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헤르만 헤세에게 푹 빠져지낼때가 있었다.
<데미안>과 <크눌프>그리고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에서 보여준 사랑스런 문체와
삶의 깊이를 아우르는 문장이 너무 좋았다. 또
시를 향한 어린시절의 열정으로 학교를 나오고
자살을 하고, 시계공장 견습공으로 지내다 서점에서
일하게되면서 본격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얼마나 컸길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했을까
하는 혼자만의 짐작으로 그를
빛내며 더욱더 흠모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헤르만 헤세의 사랑>(베르벨 레츠, 자음과모음)
을 읽으며 내 생각이 상당 부분 잘못되었음 깨달았다.
헤르만 헤세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글이 아니라 '첫사랑에 대한 실패' 때문이였으며,
그가 3번의 결혼생활 동안 첫번째 부인과
아이들에게 많은 상처를 안겼다는 사실로,
그가 크눌프처럼 얽매이는 삶을 싫어했고,
여러 여성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했으며,
아이 울음소리를 끔찍이 싫어해서 막내를
다른집으로 보내야 했고, 그 행동으로 인해
아이들과 첫번째 부인 마리아가 받은 정신적
신체적 상처가 컸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작가로써 자신의 내면세계에 침잠하여
많은 것들을 글로 써내고, 세상을 두루두루
여행하며 보고 느낀것들을 아름답게 표현한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이다. 그러나, 한 가장의
아버지로써 그가 보여준 행동은 그의 글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힘든 부분이 되었다.
'자신에게 이르는 길'로 속삭이는 작가의 삶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주관적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이런 고민속에서 정여울 작가의 <헤세로 가는길>을
도서관에서 발견했을때 잠시 미소짓기도 했다.
그동안 헤세에게 갖고 있던 감정이 정여울 작가의 글로
잘 추스려지길 바라는 마음이 컸던거 같다.
그러나, 이런 간절한 마음은 몇장 읽기도 전에
삐걱거리게 되었다.
' 두번의 이혼과 국적 변경, 부인과 아들의 정신질환으로
고통 당하다 자신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끊임없이
정신적 방황을 하는 동안 깨달은 것은 바로 자기 안에서
구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 - 프롤로그-
여기서 '고통 당하다'라는 지극히 피해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책을 읽는동안 껄끄럽게 느껴졌다.
정여울 작가는 지극히 헤세의 입장에서 가족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했지만, 나는 가족의 입장에서 헤세를 바라보며
그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임을 느끼게되면서.
관점의 차이가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내게 작가의 삶이 뭐가 중요하는가,
작품으로 평가받아야하는것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물론 그 이야기도 맞다.
하지만 지금껏 읽은 책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작가의 삶이란 글과 무관하지 않고,
않아야 한다고. 짐승같은 살인마가 아름다운
글을 쓴다고해서 아름답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정여울 작가를 비난하는것은 아니다.
다만 한 작가의 생각에 함몰되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였다.
헤르만 헤세를 사랑한 작가가 자취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모습은 누가 뭐래도 아름다웠다.
사진과 아름다운 글 ,그리고 <수레바퀴
아래서><나르치스와 골드문트><데미안><싯타르타>
작품에 관한 심도있는 이야기도 깊이 읽게 되었고
어서 찾아 읽고픈 마음도 생기게 되었지만,
정말 헤세를 사랑한다면 한쪽으로 치우치는 마음보다
그를 더 중립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릴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정여울 작가에게
띄워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