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것은 싫다! 예술은 끝없는 탈주
미학오디세이 1·2·3/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371쪽/각권 1만4000원

이 혼돈의 시대에 예술은 더 이상 책장 안에 갇혀 있거나 미술관에 걸린 박제품이 아니다. 현실을 뒤집고 비틀었을 때 비로소 진실이 드러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익숙한 것을 거꾸로 던져 놓은 예술이 오히려 진실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구나 요즘처럼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가상 이미지가 실제를 대체하고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미지들 속에 숨은 진실의 언어를 찾는 힘은 ‘미학’ 훈련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고대부터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예술사가 빚어놓은 현란한 대형 벽화 속으로 들어가 마치 오디세우스처럼 떠돌아다녀 보는 것은 어떨까. 편집자

미학 오디세이’가 10년 만에 3편으로 완간됐다. 94년 에셔의 이상야릇한 그림이 상징하는 ‘가상의 세계’를 화두로 ‘아름다움(美)’의 세계로 탐험을 떠났던 미학자 진중권은 구어체와 문어체를 적절히 넘나드는 글쓰기와 독특한 구성을 통해 전문성과 대중성을 아우른 교양서의 한 모범을 보여줬다. 대중적으로 쉽게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이 책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를 표제로 삼은 2편까지 무려 50만부(!)가 큰 소리 내지 않고 팔리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1, 2권이 고전에서 시작해 근대와 탈근대의 경계까지 탐험했다면 ‘피라네시와 함께…’ 탐험을 떠나는 3권은 탈근대의 관점을 두루 살핀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체셔 고양이의 웃음과 모네의 ‘수련’, 영화 ‘장미의 이름’ 같은 익숙한 예술 작품들을 통해 예술과 현실의 경계와 인식 문제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미술 애호가’를 위한 그림읽기 입문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우리 눈에 익숙한 그림들과 너무도 친숙한 이야기의 ‘속내를 읽자’고 자극하는 지적 선동일 수도 있다. 정치와 경제 논리가 아닌 미학의 시점으로 볼 때 현실과 가상의 위험한 경계는 그 맨얼굴을 더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이 권유하는 탈근대 미학으로의 항해는 현실 일탈이 아니라 현실 탐사가 된다.

이 책은 어느 부분을 펼쳐 읽든 그곳이 당분간의 중심이 될 수 있는 ‘탈근대적’ 구성으로 짜였다. 나는 글 머리를 먼저 읽고 마지막 부분인 ‘미디어의 미학:다시 가상과 현실’을 읽은 뒤 그 중간 부분은 무작위로 펼쳐 읽었다.

‘미디어의 미학’은 사실상 우리 시대 문화 전반의 상황과 배경을 집약하고 있다. ‘존재한다고 사실이 아니다. 일어난다고 사건이 아니다. 사실이 존재하려면 보도가 있어야 하고, 사건이 일어나려면 카메라에 복제되어야 한다. 미디어로 복제되지 않는 한 사실은 존재할 수 없고,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사실과 사건을 있게 하는 것은 미디어다.’ 이 얼마나 적절한 지적인가. 선형적이고 체계적인 독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도대체 내가 지금 책에서 어디쯤을 가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변죽만 울린다 싶으면 어느새 중심이 출몰한다. 중심인가 싶으면 무수한 갈래들로 흩어진다. 버성긴 갈래들의 숫자만 느는가 싶으면 다시 중심이다. 요컨대 이 책과 저자의 글쓰기 자체가 탈근대적 미학의 실천이며, 저자의 ‘너무 하릴없지도 너무 진지하지도 않은’ 놀이터다. 이에 따라 독자들도 일종의 탈근대적 독서 체험을 할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은 내용으로 첨부되는 게 아니라 형식 속에 침전되는 법”이다.

이 책은 상당 분량을 대화(對話) 형식으로 구성한다. 1, 2권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길항 구도였다면 3권은 디오게네스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 탈근대의 관점을 상징하는 디오게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말한다.

“현대 예술을 보게. 내용의 독재가 사라지고, 형과 색이 자율을 얻지 않았나?(디)” “무정부의 카오스 상태군요.(아)” “자네 눈에는 질서는 곧 위계질서로 보이나 보지?(디)” “그럼 다른 질서도 있나……?(아)” “게다가 ‘시학’에서 뭐라고 말했나? 전체 줄거리의 진행에 관계없는 삽화들은 빼라고 하지 않았나.(디)” “그래야 짜임새가 생기지요.(아)” “하지만 그게 사회의 구성원리라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개인은 배제되어야 한다. ‘반동분자’ 혹은 ‘반국가분자’로…….(디)”

저자는 오래전에 탈근대 미학을 선취한 벤야민, 하이데거, 아도르노 등과 상대적으로 최근에 속하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 보드리야르 등을 불러낸다. 하지만 그런 인물을 해설하거나 단순 원용하는 건 저자의 관심 밖이다.

그들은 원본과 복제, 복제의 복제인 시뮬라크르, 가상과 현실 등의 문제를 심리하기 위해 소환된 참고인들이다. 그 심리의 시작은 이렇다. “하늘에서 해를 사라지게 해도 수천 수만의 복제된 해들이 세상을 도처에서 비춘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라는 이름의 세상이다. 누군가 진리의 신, 태양신을 제 것으로 독점해도 그것을 우러를 것 없이 세상은 수없이 복제된 작은 진리들의 빛으로 별일 없이 돌아간다. 우리는 원본 없는 세상 위에 복제된 빛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평소 궁금해하던 것 하나. 오늘날의 예술은 왜 이해하기 어렵게만 느껴지는 걸까? 저자는 “현대 예술이 추하고 추상적이며 고통스러운 까닭은 현대 사회가 추할 대로 추해졌으며, 인간 관계가 추상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현대 예술은 사회를 재현하지 않고도 사회의 고통을 미메시스(모방)한다. 우리가 현대 예술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곧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불편함이라는 것이다. 현대 예술은 대중이 공유하는 코드를 일부러 깨고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자기만의 코드를 만들어낸다. 왜 굳이 그렇게 하려 드는 걸까?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상투적 코드 안에 가두려는 문화산업의 추적을 피해 끝없이 탈주하고 혁신하는 게 현대 예술의 숙명이다.

저자는 학문 분야로서의 미학 안에 머무르기보다는 늘 그것의 바깥, 다분히 구체적인 삶의 방식과 실천까지 포함하는 ‘존재 미학’을 염두에 둔다. 그 ‘존재 미학’은 저자 자신의 어떤 결의까지도 포함하는 듯하다. ‘관리되는 사회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탈주의 실천이다. 개별자의 고유성을 지우고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사회.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진리는 거기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단독자로 남는 것이다.’

(표정훈·출판평론가·조선일보 서평위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