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2
이양호 지음 / 글숲산책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우선 표지 정장이 마음에 들었다. 흘려 쓴 글씨체도 마음에 들고. 아주 어렸을 때 읽어보고 다시 안 읽었던 여자들의 로망 신데렐라를 이 기회에 다시 읽는 감회도 새롭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의 오류를 바로잡고 거기에 깊이있는 해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읽을만하다. 이 책을 쓰느라 노고가 많았을 저자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의 서문에서 신데렐라가 왜 재투성이가 될 수 밖에 없는가, 즉 신데렐라의 어원을 설명해 주고, 그후 본문에서는 신데렐라의 독일어 버전과 영국 버전을 수록해서(그것도 원문과 번역을 함께) 우리가 읽고 있는 일명 '재투성이 아가씨'와 얼마나 다른가를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글쎄, 나는 이 책을 워낙에 오래 읽었던지라 지금은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요즘 나온 이야기는 뭔가 조금이라도 달라져 있지 않을까? 모르긴 해도 내가 읽었던 이 이야기는 미국판을 수입해서 의역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이 이야기의 원뜻을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니 그런 줄 알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내용이 확실히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 의붓 엄마와 그의 딸들이 신데렐라의 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새끼 발가락을 자르고 뒷꿈치를 깍아내도록 부추기고 실제로 잘라냈다는 내용은 황당하기도 하고 엽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내가 어렸을 적 읽은 '재투성이 아가씨'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신데렐라가 재투성이의 원래 이름인 줄 알았다. 즉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씨 같은 것이 신데렐라고, 재투성이는 그녀에게만 허락된 고유대명사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솔직히 신데렐라 외에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재투성이란 말을 쓰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이 둘이 같은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 서문을 보면, '재투성이'로 옮긴 프랑스 원전 낱말은 '쌍드리옹Cendrillon'이고 독일어 원어는 '아셴푸틀Aschenputtel' 이라고 한다. 이것은 직역을 하면 '재투성이'이고 이른바 '부엌데기'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영어로 옮기면 씬데르스Ciders인데 그것은 프랑스어의 쌍드리옹과 그 뜻이 비슷한 '그을음'에서 나오고 그 소리와 뜻 모두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에 거의 겹친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로 옮기면 '씬데뤨라Cinderella'가 되고 그것을 우리말로 되면서 아주 부드럽고 가벼운 발음 신데렐라가 된 것이라고 한다.(11p) 이렇게 어원을 알고 보면 책은 더 흥미로워진다. 그리고 읽다보면 정말 그런가 싶은 것도 새롭게 재인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동화 한 편에 이렇게 심오한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인가 새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는 해설에서 옷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의 도입부분을 보면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입고 갈 옷이 없어서 전전긍긍하지 않은가?) 민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융의 집단무의식을 얘기했다가, 기독교 사상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 고희 같은 당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 이야기도 하고, 불교나 동양 사상, 서양 사상 등을 종황무진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난 그저 신데렐라 이야기도 단순히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의 다름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포괄적이어야 하는가? 한편 놀랍기도 하고 한편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갸웃해지는 것은 어차피 어린 아이를 위한 동환데 동화는 그 자체로 음미하고 즐기면 안 되는 것인가? 꼭 이렇게 까지 파헤쳐야하고, 분석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하긴 이렇게 말하면 동화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부터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해리포터'가 대단한 책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 책이 그다지 교훈적이거나 깊이가 있거나하진 않다고 본다. 그저 책을 읽지 않은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도록 만드는데 대단한 공을 세웠다는 정도로 인정만할 뿐이다. 책을 읽는 성인인 나로선 그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동화는 아름다우면서도 교훈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교훈적이진 않아도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구실만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쪽에 서야하는가? 그냥 재미있으면서 약간의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중도적 입장이면 안되는 것일까? 

요컨대 저자가 이렇게 파헤치고 분석하는 거야 나쁠거야 없지만 솔직히 그다지 공감은 가지 않는다. 그냥 신데렐라를 말하려 하다보니 여기 저기 흩어진 지식을 모아 짜깁기를 했다는 느낌이지 통찰했다고는 보기는 좀 어려운 듯하다. 즉 안타깝게도 짧은 분량에 너무 많은 지식을 소개하려다 보니 포괄적이고 개괄적인 논의는 될지 모르나 저자 자신의 생각은 그다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말미에 나오는 저자 나름의 교회 비판론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미 말했던 부분이라 식상하기까지 하다. 대안없는 비판이야 누가 못하겠는가? 그래도 어느 부분 공감하고 새로운 이해를 가능케 하는 부분도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동화는 대부분 "옛날 옛적에..."로부터 시작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로 마치지 않는가? 나는 항상 이것이 불만이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하고 오래오래 잘 살았다로 마치면 다란 말인가? 그 이후에 펼쳐질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이 부딪히고 인내해야하는가는 왜 빼고 말을하는 것인지 무책임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것에 대해 저자는 플라톤의 <향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람은 몸통 하나에 팔과 다리가 각각 넷, 머리도 둘이 달렸었다. 그런데, 신이 사람의 몸통을 위해서 아래로 쪼개 둘로 만들어버렸다. 그 때 쪼개졌던 흔적이 지금도 사람에게 남이 있는데, 배꼽이 그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사람을 이렇게 쪼개놓고 보니 세 부류의 쌍이 생겨났다. 여자와 남자,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그 쌍이다. 이들은 쪼개져 나간 제 짝에 너무도 애착한 나머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신은, 사람에게서 다시 합쳐지려는 마음 즉 사랑의 기운을 조금 덜어냈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다른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하나가 되려는 마음이 사람에게서 조금 덜어내졌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되려는 기운 즉 에로스는 사람 마음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그러니, 에로스가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를 문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 즉 불멸의 존재에 다가가 하나가 되려는 것을 '사랑'이라고 그는 말했다. 결혼은 그런 사랑의 제도화일 것이다.(192p)

 
   

 이렇게 말을하고 있으니 왜 옛날 이야기가 그렇게 끝을 맺고 있는지 이해가 갈 것 같다.  

또한 신약성경 마태복음  22장 1절에서 13절의 천국에 대한 비유에서의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과 신데렐라의 의붓언니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과연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보다 동화(문학)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동감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인과응보를 비껴나가는 게 문학의 미덕이나 되는 양 여기게 되었다. 그래야, 세련된 문학이고 현대 문학이라고 말한다. 심지오는 어린이 문학에서조차 인과응보는 덜 떨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세상살이가 인과응보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는 서글픔 경험 때문일 것이다.(200~201P)  
   

 그렇다고 하면 옛날엔 인과응보의 시대에 살고 있어서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가져야 하는 미덕은 계속이어져 와야한다고 말한다. '그림 형제 이야기'는 종교적이다'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재투성이' 역시 그렇다고 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말미에 샤를 페로가 1697년에 쓴 <재투성이와 작은 유리신발>을 부록처럼 소개해 놓고 있는데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정말 '재투성이' 이야기는 다시 써져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서 남자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남자래봤자 재투성이의 아버지와 왕자 정도인데 그들은 여기서 거의 하는 일이 없다. 왕자는 그저 굳은 결의로 재투성이와 사랑을 이룬다는 정도고 아버지는 재투성이가 의붓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그토록 핍박을 당하는데도 속수무책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니 초두에만 잠깐 언급될뿐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자들이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을 벌이는 것처럼 나온다. 더구나 의붓 어머니는, 그 유리구두에 자신의 딸의 발을 맞추기위해 새끼발가락을 자르고 뒤꿈치를 자르는 엽기적인 모성애를 드러내면서 마치 여자를 이기적인 동물로 몰아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래동화인 '콩쥐 팥쥐'에서도 그대로 들어난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인과응보나 사필귀정을 말하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해를 극히 왜곡시키는 것이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젠가 누군가는 새로운 재투성이, 즉 남자와 여자를 새롭게 보게하는 이야기가 나와줘야 하지 않을까?          

책은 아쉬움이 좀 남지만 그래도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를 새롭게 보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으니 한 번쯤 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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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9-11-1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 다닐 때 Vocabulary 특강을 들었는데 그때 그 강사 선생님께서 cind-가 '재'를 뜻한다면서 신데렐라가 원래 '재투성이'에서 왔다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저 어릴 때 계몽사 10권짜리 동화책에서 네번째 권 제목이 '재투성이 아가씨'였지요.
말씀하신대로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다시 각색해서 써보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 같네요.

stella.K 2009-11-19 12:0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계몽사 것으로 읽었던 기억이 나요.
그땐 어린이 동화책 하면 계몽사가 거의 유일하지 않았나 싶어요.
후에 계림문고도 나오고 그러긴 했지만.
그러고 보면 hnine님과 제가 함께 나눌 추억이 많네요. 그죠?^^

2009-11-18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11-1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설공주만한 오역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 동일한 저자가 쓴 백설공주는 진짜 공주가 아니다?'를 읽었는데, 이번에는 신데렐라 이야기로군요. 인과응보 권선징앙보다 더한 이야기들이 담긴 동화라는 분석은 독일어과 수업에서도 들었던지라(심연은 단편과 다르지요) 흥미가 생기는군요. 결론:보관함.

stella.K 2009-11-20 12:48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책은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다 보니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해석에 대한 시도는 좋은데 생각만큼 깊이는 잘 모르겠어서
그 책을 당장은 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안 그랬으면
호기심에 연이어 읽었을 텐데 말이죠.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