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광기로 가득한 작품은 치밀한 구성을 통해 가능했다”
생각의 즐거움 | 에드거 앨런 포 에세이 | 송경원 옮김 | 하늘연못 | 286쪽 | 8500원


▲ 이탈리아 카툰 사이트(www.fanofunny.com)에 소개된
미국의 시인·소설가·비평가 에드거 앨런 포(1809~1849).
어둠에 싸인 인간의 내면 세계를 공포와 환상, 광기와 풍자 등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보여준 에드거 앨런 포<그림>는 오늘날까지 그 독창성과 천재성을 인정받고 있다. 근대적 계몽주의가 제공하는 합리적 이성을 거부한 그는 유령과 악마가 출몰하는 광기의 세계와 환멸적인 현실로부터의 탈주 등을 단골 주제로 삼은 시대의 이단자였다.

이 책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포의 에세이집으로, 그의 문학세계의 근거와 시의 창작원리, 예술론에 관한 수려한 산문 다섯 편을 싣고 있다. 상상과 환상으로 가득찬 그의 작품 경향과는 달리 산문들은 치밀하고 논리적이다. 이를 통해 세상 만물의 이치는 물론 인간의 심리 상태와 행동 양식 모두를 이성적인 추론을 통해 분석하고 증명해보이는 문학세계를 보여준다. 심지어 환상과 몽유의 세계조차도!

그의 작품 창작의 원리를 밝히는 일은 팬터지, 추리, 공포문학의 원조로서 현대문학의 마르지 않는 문학적 원천의 한 줄기를 탐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포는 ‘강렬한 독창성’이란 짧은 글에서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미리 결말까지 구상한 뒤 비로소 집필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분석 대상은 자신의 시 ‘갈가마귀(The Raven)’로 삼았으며, 시 창작이 ‘우연이나 직관’의 영역이 아니라 ‘수학문제의 정확성과 엄밀한 귀결’ 속에서 결말로 한 단계씩 나아가는 것임을 명확히 규명하고 있다.

‘갈가마귀’ 창작 과정에서 제일 먼저 고려한 것은 ‘길이’였다. 시는 한자리에 앉아 읽기에 너무 길면 안 된다고 규정한다. 시의 길이는 강렬한 격정과 영혼의 고양을 끌어낼 수 있는 시적 효과의 정도와 수학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간결함은 시적 효과의 강렬함과 정확히 비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100행 정도가 적당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다음은 전달하고자 하는 인상이나 효과. 가장 강렬하고 고양되고 순수한 쾌락은 미(美)를 관조하는 데 있었다. 그 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정조는 ‘애상조’였다. 미는 종류를 막론하고 가장 발전된 상태에서는 섬세한 사람을 눈물짓게 만들기 때문이다.

포는 극적인 예술적 효과를 위해 ‘짧은 반복구’ 활용을 구상한다. 이 반복구는 가장 울림이 좋은 모음 ‘o’와 발음이 쉬운 자음 ‘r’이 들어간 단어 ‘다시는 안 돼요(nevermore)’가 선정된다. 각 연 끝에 ‘다시는 안 돼요’라는 말을 단조롭게 반복하는 불길한 ‘갈가마귀’의 등장 단계까지 다다른 시인은 최후의 질문을 던진다.

“인류 보편적으로 가장 애상적인 주제는 무엇일까?” 명백히, 죽음이 그 답이다. “그리고 언제 이 가장 애상적인 주제가 가장 시적인 것이 될까?” 미(美)에 가장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을 때였다. 그렇다면 물을 것도 없이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주제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것을 말하는 주체는 상(喪)을 당한 연인이 가장 적합했다. 작품의 장소는 고립된 사건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주의를 집중시키는 정신적 힘까지 발휘하는 닫힌 공간으로 결정됐다. 실제 작품에서는 여인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침실이 배경이 됐다.

언뜻 보기에 불길한 암시와 환상으로 가득찬 듯이 보이는 시 ‘갈가마귀’의 이면에는 이렇듯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한 논리가 단단히 기초공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 창작노트의 비밀은 ‘겉으론 시인, 속으론 논리학자’라고 할 수 있다. ‘천상의 미’를 추구한 탐미주의적 작품은 수학적 정밀함을 곁들인 구성, 운율과 격조에 대한 배려, 비애적 정서의 환기 등의 요소가 빈틈없이 배열된 고차방정식을 통해 가능했다. 그는 “작품의 독창성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충동이나 직관의 문제가 아니다. 독창성은 세심하게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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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사랑타령은 모두… 욕정일 뿐이야”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 실비아 플라스 지음 / 김선형 옮김 / 문예출판사 / 709쪽 | 2만5000원

작년 11월, 나는 노스햄튼의 스미스 대학에서 포에트리 센터가 주관하는 낭독회를 열었다. 그곳에서 만난 그 대학의 교수들은 모두 나에게 닐슨 도서관에 가보자고 제의했다. 왜냐하면 그곳이 실비아 플라스의 기념관이며, 그곳엔 그녀의 일기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물론 이번에 출간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중 절반 이상이 그녀의 스미스 대학의 학생 시절과 강사 시절을 다루고 있다.) 그들 중에 특히 여자 교수들은 실비아 플라스가 그 학교 출신이라는 것, 재학 기간 중 400편의 시를 썼다는 점 등을 기꺼워 하는 눈치였고, 그 대학에선 해마다 수많은 실비아 플라스 강좌와 그녀와 관련된 행사가 열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얘기 끝에 시인이 일기를 남기고 죽는 것이 좋은가, 아닌가에 대해서 농담 섞인 토론을 했다.

나는 자살한 예술가들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 자살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살한 예술가가 남긴 깨끗하고 넓은 백지 위에다 자꾸만 무언가를 쓰려고 한다. 그 예술가의 삶이 정지되었다고 하는데도 한참이나 남아 있는 백지가 부담스러워서일까. 아니면 여전히 살아가느라 지리멸렬함을 견디고 있는 자신의 백지가 한심스러워서일까. 어쨌든 사람들은 그 예술가가 남긴 백지 위에다 무언가를 끄적거려야만 자신의 생의 알리바이가 성립된다고 믿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심지어는 살아서 자신의 신화를 완성하려고 덤비는 예술가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요절한 예술가의 삶은 나날이 뚱뚱해지고, 그의 순진하고 단순했던 생의 시간들은 신화라는 덧칠로 괴팍해지고, 주인공도 없는데 나날이 길어지기까지 한다.

실비아 플라스도 그런 사후 대접을 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서른 살에 어린 두 아이 앞에 먹을 것을 두고 가스 오븐에 머리를 처박아 자살한 여자의 짧은 생에 관해 무수한 글들이 쓰여졌다. 그녀의 삶은 난도질되었고, 부풀려졌으며, 소비되었다. 자살 사건은 수십 명의 정신분석의들에 의해 분석되면서, 끝없이 우리 앞에 반복 상연되었다.(심지어 BBC는 영화로 만들 거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남성 세계에 의해 희생된 여성 시인의 전형, 혹은 갖가지 신화의 베일을 둘러쓴 여신이 되었다. 심지어 남편이었던 테드 휴즈는 아이들이 읽을까봐 두려운 나머지 자신과의 적나라한 관계가 드러나는 마지막 나날의 일기 한 권은 폐기한 채(그는 ‘그 당시 나는 망각이 생존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썼다.) 그녀의 일기를 출간했으며, 그녀가 죽은 후 35년이 지나서야 그녀를 기리는 88편의 시(‘생일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고백적 언술 방법과 여성으로서만이 발화할 수 있는 시적인 언어들, 그리고 그 언어들의 구축 원리를 스스로 체득한 자의 내면 세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어린 처녀에서 성숙한 성인으로 커가는 한 여성의 평범하나 입체적인 삶을 치사할 정도로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모든 생의 경험들을 이 일기 쓰기를 통해 시의 근원에 다가가는 몸짓으로 탈바꿈시킨다. 마치 그녀는 시를 위해 헌신하는 하녀, 창녀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물론 덤으로 구역질 0나도록 처절한 세속적 욕망과 망설임들을 읽을 수 있다.)

“신경체계의 작용이란 얼마나 복잡하고도 오묘한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는 전화기의 전자음은 자궁벽을 따라 짜릿한 기대감을 전송한다. 전화선 너머 거칠고, 건방지고, 허물없는 그의 목소리에 창자가 꽉 죄어온다. 대중 가요의 ‘사랑’ 타령을 모두 ‘욕정’이라는 단어로 바꾼다면 아마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워질 텐데.”(1959년 대학 신입생 시절의 일기)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의 한 대목을 읽을 때는 거대한 스미스 대학 강의실 한가운데서 온몸에 전율이 좌르륵 흐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 1953년 여름, 나는 그녀의 자살을 재현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1957년의 일기)

“글쓰기가 나의 건강이다. 차가운 자의식에서 벗어나 만사를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다면, 내게 어떤 의미인가, 내가 뭘 얻을 수 있는가를 따지지 않는다면.”(1959년의 일기)

이 일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남성들이 써내려간 히스토리에 자신의 몸을 처단하는 히스테리로 반항한 한 여성시인의 시의 가면들이 오히려 진정성이었음을, 지독히 정상적이었음을 깨닫는 진한 아픔이 밀려온다. 그리고 죽어서도 남들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온갖 신화의 덧칠을 정직한 일기와 죽음의 형식으로 완성한 시들로 떨쳐내려는 여성시인의 안간힘이 느껴진다.

(김혜순·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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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벤치 2004-03-27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 죽어도 결코 유명해질리야 없지만, 몇년에 한 번씩 일기 내지 잡문을 태워버리지요 십대 후반에 자살소동을 몇 번 벌인 이후로 생긴 버릇이지요, '죽음의 이유는 죽은 당사자만이 알 수있는 것, 타인은 남의 죽음을 수학공식처럼 풀어내지 말라 '는 유서를 남기고...지금은 아주 건강하게 살고 있어요 몸은 좀 망가졌지만 ...
실비아 플라스의 시를 읽으면 예전의 제 목소릴 느끼곤 했지요
 

발터 벤야민의 ‘문예 이론’;영상시대의 미학 이론
발행일 : 2000-10-14 [Books]    기자/기고자 : 안인희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붕괴되는 것과 아울러 이데올로기와 연관된 서적들이 갑자기 일반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부당하게 함께 논의에서 멀어진 인물 중에 발터 벤야민(1892~1940)도 들어있다.

90년대 들어 우리 사회에서 영상예술이 차지하는 위치가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어쩌면 그는 가장 절실하게 논의되어야 할 미학자의 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악명 높은 난해한 문체가 걸림돌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에 들어있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하나만 해도 작게는 소설과 영화의 문제에서 크게는 정보시대의 기본적 속성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깊이 있는 분석을 담고 있다.

물론 ‘문예이론’이라는 제목이 어딘지 시대에 맞지 않는 느낌을 주는 것이 현실의 사정이다. 따져보면 80년대에 너무 ‘이론’을 좋아한 후유증이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문학작품 말고도 영화와 환상소설과 게임의 형태를 한 이야기들. 인터넷의 유머와 심지어 TV 광고, 그리고 토크쇼에 이르기까지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 대신에 여러 매체를 이용한 각종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형태야 어떻든 이들 수많은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상상력이 반영되어 있고 오래 된 이야기의 구조가 들어있다.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모티브는 반복되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야기 구조와 상상력은 바로 문예학의 문제가 아니던가.

편역자가 세심하게 선별해 놓은 이 미학 에세이 책에는 브레히트, 카프카, 프루스트, 보들레르 등 몇몇 작가들에 대한 평론과 함께, 이야기와 이야기꾼과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상황의 변화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들어있다. 입으로 이야기를 전하던 고대의 이야기꾼, 인쇄매체를 통해 복제되지만 고독한 개인에 의해 창작·수용되는 소설의 상황, 이어서 집단으로 창작과 수용이 이루어지는 영상시대의 상황까지 펼쳐지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건정보를 전하는 신문이 새로움, 간결성, 이해하기 쉬움, 사건들간의 연관성이 없음 등 저널리즘 속성을 통해서 독자의 상상력을 마비시킨다는 관찰이다. 20세기 독일 최고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지만 대학으로 가는 길이 막힌 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는 ‘자유’ 문필가로 남았던 사람의 관찰이니 분명 일리가 있을 것이다.

문학의 상황뿐 아니라 미술품과 사진에 대한 관찰도 이루어진다. 화가가 보여주는 그림은 ‘아우라’를 가진 전체적인 것이지만, 카메라맨이 잡아낸 영상은 여러 부분으로 쪼개서 촬영한 단편적인 영상들을 편집을 통해서 다시 조립해낸 것이다.

‘정신분석을 통해서 충동의 무의식 세계를 알게 되었듯이 카메라의 개입을 통해서 우리는 시각(시각)의 무의식 세계를 알게 되었다. ’ 예를 들면 운동선수의 동작 하나 하나를 분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술작품 앞에서 깊은 관조적인 침잠에 잠겼다면 오늘날 관객은 움직이는 영상에서 정신을 분산시키는 오락을 기대한다. 요즘 흔히 거론되는 사용자(User)로서의 독자 및 관객의 속성 일부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쉴러, 헤겔, 니체, 루카치, 아도르노 등 독일 미학 전통의 맥락에 서있는 유태인 벤야민은 나치를 피해 도망치다가 길이 막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30년대에 주로 쓰여진 이 글들이 현재 우리의 상황까지도 부분적으로 짚고 있어서 21세기를 사는 내게도 직접적인 호소력을 가지는 데다가, 드물지 않게 튀어나오는 촌철살인(촌철살인)의 명문장들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곤 했다.

/안인희·번역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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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갈대 >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위한 30가지 법칙

1. 호감 가는 태도로 상대방을 대한다.

2. 본인과 친근하면 타인과도 친근할 수 있다.

3. 상대방에게 요구할 때는 우선 이익을 준다.

4. 질투나 증오의 감정은 다른 에너지로 전환한다.

5. 상상 속의 진실한 대화는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6. 당신의 성의를 상대방은 성가시게 느낄 수도 있다.

7. ‘친구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영원히 친구를 얻지 못한다.

8. 상대방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생각한다.

9. 험담을 들으면 그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10. 감정을 훌륭하게 발산하는 방법을 습득한다.

11. 호감을 사려면 먼저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12.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이루어진다.

13. 억울한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된다.

14. 용서하고 축복할 줄 알아야 다음에 좋은 상대를 만날 수 있다.

15. 긍정적인 생각은 최악의 상황을 최상의 상황으로 바꾼다.

16. 나의 두려움은 상대방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준다.

17. 순수한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실수 없는 선택을 할 수 있다.

18. 당혹감과 수고, 번민에 정력을 소비하지 마라.

19. 인간 관계에 자신이 없으면 작은 성공을 경험해 보라.

20.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대중의 판단에 휘둘리지 않는다.

21.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 설득의 최대 무기이다.

22. 험담은 그 자리에 없는 상대방에게도 전달된다.

23. 무심코 내뱉은 남의 말 때문에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지 말라.

24. 어설프게 이기기보다 지는 것이, 좋은 인간관계에 보탬이 된다.

25. 누구와 사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좌우된다.

26. 현재의 생각이 올바르다면 과거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27.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나쁘다.

28. 부모와의 관계가 지나치게 밀접하면 타인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하다.

29.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면 비참한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30. 고통을 함께 나눌 존재가 있다면 파괴적인 행동은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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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것은 싫다! 예술은 끝없는 탈주
미학오디세이 1·2·3/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371쪽/각권 1만4000원

이 혼돈의 시대에 예술은 더 이상 책장 안에 갇혀 있거나 미술관에 걸린 박제품이 아니다. 현실을 뒤집고 비틀었을 때 비로소 진실이 드러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익숙한 것을 거꾸로 던져 놓은 예술이 오히려 진실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구나 요즘처럼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가상 이미지가 실제를 대체하고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미지들 속에 숨은 진실의 언어를 찾는 힘은 ‘미학’ 훈련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고대부터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예술사가 빚어놓은 현란한 대형 벽화 속으로 들어가 마치 오디세우스처럼 떠돌아다녀 보는 것은 어떨까. 편집자

미학 오디세이’가 10년 만에 3편으로 완간됐다. 94년 에셔의 이상야릇한 그림이 상징하는 ‘가상의 세계’를 화두로 ‘아름다움(美)’의 세계로 탐험을 떠났던 미학자 진중권은 구어체와 문어체를 적절히 넘나드는 글쓰기와 독특한 구성을 통해 전문성과 대중성을 아우른 교양서의 한 모범을 보여줬다. 대중적으로 쉽게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이 책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를 표제로 삼은 2편까지 무려 50만부(!)가 큰 소리 내지 않고 팔리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1, 2권이 고전에서 시작해 근대와 탈근대의 경계까지 탐험했다면 ‘피라네시와 함께…’ 탐험을 떠나는 3권은 탈근대의 관점을 두루 살핀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체셔 고양이의 웃음과 모네의 ‘수련’, 영화 ‘장미의 이름’ 같은 익숙한 예술 작품들을 통해 예술과 현실의 경계와 인식 문제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미술 애호가’를 위한 그림읽기 입문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우리 눈에 익숙한 그림들과 너무도 친숙한 이야기의 ‘속내를 읽자’고 자극하는 지적 선동일 수도 있다. 정치와 경제 논리가 아닌 미학의 시점으로 볼 때 현실과 가상의 위험한 경계는 그 맨얼굴을 더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이 권유하는 탈근대 미학으로의 항해는 현실 일탈이 아니라 현실 탐사가 된다.

이 책은 어느 부분을 펼쳐 읽든 그곳이 당분간의 중심이 될 수 있는 ‘탈근대적’ 구성으로 짜였다. 나는 글 머리를 먼저 읽고 마지막 부분인 ‘미디어의 미학:다시 가상과 현실’을 읽은 뒤 그 중간 부분은 무작위로 펼쳐 읽었다.

‘미디어의 미학’은 사실상 우리 시대 문화 전반의 상황과 배경을 집약하고 있다. ‘존재한다고 사실이 아니다. 일어난다고 사건이 아니다. 사실이 존재하려면 보도가 있어야 하고, 사건이 일어나려면 카메라에 복제되어야 한다. 미디어로 복제되지 않는 한 사실은 존재할 수 없고,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사실과 사건을 있게 하는 것은 미디어다.’ 이 얼마나 적절한 지적인가. 선형적이고 체계적인 독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도대체 내가 지금 책에서 어디쯤을 가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변죽만 울린다 싶으면 어느새 중심이 출몰한다. 중심인가 싶으면 무수한 갈래들로 흩어진다. 버성긴 갈래들의 숫자만 느는가 싶으면 다시 중심이다. 요컨대 이 책과 저자의 글쓰기 자체가 탈근대적 미학의 실천이며, 저자의 ‘너무 하릴없지도 너무 진지하지도 않은’ 놀이터다. 이에 따라 독자들도 일종의 탈근대적 독서 체험을 할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은 내용으로 첨부되는 게 아니라 형식 속에 침전되는 법”이다.

이 책은 상당 분량을 대화(對話) 형식으로 구성한다. 1, 2권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길항 구도였다면 3권은 디오게네스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 탈근대의 관점을 상징하는 디오게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말한다.

“현대 예술을 보게. 내용의 독재가 사라지고, 형과 색이 자율을 얻지 않았나?(디)” “무정부의 카오스 상태군요.(아)” “자네 눈에는 질서는 곧 위계질서로 보이나 보지?(디)” “그럼 다른 질서도 있나……?(아)” “게다가 ‘시학’에서 뭐라고 말했나? 전체 줄거리의 진행에 관계없는 삽화들은 빼라고 하지 않았나.(디)” “그래야 짜임새가 생기지요.(아)” “하지만 그게 사회의 구성원리라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개인은 배제되어야 한다. ‘반동분자’ 혹은 ‘반국가분자’로…….(디)”

저자는 오래전에 탈근대 미학을 선취한 벤야민, 하이데거, 아도르노 등과 상대적으로 최근에 속하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 보드리야르 등을 불러낸다. 하지만 그런 인물을 해설하거나 단순 원용하는 건 저자의 관심 밖이다.

그들은 원본과 복제, 복제의 복제인 시뮬라크르, 가상과 현실 등의 문제를 심리하기 위해 소환된 참고인들이다. 그 심리의 시작은 이렇다. “하늘에서 해를 사라지게 해도 수천 수만의 복제된 해들이 세상을 도처에서 비춘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라는 이름의 세상이다. 누군가 진리의 신, 태양신을 제 것으로 독점해도 그것을 우러를 것 없이 세상은 수없이 복제된 작은 진리들의 빛으로 별일 없이 돌아간다. 우리는 원본 없는 세상 위에 복제된 빛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평소 궁금해하던 것 하나. 오늘날의 예술은 왜 이해하기 어렵게만 느껴지는 걸까? 저자는 “현대 예술이 추하고 추상적이며 고통스러운 까닭은 현대 사회가 추할 대로 추해졌으며, 인간 관계가 추상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현대 예술은 사회를 재현하지 않고도 사회의 고통을 미메시스(모방)한다. 우리가 현대 예술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곧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불편함이라는 것이다. 현대 예술은 대중이 공유하는 코드를 일부러 깨고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자기만의 코드를 만들어낸다. 왜 굳이 그렇게 하려 드는 걸까?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상투적 코드 안에 가두려는 문화산업의 추적을 피해 끝없이 탈주하고 혁신하는 게 현대 예술의 숙명이다.

저자는 학문 분야로서의 미학 안에 머무르기보다는 늘 그것의 바깥, 다분히 구체적인 삶의 방식과 실천까지 포함하는 ‘존재 미학’을 염두에 둔다. 그 ‘존재 미학’은 저자 자신의 어떤 결의까지도 포함하는 듯하다. ‘관리되는 사회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탈주의 실천이다. 개별자의 고유성을 지우고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사회.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진리는 거기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단독자로 남는 것이다.’

(표정훈·출판평론가·조선일보 서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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