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글맞던 더위가 한풀꺽이고 시끄럽던 매미 울음소리가 사그라들면, 간간하게 불어오는 찬 바람과 속삭이듯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정겹고도 반갑게 느껴진다. 높디높고, 맑디맑은 청명한 가을 하늘은 지난계절 굼뜬마음을 씻어주는듯, 주변을 산책하고 싶은 마음을 일게하는 마력이 있다. 청명한 하늘과 풀내음 가득한 가을 바람에 이끌려 나온 산책길에 이름모를 꽃들과 잡초들이 정말 싱그러워 보인다.
견물생심!(見物生心). 눈으로 보니 마음이 일어난다는 뜻의 사자성어만큼 가을에 딱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봄 못지않게 지천으로 피어나는 꽃들과 작은 바람결에도 우수수 떨궈내는 낙엽비는 가을이 아니고선 감상하기 힘이든데, 우리네 시선은 늘 작은 휴대폰속에만 머물고 있으니 어찌 가을의 정취가 마음속에 깃들 수 있을까!
그래서 서정주 시인은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이면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했는지 모른다. 한바탕 꿈같이 잠시 왔다가는 가을의 아쉬움을 이렇게 담아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푸른날 -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그리운 사람들을 하나 하나 떠올려보니 문득 부모님의 얼굴이 그리워진다. 또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려보니 지난 계절 무심했던 이들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오늘 편지 한통 보내고 싶다. 이 눈부신 계절에 그대 오늘 행복했느냐고 정채봉 시인의 시를 빌려 묻고싶다.
' 오늘 - 정채봉'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지 않았네.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은 시간 이였네.
오늘도 내가 나를 슬프게 했네
사랑하는 그대, 지난계절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따사로운 가을볕에 바짝 말렸는가. 그대 저기 저 가을 볕에서 피고지는 이름모를 꽃들이랑 눈인사 나눴는가. 그대 하늘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따라 고민이랑 아픔이랑 흔들어버리고 눈속에 마음속에 마음껏 담아두었는가 라고. 누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 했는가. 나는 그냥 가을. 가을이고 싶다.
이 시집은 이경철 저자가 중앙일보에서 연재한 72편의 시를 묶어놓은 것이다. 적막해진 마음에 시를 한 모금 마시며 하루를 맑고 향기롭게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별된 시들이 인상적이다. 시는 정제된 언어의 결정(結晶)과 같아서 풀어쓴 문장과는 격이 다르며, 시가 가진 절제미와 압축미야 말로 문장이 갖춰야할 최고의 선'이라던 조경국저자(소소책방 책방일지)의 이야기 마져 떠오르게 만들던 시집이였지만, 이경철 저자가 시에 곁들여 놓은 이야기들이 가끔 시의 의미를방해하는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아래에는 좋았던 시를 더 담아놓는다.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가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 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 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 앞에 있다.
' 오수(午睡) - 김춘추 '
청개구리
토란 잎에서 졸고
해오라기
깃털만치나
새하얀 여름 한 낱
고요는
수심(水深)보다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