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듯한 제목, [산에 오르는 마음Mountains of the Mind]보다도 부제, "매혹됨의 역사"에 끌려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 몇 페이지만에, '아! 문장 어쩜 이렇게 아름답고 치밀하니?'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뛰어난 문장가, 사색가들의 뒤에는 멋진 가풍이 있(는 경우가 많)더라. 저자 로버트 맥팔레인(Robert Macfarlane) 외할아버지는 서가뿐 아니라 집안 여기저기 책을 뒹굴릴 정도로 장서가였다. 어린(아마 그때도 잘생겼으리라😏) 손주는 "닥치는 대로 벽에서 벽돌을 꺼내듯이 책 더미 중간쯤에서 녹색의 커다란 책을 꺼내...," "유년 시절이 오롯이 허락하는 자기만의 시간에, 마치 폭음이라도 하듯 외할아버지의 장서를 탐독했다. (15)"


꼬마 로버트 맥팔레인은 "희박한 공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 두 개의 작은 점(등반가 맬러리와 어빈) 중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존재에 불과"(15)했다. 하지만, 소년기부터 산에 오르던 그는 훗날 산악인이자 명망 있는 작가가 된다. 스물여덟 살에 [Mountains of mind]를 출간했고 '심원의 시간 Deep time'을 연구하며 대학에서 후학도 양성한다. '아, 이렇게 조화롭고 강인한 영혼이라니!' 460여 쪽의 1/10지점을 지날 즈음, 로버트 맥팔레인에게 팬심을 느꼈다! 아울러 질투심과 부끄러움도... 작정하고 성실하게 산다 한들, 맥팔레인을 비롯한 숱한 등반가들이 보아왔을 '알펜글로 apenglow'를 내 인생에서 직접 볼 날, 있을까? 생명을 걸고 반중력의 신비, 산의 부름에 화답했던 그들만큼 대범할 수 있을까?


BrettA343,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질문을 바꿔본다. 두 발 디딜 땅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는데 굳이 아찔한 고도에 이르고 싶은 이유는 무얼까? (왜 목숨 걸고 산에 오를까?) '마음의 산(Mountains of Mind)'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인간을 매혹시켜 왔는가? 나는 차가운 형광등 빛에 안락함을 느끼면서 왜 예측불가한 색조합의 알펜글로우를 동경하는가?


바로 이런 질문에 로버트 맥팔레인은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식으로 답을 찾아간다. 옮긴이도 언급했듯, [산에 오르는 마음]은 장르를 특정하기 어렵도록 독창적인 지성의 산물이다. 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류가 산을 상상하는 방식(또는 산에 오르는 마음)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43)," 즉 '마음의 산을 향한 인간의 매혹됨 계보사'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지리학, 지질학, 생태학, 스포츠학, 철학, 역사학, 인류학, 미학...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읽어도 혹할만큼 풍성한 정보를 유기적으로 배치해 놓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그가 이처럼 방대한 지적 작업을 단독 수행하며, 심원의 시간(Deep time)에 매혹당한 등반가로서의 자신의 경험도 곁들였다는 점이다. 꼬마 맥팔레인이 할아버지의 장서 중에서도 특히 실존 탐사가의 일기를 많이 읽었던 영향일까?

Pablo Carlos Budassi,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스크린이 호도하는 가상현실의 자극이, 손발가락을 잃어가며 하는 등반예술과 맨눈의 탐사를 대체해가는 21세기에 등반가들이 저 높은 산을 오르며 이르렀던 경외감은 인간이 왜 겸허한 존재여야 하는가를일깨워주는 고백이 된다. 


로버트 맥클라인의 날카로운 지성과 통찰력을 보여주는 문장 몇을 옮겨 본다.


솟구침, 사나움, 차가움, 이 모든 것을 이제 무의식적으로 숭배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이미지들은 더 거친 야생에 대한 간접 경험에 굶주린, 도시화가 진행된 서구 문화에 스며들었다. 산행은 지난 20년 동안 가장 빠르게 성장해온 여가 활동 중 하나다...이제 에베레스트산은 경험이 부족한 등산 회사 고객 수백 명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만년설로 뒤덮인 타지마할이 되었고, 당의 糖衣를 정교하게 입힌 웨딩케이크로 전락하고 말았다. 에베레스트산의 산비탈에는 현대인들의 시체가 흩어져 있다.


[산에 오르는 마음] 41쪽



'심원한 시간'의 광대무변함을 생각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강렬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일로, 당신의 현존을 완전히 부수고 과거의 압력으로 당신을 '無'로 압축하며 미래는 너무 광활하기에 당신이 직시할 수 없도록 한다. 이는 정신적인 공포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공포다. 산의 단단한 바위가 시간의 마모에 얼마나 취약한지 깨닫는 일은 반드시 인류의 몸이 섬뜩할 정도로 덧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도록 하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마음]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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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07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에 오르는걸 ‘반중력의 신비‘ 라고 하는군요. 완전 멋진 표현인거 같아요~!!
산에 오르는 마음이 저런거였군요. 뭔가 웅장합니다~!!

얄라알라 2023-05-09 13:42   좋아요 1 | URL
1976년생 저자는 남들 80년 살아도 못해본 넘 많은 경험을 했더라고요
그러니 글이 좋을 수 밖에^^
이 역시 질투인가봅니다

새파랑님 좋은 오후 보내시기를

얄라알라 2023-05-09 13:42   좋아요 0 | URL
1976년생 저자는 남들 80년 살아도 못해본 넘 많은 경험을 했더라고요
그러니 글이 좋을 수 밖에^^
이 역시 질투인가봅니다

새파랑님 좋은 오후 보내시기를

고양이라디오 2023-05-11 1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알아갑니다.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책읽는나무 2023-06-08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을 좋아하시는 얄라 님과 잘 어울리는 책의 글로 당선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수준 높으면서 저는 처음 보는 책들 리뷰나 페이퍼에 많이 올리시는데 늘 친구 읽기 글로만 읽어 좀 아까웠었는데...흐뭇한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걸 대공개해 주세요.ㅋㅋㅋ

얄라알라 2023-06-08 14:18   좋아요 1 | URL
하하하 책읽는 나무님

저는 30000원 적립금에 일단 너무 좋아서 눈 희번덕^^;;; 도대체 내가 썼던 글 중 당선될만한 게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하면서 궁금했는데

알록달록 사진 세례를 퍼부은 이 글이었네요.
이 책이 너무 좋아서 후속작도 빌려 놨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어요.

응원해주셔서 많이 고맙습니다. 책읽는나무님도 축하드립니다. 러스트벨트의 고운 하늘 색이랑, 알펜글로 색이 묘하게 겹치네요^^ 맥락은 다르지만

겨울호랑이 2023-06-08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을 오르는 마음으로 마음의 산을 올라야 하는데, 자연에 있는 산과는 달리 오를 수록 점점 더 까막득하게 높아져 가는 것이 다른 점인 것 같아요... ㅜㅜ 얄라얄라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