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바의 수Dunbar's Number"로 유명한 인류학자(+ 진화 심리학자) 로빈 던바는 카페에서 엿듣기에 진심이었다. 그는 참여자들이 어떤 대화의 맥락이나 이해관계에 놓였든 간에 어려운 심화 주제보다는 "가쉽 gossip"거리에 쏠리게 마련이란 걸, 즉 인간 의사소통에서 가쉽의 효용성을 간파했다. 어설프게 던바 흉내내기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카페 테이블 저편의 대화는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자 해도 차단되지 않는다(는 변명을......).


최대한 늦게 낳아야 한다구!_늦게 낳는 남

IT 계열 전문직 젊은 남성들의 화두는 일에서 시작하더니 '출산과 양육'으로 흘러갔다. 대화는 일 잘하는 **, **, **를 칭찬(시기질투?)하며 시작되었다.

*

(우리 IT 업계에서) **, **, **가 뛰어나다. 잠은 자나 싶을 정도로 짧은 기간 내에 끊임없이 뭔가 만들어낼뿐더러 성과마다 놀라웠다. 촉망받는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산력이 어느새인가 시들시들, 멈춘듯했다. 잘 보니, (공통적으로) 시들시들한 그 시점에 바로 이들이 아빠가 되었더라.


대화는 이렇게 귀결된다.

한때 잘나가다가 육아에 발목 잡힌 아빠들! **, **, **을 보니 알겠다. 여기(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애는 최대한 늦게 낳는 게 답이다!.

커리어에서 손실예상 때문에 임신과 출산 미루기는 보통 '여성' 주어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남자들만의 커피 타임에서 '아이를 최대한 늦춰 낳을 이유'가 대화 소재로 등장하다니 귀가 커졌다. '출산을 최대한 미뤄, 일에서 성취를 이루자'는 생각의 이면에는, 정자는 나이를 덜 타지만(?), 즉 남자는 상당한 나이가 들어도 자식을 기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전제된 것일까? 이는, 여성의 난자는 나이를 탄다는(이왕이면 젊은 가임 여성의 난자가 선호되는) 문화적 신념과 연결되기 때문에, 유쾌한 전제만은 아니다.



15년 일하며 첨 봤대!_조리원에서 책 읽는 여자


노골적으로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는 못했기에 음성으로만 추정하기로 4~50대 여성분들의 대화를 차단하기 어려웠다. "여자 공부하면 뭐 하나, 박사 따건, 전문직이건 결혼하면 소용 없다." "아니다, 그거 우리 세대까지 그렇다. 요즘 애들은 똑똑해서 그렇지 않다(차라리 애를 안 낳는다).' 요약하자면 이런 대화였다. 책 덕후의 귀가 번쩍 뜨였던 건, 누군가가 책 덕후 친언니 예를 들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워낙 책을 워낙 좋아했어. 석사 따고, 부모님께서 박사까지 밀어준다고 하셨는데도 그냥 좋아하는 걸로 남기겠다, 업 삼지 않겠다더라고. 언니는 산후조리 하면서도 책을 읽었어.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기가 이 일(도우미) 한지 15년차에, 책 읽는 산모는 처음 봤다고 그렇게 신기해했대"


*

그 뒤 이어진 대화는 가물가물 기억하지만, '산후조리원에서 책 읽는 산모'가 화제의 중심이었음은 분명하다. 그 범주의 여성, 즉 산후조리 기간에 책 읽는 엄마는 일탈, 범상치 않음, 과장하자면 '이상해 보이는' 듯 했다.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었겠지만, 내 귀를 불편케 하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이렇게 기록한다. 

15년 산후조리 도우미를 하면서 '책 읽는 산모'를 처음 봤다 하시는 분, 마찬가지로 산후조리 기간 지적인 양분을 채우는 산모가 특이한 소수자로 여겨지는 대화. 왜 엄마라는 존재는 새 생명에게 양분(모유)를 주지만, 책으로 자신을 위한 즐거움을 채우면 평범해 보이기 어려운 걸까? 아이들 놀이터에서 그네 태우는 옆 벤치에서 책 읽던 그 어머니는 아무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왜 동네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던 걸까?


우연히 들은 조각난 대화에 과잉 의미 부여하는 걸까? 그렇다면, 어설프게 로빈 던바를 흉내내기 때문일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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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5-07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에, 저희 동네 왕송호수
뷰를 가려 버린 신축 아파트에
대한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과 일치해서 같이 수다
에 동참하고 싶은 욕망이 잠깐
일었답니다. 그렇게 가는 거죠.

2023-05-07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3-05-07 23:28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 말씀 듣다보니
김훈 작가님 에세이 중에, 작가님 사시는 일산 호수 근처 산책하시다가 할머님들 대화(주로 며느님들 ~~~, ~~~ 뒷이야기) 들으셨던 일화 어렴풋이 생각나요. 작가님께서도 그 대화에 마음은 이미 끼어 계셨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갑자기 제 흐린 기억력을 탓하고 싶어지네요

아! 이 늦은 밤, ˝그렇게 가는 거죠˝라는 말이 마음의 파고를 낮춰주는 것 같습니다. 제게 필요했던 말씀입니다. 감사드려요^^

persona 2023-05-07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질문이 많이 남는 얇은 책 한 권 읽으셨군요. ^^ 전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 듣다보면 오디오북 듣는 거 같더라고요. 가끔요. ㅎㅎㅎ
공공장소에 주로 혼자 있다보니 안 그러고 싶어도 동네 이야기는 다 듣고 다니는 거 같아요. 저도 그냥 지나가려고 하고 안 들으려고 하지만 듣게 되면 저도 관련 생각도 하게 되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ㅎㅎ

얄라알라 2023-05-07 23:30   좋아요 2 | URL
까페 순례자로서, 예의를 지키고 싶어도 귀쫑긋 되는 상황이 잦은 듯 합니다.
persona님 표현에 격 공감, 끄덕끄덕하게 됩니다.

˝질문이 많이 남는 얇은 책 한 권˝이라...아! 시적이라는 말, 이럴 때 쓰는 거겠죠?
누군지 모를 이들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귀 쫑긋 엿듣게 된 상황에서, persona님 표현 멋있습니다!

yamoo 2023-05-10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산후조리원에서도 책을!!!
진짜 책덕후네요..^^

고양이라디오 2023-05-11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던바의 수‘ 찾아보니 재밌네요ㅎ 15년 일하면서 조리원에서 책 읽는 여자를 처음 봤다니 신가하네요.
 
미국인 사용빈도 다반사 영어회화 구동사 미국인 사용빈도 다반사 영어회화 구동사 1
김아영.Jennifer Grill 지음 / 사람in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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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생활영어 도와주는 자료들이야 쓰나미 수준으로 많이 나오지만, "사람in출판사‘ 그 중에서도 Florida 김아영 선생님 책은 질적으로, 가르치는 자의 정성 면에서 확연히 변별됩니다! 감사히 활용하겠습니다! 계속 좋은 책으로 안내해 주시어요. 김아영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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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듯한 제목, [산에 오르는 마음Mountains of the Mind]보다도 부제, "매혹됨의 역사"에 끌려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 몇 페이지만에, '아! 문장 어쩜 이렇게 아름답고 치밀하니?'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뛰어난 문장가, 사색가들의 뒤에는 멋진 가풍이 있(는 경우가 많)더라. 저자 로버트 맥팔레인(Robert Macfarlane) 외할아버지는 서가뿐 아니라 집안 여기저기 책을 뒹굴릴 정도로 장서가였다. 어린(아마 그때도 잘생겼으리라😏) 손주는 "닥치는 대로 벽에서 벽돌을 꺼내듯이 책 더미 중간쯤에서 녹색의 커다란 책을 꺼내...," "유년 시절이 오롯이 허락하는 자기만의 시간에, 마치 폭음이라도 하듯 외할아버지의 장서를 탐독했다. (15)"


꼬마 로버트 맥팔레인은 "희박한 공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 두 개의 작은 점(등반가 맬러리와 어빈) 중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존재에 불과"(15)했다. 하지만, 소년기부터 산에 오르던 그는 훗날 산악인이자 명망 있는 작가가 된다. 스물여덟 살에 [Mountains of mind]를 출간했고 '심원의 시간 Deep time'을 연구하며 대학에서 후학도 양성한다. '아, 이렇게 조화롭고 강인한 영혼이라니!' 460여 쪽의 1/10지점을 지날 즈음, 로버트 맥팔레인에게 팬심을 느꼈다! 아울러 질투심과 부끄러움도... 작정하고 성실하게 산다 한들, 맥팔레인을 비롯한 숱한 등반가들이 보아왔을 '알펜글로 apenglow'를 내 인생에서 직접 볼 날, 있을까? 생명을 걸고 반중력의 신비, 산의 부름에 화답했던 그들만큼 대범할 수 있을까?


BrettA343,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질문을 바꿔본다. 두 발 디딜 땅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는데 굳이 아찔한 고도에 이르고 싶은 이유는 무얼까? (왜 목숨 걸고 산에 오를까?) '마음의 산(Mountains of Mind)'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인간을 매혹시켜 왔는가? 나는 차가운 형광등 빛에 안락함을 느끼면서 왜 예측불가한 색조합의 알펜글로우를 동경하는가?


바로 이런 질문에 로버트 맥팔레인은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식으로 답을 찾아간다. 옮긴이도 언급했듯, [산에 오르는 마음]은 장르를 특정하기 어렵도록 독창적인 지성의 산물이다. 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류가 산을 상상하는 방식(또는 산에 오르는 마음)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43)," 즉 '마음의 산을 향한 인간의 매혹됨 계보사'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지리학, 지질학, 생태학, 스포츠학, 철학, 역사학, 인류학, 미학...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읽어도 혹할만큼 풍성한 정보를 유기적으로 배치해 놓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그가 이처럼 방대한 지적 작업을 단독 수행하며, 심원의 시간(Deep time)에 매혹당한 등반가로서의 자신의 경험도 곁들였다는 점이다. 꼬마 맥팔레인이 할아버지의 장서 중에서도 특히 실존 탐사가의 일기를 많이 읽었던 영향일까?

Pablo Carlos Budassi,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스크린이 호도하는 가상현실의 자극이, 손발가락을 잃어가며 하는 등반예술과 맨눈의 탐사를 대체해가는 21세기에 등반가들이 저 높은 산을 오르며 이르렀던 경외감은 인간이 왜 겸허한 존재여야 하는가를일깨워주는 고백이 된다. 


로버트 맥클라인의 날카로운 지성과 통찰력을 보여주는 문장 몇을 옮겨 본다.


솟구침, 사나움, 차가움, 이 모든 것을 이제 무의식적으로 숭배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이미지들은 더 거친 야생에 대한 간접 경험에 굶주린, 도시화가 진행된 서구 문화에 스며들었다. 산행은 지난 20년 동안 가장 빠르게 성장해온 여가 활동 중 하나다...이제 에베레스트산은 경험이 부족한 등산 회사 고객 수백 명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만년설로 뒤덮인 타지마할이 되었고, 당의 糖衣를 정교하게 입힌 웨딩케이크로 전락하고 말았다. 에베레스트산의 산비탈에는 현대인들의 시체가 흩어져 있다.


[산에 오르는 마음] 41쪽



'심원한 시간'의 광대무변함을 생각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강렬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일로, 당신의 현존을 완전히 부수고 과거의 압력으로 당신을 '無'로 압축하며 미래는 너무 광활하기에 당신이 직시할 수 없도록 한다. 이는 정신적인 공포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공포다. 산의 단단한 바위가 시간의 마모에 얼마나 취약한지 깨닫는 일은 반드시 인류의 몸이 섬뜩할 정도로 덧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도록 하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마음]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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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07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에 오르는걸 ‘반중력의 신비‘ 라고 하는군요. 완전 멋진 표현인거 같아요~!!
산에 오르는 마음이 저런거였군요. 뭔가 웅장합니다~!!

얄라알라 2023-05-09 13:42   좋아요 1 | URL
1976년생 저자는 남들 80년 살아도 못해본 넘 많은 경험을 했더라고요
그러니 글이 좋을 수 밖에^^
이 역시 질투인가봅니다

새파랑님 좋은 오후 보내시기를

얄라알라 2023-05-09 13:42   좋아요 0 | URL
1976년생 저자는 남들 80년 살아도 못해본 넘 많은 경험을 했더라고요
그러니 글이 좋을 수 밖에^^
이 역시 질투인가봅니다

새파랑님 좋은 오후 보내시기를

고양이라디오 2023-05-11 1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알아갑니다.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책읽는나무 2023-06-08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을 좋아하시는 얄라 님과 잘 어울리는 책의 글로 당선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수준 높으면서 저는 처음 보는 책들 리뷰나 페이퍼에 많이 올리시는데 늘 친구 읽기 글로만 읽어 좀 아까웠었는데...흐뭇한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걸 대공개해 주세요.ㅋㅋㅋ

얄라알라 2023-06-08 14:18   좋아요 1 | URL
하하하 책읽는 나무님

저는 30000원 적립금에 일단 너무 좋아서 눈 희번덕^^;;; 도대체 내가 썼던 글 중 당선될만한 게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하면서 궁금했는데

알록달록 사진 세례를 퍼부은 이 글이었네요.
이 책이 너무 좋아서 후속작도 빌려 놨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어요.

응원해주셔서 많이 고맙습니다. 책읽는나무님도 축하드립니다. 러스트벨트의 고운 하늘 색이랑, 알펜글로 색이 묘하게 겹치네요^^ 맥락은 다르지만

겨울호랑이 2023-06-08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을 오르는 마음으로 마음의 산을 올라야 하는데, 자연에 있는 산과는 달리 오를 수록 점점 더 까막득하게 높아져 가는 것이 다른 점인 것 같아요... ㅜㅜ 얄라얄라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나무의 마음 단비어린이 그림책
이정록 지음, 박은정 그림 / 단비어린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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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학교> 이정록 시인의 보듬는 마음, 꿰뚫어 저 속을 보는 눈은 나무를 얘기할때도 한결같네요. ˝나무도 마음이 있는 거예요?˝ 마음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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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순례 일지에 듬성 등성 등장시키는 카페에 와 있다. 주차요금 무료인 주말에 어쩌다 방문한다. 아주 우연인데, 이 카페 올 때 두 번 연속 노란 표지의 책을 읽었다. 크리스티앙 보벵(Christian Bobin)의 [가벼운 마음(La Folle Allure]은 BTS의 BUTTER와는 사뭇 다른 톤의 연노랑을 입었는데, 그야말로 말랑한 달콤함과 맛봤어도 다시 탐하게 하는 중독성 소설이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문체에 빠져든 애서가들의 찬사는 이미 작년부터 뜨거웠다. 읽어보니 그 찬사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보벵의 매력은 책표지 색처럼 단 하나의 이름에 담길 수가 없겠다. 그 연노랑이 끈적한지 매끄러운지 건조한지 질척거리는지 보기만 해서는 알기 어렵다. 오래간만에 소설을 말 그대로 음미한다. 후각세포를 뇌로 옮겨다 놓았다 착각할 만큼 향기가 그윽한 술을 마실 때처럼, [가벼운 마음]을 혀끝으로 음미하며 천천히 읽는다. 혹시 놓쳤을까 봐 두 번을 내리읽는다.



[가벼운 마음]의 주인공 '뤼스'는 두 살 때 '누런 이빨'에 '누런 눈'을 하고 '누런' 오줌도 지리는 첫사랑이자 수호천사를 두었다. 폴란드에서 공수해온 야생의 늑대였다. 그 아이는 또한 서커스단과 유랑하며 생계를 꾸리는 부모를 두었다. 그 자체로 이미 떠도는 삶인데도, 뤼스는 어린 시절 내내 가출을 감행하고 여러 가명으로 존재의 망토를 새로 지어 입어 가며 세상에서 사라지는 방법을 터득했다. 복잡한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하자'라며 내일의 태양에 미뤄버리는 그 아이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와도 닮았다. 내가 흠모해온 '올리버 색스' 의 엉뚱한 호기심 그리고 보벵의 또 다른 작품, [흰옷 입은 여인], 에밀리 디킨스의 은둔도 떠올리게 한다. '뤼스'는 내면에 든든한 수호천사를 둔 행운아이기도 하다. 그 수호자 덕분에 뤼스는, 허영을 충족하며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닌 자신을 중심에 둔 삶을 살 수 있다. 나에게 [가벼운 마음]이 단순히 한 자아의 침잠형 고백록이 아닌, 삶의 재미를 잃어가는 요즘 사람들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확장형 대화집이다. 그래서 최근 읽었던 한국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의 산문집과는 결이 매우 다른 전율을 준다.



Ji-Elle,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가벼운 마음]을 두 번 내리읽으며 메모했던 쪽지를 보니, 몇 개의 핵심어를 꼽겠다.


  • 글쓰기와 작가라는 천직

  • 엄마라는 존재

  • 나의 수호천사는 나

  • 가명과 존재의 가벼움

메모지를 구겨 버리기 전에 정리해 본다.




'뤼스'에게는 미친 엄마가, 강렬하게 매력적이고 적절하게 미친 엄마가 있다. "미친 엄마는 야수 같은 아이들의 마음과 가장 잘 어울리는 훌륭한 엄마"(25)다. 까르르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뤼스의 엄마는 여느 엄마들처럼 "아버지들의 어두운 기운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162) 한다. 새로운 가명을 써서 가출을 재시도 하는 방탕한 딸이 돌아올 때도 웃어주고, 17살에 결혼했던 딸이 10년의 결혼생활에서 캐리어 몇 개 달랑 들고 쫓겨 났을 때도 힐난하지 않았다. 아내를 못 잊어 처갓집을 찾아온 (전) 사위에게 싸늘하게 대하는 뤼스에게도 "딸아, 너는 좀 사근사근한 맛이 없어."(154)라고 농을 던질 뿐이다. 엄마를 향한 뤼스의 신뢰와 사랑은 절대적이어서 뤼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 어머니는 자식들이 무엇을 하든 언제나 기뻐했을 것이다... 우리를 비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다. 그것이 엄마로서 그녀의 특권이며, 그 특권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배포다."(151) 영화배우로서도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뤼스의 매력은 어머니의 가벼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또 있다. "가벼운 마음"의 발원지는.


중학생 시절 뤼스의 대모(하숙집 주인)이었던 롱샬롱 부인은 할머니께 들은 말씀을 전해주었다. 핵심은 '가벼운 마음'이다. "아가야, 가장 중요한 건 즐거움이야. 어느 누구도 너한테서 즐거움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해라...사실 내 남편은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어. 하지만 아주 단순한 이유였단다. 결혼할 때 내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었어. 그런데 즐거움이 떠나 버린 거야. 그래서 이혼한 거지."(87)

뤼스 역시 3년간 이웃집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 쫓겨날 때, '티타티티타티 티타티티타티' 바흐의 아리아를 머릿속으로 재생시키며 경쾌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쫓아낸 남편이 다시 찾아와 '당신 없인 살 수 없다'라고 애걸할 때도 "그게 사랑과 무슨 상관이 있어? 우리는 당신이 없으면 괴롭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와 함께할 수는 없어. 적어도 그 사람이 자식이나 어머니가 아니라면 말이야. 로망. 나는 당신 엄마가 아니야. 그리고 더는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지 않아."(153)라고 가볍게 응수했다.

뤼스는 가볍다. 글도 가벼운 마음으로 쓴다.


"나는 글을 쓸 때 잉크로 쓰지 않는다. 가벼움으로 쓴다. 설명을 잘 했는지 모르겠다. 잉크는 구매할 수 있으나 가벼움을 파는 상점은 없다...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여름비의 도도한 서늘함에, 침대맡에 팽개쳐둔 펼쳐진 책의 날개들에, 일할 때 들려오는 수도원 종소리에, 활기 찬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음에...갓난아기의 눈꺼풀 위에, 기다리던 편지를 읽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다 열어보는 몽글몽글한 마음에....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그럼에도 가벼움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물고 희박해서 찾기 힘들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술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69)

뤼스에게, 뤼스의 창조자이자 작가인 크리스티앙 보벵에게, 혹은 보벵이 존중했던 시인 에밀리 디킨스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일까? 가벼움으로 글을 쓴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가벼움으로 써 본 적 있을까? 그게 뭔지 알기나 할까?빈칸 채우기를 해 본다.

"요즘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세 가지는 ________, _________, _______이다. 처음 두 개는 액체다. 잉크와 와인. 세 번째는 기체다. 날개와 기쁨. "(125) 아! 아름다워!보뱅의 아름다움은 문장에서 온 게 아니라 세상을 사는 태도, 그 자체에서 나왔나 봐! 그래서 흉내조차 어려워. 보벵에게 세 가지는 "글쓰기, 아르부아 와인, 소나타3번." 보벵을 따라서 나의 세 빈칸을 채워본다. "책 읽기, 새우깡, 나무"


그렇다면, 얼핏 뤼스만큼이나 충동적이며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 뤼스의 남편, 로망은 가벼운 마음을 가졌는가? 그랬다면 헤어질 이유가 없었을 텐데? [가벼운 마음]을 두 번 읽으니, 부부 사이에 놓인 강의 폭을 얼핏 가늠했다. 뤼스는 교육받지 못하고 가난한 부모를 두었고, 로망은 유서 깊은 명문가 출신 법학도이다. 비록 22살에 아버지의 직업과 명예를 이어받을 창창한 미래를 차 버리고 17세 소녀 뤼스의 허리를 감아 안았지만, 로망은 로망이다. 꿰뚫어보는 늑대의 눈을 가진 뤼스에겐 보였다. 로망이 예술가지망가들과 어울리며 환담을 나눌지라도, 차별받는 늑대, 유대인 그리고 어린이들이 더 살만하도록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은 전혀 없었다. 오직 자신의 재능에 대한 기대와 명예욕이 있을 뿐.

"아름다운 동네에는 어릿광대를 위한 자리가 없다. 부자의 세계와 가난한 자의 세계는 둘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심하다. 부자들을 위한 단 하나의 세계만 있으며, 그 옆이나 뒤에 있는 구역은 부자들 세계의 폐기물에 대해 알려 줄 뿐이다."(117) 딸인 뤼스가 알아챈 것을, 과묵한 뤼스의 아버지조차 간파했다. 아버지는 (전)사위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친구는 별로 호감 가는 타입이 아니다. 널 기다리면서 담배 한 갑을 다 피우질 않나. 내가 파 놓은 구덩이에 꽁초를 던지질 않나...사랑의 슬픔이 크면 무슨 짓을 못 하겠느냐만, 그놈은 슬퍼서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야."(151)


뤼스는 명문가의 이름, 직함, 미래를 예비한 통장잔고 등을 계산하기보다는 가벼운 마음을 따라간다. 10년간 살았던 남편 로망과 쉽게 헤어졌듯, 배우로서 크게 성장할 기회도 껌 뱉듯 별다른 충격 없이 뱉어버린다. 캐나다행 비행기에 오르기만 하면 인기와 돈과 유명세는 따 놓은 당상인데, 탑승하지 않는다. 수호천사가 강력하게 명했기 때문이다. "따져 묻지 마. 당장 '쥐로'로 가서 호텔 방을 잡고, 모든 이야기를 처음부터 쓰는 거야. 서커스, 중학교, 묘지."(174)

뤼스가 추구하는 가벼움은 바로 이런 것. 뤼스를 침묵시키고, 도망가거나 사교성을 낮추게 만드는 자폐증 걸린 늑대 아이가 원하는 대로의 가벼움. 그 가벼움은 성찰하지 않음에서 오는 허영과 위선의 촐랑거림이 아니다. 그런 촐싹거림은, 우리가 질리도록 많이 봐왔는데 종국은 불행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뤼스는 영화산업을, 돈에 대한 불안 외에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비싸기만 한 비눗방울bubble이란 걸 간파한다. 글쓰기를 "잉크와 고독과 고요함으로 꿀 만들기"(31) 에 비유하는 뤼스에겐 사람들의 수치심 없는 촐싹거림이 놀랍다. "사람들이 무엇에서든 글 쓸 거리를 너무도 빨리 찾"고 "소음에 불과할 뿐인 언어"(138)를 대량 생산해 내는 이유 역시 돈 때문이라고 본다.


뤼스, 뤼스의 수호천사 늑대 아이는 비싼 거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행복을 담보해줄 것인양 세뇌하는 비싼 거품보다는, 액체로서의 술과 잉크, 그리고 기체로서의 음악에 시간을 들인다. 그렇다고 방관자처럼 스쳐만 가지 않고 뤼스는 삶을 기록한다. 그녀는 글로 꿀을 만드는 작은 꿀벌이고, 그 벌을 창조한 크리스티앙 보뱅 역시 부지런한 작가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살되, 글만큼은 남기고 싶다." [가벼운 마음]이 나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전하는 확장형 메시지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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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4-17 12: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 종이책 노트북 커피.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필사하기 위한 노트와 볼펜.
요즘 필사하는 재미에 빠져 보려고 해요. 많이 쓰는 게 아니라 한두 문단을 쓰는 거죠.
이것도 꾸준히 하면 꽤 양이 많아질 듯해요.

얄라알라 2023-05-01 00: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페크님. 5월달에 답글을 달자니 부끄럽습니다. 서재 관리를 올 상반기 너무 안 하다 보니..

필사용 노트와 볼펜, 특수 도구(?)를 준비하셨다는 자체가 마음가짐을 다르게 할 것 같습니다.
글씨를 점점 쓸 일이 적어지는데, 저도 언젠가는 필사에 도전해봐야겠네요^^

레삭매냐 2023-04-18 20: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단 사서 쟁여 두기
시작한 작가랍니다.

그리고 최근작은 도서관에
서 빌려다 보다말고 반납한
추억이 -

독서록이 한 편의 아름다운
시처럼 그렇게 촉촉하게 다
가오네요. 쨩 -

얄라알라 2023-05-01 00:31   좋아요 0 | URL
아...도서관엔 추억 부스러기를 묻혀 놓은,
살짝 속페이지 열어보고 넘겨보고 반납한 책이 얼마나 많이 있는 걸까요?

저도 오늘 읽다 만 책들을 여럿 반납하고 새 녀석들을 데려왔습니다.

제 부족한 글을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레삭매냐님^^

그레이스 2023-04-19 05: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아두고 있습니다.
이 페이퍼때문에 조바심 나네요
빨리 읽고 싶어서...^^

얄라알라 2023-05-01 00:32   좋아요 0 | URL
이런 조바심이야 말로 사는 재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명절만 기다리던 그 조바심....명절 때 책 왕창 읽으려고 얼마나 명절을 기다렸던지...
그런 마음이 어른이 되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

그레이스님, 해피 5월 시작하시어요

초원 2023-04-21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얄라님의 흥분이 서재 전체에 퍼져서 전해집니다. ‘확장형 메시지‘가 가벼울수 있다니 신기합니다.

얄라알라 2023-05-01 00:34   좋아요 0 | URL
초원님 안녕하세요?
와우! 2023년의 5월이라니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요

블레이드 러너, 그 뒤의 숫자에 도달했다니
게다가 5월...

5월 좋은 출발 준비하셨는지요?^^ 항상 건강과 안녕을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