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티크-인사동, 무진장의 보물(강엘리야 글·그림)=꼭 탐정 만화를 읽고 있는 느낌이에요. 그만큼 재미있고, 속도감이 넘칩니다. 1권에 해당되는 이 책은 서울 인사동과 북촌이 주무대입니다.

고구려 을파소 재상 가문의 소녀 지로가 열 살짜리 사동이와 풀어가는 수수께끼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가보로 내려오는 칼에 얽힌 비밀은 무엇일까요?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는 점쟁이 노인은 누구일까요? 다빈치기프트, 7800원

 

마침 앤티크님을 위한 책이 나왔다. 앤티크님은 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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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13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이거 정말 저를 위한 책이로군요!! 앤티크-라는 글자체도 마음에 들어요~ ^^ 어,그런데 여기서 앤티크는 뭘로 쓰인건지...저 퍼갈께요~ ^^
 

"행복하건 행복하지 않건 보드카가 있는 한 징징거리지 말지니"
아이작 B. 싱어 장편소설/ 정영문 옮김/ 다른우리/ 399쪽

▲ '쇼샤'의 책표지
사랑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굴레를 쓴다. 개인이 속한 공동체에 운명적인 박해가 가해질 때면 역사라는 이름의 핑계조차 그럴싸하다. 이 소설은 폴란드에서 러시아식 공산 혁명을 열망하던 지식인들이 스탈린에 대한 처절한 배신감으로 방황하던 때의 이야기다. 이념적 혼란과 추락에 떠밀리는데 나치의 전차바퀴 굉음이 가까이 다가온다면 사랑은 어떤 토굴에 머리를 처박는가.

이 소설은 외형적 줄거리를 엮기 위해 20세기 전반 동유럽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신산했던 삶을 시공간의 배경에 늘어놓고 있다. 1910년대 중반부터 독일이 침공하기 전까지 폴란드에서 이중으로 내몰림을 당하고 있던 그들의 삶이 적실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전쟁이 지나가고, 해방과 피안의 상징이 된 미국으로의 망명과 성공이 주인공들의 운명을 또한번 휘저어 놓는다.

주인공은 바르샤바의 크로크말나 거리 10번지에 살았던 아론과 쇼샤다. 백짓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아론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옛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사용하던 언어)와 이디시어(독일어, 히브리어 등의 혼성언어)를 쓸 줄 아는 천재 소년이다. 랍비의 아들인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극작가로 성공을 거둔다. 쇼샤는 가죽가게집 딸이다.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공립학교에서 2년 정도 뒤처져 있는, 말하자면 약간 바보 취급을 받던 아이였다.

엄격한 유대 가정에서 자라난 아론에게는 ‘내가 하고 싶어한 모든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사람을 그리면 십계명 중 두번 째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다른 소년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면 그것은 중상이었으며, 누군가를 비웃으면 그것은 조롱이었고, 이야기를 꾸며내면 그것은 곧 거짓말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론은 이미 아르키메데스, 코페르니쿠스, 뉴턴 그리고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을 읽고 있었다.


쇼샤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미숙한 아이였지만, 아론은 그녀를 찾아가 그가 읽고 듣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해준다. 쇼샤도 아론의 이야기를 자기 나름의 수준대로 이해하며 좋아한다. 그러나 쇼샤네 가족이 이사를 하면서 서로 헤어진다.

아론은 쇼샤를 점차 잊어 간다. 예술에 대한 열망과 퇴락한 생활의 캄캄한 격차 속에서 아론은 글쓰기를 시작하는 한편 여러 여인들과 연애에 빠진다. 문학에 열정을 갖고 있던 셀리아 부인,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모스크바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던 도라 스톨니츠, 아론에게 희곡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주는 미국인 여배우 베티 슬로님, 그리고 하숙집 하녀인 테클라였다. 도대체 그는 ‘죽어서 무(無)로 돌아가기 전에 쾌락을 찾아야’(87쪽) 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서 꼼짝 못하고 있던 그때 유대인의 굴레는 섹스와 토라(구약 첫5권), 그리고 혁명 세 가지였다. 히틀러가 군화 발굽을 들이밀기 전 그 시절이 절대적으로 암흑이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마치 러시아 노래처럼 ‘행복하건 행복하지 않건/ 보드카와 포도주가 있는 한/ 징징거리지 말 일’이었다.

다만 ‘모든 약점과 탈선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자 하는 충동에서 생겨’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어야만 그 ‘자유가 나를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까지 이해할 것이란 충고를 하고 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면 구름에 실려 가게 될 곳’인 팔레스타인 땅을 동경하다가 “그걸 믿어요?”라는 질문에 “아뇨, 내 사랑”이라고 답하게 되는 것이다.

아론은 전쟁이 끝나기 전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쇼샤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와 결혼식을 올린다. 아론이 문학적 아이덴티티를 찾고, 삶의 본령에 올라서는 것은 쇼샤 덕분이다. 전쟁의 와중에 그녀는 목숨을 잃는다.

아이작 싱어는 특유의 문체로 솜씨좋게 잘려나간 생선회 같은 단문장의 연결, 그리고 문장전환의 상큼한 묘미를 맛보인다. 틈만 나면 그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체념, 공산주의식 탈취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인간의 비참을 외면하는 신에 대해 원망을 드러낸다. 사랑도 예술도 결국은 ‘장난감을 부순 후 울면서 그것을 다시 맞추는 아이 같’은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폴란드 태생의 아이작 싱어가 노벨문학상을 받던 1978년에 발표됐다. 싱어 자신도 랍비 교육을 받았으며, ‘쇼샤(Shosha)’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김광일기자k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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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인 지음 | 아카넷 | 586쪽 


간혹 ‘서양의 역사와 문화’라는 교양 과목을 가르칠 때가 있다. 학생들과 대면하는 첫 시간부터 늘 곤혹스럽다. ‘서양’이나 ‘동양’이 역사·지리적 실재가 아니라 만들어진 ‘상상의 역사 지리’임을 강조하노라면, ‘서양의 역사와 문화’라는 과목의 정당성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실정성이 부정되면, ‘서양사’ 전공 교수로 분류되어 ‘서양사’를 연구하고 가르쳐야 하는 내 자신의 학문적 존재와 재생산의 근거가 사라진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서양’의 대학에는 ‘서양사’라는 전공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 대학의 지식 분류 체계가 ‘서양’보다 더 서양적인 것이다.

강정인 교수(서강대·정치학)의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서양’보다 더 서양적인 한국의 지식사회에 보내는 차분하면서도 통렬한 경고장이다. ‘서구중심적 세계관을 내면화’한 이 땅의 지식인들에 대한 그의 비판은 자기 성찰에서 출발하기에 단단한 존재론적 기반을 갖는다.

그에 의하면 ‘서구중심주의’는 서구우월주의, 서구보편주의·역사주의, 문명화·근대화·지구화라는 세 가지 명제로 압축된다. 서구는 다른 문명에 비해 내재적으로 우월한 요인들을 갖고 있어서 먼저 근대 문명의 길로 접어들었고, 서양의 근대가 걸어 온 길은 여타 문명권도 본받아야 할 인류 역사 발전의 보편적 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서구예외(例外)주의’와 ‘오리엔탈리즘’으로 요약된다. 계몽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진보사상 등을 특징으로 부여하면서 서구를 특권화하여 ‘유럽의 기적이라는 신화’를 만든 서구예외주의와, 비유럽은 자유주의, 합리주의, 법치주의, 사유재산 등이 결여되었다는 ‘부재의 신화’를 만든 오리엔탈리즘은 사실상 한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서구중심주의’는 제국에 앞서 제국을 정당화하는 지식 체계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로부터 영국 이주민들의 재산권을 옹호하고자 했던 로크의 재산권 이론에서부터 기독교에 대한 서구예외주의와 유교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으로 가득 찬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 이르기까지 그 목록은 끝이 없다.

사이드, 채터지, 블로트, 프랭크, 영 등 탈식민주의 연구자들의 선구적 업적을 계승한 저자의 이러한 문제 의식은 선언적 차원을 넘어선다. 한국의 현실을 서구의 경험과 개념에 두들겨 맞추는 서구중심주의적 심성에서 한국 보수주의의 특수성을 끌어내는 저자의 신선한 시도는 자신의 문제 의식을 학문적으로 감당하고자하는 한 지식인의 고투를 보여준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편견을 지적하거나 겉으로 드러나는 제국의 지배에 대한 도덕적 비판은 상대적으로 쉽다. 21세기의 탈식민적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더 이상 ‘군림하는 제국’이 아니라 ‘헤게모니로서의 제국’이다. 지배하지 않는 듯한 외양을 띠는 헤게모니는 늘 숨어 있다. 그리고 더 심층에서 더 정교하게 작동한다.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가 제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비판 작업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 이데올로기가 소외와 억압의 기제이며 비(非)서구 사회의 지식인이나 일반인 모두 그 피해자라는 저자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서구 사회 자체 내에서도 시민을 규율화하고 주변인을 만들어내는 소외와 억압의 기제로 작동한다.

지구적 차원의 민주화 혹은 ‘다중심적 다문화주의’에서 대안을 발견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동양’의 피해자뿐 아니라 ‘서양’의 주변인에게도 눈을 돌릴 때,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도 ‘서양’이 있듯이 뉴욕에도 ‘동양’이 있는 것이다. ‘서양’의 해체는 ‘동양’의 해체이지, ‘동양’의 반사적 구축은 아닌 것이다.

임지현·한양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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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읽는 타르코프스키 영화 7편
 김용규 지음/ 이론과 실천 / 335쪽 

영화가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수 있을까. 긍정하기 쉽잖은 질문에 만일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면, 우리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란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편 데뷔작 ‘이반의 어린시절’(1962)에서 유작 ‘희생’(1986)까지 모두 7편에 이르는 걸작들에 담긴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세계 지향점을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바로 구원일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두레) 같은 책을 보면 그가 거의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태도로 영화작업에 매달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술가였고 철학자였으며 동시에 구도자였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의 영화 7편을 철학적으로 치밀하게 해석해낸 역작이다. (엄청난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영화라는 매체를 빌려 (골방에 유폐된) 철학을 설명하려는 책들은 많이 나왔지만, 영화 자체를 철학적으로 해설한 책들은 별로 없는 상황에서 위대한 창작자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는 이 책은 단연 빛난다. 저자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10부작 영화 ‘십계’를 한 편 한 편 꼼꼼히 다뤄낸 책 ‘데칼로그’에서도 영화 해석의 또 다른 깊이를 보여준 바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개념들은 그 자체로 교양과 지식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감독의 영화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동원되는 도구에 가깝다. 자전적인 작품 ‘거울’을 해설하기 위해 라캉을 끌어들이고, ‘이반의 어린시절’ 속 현대문명에 대한 위기의식을 설명하기 위해 마르쿠제의 저서 ‘일차원적 인간’과 연결짓는 등 상대적으로 익숙한 독법도 있지만, ‘안드레이 류블료프’의 주인공이 처한 실존적 위기를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윤리학으로 해설하는 것처럼 독특한 시도도 담겨있다. 학문의 딱딱한 개념어로 예술의 풍부한 상징을 난도질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장점이다.


▲ 타르코프스키의 대표작 '노스탤지어'
저자는 각 작품을 장별로 분석하면서도 ‘타르코프스키적 구원’이란 중심테마에 대한 관심을 내내 잊지 않음으로써 이 책에 튼튼한 척추 하나를 심어놓았다. 첫 작품 ‘이반의 어린시절’을 타르코프스키 예술 세계 전반에 대한 ‘위대한 질문’ 자체로 인상적 자리매김을 한 저자는, 마지막 작품 ‘희생’에 대한 글을 맺는 자리에서 애초 제기한 물음을 다시 상기시킨 뒤 타르코프스키의 말을 인용해 답변을 시도한다.

그리고 한 빼어난 영화 철학자의 뇌와 심장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려 했던 이 책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독자(관객)의 윤리적 결단을 상기시키는 묵직한 질문으로 끝을 맺는다. 다른 감독에 대한 책이라면 너무 많이 나아간 결말일 확률이 높겠지만, 그게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것이라면, 사실 이보다 더 적절한 마무리를 찾기도 어렵지 않을까.

(이동진기자 djl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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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에게 정치를 배워라
침팬지 폴리틱스 | 프란스 드발 지음 | 황상익·장대익 옮김 | 바다출판사 | 304쪽 


▲ 엄마와 함께 있는 새끼 침팬지. 침팬지는 성장하면서 사회의 권력관계를 학습한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고질병 중의 하나였던 지역감정에 힘입어 영남의 맹주와 더불어 나라를 양분하던 정당이 대통령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잠시 적과 동침했다는 죄로 끝도 모르게 추락하고 있다. 어제까지 어깨동무를 하며 평생을 같이하자던 몇몇 동지들은 새로 정당을 만들어 언제 봤느냐는 듯 홀로 영화를 쫓고 있다. 애당초 이념따윈 갖고 있지도 않았던 ‘정치진드기’들은 침몰하는 배를 탈출하기 바쁘다.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정치 얘기만 하면 냇물에 귀를 씻었다는 소부와 허유를 흠모하면서도 신문을 도배하는 정치계 소식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우리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정치적인 동물들이다. 애써 깨끗한 척 부인해도 소용이 없다. 정치의 기원이 인류의 역사보다 더 오래 됐기 때문이다. 침팬지도 정치를 한다는 사실은 침팬지와 인류의 공동조상 역시 정치를 했었음을 의미한다.

‘침팬지 폴리틱스’는 제인 구달에 버금가는 침팬지 연구가 프란스 드 발이 네덜란드 아넴 연구소의 야외 사육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사는 침팬지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사회구조를 분석하여 쓴 책이다. 네 마리의 수컷 침팬지들(이에론·루이트·니키·댄디) 간의 권력투쟁, 지배전략, 계급구조, 동맹, 배반, 음모, 거래, 타협, 화해 등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세대교체 대세론을 앞세우고 집요하게 이에론의 권위에 도전한 루이트가 끝내 권력을 찬탈하는 데 성공한다. 그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니키는 젊은 나이에 2인자의 자리로 뛰어오른다. 제1인자가 된 루이트는 흥미롭게도 니키를 견제하기 위해 이에론과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얼마 후 이에론과 니키가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결국 니키가 권좌에 오른다. 그러나 니키는 귀족의 원조를 받아 권좌에 오른 무력한 군주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침팬지 사회에서는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가 더 중요하다.” 프란스 드 발이 남긴 명언이다.

▲ 침팬지 폴리틱스
‘침팬지 폴리틱스’는 한때 미국 하원의장이었던 뉴트 깅리치가 가장 훌륭한 정치학 참고서라고 극찬한 책이다. 깅리치와 달리 나는 우리 정치인들에게는 구태여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그들에게는 그리 새로울 것도, 딱히 배울 것도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혹은 교양으로라도 마키아벨리를 읽는 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손자를 읽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윈은 말할 나위도 없고, 홉스, 뒤르켐 또는 레비스트로스를 읽는 이들도 이 책에서 신선한 감동을 얻을 것이다.

1982년 프란스 드 발이 처음 이 책을 냈을 시절에는 동물에게 ‘인지’라는 단어를, 그리고 침팬지에게 ‘정치’라는 개념을 부여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얼마 전에는 프란스 드 발과 그의 동료가 원숭이들도 불공평한 대우에 불만을 표시한다는 관찰 결과를 저명한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게재했다.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문화연구 그리고 생물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 있게 이 책을 권한다. 침팬지의 행동과 문화에 대해 보다 포괄적인 이해를 원한다면 ‘인간의 그늘에서’(제인 구달 지음)와 ‘공부하는 침팬지, 아이와 아유무’(마츠자와 데츠로 지음)를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과 묘한 애증관계를 갖고 있다. 이 책은 내가 미국에서 읽었던 교양과학서 중 가장 좋아하던 책이다. 그래서 귀국한 후 처음으로 책을 한 권 번역해달라는 어느 출판사의 요청을 받고 곧바로 이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거의 3분의 1 가량의 번역을 마쳤을 때 다른 사람이 이미 번역을 끝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쉽지만 나의 번역문은 오늘도 내 컴퓨터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이 책의 서평을 쓰며 나는 나의 그 ‘한 많은’ 번역문을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그리곤 이내 그것이 세상 빛을 보지 못한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나 깨달았다. 우리 과학사와 과학철학 학계의 두 실력 있는 학자들이 함께 번역한 책이라 처음 원서를 읽었을 때 느꼈던 감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더할 수 없는 원저에 나무랄 데 없는 번역이다.

(최재천·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조선일보 Books 서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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