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문예 이론’;영상시대의 미학 이론 |
발행일 : 2000-10-14 [Books] 기자/기고자 : 안인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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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동구권이 붕괴되는 것과 아울러 이데올로기와 연관된 서적들이 갑자기 일반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부당하게 함께 논의에서 멀어진 인물 중에 발터 벤야민(1892~1940)도 들어있다.
90년대 들어 우리 사회에서 영상예술이 차지하는 위치가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어쩌면 그는 가장 절실하게 논의되어야 할 미학자의 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악명 높은 난해한 문체가 걸림돌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에 들어있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하나만 해도 작게는 소설과 영화의 문제에서 크게는 정보시대의 기본적 속성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깊이 있는 분석을 담고 있다.
물론 ‘문예이론’이라는 제목이 어딘지 시대에 맞지 않는 느낌을 주는 것이 현실의 사정이다. 따져보면 80년대에 너무 ‘이론’을 좋아한 후유증이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문학작품 말고도 영화와 환상소설과 게임의 형태를 한 이야기들. 인터넷의 유머와 심지어 TV 광고, 그리고 토크쇼에 이르기까지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 대신에 여러 매체를 이용한 각종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형태야 어떻든 이들 수많은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상상력이 반영되어 있고 오래 된 이야기의 구조가 들어있다.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모티브는 반복되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야기 구조와 상상력은 바로 문예학의 문제가 아니던가.
편역자가 세심하게 선별해 놓은 이 미학 에세이 책에는 브레히트, 카프카, 프루스트, 보들레르 등 몇몇 작가들에 대한 평론과 함께, 이야기와 이야기꾼과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상황의 변화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들어있다. 입으로 이야기를 전하던 고대의 이야기꾼, 인쇄매체를 통해 복제되지만 고독한 개인에 의해 창작·수용되는 소설의 상황, 이어서 집단으로 창작과 수용이 이루어지는 영상시대의 상황까지 펼쳐지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건정보를 전하는 신문이 새로움, 간결성, 이해하기 쉬움, 사건들간의 연관성이 없음 등 저널리즘 속성을 통해서 독자의 상상력을 마비시킨다는 관찰이다. 20세기 독일 최고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지만 대학으로 가는 길이 막힌 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는 ‘자유’ 문필가로 남았던 사람의 관찰이니 분명 일리가 있을 것이다.
문학의 상황뿐 아니라 미술품과 사진에 대한 관찰도 이루어진다. 화가가 보여주는 그림은 ‘아우라’를 가진 전체적인 것이지만, 카메라맨이 잡아낸 영상은 여러 부분으로 쪼개서 촬영한 단편적인 영상들을 편집을 통해서 다시 조립해낸 것이다.
‘정신분석을 통해서 충동의 무의식 세계를 알게 되었듯이 카메라의 개입을 통해서 우리는 시각(시각)의 무의식 세계를 알게 되었다. ’ 예를 들면 운동선수의 동작 하나 하나를 분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술작품 앞에서 깊은 관조적인 침잠에 잠겼다면 오늘날 관객은 움직이는 영상에서 정신을 분산시키는 오락을 기대한다. 요즘 흔히 거론되는 사용자(User)로서의 독자 및 관객의 속성 일부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쉴러, 헤겔, 니체, 루카치, 아도르노 등 독일 미학 전통의 맥락에 서있는 유태인 벤야민은 나치를 피해 도망치다가 길이 막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30년대에 주로 쓰여진 이 글들이 현재 우리의 상황까지도 부분적으로 짚고 있어서 21세기를 사는 내게도 직접적인 호소력을 가지는 데다가, 드물지 않게 튀어나오는 촌철살인(촌철살인)의 명문장들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곤 했다.
/안인희·번역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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