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림자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고통들을 오래 견딘 것 같았어. 손톱 아래마•다 진한 보랏빛 상처가 있던, 옷이 젖어 있던 몸들의 혼이었을까.
그들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 끝에 닿을 때마다 끔찍한 고통의 기척이 저릿하게 전해져왔어 - P60

만약 그렇게 좀더 시간이 흘렀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될 수 있었을까. 마침내 어떤 말을, 어떤 생각을 주고받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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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이 덤불숲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기억이 바로 그거였어.
내가 아직 몸을 가지고 있었던 그 밤의 모든 것. 늦은 밤 창문으로불어들어오던 습기 찬 바람, 그게 벗은 발등에 부드럽게 닿던 감촉.
잠든 누나로부터 희미하게 날아오는 로션과 파스 냄새. 삐르르 삐르르, 숨죽여 울던 마당의 풀벌레들. 우리 방 앞으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커다란 접시꽃들. 네 부엌머리 방 맞은편 블록담을 타고 오르는 흐드러진 들장미들의 기척. 누나가 두번 쓰다듬어준 내 얼굴. 누나가 사랑한 내 눈 감은 얼굴. - P55

더 많은 기억이 필요했어.
더 빨리, 끊어지지 않게 기억을 이어가야 했어.
여름밤 마당에서 등목을 했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고귀한보물 같은, 펌프로 막 길어올린 차가운 물을, 네가 양동이째 내끈끈한 등에 끼얹었지. 으흐흐, 몸서리치는 나를 보고 너는 웃었지.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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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 혼도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어. 서로에게 말을 거는 법을 알지 못하면서, 다만 온 힘을 기울여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고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어. 마침내 체념한 듯 그것이 떨어져나가자 난 다시 혼자가 되었어. - P48

넌 여기 없을 뿐 아니라, 아직 살아 있었어. 그러니까 혼이란 건가까이 있는 흔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만은 온 힘으로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였어.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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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고 우묵해진 그녀의 눈언저리를 유심히 보다 너는 생각한다. 사람이 죽으면 빠져나가는 어린 새는, 살았을 땐 몸 어디에 있을까. 찌푸린 저 미간에, 후광처럼 정수리 뒤에, 아니면 심장 어디께에 있을까. - P27

정대의 책상 앞에 앉아보았다가, 차가운 방바닥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고통이 느껴지는 가슴뼈 가운데 오목한 곳을 주먹으로 눌렀다. 지금 정미 누나가갑자기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달려나가 무릎을 꿇을 텐데. 같이도청 앞으로 가서 정대를 찾자고 할 텐데. 그러고도 네가 친구냐.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정미 누나가 너를 때리는 대로 얻어맞을텐데 얻어맞으면서 용서를 빌 텐데. - P36

그녀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너는 금세 알아들었다. 차갑고 부드러운 헝겊으로 겹겹이 감싼 것 같은 손끝으로, 뭔가를 겁내는 듯 조용히 두드리는 소리, 얼른 문을 열고 나간 너에게 그녀는 물었다. - P38

그렇게 잠깐 궁금했을 뿐인데, 그후로 자꾸 떠올랐다. 잠든 정대의 머리맡에서 네 교과서를 펼칠 통통한 손. 조그만 입술을 달싹여외울 단어들. 세상에 너는 머시매가 어쩌면 이렇게 착실하냐....
생글거리던 눈. 고단한 미소, 부드러운 천으로 겹겹이 손끝을 감싼것 같은 노크 소리. 그것들이 가슴을 저며 너는 깊은 잠을 이루지못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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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그 밤 빽빽이 강당을 메운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문득 둘러보며, 마치 이곳에 집결하기로 약속한 군중 같다고 너는 생각했다. 소리치지도 움직이지도 손을 맞잡지도않는, 지독한 시취만을 뿜어내는 군중 속을, 너는 장부를 겨드랑이에 끼운 채 빠르게 걸어다녔다. - P21

임종은 조용한 것이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던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 나갔다. 순식간에 주검이 된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 어린 새 같은 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몰라 너는 멍하게 서 있었다.
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 새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 놀란 그 새들은 어디 있을까.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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