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2
이양호 지음 / 글숲산책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우선 표지 정장이 마음에 들었다. 흘려 쓴 글씨체도 마음에 들고. 아주 어렸을 때 읽어보고 다시 안 읽었던 여자들의 로망 신데렐라를 이 기회에 다시 읽는 감회도 새롭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의 오류를 바로잡고 거기에 깊이있는 해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읽을만하다. 이 책을 쓰느라 노고가 많았을 저자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의 서문에서 신데렐라가 왜 재투성이가 될 수 밖에 없는가, 즉 신데렐라의 어원을 설명해 주고, 그후 본문에서는 신데렐라의 독일어 버전과 영국 버전을 수록해서(그것도 원문과 번역을 함께) 우리가 읽고 있는 일명 '재투성이 아가씨'와 얼마나 다른가를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글쎄, 나는 이 책을 워낙에 오래 읽었던지라 지금은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요즘 나온 이야기는 뭔가 조금이라도 달라져 있지 않을까? 모르긴 해도 내가 읽었던 이 이야기는 미국판을 수입해서 의역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이 이야기의 원뜻을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니 그런 줄 알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내용이 확실히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 의붓 엄마와 그의 딸들이 신데렐라의 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새끼 발가락을 자르고 뒷꿈치를 깍아내도록 부추기고 실제로 잘라냈다는 내용은 황당하기도 하고 엽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내가 어렸을 적 읽은 '재투성이 아가씨'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신데렐라가 재투성이의 원래 이름인 줄 알았다. 즉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씨 같은 것이 신데렐라고, 재투성이는 그녀에게만 허락된 고유대명사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솔직히 신데렐라 외에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재투성이란 말을 쓰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이 둘이 같은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 서문을 보면, '재투성이'로 옮긴 프랑스 원전 낱말은 '쌍드리옹Cendrillon'이고 독일어 원어는 '아셴푸틀Aschenputtel' 이라고 한다. 이것은 직역을 하면 '재투성이'이고 이른바 '부엌데기'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영어로 옮기면 씬데르스Ciders인데 그것은 프랑스어의 쌍드리옹과 그 뜻이 비슷한 '그을음'에서 나오고 그 소리와 뜻 모두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에 거의 겹친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로 옮기면 '씬데뤨라Cinderella'가 되고 그것을 우리말로 되면서 아주 부드럽고 가벼운 발음 신데렐라가 된 것이라고 한다.(11p) 이렇게 어원을 알고 보면 책은 더 흥미로워진다. 그리고 읽다보면 정말 그런가 싶은 것도 새롭게 재인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동화 한 편에 이렇게 심오한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인가 새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는 해설에서 옷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의 도입부분을 보면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입고 갈 옷이 없어서 전전긍긍하지 않은가?) 민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융의 집단무의식을 얘기했다가, 기독교 사상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 고희 같은 당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 이야기도 하고, 불교나 동양 사상, 서양 사상 등을 종황무진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난 그저 신데렐라 이야기도 단순히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의 다름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포괄적이어야 하는가? 한편 놀랍기도 하고 한편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갸웃해지는 것은 어차피 어린 아이를 위한 동환데 동화는 그 자체로 음미하고 즐기면 안 되는 것인가? 꼭 이렇게 까지 파헤쳐야하고, 분석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하긴 이렇게 말하면 동화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부터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해리포터'가 대단한 책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 책이 그다지 교훈적이거나 깊이가 있거나하진 않다고 본다. 그저 책을 읽지 않은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도록 만드는데 대단한 공을 세웠다는 정도로 인정만할 뿐이다. 책을 읽는 성인인 나로선 그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동화는 아름다우면서도 교훈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교훈적이진 않아도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구실만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쪽에 서야하는가? 그냥 재미있으면서 약간의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중도적 입장이면 안되는 것일까? 

요컨대 저자가 이렇게 파헤치고 분석하는 거야 나쁠거야 없지만 솔직히 그다지 공감은 가지 않는다. 그냥 신데렐라를 말하려 하다보니 여기 저기 흩어진 지식을 모아 짜깁기를 했다는 느낌이지 통찰했다고는 보기는 좀 어려운 듯하다. 즉 안타깝게도 짧은 분량에 너무 많은 지식을 소개하려다 보니 포괄적이고 개괄적인 논의는 될지 모르나 저자 자신의 생각은 그다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말미에 나오는 저자 나름의 교회 비판론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미 말했던 부분이라 식상하기까지 하다. 대안없는 비판이야 누가 못하겠는가? 그래도 어느 부분 공감하고 새로운 이해를 가능케 하는 부분도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동화는 대부분 "옛날 옛적에..."로부터 시작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로 마치지 않는가? 나는 항상 이것이 불만이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하고 오래오래 잘 살았다로 마치면 다란 말인가? 그 이후에 펼쳐질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이 부딪히고 인내해야하는가는 왜 빼고 말을하는 것인지 무책임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것에 대해 저자는 플라톤의 <향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람은 몸통 하나에 팔과 다리가 각각 넷, 머리도 둘이 달렸었다. 그런데, 신이 사람의 몸통을 위해서 아래로 쪼개 둘로 만들어버렸다. 그 때 쪼개졌던 흔적이 지금도 사람에게 남이 있는데, 배꼽이 그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사람을 이렇게 쪼개놓고 보니 세 부류의 쌍이 생겨났다. 여자와 남자,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그 쌍이다. 이들은 쪼개져 나간 제 짝에 너무도 애착한 나머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신은, 사람에게서 다시 합쳐지려는 마음 즉 사랑의 기운을 조금 덜어냈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다른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하나가 되려는 마음이 사람에게서 조금 덜어내졌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되려는 기운 즉 에로스는 사람 마음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그러니, 에로스가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를 문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 즉 불멸의 존재에 다가가 하나가 되려는 것을 '사랑'이라고 그는 말했다. 결혼은 그런 사랑의 제도화일 것이다.(192p)

 
   

 이렇게 말을하고 있으니 왜 옛날 이야기가 그렇게 끝을 맺고 있는지 이해가 갈 것 같다.  

또한 신약성경 마태복음  22장 1절에서 13절의 천국에 대한 비유에서의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과 신데렐라의 의붓언니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과연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보다 동화(문학)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동감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인과응보를 비껴나가는 게 문학의 미덕이나 되는 양 여기게 되었다. 그래야, 세련된 문학이고 현대 문학이라고 말한다. 심지오는 어린이 문학에서조차 인과응보는 덜 떨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세상살이가 인과응보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는 서글픔 경험 때문일 것이다.(200~201P)  
   

 그렇다고 하면 옛날엔 인과응보의 시대에 살고 있어서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가져야 하는 미덕은 계속이어져 와야한다고 말한다. '그림 형제 이야기'는 종교적이다'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재투성이' 역시 그렇다고 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말미에 샤를 페로가 1697년에 쓴 <재투성이와 작은 유리신발>을 부록처럼 소개해 놓고 있는데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정말 '재투성이' 이야기는 다시 써져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서 남자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남자래봤자 재투성이의 아버지와 왕자 정도인데 그들은 여기서 거의 하는 일이 없다. 왕자는 그저 굳은 결의로 재투성이와 사랑을 이룬다는 정도고 아버지는 재투성이가 의붓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그토록 핍박을 당하는데도 속수무책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니 초두에만 잠깐 언급될뿐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자들이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을 벌이는 것처럼 나온다. 더구나 의붓 어머니는, 그 유리구두에 자신의 딸의 발을 맞추기위해 새끼발가락을 자르고 뒤꿈치를 자르는 엽기적인 모성애를 드러내면서 마치 여자를 이기적인 동물로 몰아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래동화인 '콩쥐 팥쥐'에서도 그대로 들어난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인과응보나 사필귀정을 말하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해를 극히 왜곡시키는 것이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젠가 누군가는 새로운 재투성이, 즉 남자와 여자를 새롭게 보게하는 이야기가 나와줘야 하지 않을까?          

책은 아쉬움이 좀 남지만 그래도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를 새롭게 보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으니 한 번쯤 봐도 좋을 것 같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09-11-1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 다닐 때 Vocabulary 특강을 들었는데 그때 그 강사 선생님께서 cind-가 '재'를 뜻한다면서 신데렐라가 원래 '재투성이'에서 왔다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저 어릴 때 계몽사 10권짜리 동화책에서 네번째 권 제목이 '재투성이 아가씨'였지요.
말씀하신대로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다시 각색해서 써보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 같네요.

stella.K 2009-11-19 12:0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계몽사 것으로 읽었던 기억이 나요.
그땐 어린이 동화책 하면 계몽사가 거의 유일하지 않았나 싶어요.
후에 계림문고도 나오고 그러긴 했지만.
그러고 보면 hnine님과 제가 함께 나눌 추억이 많네요. 그죠?^^

2009-11-18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11-1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설공주만한 오역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 동일한 저자가 쓴 백설공주는 진짜 공주가 아니다?'를 읽었는데, 이번에는 신데렐라 이야기로군요. 인과응보 권선징앙보다 더한 이야기들이 담긴 동화라는 분석은 독일어과 수업에서도 들었던지라(심연은 단편과 다르지요) 흥미가 생기는군요. 결론:보관함.

stella.K 2009-11-20 12:48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책은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다 보니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해석에 대한 시도는 좋은데 생각만큼 깊이는 잘 모르겠어서
그 책을 당장은 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안 그랬으면
호기심에 연이어 읽었을 텐데 말이죠.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소설로 만나는 중세 이야기 에듀 픽션 시리즈 5
귄터 벤텔레 지음, 박미화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사람의 편견이 무섭긴 무섭다. 내가 책에 갖는 편견은 뭘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세계사에서 '중세'하면 뭔가 신비롭지 않은가? 고딕 양식을 떠올리게 되고 정치적으로는 암흑기라고 하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계사 공부를 한지가 워낙 오래 되어서 그런지 나는 중세에 대해서 정말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도 난 이 책을 읽을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나는 이 책을 알게된다면 중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알게 될 줄 알았다. 뭐 이를테면 중세 시대라고 특징 지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 중세가 올 수 밖에 없는 배경들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나의 기대를 좀 벗어난 느낌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중세에 여러 가지 떠돌아 다니는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 내용도 평이해서 읽기에 부담이 없는 편이다. 이야기는 총 15가지고 주로 왕조에 관한 이야기인데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을 그렸다기 보다 오히려 중세하면 기사도를 연상하듯 주로 왕족들의 모험담을 다루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도 개중엔 동화같은 이야기도 있다. 특히 제2장의 '눈밭은 발자국' 같은 경우 카롤루스 대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딸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결혼을 안 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의 측근인 에긴하르트와 그의 막내 황녀와의 사랑 이야기를 읽고 있으려니 나름 이야기가 깜찍하고 동화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책에 관심이 있다면 직접 확인해 보라. 또한 7장의 황녀 이레네를 다룬 부분을 읽으면 마냥 정치권력의 패권 싸움만 할 것 같아도 그냥 어느 복 많은 아낙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해진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나 할까?

그러나 전체적인 느낌 역시 남의 나라 역사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느낌이다. 아무리 평이하게 썼다고는 하지만 역사 전반을 알고 읽는 것이 아니라 쉽게 와 닿지는 않는다.  역시 중세를 이해하는 건 쉽지 않다는 좌절까지는 아니지만  낮설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저자가 독일을 역사 교사인만큼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서 썼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나 같은 한국의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을테니까. 아마도 이렇게 낮춰서 쓰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눈높이를 높이는 수 밖에. 

그래도 내가 느끼는 건 중세 암흑기라고 하지만 그래서 더 빛나는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세를 연구하는 학자도 많고. 읽다보면 영화 보기엔 성공했으나 책 읽기엔 실패한 움베르토 에코의<장미의 이름>을 다시 붙들고 싶게 만든다.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중세 이야기라고는 하나 저자가 독일 사람이라 그런지 주로 자기네 나라의 이야기를 많이 다룬 것 같아 그 이야기를 다룸에 있어서 폭이 그다지 넓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겸해서 독일사의 한 단면을 보고자 원한다면 한번쯤 읽어도 무방하다고 말하면 이 책을 너무 가볍게 보는 거라고 하려나? 하지만 저자의 이 말은 한 번쯤 곱씹어 봐도 좋을 것 같다.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의 삶에 관한 전설이나 신화, 일화들은 객관적인 역사 문헌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 속에 서술된 내용은 실제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할 때 이러한 것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전설이나 신화, 일화는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 속 실존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전설이나 신화, 일화는 인물들이 살던 당시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실제 역사와는 다른 색깔을 입힌 이야기들이다. 전설과 신화가 발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선전, 선동의 목적으로 일부러 꾸며 낸 것일 수도 있고 의식적으로 과장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전설이나 신화를 바라본다면 그것이 발생한 당시의 시대상에 관한 중요한 정보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36p)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09-10-31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관점에서 보는것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중세가 동화적이라곤 할수 없지않을까요?
낭만적인 기사도를 생각하신다면 동화적이라고 할수 있지만 사실 기사도라는 것도 너무 미화된것이 사실이죠.
유럽의 중세를 다룬 인문 서적을 읽어봤더니 너무 허걱한 부분이 많더군요.그래서 중세를 암흑기라고 했나 봅니다.

stella.K 2009-10-31 20:37   좋아요 0 | URL
날카로운 지적이네요. 그런데 정말 동화책 읽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그건 아마도 이국적인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작가가 최대한 정치적 색깔을 빼고 평이하게 다루려고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아무튼 중세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한
저의 인상은 그랬습니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릭 게코스키 지음, 차익종 옮김 / 르네상스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타가 처음부터 저 좋아 반짝반짝 빛났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도 알고 보면 무명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작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유명한 책을 낸 작가 역시 처음부터 어느 별에서 툭하고 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도 나름 무명의 시절이 있었고, 습작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이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지 않으면 나 같은 벽안의 독자는 알리가 없을 것이다그렇게 잘난 책의 무명시절을 알게 되면 '그들도 우리처럼'하며 더 친근하게 느끼게 되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 릭 게코스키는 아마도 이 한 권의 책으로 그러한 분야에 있어서 탁월한 공로를 세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독서계의 빌 브라이슨으로 불린다. 그는 희귀본에 아주 관심이 많아 그것을 수집하고 그 과정을 취재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당연히 취재하다 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많을 것이다. 역시 사람은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가장 가치 있게 빛나는 것 같다.  

유명 작가의 삶과 작품의 이면을 본다는 것이 왜 그리 즐거운 것인가? 그것은 마치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이었다. 노벨문학상은 어렵거나 지루하다는 그 편견에서 이 책 역시 조금도 비껴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래 전 읽기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영화 보기엔 성공했던 작품으로 기억된다. 이 책을 읽다보니 이런 문구에 눈이 멎었다 

 

   
  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손으로 쓴 원고인데도 수정한 흔적이 극히 드물었다. 나중에 그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그는 <파리대왕>을 집필할 때 줄거리가 머릿속에 워낙에 뚜렷이 새겨 있어서 글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냥 타자기를 두드리는 듯했다고 한다.(45p)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질투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신은 참 불공평하다. 어떻게 여느 평범한 작가(또는 작가지망생)에겐 그토록 무지막지하게 자신의 원고를 고쳐야하는 천형을 주시면서 이런 사람에게는 타자기로 두드리듯이 한 번에 쓸 수 있는 은총을 주셨단 말인가? 그렇다면 윌리엄 골딩은 가히 문학계의 미켈란젤로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머릿속에 이미 완벽한 조각상을 그려놓고 실제로 작업을 할 땐 그 나머지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낸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완성시켰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중요한 건 윌리엄 골딩이 그럴 수 있기까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그는 교직에 있었다고 한다)을 관찰했고 그것을 글로 옮겼다는 것이다

 

 

   
  인간이 엄청난 규모의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족속임을 깨달은 후 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어떻게 변화한 것일까? 그의 학생들은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성에 공포를 느낀 그는 서서히 이와 관련된 새로운 주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것은 아이에 대한 아이의 비인간성이었다.(50p)  
   

 

그가 그렇게 타이프로 글을 찍어내듯 글을 쓸 수 있는 것엔 지난한 관찰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봐도 대단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문학에 이토록이나 잘 녹여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혜안에 탄복할 정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유명한 작품도 처음엔 푸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스물두 군데 출판사에 보내봤지만 연속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어디 그 뿐인가? 나보코프의 <롤리타> 역시 그랬고, 우리가 그토록 추앙해 마지않는 저 유명한 롤링의<해리포터와 현자의 돌>12번이나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고 13번째에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헤밍웨이 역시 처음부터 잘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세 편의 단편과 열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누구나 데뷔는 고단하다고 말한 바 있다그밖에도 저자가 다루고 있는 작가들 역시 하나 같이 험난한 여정을 거쳐 세상에 빛을 보았음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런 걸 접하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뭐 나름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세상의 한다하는 작가의 작품도 다 그런 과정을 거쳤어첫 술에 배부를 수 없지. 중요한 건 무슨 일에든지 포기하지 말고 좌절하지 않는 거야.’ 하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론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도 그런 긴 무명시절이 있는데 나는 어느 세월에 뜻을 이룬단 말인가 하고 지레 포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하지만 세상은 뜻을 이루던 못 이루던 그것은 둘째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문제는 무엇인가를 해 보는 것과 안 하는 사람의 차이인 것 같다. 그래서 해 보는 것과 그래서 못하겠다는 사람. 그래도 세상은 뭔가를 안하는 사람 보다 하는 사람의 것이 아닐까물론 잘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쯤 되면 당대의 출판사들 참 까막눈이라고 비아냥거리기라도 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그렇게 유명한 작품에 퇴짜를 놓을 수가 있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들도 한마디씩은 다 했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될 줄 알았냐고. 가슴을 치고 후회하며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하나의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를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노벨문학상도 타고 명불허전이 될 수도 있었겠지. 그렇게 쉽게 예측이 가능한 작품이라면 그만한 명예를 안을 수 있었겠는가?  

 

이 책은 이것 외에도 작가의 삶을 다루기도 하고, 희귀본을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들을 담백하게 전하기도 한다. 또한 유명 작가의 작품도 저자는 무작정 좋다고만 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지나갈 법한 면도 한마디씩 꾹 찔러주고 가는 날카로움도 지녔다그런 부분을 읽다보면 아, 정말? 하며 작가와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기대를 갖게 만든다.

그러면서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어떤 생각과 정신을 가지고 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좀 더 깊은 안목을 가질 것을 주문하는 것 같다명작이니만큼 그 명성에 눌려 좋은 게 좋은 것이려니 안일한 자세로 책을 읽는 것처럼 안 좋은 건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어도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비판 정신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이 있다면 존 케네디 툴의 <바보들의 연합>인 것 같다. 그것은 작가 자신도 너무 아까운 삶을 살았으며 동시에 세상에 재대로 빛을 보지 못한 책이라 더 아쉬울 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엔 절판된 상태다. 아마도 책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소홀해지고 그래서 또 안타까움을 갖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책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노력으로 이런 좋은 책을 읽어 볼 수 있는 행복을 선사해 준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물론 알 리 없겠지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해한모리군 2009-10-28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흐 안살수 없는 리뷰 ㅠ.ㅠ

stella.K 2009-10-28 12:52   좋아요 0 | URL
ㅎㅎ 꼭 한 번 읽어 보세요. 우리나라엔 왜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없을까
아쉬울 정돕니다.^^

프레이야 2009-10-31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트특종이에요.
스텔라님 축하해요.^^
이 책도 보관함으로 일단 직행~

stella.K 2009-10-31 11:35   좋아요 0 | URL
아악~! 이럴 줄 몰랐어요!!
베스트 특종이어도 항상 작은 것만 됐는데...
저도 이런 날이 있군요. ㅎㅎ
고맙습니다 프레이야님.
좋은 주말 보내십시오.^^
 
유혹하는 에디터 - 고경태 기자의 색깔 있는 편집 노하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난 느낌은 일단 참 능청스럽게 잘 만든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경우 책을 살 때 습관적으로 보는 것이 차례다. 이 책의 내용이 뭘 차려 보여주지 알아야 사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책 차례를 보면 그 소제목들이 재밌고 엉뚱한 게 많다. 예를들어 '엄마를 부탁해, 짜라시를 부탁해' '별꼴이 반쪽이어도 좋아' '뻥이 뻔 보다 낫다' 또는 '이 '것'들아, 하고 있지 마!' '그 마사지, 선을 넘었잖아'이런 것들인데 재미도 있으면서 능청스럽다.  그전까지 편집에 관해 딱딱 해설서만 읽었다면 이런 책 한 둰쯤 사서 책상 책꽂이에 꽂아두r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글쓰기나 편집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이 '능청스럽다'는 게 뭘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타고난 천성 또는 성격을 반영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의 일에서 노련함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것도 같다. 또한 그만큼의 여유를 가지고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1, 2년 해 가지고는 나오는 것이겠는가? 저자는 편집 일만 햇수로 13년이다. 그쯤되면 이런 책도 능청스럽게 잘 쓸 수 있는 것이겠구나 싶다. 

그런데 솔직히 읽으면서 편집 일은 좀 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편집 일 자체가 결코 만만치 않거니와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라. 저자는 한겨례 편집 기자 일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기자의 꽃은 취재 기자가 아닐까? 누가 편집 기자를 생각하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집필자의 기고문을 다듬는 건 편집자의 몫이다. 하지만 독자가 읽는 것은 집필자의 글이라고 생각하지 편집자의 편집된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 글이 독자의 공감을 사고 박수를 받는다면 그것은 집필자를 위해 박수를 치는 거지 편집자를 생각하고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편집자는 빛도 없고 이름도 없다. 그러니 누가 편집일을 하고 싶을까? 

게다가 집필자의 십중팔구는 편집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짐을 받기도 한다지. "내 글을 터치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글을 써 주겠소."하는 단서. 편집자로선 속 터지고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자기 글 예쁘게 다듬어 주겠다는데 그것을 마다 하다니.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럴 바엔 내가 직접 쓰겠다는 생각 편집자라면 한번쯤 하게 될 것 같다. 그런데 그거면 또 차라리 낫다. 같은 편집 기자들끼리도 싸운다. 인간이 하는 일인데 어떻게 싸움을 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 진짜 살인까지 갈 뻔하기도 했단다. 물론 이건 저자의 말이 아니고 저자가 인용한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편집자는 유혹한단다. 이렇게 빛도 없는 일이 유혹한다니? 물귀신 같다. 

하지만 그게 또 사실 맞는 얘기다. 글에 관심있는 사람치고 편집에 관심없는 사람이 있을까? 글이란 온전히 나만을 위해 쓰지는 않게 되는 것 같다. 하다못해 일기도 그렇다. 나를 위해서 쓰는 것 같아도 먼 훗날 누군가 읽어주게 되길 바라고 쓰기도 한다. 글이란 씌여지는 순간 누군가 읽혀지기 위해 쓰는 것이다. 음식도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서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그 음식의 품격이 다른 것처럼 글도 그런 것 같다. 어떤 기획에 의해서 어떻게 보기좋게 다듬느냐에 따라 그 글의 품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집자란 결코 홀로 빛날 수 없으며 필자를 빛나게 해 줄 때라야 빛이 날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나름 보람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말이 쉬워 편집자지 그 일도 쉽지는 결코 않아 보인다. 말의 홍수. 온갖 비어와 속어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고 독자들에게 각인될만한 내용의 글을 선별해서 보여준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저자는 그리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도 내용은 깐깐하다. 어찌보면 풀어놓는 말의 솜씨가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시아버지 수준이다. 읽으면서 내가 지금 글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뜨끔할 정도다.  특히 문장부호들의 난무. 우리가 너무나 쉽게 아무렇게나 쓰는 것들도 저자 앞에서는 그냥 넘어 가지 못한다. 그러면서 나 역시도 아무 생각없이 썼던 문장부호들이 거머리 같이 느껴졌다. 내가 저렇게 많이 사용했단 말야? 

여기까지 쓰고나니 저자가 내 글을 본다면 이 속에서 잘못된 문장을 얼마나 찾아낼까 오금이 저릴 정도다. 특히 물음표. 왜 이렇게 많이 쓴 거지? 어, 또 쓰고 있네(긁적긁적). 그만큼 깐깐하게 쓰고 있어 나 같이 엉성한 사람은 편집자는 못되겠구나 싶다. 그래도 정신 차리게 해 주는대는 또 이만한 책이 없는 것 같다.   

특히신경숙의 베스트셀러<엄마를 부탁해>의 내용으로 '찌라시를 부탁해'란 소제목을 달고 글을 줄여 나가는 실제적 예를 보여주는 내용은 참 신선했다. 그것은 저자가 말하는 편집자의 세 가지 구호에 부합한 내용이기도 하다. 1. 짧게, 좀 더 짧게 2. 구체적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3. 새롭게, 좀 더 새롭게. 말이 쉽지 그러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데 고경태 기자 알고보면 일을 참 진지하면서도 즐겁게 하고 인간적으로 쓰는 사람 같다. 그는 자신의 어린 자녀들한테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오죽하면 주위에서 아이들 좀 그만 울거먹으로고 핀잔을 들을 정도란다. 물론 직업 의식이겠지만 그게 또 읽는 독자의 입장에선 참 아이들을 사랑하는 가장처럼 느껴진다. 

또한 자신의 카피를 뽑을 때 잘 된 카피와 잘못된 카피를 솔직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들면 <한겨례21> 226호, 1998년 9월24일자를 보면 제목이 "클린턴 포르노 미국의 두 얼굴!"도 되있다. 그리고 그의 알몸 사진에 모니카 르윈스키의 사진이 조그맣게 그의 음부 위치에 밖았다. 내가 봐도 좀 거시기하긴 하다. 그는 그 밑에 진한 글씨로 "정말로 대중들의 구미를 당기는 건 홀딱 벗은 게 아니라 살짝 보여주는 거다. 다 벗으면 허탈할지니..."라고 썼다.(178p) 또한 보수의 오르가슴!(631호) 에선 자극적인 단어로 대충 얼버무리려 하지 마라.(183p)고도 썼다. 이것은 표지 광고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인데 어찌보면 자신의 실례를 들으면서 자기 반성문을 쓰는 것 같다. 

그에 비해 같은 쳅터 다른 방향으로는 잘 쓴 카피와 광고도 밝히고 있다. 그 부분에서는 잘난 척하기 보단 현명한 조언을 듣고 있는 것 같아 유익하다. 하지만 모든 유익된 말중에 '자기 글을 끊임없이 의심하라'라는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일 것이다. 

블로그가 생기고부터 소통은 전보다 자유로워졌다. 이 정도면 1인 잡지가 가능해졌다. 하지지 그에 비해 아무 생각없이 의심없이 올리는 글도 많아졌다. 그런 거 생각하면 난 블로거들한테 미안하고 우리나라 글에 미안해진다. 남이 볼 것을 생각하면 나도 몇번씩 고쳐써야 하는데 귀찮은 생각에 무책임하게 올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난 또 의심없이 이 한 편의 글을 올려야하니 아, 이를 어쩔고...

사실 이 책은 편집자(또는 편집자가 될 사람)만 읽어야 할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글에 책임지고, 조금이라도 의심하며 좀 더 나은 소통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 읽어두면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강추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 난다. 지금은 아니지만 몇 년 전만해도 우린 조선일보를 구독했었고 주말이면 장영희 교수의 수필 연재글을 볼 수가 있었다. 연재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그때 나는 가끔 눈에 띄는 그의 글을 몇 편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이 분 글 잘 쓰네! 하고 감탄하곤 했다. 그래도 읽는데는 워낙에 게으른 눈을 가진 터라 그때 그의 글을 꼼꼼히 챙겨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새 그는 연재를 마쳤고 책으로 나와 이 청명한 가을 날 나의 손에 들렸다. 과연 이 미치도록 좋은 가을 날 수필 한 편 읽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책 속에서 장영희 교수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수필은 여간해서 대접 받기가 어려운 분야인가 보다. 오죽 홀대를 하면 교수 업적(?) 보고 때 논문을 내거나 책을 내면 학교에서 가산점을 받는데 유독 수필집을 내면 0점을 받는다고 썼을까? 물론 이것은 벌점 제도도 포함되어 있어 마이너스 1보다 나은 점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0점은 읽는 나도 너무하다 싶다. 그렇잖아도 바쁜 그가 시간을 쪼개 연재글을 쓰고 그걸 책으로 엮어냈구만 점수에 포함시키지 않다니. 그의 시간과 노력은 어디서도 보상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이런 미문에 100점을 줘도 시원치 않을판에 0점이라니? 이는 비단 그가 재직했던 학교의 제도의 문제마는 아닐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수필을 너무 낮게보는 단적인 예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꼭 이런 가을 날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상처내고 혹사시켰을 나의 '생각'에 반창고 하나쯤 붙여주고, 토닥여주고 살찌우는데 잘 쓴 수필집 하나 읽는 것만큼 좋은 처방전이 또 있을까? 잘 쓴 수필은 저자가 누구든 간에 자신의 삶의 경험이 있기에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준다. 이 책 역시 그러기에 모자람이 없다. 

더구나 이 책은 그냥 에세이가 아니라 '문학 에세이'다. 에세이 한 편마다 장영희 교수가 다루고 있는 서양문학사에서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문학 작품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그건 차라리 행운이라는 생각이들 정도다.  

요즘 논술의 비중이 높아져서 명작도 논술의 관점에서 풀어낸 책들이 있던데 (실제로 내용은 어떨지 모르지만)그런거 보면 상술과 대입이라는 단내가 나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역겨워질 때가 많다. 고전을 고전으로 읽고 명작을 명작으로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거기에 꼭 '대입 논술'이란 꼬리를 붙여야겠는가? 차라리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런 미문의 문학 에세이 한 권 읽게 만들고 꼬리에 꼬리를 물듯 자연스럽게 거기 소개된 고전 명작들을 읽으면 정서도 풍부해지고 교양도 쌓을 수 있을텐데란 생각이 절로 든다.   

읽으면서 어쩌면 자신의 일상과 문학은 그리도 잘 연결해서 설명하고 마무리를 하는지. 그의 탁월한 글솜씨에 오래 전에 이 책을 선물 받아 놓고 너무 늦게 읽은 것이 선물을 한 사람에게나 장영희 교수한테나 못내 미안할 정도다. 

그는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의 아름다움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남들처럼 외모가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가끔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그 이지적인 모습과 함께 눈이 참 나의 마음을 끌곤했다. 다소 크고 초롱초롱하면서도 선한 눈매가 말이다.   

책 속에서 교수가 만난 어느 꼬마의 말마따나 그녀는 평생 목발을 짚어야했기에 그 어깨가 더 아팠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녀는 아름답다. 장애자로 평생을 살았지만 장애자에 대한 어떠한 편견도(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간에) 그녀는 원치 않았다. 그냥 장애자는 사람일뿐 거기에 어떠한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그는 원치 않았다. 그것은 장애자를 보는 또 다른 편견일 수 있기 때문에 경계했던 것이다. 그만큼 장영희 교수는 자기 삶에서 당당했던 사람이었고, 자기 삶을 진정 사랑했던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다.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었던 만큼 자기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확고한 문학관을 갖게되길 바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책의 맨 마지막장에 윌리엄 포크너가 노벨상 수상 연설문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그렇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치열한 삶, 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윌리엄 포크너) 라고 적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장에 자신의 암투병 사실을 함께 밝히기도 했다.  얼굴이 티 없이 맑아 생전 그런 병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있다가도 비껴갈 것 같았다. 그렇찮아도 자신은 이 병에 대해서만큼은 행운아라고도 했다. 또한 신은 다시 일어나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며 자신의 병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어느 덧 자신이 신문 글을 연재한지가 3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싯점에서 그의 글은 일단의 막을 내렸다. 아직 <데미안>, <파우스트>, <햄릿>에 관한 글이 남아 있긴 하지만 윌리엄 포크너의 말과 함께 훗날을 약속하며 글을 접었다. 아마도 그 무렵이 병이 재발해서 더 이상 버티고 있기가 뭐해 내려놓은 것은 아닌가 싶다.  

이처럼 그의 병이 알려졌을 때 나는 정말 쾌유를 빌었다. 그러나 그는 말과 달리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안타까웠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장을 덥으니 슬펐다.  이제 더 이상 그의 탁월한 미문을 읽을 수 없음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가 없는 교정은 이제 서늘한 바람만 일겠지?  

그래도 그는 지금쯤 우리나라 영문학의 태동을 이끌었던 부친 장왕록 박사와 함께 목발없이 천국을 뛰어 다니지 않을까?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9-09-21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영희님의 글, 저도 참 좋아해요.
편안하게 읽히면서 참 진솔한 울림이 있지요.

stella.K 2009-09-21 11:0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런 분이 이 지구상에 없다는 게 서글프더라구요.
그래도 뭐 프레이야님이 계시니까...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