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순례 일지에 듬성 등성 등장시키는 카페에 와 있다. 주차요금 무료인 주말에 어쩌다 방문한다. 아주 우연인데, 이 카페 올 때 두 번 연속 노란 표지의 책을 읽었다. 크리스티앙 보벵(Christian Bobin)의 [가벼운 마음(La Folle Allure]은 BTS의 BUTTER와는 사뭇 다른 톤의 연노랑을 입었는데, 그야말로 말랑한 달콤함과 맛봤어도 다시 탐하게 하는 중독성 소설이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문체에 빠져든 애서가들의 찬사는 이미 작년부터 뜨거웠다. 읽어보니 그 찬사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보벵의 매력은 책표지 색처럼 단 하나의 이름에 담길 수가 없겠다. 그 연노랑이 끈적한지 매끄러운지 건조한지 질척거리는지 보기만 해서는 알기 어렵다. 오래간만에 소설을 말 그대로 음미한다. 후각세포를 뇌로 옮겨다 놓았다 착각할 만큼 향기가 그윽한 술을 마실 때처럼, [가벼운 마음]을 혀끝으로 음미하며 천천히 읽는다. 혹시 놓쳤을까 봐 두 번을 내리읽는다.



[가벼운 마음]의 주인공 '뤼스'는 두 살 때 '누런 이빨'에 '누런 눈'을 하고 '누런' 오줌도 지리는 첫사랑이자 수호천사를 두었다. 폴란드에서 공수해온 야생의 늑대였다. 그 아이는 또한 서커스단과 유랑하며 생계를 꾸리는 부모를 두었다. 그 자체로 이미 떠도는 삶인데도, 뤼스는 어린 시절 내내 가출을 감행하고 여러 가명으로 존재의 망토를 새로 지어 입어 가며 세상에서 사라지는 방법을 터득했다. 복잡한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하자'라며 내일의 태양에 미뤄버리는 그 아이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와도 닮았다. 내가 흠모해온 '올리버 색스' 의 엉뚱한 호기심 그리고 보벵의 또 다른 작품, [흰옷 입은 여인], 에밀리 디킨스의 은둔도 떠올리게 한다. '뤼스'는 내면에 든든한 수호천사를 둔 행운아이기도 하다. 그 수호자 덕분에 뤼스는, 허영을 충족하며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닌 자신을 중심에 둔 삶을 살 수 있다. 나에게 [가벼운 마음]이 단순히 한 자아의 침잠형 고백록이 아닌, 삶의 재미를 잃어가는 요즘 사람들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확장형 대화집이다. 그래서 최근 읽었던 한국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의 산문집과는 결이 매우 다른 전율을 준다.



Ji-Elle,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가벼운 마음]을 두 번 내리읽으며 메모했던 쪽지를 보니, 몇 개의 핵심어를 꼽겠다.


  • 글쓰기와 작가라는 천직

  • 엄마라는 존재

  • 나의 수호천사는 나

  • 가명과 존재의 가벼움

메모지를 구겨 버리기 전에 정리해 본다.




'뤼스'에게는 미친 엄마가, 강렬하게 매력적이고 적절하게 미친 엄마가 있다. "미친 엄마는 야수 같은 아이들의 마음과 가장 잘 어울리는 훌륭한 엄마"(25)다. 까르르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뤼스의 엄마는 여느 엄마들처럼 "아버지들의 어두운 기운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162) 한다. 새로운 가명을 써서 가출을 재시도 하는 방탕한 딸이 돌아올 때도 웃어주고, 17살에 결혼했던 딸이 10년의 결혼생활에서 캐리어 몇 개 달랑 들고 쫓겨 났을 때도 힐난하지 않았다. 아내를 못 잊어 처갓집을 찾아온 (전) 사위에게 싸늘하게 대하는 뤼스에게도 "딸아, 너는 좀 사근사근한 맛이 없어."(154)라고 농을 던질 뿐이다. 엄마를 향한 뤼스의 신뢰와 사랑은 절대적이어서 뤼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 어머니는 자식들이 무엇을 하든 언제나 기뻐했을 것이다... 우리를 비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다. 그것이 엄마로서 그녀의 특권이며, 그 특권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배포다."(151) 영화배우로서도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뤼스의 매력은 어머니의 가벼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또 있다. "가벼운 마음"의 발원지는.


중학생 시절 뤼스의 대모(하숙집 주인)이었던 롱샬롱 부인은 할머니께 들은 말씀을 전해주었다. 핵심은 '가벼운 마음'이다. "아가야, 가장 중요한 건 즐거움이야. 어느 누구도 너한테서 즐거움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해라...사실 내 남편은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어. 하지만 아주 단순한 이유였단다. 결혼할 때 내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었어. 그런데 즐거움이 떠나 버린 거야. 그래서 이혼한 거지."(87)

뤼스 역시 3년간 이웃집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 쫓겨날 때, '티타티티타티 티타티티타티' 바흐의 아리아를 머릿속으로 재생시키며 경쾌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쫓아낸 남편이 다시 찾아와 '당신 없인 살 수 없다'라고 애걸할 때도 "그게 사랑과 무슨 상관이 있어? 우리는 당신이 없으면 괴롭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와 함께할 수는 없어. 적어도 그 사람이 자식이나 어머니가 아니라면 말이야. 로망. 나는 당신 엄마가 아니야. 그리고 더는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지 않아."(153)라고 가볍게 응수했다.

뤼스는 가볍다. 글도 가벼운 마음으로 쓴다.


"나는 글을 쓸 때 잉크로 쓰지 않는다. 가벼움으로 쓴다. 설명을 잘 했는지 모르겠다. 잉크는 구매할 수 있으나 가벼움을 파는 상점은 없다...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여름비의 도도한 서늘함에, 침대맡에 팽개쳐둔 펼쳐진 책의 날개들에, 일할 때 들려오는 수도원 종소리에, 활기 찬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음에...갓난아기의 눈꺼풀 위에, 기다리던 편지를 읽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다 열어보는 몽글몽글한 마음에....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그럼에도 가벼움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물고 희박해서 찾기 힘들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술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69)

뤼스에게, 뤼스의 창조자이자 작가인 크리스티앙 보벵에게, 혹은 보벵이 존중했던 시인 에밀리 디킨스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일까? 가벼움으로 글을 쓴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가벼움으로 써 본 적 있을까? 그게 뭔지 알기나 할까?빈칸 채우기를 해 본다.

"요즘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세 가지는 ________, _________, _______이다. 처음 두 개는 액체다. 잉크와 와인. 세 번째는 기체다. 날개와 기쁨. "(125) 아! 아름다워!보뱅의 아름다움은 문장에서 온 게 아니라 세상을 사는 태도, 그 자체에서 나왔나 봐! 그래서 흉내조차 어려워. 보벵에게 세 가지는 "글쓰기, 아르부아 와인, 소나타3번." 보벵을 따라서 나의 세 빈칸을 채워본다. "책 읽기, 새우깡, 나무"


그렇다면, 얼핏 뤼스만큼이나 충동적이며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 뤼스의 남편, 로망은 가벼운 마음을 가졌는가? 그랬다면 헤어질 이유가 없었을 텐데? [가벼운 마음]을 두 번 읽으니, 부부 사이에 놓인 강의 폭을 얼핏 가늠했다. 뤼스는 교육받지 못하고 가난한 부모를 두었고, 로망은 유서 깊은 명문가 출신 법학도이다. 비록 22살에 아버지의 직업과 명예를 이어받을 창창한 미래를 차 버리고 17세 소녀 뤼스의 허리를 감아 안았지만, 로망은 로망이다. 꿰뚫어보는 늑대의 눈을 가진 뤼스에겐 보였다. 로망이 예술가지망가들과 어울리며 환담을 나눌지라도, 차별받는 늑대, 유대인 그리고 어린이들이 더 살만하도록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은 전혀 없었다. 오직 자신의 재능에 대한 기대와 명예욕이 있을 뿐.

"아름다운 동네에는 어릿광대를 위한 자리가 없다. 부자의 세계와 가난한 자의 세계는 둘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심하다. 부자들을 위한 단 하나의 세계만 있으며, 그 옆이나 뒤에 있는 구역은 부자들 세계의 폐기물에 대해 알려 줄 뿐이다."(117) 딸인 뤼스가 알아챈 것을, 과묵한 뤼스의 아버지조차 간파했다. 아버지는 (전)사위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친구는 별로 호감 가는 타입이 아니다. 널 기다리면서 담배 한 갑을 다 피우질 않나. 내가 파 놓은 구덩이에 꽁초를 던지질 않나...사랑의 슬픔이 크면 무슨 짓을 못 하겠느냐만, 그놈은 슬퍼서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야."(151)


뤼스는 명문가의 이름, 직함, 미래를 예비한 통장잔고 등을 계산하기보다는 가벼운 마음을 따라간다. 10년간 살았던 남편 로망과 쉽게 헤어졌듯, 배우로서 크게 성장할 기회도 껌 뱉듯 별다른 충격 없이 뱉어버린다. 캐나다행 비행기에 오르기만 하면 인기와 돈과 유명세는 따 놓은 당상인데, 탑승하지 않는다. 수호천사가 강력하게 명했기 때문이다. "따져 묻지 마. 당장 '쥐로'로 가서 호텔 방을 잡고, 모든 이야기를 처음부터 쓰는 거야. 서커스, 중학교, 묘지."(174)

뤼스가 추구하는 가벼움은 바로 이런 것. 뤼스를 침묵시키고, 도망가거나 사교성을 낮추게 만드는 자폐증 걸린 늑대 아이가 원하는 대로의 가벼움. 그 가벼움은 성찰하지 않음에서 오는 허영과 위선의 촐랑거림이 아니다. 그런 촐싹거림은, 우리가 질리도록 많이 봐왔는데 종국은 불행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뤼스는 영화산업을, 돈에 대한 불안 외에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비싸기만 한 비눗방울bubble이란 걸 간파한다. 글쓰기를 "잉크와 고독과 고요함으로 꿀 만들기"(31) 에 비유하는 뤼스에겐 사람들의 수치심 없는 촐싹거림이 놀랍다. "사람들이 무엇에서든 글 쓸 거리를 너무도 빨리 찾"고 "소음에 불과할 뿐인 언어"(138)를 대량 생산해 내는 이유 역시 돈 때문이라고 본다.


뤼스, 뤼스의 수호천사 늑대 아이는 비싼 거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행복을 담보해줄 것인양 세뇌하는 비싼 거품보다는, 액체로서의 술과 잉크, 그리고 기체로서의 음악에 시간을 들인다. 그렇다고 방관자처럼 스쳐만 가지 않고 뤼스는 삶을 기록한다. 그녀는 글로 꿀을 만드는 작은 꿀벌이고, 그 벌을 창조한 크리스티앙 보뱅 역시 부지런한 작가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살되, 글만큼은 남기고 싶다." [가벼운 마음]이 나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전하는 확장형 메시지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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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4-17 12: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 종이책 노트북 커피.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필사하기 위한 노트와 볼펜.
요즘 필사하는 재미에 빠져 보려고 해요. 많이 쓰는 게 아니라 한두 문단을 쓰는 거죠.
이것도 꾸준히 하면 꽤 양이 많아질 듯해요.

얄라알라 2023-05-01 00: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페크님. 5월달에 답글을 달자니 부끄럽습니다. 서재 관리를 올 상반기 너무 안 하다 보니..

필사용 노트와 볼펜, 특수 도구(?)를 준비하셨다는 자체가 마음가짐을 다르게 할 것 같습니다.
글씨를 점점 쓸 일이 적어지는데, 저도 언젠가는 필사에 도전해봐야겠네요^^

레삭매냐 2023-04-18 20: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단 사서 쟁여 두기
시작한 작가랍니다.

그리고 최근작은 도서관에
서 빌려다 보다말고 반납한
추억이 -

독서록이 한 편의 아름다운
시처럼 그렇게 촉촉하게 다
가오네요. 쨩 -

얄라알라 2023-05-01 00:31   좋아요 0 | URL
아...도서관엔 추억 부스러기를 묻혀 놓은,
살짝 속페이지 열어보고 넘겨보고 반납한 책이 얼마나 많이 있는 걸까요?

저도 오늘 읽다 만 책들을 여럿 반납하고 새 녀석들을 데려왔습니다.

제 부족한 글을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레삭매냐님^^

그레이스 2023-04-19 05: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아두고 있습니다.
이 페이퍼때문에 조바심 나네요
빨리 읽고 싶어서...^^

얄라알라 2023-05-01 00:32   좋아요 0 | URL
이런 조바심이야 말로 사는 재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명절만 기다리던 그 조바심....명절 때 책 왕창 읽으려고 얼마나 명절을 기다렸던지...
그런 마음이 어른이 되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

그레이스님, 해피 5월 시작하시어요

초원 2023-04-21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얄라님의 흥분이 서재 전체에 퍼져서 전해집니다. ‘확장형 메시지‘가 가벼울수 있다니 신기합니다.

얄라알라 2023-05-01 00:34   좋아요 0 | URL
초원님 안녕하세요?
와우! 2023년의 5월이라니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요

블레이드 러너, 그 뒤의 숫자에 도달했다니
게다가 5월...

5월 좋은 출발 준비하셨는지요?^^ 항상 건강과 안녕을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