서 쓰다가 포기하고 싶은 때가 없었을까? 글 쓰다 막히면 포기하거나, 우회하거나, 다음 기회로 미루고 싶은 유혹 세상의 작가라면 다 있을 거라고 본다. 꼭 이 방법이어야 했을까? 다른 방법으로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왜 이 방법으로 밖엔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작가는 무수히 많이 물어보며 썼을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이건 독자로서 작가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어떤 작가는 (영감이 충만해서) 내 안에 어떤 목소리가 있어 받아쓰듯 썼다고도 하던데, 왠지 한강 작가는 그렇게 썼을 것 같지가 않다. 이렇게 한 여자와 가족들 처참한 지경에 몰아넣고 신들리듯 쓸 수 있었을까? 오히려 펜이 바늘이 되어 한 땀 한 땀 자기 살에다 새기듯 쓰지 않았을까? 또 그런 과정에서 자주 머릿속이 하애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 작가는 쉬운 방법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솔직히 내가 이 작품을 쉬 읽지 못했던 이유는 꼭 어떤 선입견이나 게을러서만도 아니었다. 적어도 90년대 이후 우리나라 문학은 뭔가 편중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이전 작품들이 다채로웠냐면 그렇지도 않다. 한때 민주화에 몰두했고, 그것이 사그라들자 문학은 사변화되어 인간의 허무나 일탈과 방황을 묘사하는데 급급했다. 게다가 열린 결말이라며 이도 저도 아닌 결말을 보여주는 게 트렌드였다. (물론 그런 중에도 독자적인 길을 간 작가도 없지 않다.) 그러니 연작인지도 모르고 표제작이자 첫 번째 수록작만 읽고 내가 느꼈던 건 잊고 있었던 그때의 문학 정서를 마주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건 나머지 두 작품을 다 읽었다고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젠 이 작품에 대해 감히 혹평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에 맞는 사람 서넛과 술잔을 기울이며 작품을 안주 삼아, 시쳇말로 까대기를 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젠 노벨문학상 작가를 배출한 나라가 되지 않았는가? 그에 맞는 품격을 가지고 작품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작품에 대해 좋은 말을 해 줄 수 없을 것 같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대를 못 받는다고, 세상 다시없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본토 일본에선 아주 환영받는 작가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테면 작가도 거지 뭐.

그런데 나의 친애하는 한 이웃분께서, 사람들이 폭력을 폭력인지도 모르고 하는 경우가 있다며 사람은 동물을 죽여 먹지만 식물은 남을 해치지 않고 물과 햇빛만으로 살 수 있으니 주인공이 식물이 되려고 하는 게 이해가 간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찌 보면 그건 살생하지 않다는 불교의 세계관의 역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자 애초의 당혹스러움이 줄어들면서 이해의 폭이 다소 넓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읽는대서 끝나지 않고 리뷰하고 토론해야 한다. 그래야 독자의 진정한 책무를 다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자 작가의 작품이 동티가 났다. 그러자 한 간에선 이렇게 품귀현상을 빚으면 뭐 하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중 하나라도 끝까지 성실하게 읽어낼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는 것이다. 뭐 꼭 틀린 건 아니지만 난 왠지 그게 사실이어도 싫지 않다. 우리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 또 원어로 된 노벨문학상 작품을 만져 보겠는가? 책이라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질기고 힘이 세다. 어떤 책은 사 놓은지 10년, 20년 만에 읽게 되는 경우도 있고, 실제로 어떤 책은 나중에 빛을 보고 역주행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사 놓기라도 해라 언젠간 읽게 될 테니!

반가운 소식은, 요즘 동네 책방이 의외로 각광을 받는다고 한다. 거기선 여러 가지 책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람들을 끈다고 한다. (우리 동네는 아직 없다. ㅠ) 그 프로그램 중 빠지지 않는 건 독서 토론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경사를 계기로 동네 책방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내가 이 작품을 읽은 것도 한 온라인 플랫폼에서 이 작품을 읽고 토론한다고 해서 읽은 것이기도 하다. (온라인이라 편한 것도 있지만 약간의 한계도 있긴 하다. 하지만 나름 유용했다.)

노벨문학상을 비롯해 세계 주요 문학상 수상자는 그냥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고 본다. 물론 우리가 입시 치르듯 무슨 상을 바라보고 문학작품을 써서는 안 되겠지만 평소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그런 환경이 만들어지고 확산되고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토론이 부재해서 지금 국가적으로 얼마나 난감하고 해괴한 일을 겪고 있는지 우리는 너무나 똑똑히 보고 있지 않은가.)

작가가 있기 전에 먼저 독자가 있었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해 우리나라 작가의 위상이 높아진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거기에만 머물면 안 된다. 그에 맞는 독자의 품격도 갖춰야 하고, 지금이야말로 독자는 어떻게 문학을 생산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할 때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한강 작가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적어도 이 말은 올해 새로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올 때까지 유효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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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24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벨상이건 문학상이건 빈손이건, 누가 알아보아 주면서 크게 기리는 책이 아니라 하더라도, 삶을 밝히고 살림을 노래하는 책이 차분히 고루 읽히는 나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이 터전은 아름다운 나라로 나아갈 만하지 싶습니다.

푸나무는 해바람비흙으로 살아간다고 여기는데, 곰곰이 보면 ‘흙’은 “살덩이라는 몸을 입은 사람과 짐승이 죽고 나서 돌아가는 알갱이”이기도 합니다. 해바람비만 있을 적에는 풀이나 나무가 시들시들하고, 흙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풀이며 나무가 푸르고 싱그럽습니다. 사람과 짐승은 “살덩이라는 몸을 입은 삶”일 적에는 풀도 나무도 낟알도 열매도 다른 작은짐승도 먹되, “살덩이라는 몸을 내려놓고 떠날” 적에는 이 몸을 고스란히 흙으로 돌려보내어 푸나무를 살찌우는 얼거리입니다.

그래서 숲일 텐데, 고기밥이 맞거나 풀밥이 옳다고 여길 수 없다고 느껴요. 그저 이 푸른별에서 온숨결은 서로 다른 몸으로 돌고돌면서 하나인 마음, 곧 사랑으로 어울린다고 느낍니다. 고기를 먹든 풀을 먹든, 스스로 사랑인 줄 알아보면서 “나를 둘러싼 모든 이웃(사람·짐승·푸나무)”도 고스란히 사랑인 줄 알아차릴 수 있으면, 걱정이나 멍울이나 생채기란 가뭇없이 녹으리라 봅니다.

그나저나 요즈음 ‘한국문학’은 너무 ‘주제(교훈)’에 치닫거나, 목소리(정의)만 높이거나, 글치레(문장기교·수사법)에 얽매인다고 느껴요. 그저 글꽃(문 + 학)이면 될 텐데, 그저 글꽃인 글이 사그라드는 듯싶습니다.

stella.K 님이 쓰신 이 글자락은 ‘서평’이 아닌 ‘문학’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잘 읽었습니다.

stella.K 2025-02-24 12:38   좋아요 0 | URL
아아고, 과찬이십니다. 조금 아까도 여기 들어와 다시 보니 글이 다듬어 지지않아 또 고쳐썼습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ㅋ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할 다름입니다. 글꽃이면 되겠다는 숲노래님 말씀 저도 깊이 새겨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