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과학은 인간에 내재된 상상력의 실현”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김은국·김현숙 옮김/바다/516쪽

▲ 인간 등정의 발자취
“그리스인들이 반인반마(半人半馬), 켄타우로스의 전설을 만들어낸 것은 자유자재로 말을 다루는 스키타이족에 대한 경이와 공포 때문이었다.” 저자는 폴란드 출신답게 당시 그리스인들이 느꼈을 공포감을 “1939년 폴란드 전역을 휩쓸며 달려오던 나치의 탱크부대에나 비길 수 있는 엄청난 것”이었다고 말한다. 과학자라기보다는 문명사가, 문명사가라기보다는 ‘인류의 철학자’라고 불려야 적절할 브로노우스키는 “말을 탄다는 생각은 기계를 발명한 것만큼이나 당시에는 깜짝 놀랄 일이었음에 틀림없다”고 통찰한다.

브로노우스키, 새삼 소개가 필요없을 만큼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과학자이자 문명철학자이다. 그는 “문학과 과학은 동일한 경험의 두 가지 서로 다른 언어”로 보았다. 둘 다 결국은 세계를 해석해내는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인간 등정’이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던 잠재적인 상상력의 실현을 의미한다. 좁게는 과학기술의 발전, 넓게는 인간문화의 발전은 결국 그 같은 상상력의 구체화라는 것이다.

내용은 한마디로 종횡무진이다. 인류의 기원을 좇아 에티오피아의 오모강 골짜기를 찾아간다.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를 추적하기 위함이다. 진화 과정의 경이로움에 젖어있노라며 어느새 브로노우스키의 발은 근동 땅을 딛고 인간의 문화적 진화, 즉 문명의 발상 과정을 이야기한다. 이 두 가지 진화에서 뒤떨어져야 했던 신대륙에서 그가 찾아낸 주제는 지구의 역사 이야기다. 초창기 지구 내부의 움직임의 흔적들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간적인 이동도 눈부시다. 100만년 전 북아프리카에서 70만년 전 자바섬으로, 그러다가 농업의 탄생을 이야기하며 1만여년 전으로 건너뛴다. 농업은 인류에게 비로소 문화의 역사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도시의 조직화라는 한 단계 뛰어넘는 문명을 선사한다.


▲ 브로노우스키는 잃어버린 제국의 도시를 찾아 경관에만 몰두하지 말고 도로, 다리, 통신을 느껴보라고 말한다. 이 셋은 어떤 문명에서건 진보적 발명이라는 것이다. 사진은 잉카문명의 유적 마추픽추
돌을 다루는 인간의 손놀림에서 출발해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의 신비를 벗겨내고 돌 속의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한 인간의 상상력은 결국 미켈란젤로를 거쳐 현대의 헨리 무어까지 연결시키는 그의 광대한 시야에 입을 다물기가 힘들 정도다. 불의 이야기는 합금으로, 다시 연금술을 거쳐 존 돌턴의 원자론에서 일단락된다. 음악과 수학이 한데 어우러지고 천문학과 종교재판, 영국혁명과 새로운 동력, 그리고 공장의 탄생 등도 인간 등정의 정점들이다.

고대벽화를 설명하는 다음 구절에 브로노우스키의 시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무기를 만든 사람들과 벽화를 그린 사람들은 동일한 작업, 즉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미래의 예상, 현재 있는 것에서부터 무엇이 나올지 추론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끌어내는 능력이야말로 상상력의 본질이며, 이런 상상력을 가진 인간에 대한 그의 신뢰는 무궁무진하며, 당연히 그는 이런 인간이 만들어낸 인류문명과 과학에 대해서도 무한한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고 말한다.

(이한우기자 hwl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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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5-05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고 싶은 책입니다. 비싸서 좀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stella.K 2004-05-05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그냥 올려봤어요. 언젠가는 사게되겠지요.

waho 2004-05-0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근데 넘 비싸네요. 지금 찾아보니...허걱...
 

조각칼로 파헤친 세상 소리없이 가슴을 베고 가버려…
서성란 소설집/문이당

대저, 소설이란 무엇이고 소설가란 누구인가? 요즘 들어 부쩍 이 질문을 내게 자주 한다. 답은 작가마다 다를 것이다. 나 역시도 내게 맞는 내 답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질문의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잊을까 봐 수시로 던지곤 한다.

이제 소설은 잊혀진 장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손아귀에 힘이 불끈 쥐어진다. 기초예술분야가 천대받는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소설은 아직 숨겨진 광맥이 무궁하게 많다고 누군가는 그것을 캐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불 나간 집에 전깃불이 들어오듯 일시에 환하게 밝아질 그런 날도 있을 거라고 중얼거리는 작가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도저한 답을 가지고, 남들 배추씨 뿌리러 우르르 몰려갈 때 혼자 무씨 뿌리러 묵묵히 가는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서성란이다. 서성란<사진>은 ‘혹시?’ 하고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뚜벅뚜벅 앞으로만 걸어갈 뿐이다. 그가 즐겨 신는 단화가 남긴 발자국은 그래서 더욱 선명하다.

서성란은 1996년 중편 ‘할머니의 평화’로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작년에 ‘모두 다 사라지지 않는 달’이라는 장편을 상재했고 일 년 만에 그의 첫 소설집이자 두 번째 책인 ‘방에 관한 기억’을 가지고 다시 독자 앞에 돌아와 섰다.

“아이는 아라비아 숫자가 적힌 종이 카드를 손에 쥐고 잠이 들었다. 여간해서는 낮잠을 자지 않는 아이다. 방 안 여기저기에는 아이가 가지고 놀던 숫자 카드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잠든 아이를 안아 요 위에 눕히고 손에 쥐어져 있던 카드를 빼내려 하자 잠결에도 아이는 손을 꼭 쥔 채 모로 돌아누워 버린다. 잠든 아이의 얼굴에는 상처가 깊이 패어 있다. 관자놀이와 양 볼은 찢어져 아물지 않은 상처와 보랏빛 멍자국들로 어지럽다.”(‘모델하우스’ 233쪽)


▲ 소설가 서성란
세모꼴의 조각칼로 예리하게 파헤친 듯한 이 간결한 문장은 독자의 어떤 참견도 거절한다. 표제작인 ‘방에 관한 기억’을 포함해 여덟 편의 중단편이 실린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딱 손에 쥐기 좋을 만큼 한 움큼씩 나뉘어져 붉은 리본에 감긴 고급 소면이 떠오른다. 작가는 잘 삶긴 쫄깃한 면발을 따뜻한 육수에 풀어 내놓았다. 국수를 한입 머금고 있다가 입 속으로 ‘쪽’ 하고 빨아들일 때 국숫발이 입 천장에 찰싹 달라붙는 명랑한 소리를, 그 유쾌한 즐거움을 독자들은 책의 곳곳에서 보고 듣고 느낄 것이다.

이 책에는 그가 첫 책에서부터 집요하게 그리고 있는 발달 장애아와 그 어머니들의 모습,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혜롭게 살아갈 능력을 지니지 못한 아버지, 불어난 몸 때문에 사회와 남편에게 버림받는 여성, 사랑의 상처를 광기에 가까운 동성애의 집착으로 표현하는 여성, 가난과 줄기찬 투쟁을 하고 있는 가족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그의 글에는 페미니즘적 저항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심리적 굴절이나 종교적 초월도 보이지 않는다.”(문학평론가 황광수) 그저 담담히 응시할 뿐이다. 지독할 정도로 담담해서 오히려 섬뜩하게 만든다. 가령 이런 말들.

“하긴 우리 부모는 이제까지 나한테 아무 것도 준 것이 없으니까요.”(‘산초’ 42쪽)

슬프지도 않는데 슬픔을 요구하거나, 안개를 뿌려 문장을 달달하게 만들거나, 읽고 난 뒤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이야?’ 하는 허전함이 남게 하지도 않는다. 단지 조각칼로 날카롭게 파헤칠 뿐이다. 잘못하다간 그의 조각칼에 가슴을 베이기 십상이다. 도둑처럼 스며들어와 소리도 없이 긋고 가니까. 내출혈이 걱정되면 마음을 굳게 먹고 이 책을 펼칠 일이다.

(이현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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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는 12시간 일하고 36시간 쉬었다
신명호 지음
시공사/294쪽



▲ 조선시대의 궁녀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높인 MBC TV 드라마‘대장금’의 한 장면. 의녀는 다른 궁녀와 마찬가지로 공노비 중에서 선발됐고, 내의원에 소속돼 궁중 여성들을 치료했다. 이들은 출퇴근을 했으며 혼인도 가능했다.
“설한단(雪漢緞·고급 비단) 남치마와 불빛 모단(毛緞) 족도리며/ …항아(姮娥·중국 고대신화의 달의 여신)가 적강(謫降)한가 속태(俗態)도 전혀 없네.”(‘한양가’ 중에서 궁녀를 묘사한 부분)

인터넷에서 ‘월간궁녀’나 ‘궁녀센스’라는 잡지 형태의 희한한 게시물을 한 번쯤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최근 많은 TV 사극에서 궁녀들은 궁중 암투극의 필수적인 조연을 넘어서 당당한 주인공으로까지 격상되고 있다. 일상사와 생활사로 관심이 집중되는 교양 역사서의 흐름이 이런 대중적인 관심과 만나면 이제 책이 한 권 나와야 한다. 바로 이 책이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조선시대의 궁녀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을 하는 과정이 ‘역사의 무의식 속에 침잠해 있던 기억들을 되살려내는 느낌’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궁녀에 대한 기존의 지식은 생존 궁녀의 증언을 토대로 한 이규태 저 ‘개화백경’(1971)과 김용숙 저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1987)가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방대한 기록 속에서도 궁녀에 대한 내용은 드물다. 궁녀란 원칙적으로 ‘왕의 여자’였으므로 왕 말고는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역모사건에 대한 법정 기록인 ‘추안급국안’에 궁녀들의 인적사항과 업무가 대단히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었고, 이 책의 주요 자료가 됐다.

왜 궁녀인가? 수천 년간 침묵을 강요받았던 그들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문화인 왕실의 생활문화를 창조하고 전승한 주역이었다는 것이다. 왕실의 음식과 옷과 육아의 담당자가 그들 아니면 누구였겠는가? 그들은 지밀(왕·왕비의 침전과 대청 등 근무)·침방(옷·이부자리 제작)·수방(수를 놓는 일)·생과방(음료·과자 담당)·소주방(음식 담당)·세수간(세숫물과 목욕물)·세답방(빨래)으로 그 부서가 구분돼 있었고, 정5품에서 종9품까지 직급이 나누어졌다.

▲ 궁녀
방마다 궁녀 전체를 총괄하는 제조 상궁과 부제조 상궁이 있었고, 이들은 각 처소의 궁녀들을 대표하는 실력자였다. 궁녀들도 하녀를 두었는데 방자·취반비·무수리 등이 그들로, 넓은 의미의 궁녀에 포함된다. 궁궐 안에는 우물이 부족해 물을 긷는 ‘무수리’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궁녀들은 생각보다 많은 급료를 받았는데 1년에 적어도 쌀 10가마는 보장됐다. 이러다 보니 갖은 이권에 개입해 재산을 모으는 궁녀까지 생겼다.

궁녀에 대한 웬만한 궁금증은 이 책에서 거의 풀린다. 사극에서 방문을 열어주는 궁녀는 잠도 자지 않고 24시간 대기했을까? 아니다. 주·야간으로 교대했고 보통 12시간 일하고 36시간 쉬었다. 임금의 승은을 입지 못한 궁녀는 어떻게 성적 본능을 해소했을까? 내시·별감과의 스캔들, 심지어 동성애까지 기록 곳곳에 보인다. 여가 시간은 어떻게? 바느질, 글씨(궁체) 연습, 투호….

3년 전 ‘마지막 궁녀’가 세상을 떠난 대목은 서글프다. 1966년까지 순종의 황후인 윤 황후를 모셨던 성옥염 상궁은 이후 절에 들어가 살았는데, 유품은 지갑에 들어 있던 2만3000원이 전부였다고 한다. 어쩌면 최초의 전문직 여성이었을지도 모를 그들의 삶은 끝내 전근대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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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5-05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구 싶어요. 값이 좀 내리거나 이벤트하면 얼른 데리고 올려구요. 물론 평이 좋아야겠지만...요즘 자꾸 사는 책마다 실패하는게 많아져서...
 
 전출처 : 프레이야 > [퍼온글] 재미있는 서재 놀이...

1. 지금 옆에서 가장 가까운 책을 집으세요.
2. 그 책의 23페이지를 여세요.
3. 다섯 번째 문장을 찾으세요.
4. 이 지시문과 함께 그 문장을 제 서재에 답글로 적어 주세요.
5. 그리고 퍼가서 다른 분들에게도 시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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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루쉰/ 희망은 길이다/ 예문(23쪽) 다섯째 문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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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라 독후감을 써라” 강요하지 마라


“또 해 줘.” 우리는 이 말을 잊은 지 오래다. 잠드는 머리맡에서 아빠 엄마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면 우리는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발레리는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는 자리에서 ‘또 해 줘’의 추억을 말했다. “나 또한 하고많은 마법사며 괴물, 해적, 요정 따위를 끊임없이 지어내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쳐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진이 다 빠져버린 아빠에게, ‘또 해 줘’ 하며 졸라대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저녁마다 장부의 수지타산을 맞추는 일만 했던 프란츠 카프카는 어린 시절, 이런 일기를 남겼다. “어른들은 저녁 나절, 한참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빠져 있는 아이를 결코 납득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그만 책을 읽고 자야만 하는 이유를 강변하는 어른들만의 논리를 아이는 결코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말로센 연작소설, 까모 시리즈 등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프랑스 소설가 페나크(Pennac·60)의 이 책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소설(책)을 읽힐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첫 번째 주문은 소설을 큰 소리로 읽어주라는 것이다. 카프카가 막스 브로트(카프카 전집의 편집자이자 그의 친구)에게 ‘변신’을 읽어주면서 눈물이 나도록 웃어 젖혔던 것처럼, 강가에 앉은 마르탱 뒤가르가 앙드레 지드에게 ‘티보가의 사람들’을 읽어주었던 것처럼, 소리내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아예 처음부터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에게 큰 소리로 글을 불러주며 ‘죄와 벌’을 썼던 것처럼 말이다.

문제아만 모아 놓은 35명 학급에서 소설을 읽어주면 마치 거짓말 같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페나크는 단언하고 있다. 처음에 심드렁하던 아이들이 점차로 책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그리고 새로 읽은 책 경험을 말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는 어떤 경우에도 ‘책을 읽어야 한다’는 투의 강제를 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아이들은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소설은 ‘소설처럼’(원제: Comme un Roman) 읽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고 페나크는 거듭 강조하고 있다.


▲ 다니엘 페나크는 '책(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읽는 것이 재미있게 읽는 것인지 몇 가지 귀중한 힌트를 주고 있을 뿐이다.


페나크는 “소설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은 작가와 나 사이에 형성되는 그 역설적인 친밀감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홀로 씌어진 그(작가)의 글이 혼자서 소리 없이 읽어내리는 나의 목소리에 의해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페나크는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는 요령까지 말해 주고 있다.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마치 글을 쓰는 시간이나 연애하는 시간처럼)이므로 ‘재킷을 살 때는 먼저 주머니의 크기가 포켓판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소설을 읽을 환경이 안 된다고? 카프카는 잇속만 차리는 아버지를 거역하면서 읽었고, 플래너리 오코너(미국 여성작가)는 “아니 ‘백치’가 뭐냐? 그런 책만 싸고 돌다가 너도 그 꼴이 될라” 하던 어머니의 이죽거림을 들어가며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 티보데는 베르? 전선의 참호 속에서 몽테뉴를 읽었고, 앙리 몽도르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던 당시 암시장에서 구한 말라르메의 시를 탐독했다.

세번째로 페나크가 권하는 말은 ‘아이들이 자연스레 책읽기에 길들게 하려면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용을 묻지도 말고, 독후감을 요구하지도 말고, 책에 대한 사전 지식을 동원하지도 말 일이다.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말라. 책이란 우리 아들딸이 설명하라고 씌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면’ 읽으라고 씌어진 것이다. 독서를 하면서 가장 먼저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다.

또 ‘이 책을 다 읽으면 TV를 보게 해준다’는 식으로 TV가 책보다 선망의 포상이 되도록 하지 말라. 청소년용 다이제스트를 만들지도 말라. 아니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아이가 보기에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구실로 화랑 큐레이터 중 누군가가 다시 그려보겠다고 덤비겠는가.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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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5-0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때 책 읽는 건 좋아했지만 독후감 쓰는건 고역이었죠...커서는 일기를 습관처럼 쓰지만, 그땐 일기쓰는게 의무가 되니 고역이었던거 처럼요. ^^;; 자연스럽게 쓰는게 아니라 '의무'를 만들어두면, 더 못하게 된다니까요. 윗글에 정말 동감~ ^^

프레이야 2004-05-0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니엘 페나크는 어린이책으로 먼저 알게된 소설가였어요. 바로 좋아지더군요. 늑대의 눈, 같은 책은 전율이었어요. 이 책의 뒷장에 나오는 옮긴이의 말(최윤정)에는 페나크의 이런 목소리가 있어요.
- 만약 어떤 소설을 그 소설이 태어나게 만든 관념으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 작품은 소설로서는 실패한 것입니다.

waho 2004-05-0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후감이건 일기건 전 뭐든 써 내란 과제는 죄다 싫었어요. 글 솜씨가 좋지도 않은데다 제 생각을 옮기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고 더 싫었던건 누군가가 억지로 제 사생활을 들춰 낸단 느낌 땜에...결국 이 나이에도 글 솜씨 없이 살고 있지만요

stella.K 2004-05-03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 그런게 아니었군요. 전 지금도, 마이리뷰 쓰긴 하지만 영 어색한거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