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녀 -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김용언 지음 / 반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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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문학소년 또는 문학소녀에 비유하는 걸 좋아한다. 사실 문학소년이란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문학소녀의 대응어로 훗날 이 소년이 자라 청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문학에 뜻을 두었다면 문학청년 줄여서 문청이란 말로 불러준다. 그리고 이는 작가지망생의 또 다른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문학소녀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문학을 좋아하는 소녀다. 일반인들이 그 말을 사용할 땐 시나 소설을 좋아하고 작가가 되기를 꿈꿨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들이 그 꿈을 가지고 성인이 되어 작가가 된다면 여류작가가 될 것이지만 이루지 못한다면 여전히 문학소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여류작가란 말도 일제 강점기 몇 되지도 않았을 여성 작가를 비하해서 썼던 말이다. 게다가 페미니즘에 입각해 작가를 굳이 남자와 여자로 나눠 남자는 그냥 작가라고 부르면서 여자는 굳이 여류란 말을 붙여 차별을 두고, 여자는 결코 일류가 될 수 없음을 조장한다는 반발론을 제기해 폐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니 새삼 언어의 음모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여류작가란 말은 폐기했지만 문학소녀란 말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우리의 의식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 문학소녀란 말은 부정적인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렇다면 아직도 여성작가에게 덧씌워진 부정적인 의미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저자는 문학소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전혜린에서 찾고자 했다.

 

사실 사춘기 시절 자신이 문학소녀였다면 전혜린의 책 한 권 정도는 읽어줬다는 말로, 그만큼 전혜린은 당대뿐 아니라 모든 여성 문학인의 롤모델이자 아이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녀는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떠나 버렸으니 거의 전설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녀의 책은 주로 일기나 단상을 자유롭게 쓰며 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렇다면 전혜린은 누구인가?

전혜린은 한마디로 고관대작의 영애 소리를 들을만한 집에서 태어났다. 저자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 전봉덕이 어떤 사람인지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해 놓고 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엘리트로서 해방 당시 경시(총경) 직위까지 올랐고, 나중에 반민특위로 헌병사령부의 친일파의 도피처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것은 다 폐일언하고(전혜린이란 예외적 존재란 곳을 읽어 보라) 딸에 대한 아버지 사랑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4세 때부터 한글과 일본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고, 딸에겐 심부름이나 주방 일 같은 건 절대로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면 그녀가 어떻게 자랐을지 짐작이 간다. 당시 일본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였고, 아버지가 친일파로 책 읽는 것을 직접 가르쳐 줄 정도라니 그녀는 자연스럽게 서양을 동경했을 것이다. 게다가 지식욕이 대단한 노력파이기도 하지만 겉으론 모던 걸처럼 자유분방 했다. 문학소녀가 어떤 캐릭터인지를 안다면 문학소녀=전혜린이란 등식도 설득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전혜린은 그토록 문학을 사랑하고 갈망했음에도 소설이나 시를 쓰지 않았다. 전혜린이 자신의 이름으로 낸 책은 오로지 에세이였다. 그나마 그것도 그녀의 사후 그녀가 알던 지인을 통해 엮어낸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그녀는 살아생전 책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전혜린은 오로지 번역가로만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평자들로부터 그녀를 저평가하기 좋은 것으로 작용한다.

 

오늘 날의 에세이는 어느 정도 인문학적 교양과 격식을 갖춘 것도 많지만, 당시의 에세이 즉 수필이라는 것은 마음가는대로가볍게 쓴 이지 고잉(easy-going)’ 즉 만필이었다. 그러니까 수필은 시나 소설 보다 못한 하위 문학으로 취급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혜린은 문학소녀이면서 만필이나 쓰는 어느 팔자 좋은 모던걸 또는 유한마담처럼 평가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읽고 쓰는 여자들의 흑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을 또 어디까지 낮췄냐면, 문학소녀의 일탈 행위를 지적하며 정신적 환상증으로 치부하고, 나아가 문학소녀의 자살로까지 확대해석하며 문화발전에 따른 향락욕과 태타욕(怠惰欲)과 사치욕에 기인한 좋지 못한 사상의 결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154p). 이렇게 보는 관점은 여성은 남자보다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상적이고 감정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전혜린을 비롯한 당대 엘리트 여성을 가리켜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운 손이라는 형용구를 쓰기도 했다. 언뜻 들으면 여성을 존경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것은 여자를 경멸하여 이른 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 손은 전체 국민의 1% 내외의 특권 지배층의 손이라며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 또한 불란서 시집을 읽으며 허황된 꿈에 잠긴 소녀야 말로 일하지 않는 자라며 비난하고, 문학소녀는 공공의 적이자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적폐란 말도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가 잘 아는 고종석이나 김화영 같은 지식인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요즘 같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자신의 위신을 보장 받을 수 없는 파급력이 강한 세상에서 아직도 여성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남자들이 글을 쓰고 문학을 하는 건 고양된 정신적 행위이거나 생존이 달린 문제로 진지하게 봐주면서, 왜 똑같은 행위를 여성이 하면 그건 일탈이거나 아니면 잉여 행위로 보는지 모르겠다. 물론 전혜린이 문학 위해 죽은 건 아니지만(그녀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문학을 하다 죽었다.

 

그렇게 남자들은 전혜린을 저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 여성들이 볼 때 전혜린은 확실히 앞서간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독일 유학생이자 독일 문학자요 번역가다. 그녀가 살아생전 독일 문학을 열심히 번역하지 않았다면 헤르만 헷세나 루이제 린저 같은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알았던 때보다 훨씬 늦게 접했을 지도 모른다. 한국의 평자들이 그런 싸구려 저평가를 늘어놓고 있을 때, 그녀가 독일에서 얼마나 생활에 쪼들리며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녀에게 그런 평가를 하는 건 확실히 그녀를 모독하는 거나 다름없다.

 

전혜린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었다. 그동안 여성의 문학 환경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이 나라의 정치가와 문학권력자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나라 문학 발전의 길은 멀어 보인다.

 

일례로 193, 40년대 우리나라 여성의 문맹률은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비해 일본 여성들은 그때 문맹을 깨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는 5, 60년대가 돼서야 비로소 그것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문학이 여성에게 전파되는 속도가 일본 보다 늦는다는 말이기도 하니, 우리나라 문학은 전반적으로 일본 보다 훨씬 뒤져 있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일본도 문학소녀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여성 문학인에 대한 저평가를 쏟아낼 때 일본의 여성 문학은 저만큼 앞서갔다는 얘기다

         

사실 이 책은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이어서 마치 한편의 논문을 읽는 것 같다. 또한 여성 문학의 앞으로의 전망은 뚜렷이 제시하지 않고 있어 그 점은 좀 아쉽긴 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우리나라 문학소녀들도 이런 읽고 쓰는 여자의 흑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번쯤 읽어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젠 이 문학소녀란 말도 여류작가란 말과 함께 사라져야할 말은 아닐까 싶다. 여성문학도 그것도 내키지 않으면 그냥 문학도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건 필요하지만 비교하는 건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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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7-23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읽기》(푸른역사, 2017)에 전혜린 작가의 이야기가 나와요. 작년에 최남선, 이광수 문학상 제정을 추진한다고 말이 많았어요. 다행히 상 제정은 무산되었어요. 그런 친일 작가 이름을 딴 상 만들지 말고, ‘전혜린 에세이 문학상‘이라든가 ‘전혜린 번역상‘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stella.K 2017-07-24 14:55   좋아요 0 | URL
그렇구나. 그런 책이 있었네.
그런데 전혜린이 그런 평가를 받지 않더라도
그녀의 아버지가 친일파였잖아.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전혜린을 저평가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거야.
에세이는 번역물은 좋은데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낮게 보는 시각이 많지.

페크pek0501 2017-07-27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전혜린의 번역이어서 작가와 번역가를 동일시하면서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꽤 인상깊게 읽은 책이라서 오래전에 읽었음에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stella.K 2017-07-27 17:44   좋아요 0 | URL
저는 전혜린 번역본으로는 못 읽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녀를 동경하지 않는 문학소녀는 없었다고 봐요.
우리 여자들이 그러고 있을 때 이런 흑역사가 있었다는 게
씁쓸하긴 하죠?
책이 쉽게 읽혀지는 건 아닌데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어요.

transient-guest 2017-07-3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혜린이 낮은 평가를 받는 다는 건 몰랐네요. 항상 뭐랄까,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이미지로 남아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예전에 TV드라마 명동백작에서 이재은씨가 연기한 잠깐 나온 모습이 기억나네요.

stella.K 2017-07-31 17:59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번에 새롭게 알았어요.
적어도 전혜린만큼은 그랬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명동백작에 전혜린이 다뤄졌던가요?
저도 그 드라마 너무 괜찮아서 빼놓지 않고 봤다고
생각하는데 전혜린 나온 건 기억에 없네요.
잠깐 나왔다면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남성 문학인 일색이란 말이겠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