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바의 수Dunbar's Number"로 유명한 인류학자(+ 진화 심리학자) 로빈 던바는 카페에서 엿듣기에 진심이었다. 그는 참여자들이 어떤 대화의 맥락이나 이해관계에 놓였든 간에 어려운 심화 주제보다는 "가쉽 gossip"거리에 쏠리게 마련이란 걸, 즉 인간 의사소통에서 가쉽의 효용성을 간파했다. 어설프게 던바 흉내내기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카페 테이블 저편의 대화는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자 해도 차단되지 않는다(는 변명을......).


최대한 늦게 낳아야 한다구!_늦게 낳는 남

IT 계열 전문직 젊은 남성들의 화두는 일에서 시작하더니 '출산과 양육'으로 흘러갔다. 대화는 일 잘하는 **, **, **를 칭찬(시기질투?)하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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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IT 업계에서) **, **, **가 뛰어나다. 잠은 자나 싶을 정도로 짧은 기간 내에 끊임없이 뭔가 만들어낼뿐더러 성과마다 놀라웠다. 촉망받는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산력이 어느새인가 시들시들, 멈춘듯했다. 잘 보니, (공통적으로) 시들시들한 그 시점에 바로 이들이 아빠가 되었더라.


대화는 이렇게 귀결된다.

한때 잘나가다가 육아에 발목 잡힌 아빠들! **, **, **을 보니 알겠다. 여기(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애는 최대한 늦게 낳는 게 답이다!.

커리어에서 손실예상 때문에 임신과 출산 미루기는 보통 '여성' 주어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남자들만의 커피 타임에서 '아이를 최대한 늦춰 낳을 이유'가 대화 소재로 등장하다니 귀가 커졌다. '출산을 최대한 미뤄, 일에서 성취를 이루자'는 생각의 이면에는, 정자는 나이를 덜 타지만(?), 즉 남자는 상당한 나이가 들어도 자식을 기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전제된 것일까? 이는, 여성의 난자는 나이를 탄다는(이왕이면 젊은 가임 여성의 난자가 선호되는) 문화적 신념과 연결되기 때문에, 유쾌한 전제만은 아니다.



15년 일하며 첨 봤대!_조리원에서 책 읽는 여자


노골적으로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는 못했기에 음성으로만 추정하기로 4~50대 여성분들의 대화를 차단하기 어려웠다. "여자 공부하면 뭐 하나, 박사 따건, 전문직이건 결혼하면 소용 없다." "아니다, 그거 우리 세대까지 그렇다. 요즘 애들은 똑똑해서 그렇지 않다(차라리 애를 안 낳는다).' 요약하자면 이런 대화였다. 책 덕후의 귀가 번쩍 뜨였던 건, 누군가가 책 덕후 친언니 예를 들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워낙 책을 워낙 좋아했어. 석사 따고, 부모님께서 박사까지 밀어준다고 하셨는데도 그냥 좋아하는 걸로 남기겠다, 업 삼지 않겠다더라고. 언니는 산후조리 하면서도 책을 읽었어.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기가 이 일(도우미) 한지 15년차에, 책 읽는 산모는 처음 봤다고 그렇게 신기해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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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이어진 대화는 가물가물 기억하지만, '산후조리원에서 책 읽는 산모'가 화제의 중심이었음은 분명하다. 그 범주의 여성, 즉 산후조리 기간에 책 읽는 엄마는 일탈, 범상치 않음, 과장하자면 '이상해 보이는' 듯 했다.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었겠지만, 내 귀를 불편케 하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이렇게 기록한다. 

15년 산후조리 도우미를 하면서 '책 읽는 산모'를 처음 봤다 하시는 분, 마찬가지로 산후조리 기간 지적인 양분을 채우는 산모가 특이한 소수자로 여겨지는 대화. 왜 엄마라는 존재는 새 생명에게 양분(모유)를 주지만, 책으로 자신을 위한 즐거움을 채우면 평범해 보이기 어려운 걸까? 아이들 놀이터에서 그네 태우는 옆 벤치에서 책 읽던 그 어머니는 아무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왜 동네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던 걸까?


우연히 들은 조각난 대화에 과잉 의미 부여하는 걸까? 그렇다면, 어설프게 로빈 던바를 흉내내기 때문일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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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5-07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에, 저희 동네 왕송호수
뷰를 가려 버린 신축 아파트에
대한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과 일치해서 같이 수다
에 동참하고 싶은 욕망이 잠깐
일었답니다. 그렇게 가는 거죠.

2023-05-07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3-05-07 23:28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 말씀 듣다보니
김훈 작가님 에세이 중에, 작가님 사시는 일산 호수 근처 산책하시다가 할머님들 대화(주로 며느님들 ~~~, ~~~ 뒷이야기) 들으셨던 일화 어렴풋이 생각나요. 작가님께서도 그 대화에 마음은 이미 끼어 계셨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갑자기 제 흐린 기억력을 탓하고 싶어지네요

아! 이 늦은 밤, ˝그렇게 가는 거죠˝라는 말이 마음의 파고를 낮춰주는 것 같습니다. 제게 필요했던 말씀입니다. 감사드려요^^

persona 2023-05-07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질문이 많이 남는 얇은 책 한 권 읽으셨군요. ^^ 전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 듣다보면 오디오북 듣는 거 같더라고요. 가끔요. ㅎㅎㅎ
공공장소에 주로 혼자 있다보니 안 그러고 싶어도 동네 이야기는 다 듣고 다니는 거 같아요. 저도 그냥 지나가려고 하고 안 들으려고 하지만 듣게 되면 저도 관련 생각도 하게 되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ㅎㅎ

얄라알라 2023-05-07 23:30   좋아요 2 | URL
까페 순례자로서, 예의를 지키고 싶어도 귀쫑긋 되는 상황이 잦은 듯 합니다.
persona님 표현에 격 공감, 끄덕끄덕하게 됩니다.

˝질문이 많이 남는 얇은 책 한 권˝이라...아! 시적이라는 말, 이럴 때 쓰는 거겠죠?
누군지 모를 이들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귀 쫑긋 엿듣게 된 상황에서, persona님 표현 멋있습니다!

yamoo 2023-05-10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산후조리원에서도 책을!!!
진짜 책덕후네요..^^

고양이라디오 2023-05-11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던바의 수‘ 찾아보니 재밌네요ㅎ 15년 일하면서 조리원에서 책 읽는 여자를 처음 봤다니 신가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