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칠일 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강연록
발행일 : 2004-02-28 D7 [Books]    기자/기고자 : 김광일
 
송병선 옮김

현대문학

1만2000원

‘스티븐슨이 말했듯이 ‘매혹’이란 작가가 가져야만 하는 근본적인 자질 중의 하나입니다. 매혹이 없으면, 나머지는 모두 소용없는 것입니다. ’(16쪽)

이 책은 보르헤스<사진>가 칠일 밤에 걸쳐 강연한 일곱 가지 문학 얘기를 주제별로 묶은 것이다. 1977년 여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리세오 극장에서 행했던 강연 초록을 여러 차례 수정한 끝에 1980년에 발간했고, 이번에 한국어로 초역됐다. 그가 선택한 주제들은 ‘신곡’ ‘악몽’ ‘천하룻밤의 이야기’ ‘불교’ ‘시’ ‘카발라’ ‘실명’ 등이다. 죽는 날까지 마치 유언장처럼 그를 뜨겁게 달군 주제들이라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독자들에게는 수많은 고전과 현대물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일종의 독서 에세이로 보일 것이다.

“천국은 도서관과 같은 곳”이라고 비유한 보르헤스는 1955년 아람부루 정부에 의해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임명됐다. (231쪽) 아르헨티나 출신의 그(1899~1986)는 평생 자신을 따라다닌 수많은 수식어 중에서 ‘도서관장’이란 직함을 가장 영예롭게 생각했다. 밀튼이나 제임스 조이스가 말년에 시력을 잃었듯이 그는 도서관에서 엄청난 양의 지식에 함빡 빠졌다가 작가로서는 치명적인 실명에 이르게 된다.

‘20세기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 현대 환상문학의 거장, 소설을 죽음에서 구해낸 작가’로 불리는 보르헤스는 이 책에서 그가 어떤 작품과 사상들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문학 속의 보르헤스와 더불어 현실의 보르헤스를 보여주고, 인간적인 보르헤스도 알게 해준다. 이 책을 한마디로 줄이면 보르헤스의 문학적 운명을 밝히는 책이다.

‘항상 나는 내 운명이 무엇보다도 문학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게는 수많은 나쁜 일과 몇 개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감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 모든 것, 특히 나쁜 일들이 장기적으로는 글로 변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246쪽)

한 가지. 보르헤스의 어머니인 레오노르 아세베도는 9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아들의 책 한 권을 침대 머리맡에 놓아 두었다. 그러나 그 책을 제외하고는 보르헤스의 집에 그의 책은 한 권도 없었다. 보르헤스는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는 책들과 ‘중요하지 않은’ 자기 책들을 뒤섞어 놓는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허영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267쪽) 김광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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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신화 속 신들은 시대에 따라 변신한다"
그리스 신화의 이해
이진성 지음 / 아카넷 / 560쪽 / 1만8000원


“제우스는 헤라와의 사이에서 아레스를 낳았고, 레토와의 사이에서 아폴론을 낳았어요. 프리아모스의 아들인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의 아내였던 헬레네와 결혼해서….”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그리스 신화(神話)에 나오는 신(神)과 영웅들의 계보를 줄줄 읊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진성 연세대 불문과 교수가 최근 출간한 ‘그리스 신화의 이해’는 벌써 몇 년째 계속되는 그리스 신화 붐을 보며 “이제 신화라는 ‘고전(古典)’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절실한 필요성을 느낀 결과물이다.

“그동안 그리스 신화 관련 서적은 대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나 토마스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참고한 에피소드 중심의 서술이 많았습니다. 이런 방식은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긴 하지만 ‘신화의 숲’을 보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됐죠.”

그보다 먼저 도대체 왜 우리나라에서 ‘그리스 신화 붐’이 일어났을까? 이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생활이 윤택해지고 문화가 발전할수록 지적 호기심이 늘어나게 됩니다. 외국여행의 기회가 많아졌고 서구와의 왕래도 흔한 일이 됐죠.

그런데 서양 문화의 원류인 그리스 신화를 모르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 문명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초창기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던 대학생들이 이제 부모가 된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그리스 신화를 읽힌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단지 그것뿐일까? “또 있죠. 그리스 신화에는 아이들이 열광할 만한 ‘재미’가 있습니다!” 신화에는 다른 문학작품에선 찾아볼 수 없는 환상성과 초현실성이 존재한다는 것. “600만불의 사나이나 수퍼맨 같은 SF 수퍼 히어로들은 모두 그 원형이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같은 ‘영웅 신화’에 있단 말입니다.”

앞서 나온 ‘신화의 숲’ 이야기로 돌아가자. 19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나온 벌핀치의 책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지만 몇 십년 전 우리말로 그 책이 번역됐을 땐 그렇지 못했다. “우리가 서양의 고대사와 지명·인명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신화의 총체적인 이해’를 노린 일종의 개론서다. 말이 ‘개론서’지 분량은 600페이지에 가깝다. 신화의 성격과 특징, 형성 과정을 먼저 제시한 뒤 ‘창세 신화’ ‘올림포스 신화’ ‘영웅 신화’의 3개 장으로 구분해 신화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뒤 그리스 신화의 역사적 변모와 연구사까지 소개했다.

“서구 문화가 세계성을 확보하게 된 원인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담겨져 있어요. ‘개념 중심’의 고전이 힘을 얻은 동양에 비해 서양은 리얼리티를 묘사하는 ‘작가적 상상력’에서 앞서 있었습니다. 바로 이 상상력이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용되고 반복되면서 서구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죠.” 예를 들어 중세 유럽에서 제우스 신은 십자가를 든 배불뚝이 수도승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이는 ‘당대의 가장 도덕적인 인물’의 형상화였다는 것이다.


불문학을 전공한 이 교수가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몽펠리에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시절로 올라간다. 유학생인 그의 눈에 비쳤던 유럽문명은 온통 그리스 신화에 침잠되고 채색된 듯한 모습이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밀로의 비너스’,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라오콘’,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비너스의 탄생’…. 서양문명 공통의 고전이라고 할 그리스 신화를 모르고선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리스 오르페우스 신화를 소재로 ‘신화 및 신비주의적 발상’이란 제목의 박사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파리 10대학 신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신화 탐구 역정’을 계속됐다.

“새학기에 책 제목과 같은 교양강의를 개설했어요. 수강생이 300명 가까이 몰리는 걸 보고 젊은 학생들이 신화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걸 실감했죠. 강의실이 넘쳐 많은 학생들이 그냥 돌아갔습니다만….” 이 교수는 그리스 신화 중 가장 감명깊은 부분을 묻자 “인간의 욕망·질투·명예와 온갖 전쟁·영웅담이 펼쳐지는 트로이 전쟁이야말로 그리스 신화의 백미”라고 말했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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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예술의 뒷면에 어른거리는 경제의 그림자

예술의 역사-경제적 접근 … 이재희·이미혜 지음 / 경성대 출판부


 

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은 예술에도 작용한다.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 등장한 근대소설은 경제적 환경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시장 경제가 확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역동하는 중간 계급의 생활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들이 유행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프랑스에서는 왕정과 귀족이 예술가를 후원하는 제도가 엄존했기 때문에, 소설가들은 비사실적인 우화와 귀족의 생활을 반영하는 에로티시즘에 탐닉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에는 왕이나 귀족 등 고귀한 신분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지만, 18세기 영국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전 세계를 무대로 부를 축적했던 당시 중간 계급의 세계관을 대변했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는 28년 동안 금욕적으로 지내면서 쉬지 않고 일을 한다. 크루소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재화를 거두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중간 계급의 자유방임주의를 반영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보다 앞서서 자유주의를 예찬한 셈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어떻게 富를 축적했나

18세기에 바로크 미술이 섬세하고 우아한 로코코 미술로 넘어가면서, 화폭에는 궁정의 풍속이 아니라, 귀족들의 사냥과 아유회가 더 많이 등장하게 됐다. 위선적인 궁정 생활에 싫증이 난 귀족들이 그에 대한 반동으로 전원 생활을 이상화했기 때문이다.

궁전 안에 시골집을 지어놓고 양치기 놀이를 즐겼던 귀족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미술에서는 양치기 소년이 자주 등장했고, 그림 속의 양치기는 거친 노동에 시달리는 청소년이 아니라, 깊은 사색에 잠긴 채 양떼를 바라보는 기품있는 인물로 묘사됐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노동문학이 크게 떠올랐다. 후원자를 잃은 작가들이 실업자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면서, 당시 증가된 노동자 계급에 심정적으로 동질감을 느꼈다. 작가들은 왕과 귀족에 이어 사회의 지배 세력으로 자리잡은 부르주아지를 비판하면서 하층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동 문학은 20세기에 들어와 문학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 책의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노동자들은 19세기 후반에 문맹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노동문학에는 관심이 없었다”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답답하고 비참한 일상 생활을 다룬 소설보다는 귀족과 중간 계급의 생활을 다룬 통속 소설을 읽으며 잠시나마 환상에 젖는 편을 택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생활을 다룬 에밀 졸라의 소설들은 주로 중간 계급에서 널리 읽혔다. 하층민들의 생활을 엿보는 재미를 통해 안락한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중간 계급들 덕분에 졸라의 소설들은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10만부 이상 팔리는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경제학자와 불문학자가 공동으로 펴낸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서양의 예술사를 훑어 가면서 시대별로 예술과 경제의 상호 작용을 확인시켜준다. 난삽한 이론보다는 풍부한 사례들을 대거 동원하면서 서양 예술에 드리워진 경제의 흔적을 명료하게 드러냈다.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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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꾀 부린 자, 꾀로 망할 것이니…위선과 변명 꾸짖는 '성인 우화'
라퐁텐 그림 우화/ 장 드 라 퐁텐 지음/ 박명숙 옮김/ 시공사

여우의 초대 자리에서 황새는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그릇에 담긴 먹음직스런 음식들….

그러나 황새의 긴 부리로는 아무 것도 집을 수가 없었다. 환상적인 음식, 이 모든 것이 넓은 접시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새라고 답할 길이 없으랴. 황새는 여우를 청했다. 이번엔 모든 산해 진미가 목이 긴 병에 담겨 있었다. 하하! 세상엔 이런 복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우도 황새도 어느 쪽도 행복하지 못했다. 우린, 지금, 여우와 황새의 손님 초대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 퐁텐은 ‘황금 알을 낳는 암탉’을 들려주면서 “우리는 너무 일찍 부자가 되기 위해 오히려 순식간에 가난해진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라며 어른들의 탐욕을 직접 꾸짖는다.

끝없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거듭하는 ‘목동과 사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화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아주 작은 동물이라도 우화 속에서는 주인 역할을 한다. 단순한 도덕론은 지루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통해서 교훈을 들려주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꾸민 이야기를 통하여 가르치면서 즐겁게 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 라 퐁텐의 ‘우화(寓話)’가 마침내 우리말로 모두 옮겨졌다. 본디 12권으로 이뤄진 책을 삽화를 곁들여 양장본 1권으로 묶었다.

황새와 여우가 서로 식사 자리에 초대해서 골탕을 먹이는 이야기, 멍청한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있다가 “예쁜 목소리를 들려달라”는 여우의 꾐에 빠져 고기를 놓치는 이야기, 진수성찬과 맞바꾼 목걸이를 거부하고 멀리멀리 달아난 늑대 이야기….

솔직히 털어놓자. 라 퐁텐의 우화를 우리가 아는가.

그동안 우리가 읽은 우화는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로 재편집돼 돌아다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교훈적이며 풍자적인 내용과 동·식물이 화자로 등장하는 형식이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라 퐁텐도 이솝도, 어린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우화를 쓰지는 않았다. 우화는 그야말로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다. 거짓말에 익숙해 있고, 언제든지 온갖 궤변으로 자신을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다.

이번의 우리말 완역본은 1834년에 프랑스에서 펴낸 초판본을 옮긴 것이다. 이 책은 고서적상 김준목씨가 이탈리아의 한 시골 마을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시골 농부의 서재에서 100년이 넘도록 잠자고 있던 그 오래된 책의 느낌을 고스란히 살린, 심지어는 먼지와 곰팡이까지도 보여주고자 애쓴 표지 장정은 아름답다.

그리고 작품 한편 한편마다 판화가 구제의 세밀화가 문자를 이미지로 받쳐주고 있어, 책이 출간된 19세기의 정신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망외의 소득도 있다.

그렇지만 시적인 원문을 그대로 옮긴 데다가, 글씨의 크기도 작고, 어른들 세계의 실상을 엑스레이 필름처럼 환하게 드러내는 작품도 적지 않아 아이들에게는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청소년은 되어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라 퐁텐의 애초의 의도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고대인의 영혼이 우리들 현대인의 몸 속에, 그리고 불투명한 삶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야기꾼 라 퐁텐의 이 마르지 않는 샘물을 천천히 맛보기를. 작가의 이름 라 퐁텐은 프랑스어로 ‘샘’이라는 뜻이다.

작품의 유명세와 달리 작가 라 퐁텐이란 인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작가의 조국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우화’ 몇 소절 정도는 누구나 다 암기할 정도로 유명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런데 이 독특한 장르의 글인 ‘우화’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라도 이 ‘기이한 역설’의 주인공인 그를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장 드 라 퐁텐은 1621년 샹파뉴 지방에서 태어났다. 부르주아지 가문의 자식으로 부친에게서 적지 않은 땅과 함께 물과 숲을 관리 감독하는 직위를 물려받는다. 그리하여 거기서 들어오는 연금과 세금으로 부르주아의 안온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평범한 삶을 택하지 않는다. 라틴어로 된 고전과 당대의 시인들에게 매료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버리고 글쓰기를 선택한다.

결혼을 하여 아이까지 하나 두었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올라가 독신의 자유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 사교계를 드나들며 시적 재능을 펼칠 기회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문학적 영광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당대의 권력자인 재무총감 푸케에게 시를 지어 바쳐 그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것도 푸케의 실각과 함께 끝났다. 성공을 갈망하며 여러 권의 에세이를 남겼고, 그 가운데 하나는 훗날 시학 이론서에 이름이 오르지만, 4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라 퐁텐은 내내 별볼일없는 작가로 지내야 했다.

‘우화’는 라퐁텐에게 거의 유일한 성공을 안겨주었다. 이 성공으로 그는 후원자를 얻는다. 오를레앙 공작 부인, 라 사블리에르 부인, 그리고 에르바르 가문. 하지만 뒤늦은 성공 탓인지는 몰라도 건실한 부르주아의 삶과는 거리가 먼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사상적인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실제적인 삶에서도 그러했다. 술과 도박·매춘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여 그가 죽었을 때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런 면모 때문에 그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왕에게 얌전하게 살겠다는 약속까지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서약이 있은 뒤에도 라 퐁텐은 여전히 순종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자유사상가들과 교류하며, 제도 바깥의 삶을 살아나간다. ‘우화’는 계속 이어졌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 자체가 문학 제도의 바깥에 있는 것이었다.

그를 얌전하게 만든 것은 병이었다. 생의 마지막 회한 때문이었을까? 종부성사(終傅聖事)를 받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쓴 글을 부정했다. 그의 묘비명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장은 그가 왔던 것처럼 가버렸다/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많은 재물을 하찮게 여겼다/ 시간으로 말하자면, 그것만큼은 잘 쓸 줄 알았다/ 시간을 절반으로 나누어서/ 반은 실컷 잠자는 데/ 나머지 절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썼으므로.’

그의 ‘우화’에는 이렇게 라 퐁텐의 삶이 그려나간 궤적이 밑그림으로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의 교양과 섬세함이,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가로서의 자유의지와 비판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때때로 그것이 도덕적 차원에서의 일탈과 방종의 모습을 띠긴 했지만, 그 둘은 우리들 인간 자신에 대한 신랄하면서도 예리한 통찰의 시선을 빚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라 퐁텐의 ‘우화’는 창작이 아니다. 그러나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문체는 시적인 품격을,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이야기 구성과 함께 인간존재와 삶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지적인 시선은 뛰어난 산문가의 특성을 그에게 부여해주었고 프랑스 문학의 전통으로 자리잡는 풍자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데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친구인 몰리에르의 희곡 작품과 함께 사랑과 미움, 우정과 배신, 지혜와 어리석음, 성공과 질투 등등 우리들 삶의 내장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로 이어진다.

(박철화·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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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비발~* > 펌> 감독들의 3.12

"한나라당 의원들이 뒷짐지고 서 있는 장면, 공포영화를 보는 듯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42)

                                                                       
"요즘 파주에서 계속 영화 촬영중이라 '생중계'로는 보지 못했다. 저녁뉴스로 편집된 화면을 봤다. 내게 그날의 영상은 한 편의 '공포영화'였다. 의장석에서 끌려나와 통곡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의원들 모습이 슬펐다기 보다 한쪽 편에서 뒷짐지고 있는 서 있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보면서 괴괴한 느낌이었다. 뒤쪽 멀리 떨어져 최병렬 대표나 박근혜 의원 등 지도부가 당당하게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그랬다.

다들 생각이 비슷할 거라고 본다. 한심했다. 마음 한편에선 사회개혁이나 개선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좌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국 정치역사의 엄청난 퇴보다. 87년 6월항쟁이 떠올랐다. 그 때 청산하지 못한 기득권 세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끈질길 수 있는지, 또 그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질긴지 이번 탄핵안이 통과되는 걸 보면서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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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좀비들...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드시 귀환한다"
- <조용한 가족> <반칙왕> <장화, 홍련> 김지운 감독(42)

"참담하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탄핵 결과에 대한 파장이 클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설마 가결이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국회의 정치수준은 영화감독의 상상력을 초월했다. 어떤 잣대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만약 지금의 탄핵정국을 시나리오로 쓴다면 유치하다고 충무로에서 퇴짜맞는다. 말도 안되는 상상력은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박수치고 만세 부르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박수를 치고 좋아하는 것 아니겠나. 탄핵이 가져올 여파에 대해 판단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나. 물론 전에도 정치인들이 실소를 자아내는 장면은 여러 차례 연출되었지만 이번 사태는 그 정점이다.

탄핵에 찬성한 193명의 의원들은 괴상망측한 몰골의 '돌아온 좀비들' 같았다. 앞으로 나가던 역사를 거꾸로 돌려놓는 집단적 광기였고, 동시에 좀비를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좀비들에게 역사가 발목이 잡힌 것이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드시 귀환한다. 지난 역사 속에서 국민들이 잘하겠지 하면서 봐준 게 있다. 그 잔재가 망령을 불어들였다.

어쨋든 살아 있는 사람들과 좀비들과의 한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번 총선을 기점으로 다시는 좀비들이 살아오지 못하게 확실히 매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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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으로 눌러버린 강간...결국엔 자위로 끝난 포르노 스펙타클" 
 [기고]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본 3·12 
 
그날 대통령 탄핵가결안을 통과시키는 국회의 스펙터클은 내게 정치적이라기보다는 포르노그래픽하게 보였다.

첫 번째 이유는 그걸 보는 내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협상과 토론의 중재에 의한 정치가 없었다. 그냥 힘으로 눌러서 벌이는 강간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보는 우리에게 즐겁지 않느냐고 뻔뻔하게 물어보는 중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이유이다. 그건 사실상 했는데 당사자들은 안 했다고 생각하고 있거나(그래서 국민들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안 했는데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여전히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갈 데까지 가서 다 보여주고 말았다. 그런데 그건 한 게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애처로운 일이다. 거기서 오르가즘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그들이 잊어버린 것이 있다. 포르노그래픽한 스펙터클은 두 가지 약점이 있다. 그 하나는 흥분은커녕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무리 잘해봐야 그건 자위행위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민주주의라고 착각한 포르노그래픽한) 스펙터클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서 흥분한 연기는 가증스럽고 유치한 것이었다.

사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포르노그래픽한 스펙터클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항상 그걸 보는 사람들이지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걸 보고 그냥 웃자면 익살스럽기도 하지만, 이 스펙터클에 함께 참여하라고 제안을 받으면 그건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광화문에 선 그 수많은 시민들이 노! 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그대들은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런데도 방송국을 찾아다니고 신문사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중언부언하는 중이다. 무슨 말을 이렇게 복잡하게 말하느냐고? 그냥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같다'는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 당신이 잘 해서 이 포르노스펙터클과 맞서면서 당신 대신 거리에 서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한국군을 이라크에 파병한 것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의 차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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