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 난다. 지금은 아니지만 몇 년 전만해도 우린 조선일보를 구독했었고 주말이면 장영희 교수의 수필 연재글을 볼 수가 있었다. 연재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그때 나는 가끔 눈에 띄는 그의 글을 몇 편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이 분 글 잘 쓰네! 하고 감탄하곤 했다. 그래도 읽는데는 워낙에 게으른 눈을 가진 터라 그때 그의 글을 꼼꼼히 챙겨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새 그는 연재를 마쳤고 책으로 나와 이 청명한 가을 날 나의 손에 들렸다. 과연 이 미치도록 좋은 가을 날 수필 한 편 읽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책 속에서 장영희 교수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수필은 여간해서 대접 받기가 어려운 분야인가 보다. 오죽 홀대를 하면 교수 업적(?) 보고 때 논문을 내거나 책을 내면 학교에서 가산점을 받는데 유독 수필집을 내면 0점을 받는다고 썼을까? 물론 이것은 벌점 제도도 포함되어 있어 마이너스 1보다 나은 점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0점은 읽는 나도 너무하다 싶다. 그렇잖아도 바쁜 그가 시간을 쪼개 연재글을 쓰고 그걸 책으로 엮어냈구만 점수에 포함시키지 않다니. 그의 시간과 노력은 어디서도 보상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이런 미문에 100점을 줘도 시원치 않을판에 0점이라니? 이는 비단 그가 재직했던 학교의 제도의 문제마는 아닐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수필을 너무 낮게보는 단적인 예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꼭 이런 가을 날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상처내고 혹사시켰을 나의 '생각'에 반창고 하나쯤 붙여주고, 토닥여주고 살찌우는데 잘 쓴 수필집 하나 읽는 것만큼 좋은 처방전이 또 있을까? 잘 쓴 수필은 저자가 누구든 간에 자신의 삶의 경험이 있기에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준다. 이 책 역시 그러기에 모자람이 없다. 

더구나 이 책은 그냥 에세이가 아니라 '문학 에세이'다. 에세이 한 편마다 장영희 교수가 다루고 있는 서양문학사에서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문학 작품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그건 차라리 행운이라는 생각이들 정도다.  

요즘 논술의 비중이 높아져서 명작도 논술의 관점에서 풀어낸 책들이 있던데 (실제로 내용은 어떨지 모르지만)그런거 보면 상술과 대입이라는 단내가 나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역겨워질 때가 많다. 고전을 고전으로 읽고 명작을 명작으로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거기에 꼭 '대입 논술'이란 꼬리를 붙여야겠는가? 차라리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런 미문의 문학 에세이 한 권 읽게 만들고 꼬리에 꼬리를 물듯 자연스럽게 거기 소개된 고전 명작들을 읽으면 정서도 풍부해지고 교양도 쌓을 수 있을텐데란 생각이 절로 든다.   

읽으면서 어쩌면 자신의 일상과 문학은 그리도 잘 연결해서 설명하고 마무리를 하는지. 그의 탁월한 글솜씨에 오래 전에 이 책을 선물 받아 놓고 너무 늦게 읽은 것이 선물을 한 사람에게나 장영희 교수한테나 못내 미안할 정도다. 

그는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의 아름다움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남들처럼 외모가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가끔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그 이지적인 모습과 함께 눈이 참 나의 마음을 끌곤했다. 다소 크고 초롱초롱하면서도 선한 눈매가 말이다.   

책 속에서 교수가 만난 어느 꼬마의 말마따나 그녀는 평생 목발을 짚어야했기에 그 어깨가 더 아팠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녀는 아름답다. 장애자로 평생을 살았지만 장애자에 대한 어떠한 편견도(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간에) 그녀는 원치 않았다. 그냥 장애자는 사람일뿐 거기에 어떠한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그는 원치 않았다. 그것은 장애자를 보는 또 다른 편견일 수 있기 때문에 경계했던 것이다. 그만큼 장영희 교수는 자기 삶에서 당당했던 사람이었고, 자기 삶을 진정 사랑했던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다.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었던 만큼 자기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확고한 문학관을 갖게되길 바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책의 맨 마지막장에 윌리엄 포크너가 노벨상 수상 연설문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그렇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치열한 삶, 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윌리엄 포크너) 라고 적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장에 자신의 암투병 사실을 함께 밝히기도 했다.  얼굴이 티 없이 맑아 생전 그런 병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있다가도 비껴갈 것 같았다. 그렇찮아도 자신은 이 병에 대해서만큼은 행운아라고도 했다. 또한 신은 다시 일어나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며 자신의 병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어느 덧 자신이 신문 글을 연재한지가 3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싯점에서 그의 글은 일단의 막을 내렸다. 아직 <데미안>, <파우스트>, <햄릿>에 관한 글이 남아 있긴 하지만 윌리엄 포크너의 말과 함께 훗날을 약속하며 글을 접었다. 아마도 그 무렵이 병이 재발해서 더 이상 버티고 있기가 뭐해 내려놓은 것은 아닌가 싶다.  

이처럼 그의 병이 알려졌을 때 나는 정말 쾌유를 빌었다. 그러나 그는 말과 달리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안타까웠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장을 덥으니 슬펐다.  이제 더 이상 그의 탁월한 미문을 읽을 수 없음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가 없는 교정은 이제 서늘한 바람만 일겠지?  

그래도 그는 지금쯤 우리나라 영문학의 태동을 이끌었던 부친 장왕록 박사와 함께 목발없이 천국을 뛰어 다니지 않을까?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9-09-21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영희님의 글, 저도 참 좋아해요.
편안하게 읽히면서 참 진솔한 울림이 있지요.

stella.K 2009-09-21 11:0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런 분이 이 지구상에 없다는 게 서글프더라구요.
그래도 뭐 프레이야님이 계시니까...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