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마지막 오랑캐
이영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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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이웃 블로그에서 주최한 훈훈한 이벤트 덕분이다. 책의 제목을 보고 얼마나 웃겼던지. 어릴 적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불렀던 ‘무찌르자~ 오랑캐’ 하는 노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머리말에서도 이 노래를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어, 남자분이 이 노래를 어떻게 기억하지, 신기해하며 정겨움에 흠뻑 젖어들기 시작한다.

 

 몽골, 하면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사막, 드넓은 초원, 칭기스칸, 말을 타고 달리는 유목민들이 생각난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몽골 여행기라기보다는 몽골의 문화, 정서, 몽골인의 삶의 태도 등 여러 가지를 담고 있다. 작가는 2000년 여름, 멋모르고 찾아간 몽골 초원에서 안내인이자 유목민인 두게르잡 비지아를 만나게 된다. 몽골은 화장실이 따로 없다 한다. 문명인으로 살아온 여행객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냥 넓은 초원이 모두 화장실이란다. 하지만, 강물은 모두 쓰는 생명수니까 안 되고, 작은 쥐구멍에 오줌을 누니, 왜 저 넓은 땅을 놔두고 하필 쥐가 사는 구멍에다 그러느냐고 타박하더란다. 이 얼마나 민망한 일인지. 오랑캐로 알고 있던 그는 나쁜 오랑캐가 아니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없어서 힘들었던 좌충우돌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펼쳐진다.

 

 그 후 그 대지와 사람에 반해 몽골을 공부하고 여행하며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한다. 한국에서 교수로 지내고 있다는 알타이산의 마지막 오랑캐 친구 비지아와 함께 했던 초원 이야기이다. 학창시절에 배운 바로는 오랑캐는 아주 나쁜 적으로 통했다. 종류도 다양해서 동이(東夷), 서이(西夷),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불렸는데, 이는 중국과 한통속이 되어 그대로 따라 했다는 것이다. 비지아는 알타이산의 주봉 이름을 딴 뭉흐 하이르항 솜(郡) 출신인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오리앙카이 부족민이다. 칭기즈칸의 정복전쟁 때부터 청나라와의 독립전쟁까지 활약한 몽골 기마병 중에서도 가장 용맹했다고 한다. 맞붙을 때마다 선봉에서 달려오는 오리앙카이 부족 때문에 무서워서 만리나 되는 장성을 쌓았다고 하니, 그 용맹함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저주와 분노의 뜻이 담겨진 오리앙카이는 ‘오랑캐’가 되었다고.

 

 책 속에 들어있는 사진들은 쉽게 갈 수 없는 몽골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탁 트인 몽골의 초원과 푸른 하늘, 석양을 배경으로 찍은 실루엣 사진,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의 사진 등... 하루하루 경쟁에 치어 지친 마음을 풀어주기에 더없이 황홀하다. 넓디넓은 초원과 광활한 자연 풍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후련해진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생각해보니, 그 풍경 속에 들어앉아 생활하는 유목민들의 삶은 감히 동경하고 흉내 낼 수도 없을 것 같다. 

 

 이동이 주된 삶의 방식인 유목민들에게도 이사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았다. 게르를 철거하고 양떼, 말 등 가축까지 모두 끌고 가는, 몇 달씩 걸리는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낮에도 기온이 영하 사십 도로 곤두박질하는 혹한의 겨울을 유목민들은 어떻게 보낼까.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울 만큼 추운데, 풀이 없어 고생하는 가축들, 굶주린 가축들에게서 젖이 나오지 않으니 사람들도 배고픔의 연속이고... 몽골의 초원 낭만적으로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멀리서 바라보니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이다. 그 환경에 놓이게 되면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實戰(실전)이다.

 

 우리는 단 하루라도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씻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등 불편함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비지아는 싸우나, 목욕을 죽기만큼 싫어한다고 한다.(다른 몽골인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욕조에 담긴 목욕물 일 뿐이지만, 들어가면 끝이라는 거다. 소위 ‘근대’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서 영원히 돌아 나올 수 없는 문명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모양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습관이 되고 삶이 되고 그것이 문화로 형성된다는 것은 정말 간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문화의 차이가 생기고, 그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몽골의 기후 조건은 연중 비, 눈 모두 합쳐도 이백사십 밀리미터의 강우량이라니... 물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우니, 씻지 않는 습관은 척박한 자연에서 저절로 터득한 지혜이며 삶의 일부분이다. 그러한 기후 토양의 조건을 알지 못하고는 야만이네, 비위생적이네 하고 감히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예전부터 유목민들의 식생활이 궁금했었다. 육식을 위주로 먹고 있는 모습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 유목민들에 유명한 문구처럼, “동물은 풀을 먹고 사람은 고기를 먹는다.”고 한다. 평생 야채, 과일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젖을 짜서 만든 유제품을 먹기 때문에 고기만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의외로 돼지고기는 먹지 않는단다. 가장 큰 이유는 돼지가 반유목적 동물이란 점이다. 돼지는 인간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는데, 이로 인하여 식량 부족 문제로 이어지고, 사회 전체의 분열과 파괴를 부를 수도 있으니까. 유목생활에 대해 언급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어떤 때는 가뭄, 전쟁, 제방의 붕괴와 대홍수, 또 어떤 때는 강물이 불어나 밀려가듯 인구가 너무 불어남으로 해서 잉여 인구가 추방되기도 했다. 하지만 갈 곳이라고는 북부밖에 없었다. 북부는 사막이었다.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일단 사막 속으로 들어오면 살아남기 위해 유목민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사막에서 가능한 단 한 가지 생활 수단인 유목생활만큼 가혹한 생활 형태는 달리 없다.’(P162)-게오르규의 『마호메트 평전』中에서

 

 돼지가 살기 위해서는 습지가 있어야 하는데, 몽골은 사막과 반사막 기후로는 생존하기 어렵다고 한다. 소, 양, 말들이 먹어야 할 풀이 있는 초원을 짓밟는 돼지를 좋아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또한 뚱뚱하고 걸음도 느린 돼지가 잦은 이사에 어떻게 걸어가겠는가. 생각해보니 참으로 애물단지 일 수밖에 없겠다. 가축도 기후와 토양에 맞아야 생육이 가능함을 알게 된다.

 

 이밖에도 오랑캐라는 이미지와 달리 몽골은 여자들의 지위가 매우 높다고 하는데, 놀랍고 흥미롭다. 그들의 사랑법은 더욱 더. 영하 사오십 도를 오르내리는 겨울밤 부부는 어떻게 사랑을 나눌까. 금쪽같은 새끼들을 나가 있으라고 할 수 없으니, 그냥 자연스럽게 사랑을 나눈단다. 지극히 일상적인 일로 무슨 유난을 떠느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오랑캐답다고 해야 할까. 우리에겐 좀, 아니 많이 민망해서 홍당무가 될 지경이다. 그들의 삶은 전통이 되고 문화로 형성된 것이니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만의 문화이니까. 전반적으로는 유쾌 발랄하면서도, 가끔은 찡한 먹먹함과 감동을 준다. 정말 소설만큼, 아니 소설보다 재미있다.

 

 또 인상적인 것이 있었다. 우리는 ‘비가 온다’라고 하는데, 몽골어는 ‘비가 들어 간다’고 한단다. 이는 문장의 주인공을 ‘하늘과 대지’로 보는 것이다. 스스로 우주의 주인이라는 짐을 덜어내고 그만큼 가볍고 그만큼 자유롭게 살아가는 유목민이다. 아, 정말 하늘과 대지 속으로 비가 들어가는구나... 이들의 자연을 경외하는 태도와 삶의 방식은 우리 정착민과는 현저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우리 정착민들은 보통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정말 그렇게 자부할 만할까 싶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는 문화가 많이 자리잡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부자들은 묘지를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몽골인들은 아예 묘지가 없다고 한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우리로서는 좀 섬뜩했다. 손자의 힘을 빌어서 죽고 제사를 지내는 일도 없다고 한다. 중국의 유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고, 지금까지도 견원지간이라고 한다. 그냥 땅에 묻혀 자연과 일부가 되는 것. 이것이 그들의 삶과 죽음이다.

 

 

 

 

 친구 비지아를 통해서 바라본 몽골인의 삶과 죽음, 문화는 정주민(定住民)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이 귀한 그들은 외지인이나 여행객들이 오면 얘기를 하고 싶어서 물고 늘어진단다. 반가워서 인사를 하려고 수 십 킬로미터를 말을 타고 달려온다는 그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람 귀한 줄을 모른다. 경쟁하느라고 점점 지쳐간다. 사람에 치여 혼밥, 혼술, 혼영 등 혼자族(족) 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물건에 치여 산다. 좀 더 가뿐한 삶이 그립다.

 

 수백 번 몽골을 드나들며 유목민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배운 이영산 작가는 관광객이 아닌 이웃의 시선으로 재미있고 맛깔 나는 어조로 이야기한다. 야만이란 이름으로 폄훼되어왔던 유목민의 삶을 새롭게 들여다 볼 수 있어서 매우 유쾌한 시간이었다. 몽골이 궁금한 사람, 여행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유용한 총체적인 몽골 이야기이다. 수많은 몽골 관련 책을 참고하여 상세하게 쓴 이야기로 그들을 삶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몽골에 한걸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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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 - 이미령의 위로하는 문학
이미령 지음 / 샘터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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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언니를 잃고 충격과 상심에 휩싸였다가 1년 동안 하루 한 권씩 책을 읽는 계획을 실행하는 동안 삶을 돌아보면서 마음을 치유했다는 니나 상코비치의 혼자 책 읽는 시간을 읽은 적이 있다. 이처럼 사람은 저마다 가슴 저 깊은 곳에 크고 작은 고민들, 슬픔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내 슬픔이 가장 큰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있다. 인간의 삶은 영원한 행복, 영원한 불행이 계속되지도 않는다고 했다. 누구나 삶에서 인생의 굴곡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치유하며 다시 나아가는 힘을 얻을까. 음악을 듣고, 여행을 떠나고, 친구를 만나는 등 여러 가지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은 아마 책읽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 속에서 다양한 삶의 주인공들을 만난다. 가난하거나 부자인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 등 제각기 사연을 품고 있다. 울다가 웃기도 하고, 그러면 그렇지 그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편이구나, 그들이 처한 상황에 감정이입을 하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렇게 눈물의 카타르시르를 느끼며 새로운 힘을 얻곤 한다.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읽는데, 벌써 눈물이 앞을 흐린다. , 이건 뭐지. 커다란 감동을 줄 것 같은 예감에 허리를 바짝 곧추 세운다. 아닌 게 아니라, 눈물의 연속이다. 어쩌면, 슬픈 사연의 이야기만 모아 놓은 것인가. 슬픔만이 아니라, 분노, 절망이 있다. 인종차별, 여성에 대한 편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고통의 외침들이 가득하다.


 프롤로그에 언급된 『레 미제라블』을 읽은 것은 중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장발장이 은 식기를 훔쳤다는 것 정도. 어린 소녀 코제트와 장발장이 만나는 장면은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지... 집이 가난하여 코제트는 하숙에 내맡겨진다. 하숙집 주인은 코제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양육비는 받아 챙기지만, 코제트를 하녀로 부려먹으며 온갖 학대를 일삼는다. 그 중에 가장 싫은 일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일이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밤, 이제 겨우 여덟 살의 소녀는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몸을 떤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큰 두려움인가. 무서운 하숙집 주인의 등살에 못 이겨 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가엾은 코제트는 머리를 긁기 시작한다. 그 상황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디선가 나타난 키다리 아저씨 장발장의 도움으로 순간 물통은 가벼워진다. 갑작스런 상황임에도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여린 소녀 코제트. 끝모를 두려운 상황에서 한줄기 빛과 온기를 만난다.

 

 특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야기는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풀어놓은 것으로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전에작가와 술이라는 책에서 처음 접한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이 나와서 참 반가웠다. 제목도 참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 사연은 마음이 아프고 참 안타깝다. 아이의 생일 파티를 하려고 케이크를 맞추어 놓았는데, 생일이 지나기 전에 뺑소니차에 치어 아이가 죽는다. 젊은 부부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상황이 어떨지는 뻔하다. 장례식을 겨우 마친 후, 식음을 전폐하고 슬픔에 싸여 있는데, 한 밤중에 장난 전화 같은 것이 며칠 동안 계속된다. 그때서야 알아차린 부부는 너무 화가 나서 빵집 주인을 혼내주려고 찾아가는데...

아이가 죽었다고 말을 해도 이 무뚝뚝한 빵집 주인은 위로의 말이라든지, 슬픔의 그림자를 가득 안고 있는 이들 부부에게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드시지요. …… 이럴 때 뭘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P40)

이런 와중에 먹을 것이 넘어갈까마는,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서 허기를 느낄 수도 없었던 부부는 따뜻한 빵을 먹는다. 무뚝뚝한 사내가 내미는 빵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따뜻함을 나누기에는 큰 힘이 된다. 그리고 이 늙은 빵집 주인의 이야기가 밤새도록 펼쳐진다는... 이제 막 지독한 슬픔을 겪은 부부에게, 처음부터 슬프게 살아왔다는 사내의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데...


 슬픔이나 고통이 계속된 채 살아가다보면 자포자기의 심정이 될 것이다. 희망도 없지만, 그렇다고 죽지도 못하고 그저 살아간다. 무표정으로 무장한 채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러니 남의 슬픔 따위는 알 바도 아니다. 자신의 슬픔을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퇴적화된 암석처럼 굳혀가며 살아온 인생이 아닐까. 사람은 행복한 순간에 불행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 행복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여긴다. 늙은 빵집 주인의 밤새도록 계속된 이야기를 들으며, 결국은 셋이 어깨를 토닥이며 울었을 것이다.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치유된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를 외치며, 먹기도 거부하고 구치소에서 죽어간 필경사 바틀비는 소통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외침이었다.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나와 의견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와 다른 것은 인정하기 싫어하며, 정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언급한 이 문장은 매우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이 이상한 외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단서가 필요했다. 필경사 이전에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을 불태우는 일을 했다고 한다. 편지는 지인들과 얽히고설킨 생사고락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것을 일일이 읽고 분류해서 폐기처분해야 했던 바틀비는 사람들의 희망을 불태워야하는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고통이었을까. 소수는 다수에게 질 수밖에 없다. 약자도, 소수민족도 거대한 힘 앞에는 힘없이 무너진다. 그렇다고 소수인 약자가 비정상이라고 확정을 지을 수 있을까.


 성공이란,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 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이다. 주인공은 쉰다섯 살의 사내 엘제아르 부피에, 고독하게 살아가는 양치기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작은 오두막에서 양치기 개 한 마리와 살고 있다. 매일 아침, 튼실한 도토리를 백 개씩 갖고 다니며 황무지에 심는다. 자기 소유의 땅도 아니고, 싹을 틔우기 전에 들쥐나 산토끼의 밥이 되기도 한다. 10만 개의 도토리를 심었는데, 그 중 2만 개만 싹을 틔웠다. 여기서 절반은 자연재해로 소멸되고 1만 그루만 떡갈나무로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딱 보아도 밑지는 장사를 하는 애달픈 사연이 있다. 아들 하나와 아내를 차례로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땅은 죽음의 땅이라고 생각한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곳의 땅이 죽어가고 있다.’

물론 그 사내가 열심히 나무를 심는다고 해서 이미 떠난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올 리는 없다. 뒤에 살아갈 사람을 위해서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푸르러지는 나무들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평화를 찾았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실제 만난 인물을 다룬 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더욱 진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 작품의 첫 페이지의 내용은 이렇게 쓰여 있다 한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P171)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이렇게 해야 할까, 저렇게 해야 할까. 아니면 편하게 포기해 버릴까. 이리 재고 저리 재다가 세월을 보내고 가슴 저편에 쌓이는 것은 후회뿐이다. 이럴 때는 조르바가 나와서 갑자기 호통을 칠 것 같다. 사람이 오래 살았다고 해서 모두 조르바처럼, 초면인 사람에게도 선뜻 다가가 하고픈 말을 시원하게 다 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행하시오? 날 데려가시겠소?”

왜요! 왜요! ……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자 날 데려가쇼.”

무슨 생각을 하시오? ……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 젊은 양반, 결정해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이 얼마나 화끈하고 시원스런 말인가. 크레타 섬으로 출발하는 배를 타려고 항구 술집에 앉아 있는 책벌레 청년에게 떡 하니 나타나 다짜고짜 해대는 말이다. 일명 자유인으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이다. 어쨌든 이렇게 청년 두목과 그의 매니저가 된 조르바가 크레타 섬에서 한 겨울을 나면서 보고 겪은 일과 갈탄광 사업을 벌였다가 쫄딱 망해버린 사연을 이야기한다. 읽다 말고 접어두었던 조르바를 다시 만날 때가 된 것 같다.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일단 해 보는 것, 을 배우려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화끈하게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얼음을 깨는 듯 쨍하게 다가온다.


 존 버거의 행운아』는 시골 의사 존 사샬이 환자와 삶을 함께 하며 총체적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다. ‘환자의 질병과 환자의 인간 전체를 분리하는 일이 없기때문에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잘 살필 수 있는 눈과 가슴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단지 아픈 곳의 처방만 내려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을에 있는 단 하나의 의사로서, 주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사회지도층 인사이다. 병을 고쳐주는 의사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통과 한계를 떠안고 운명과 불행에 맞서 싸워줄 대리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아픈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부를 이루었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고 존경해 마지않는 주민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래서 그는 행운아라는 것이다. 그저 어느 날 어디서 툭 떨어진 행운이 아닌, 삶의 태도와 가치로 이루어진 행운이었다. 이 시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서른 네 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저자도 어린이용인 줄 알았다던,어린 왕자는 세속을 살아가는 어른에게 주는 힌트라는 것을 알았다. 여기 실려 있는 주옥같은 작품은 우리의 슬픔을 보듬어주고, 우리가 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이해하는 발자국이 되리라 믿는다. 말은 살아 있고 문학은 도피가 된다. 그것은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삶 속으로 들어가는 도피이다.”(시릴 코널리CYRIL CONNOLLY)혼자 책 읽는 시간-니나 상코비치)고 했다. 이처럼 문학은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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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3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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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책을 선택하는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책의 제목이 끌렸다든가, 아니면 저자의 굉장한 유명세와 작품의 호평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든지. 아마도 내 경우는 두 가지 모두였다고 할까. 몇 년 전 이 책을 구입해서 읽다가 좀 지루하기도 해서 읽다가 말았는데, 다시 읽기로 마음먹고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는 좀 동떨어진 삶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읽기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하게 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우리 마을 젊은이들의 불행은 농장과 가옥, 헛간, 가축, 농기구들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데서 싹튼다고 생각한다. 그런 물건들을 얻으면 여간해서는 없애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차라리 드넓은 초원에서 태어나 이리 젖을 먹고 자라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인데, 그랬다면 자신들이 노동을 바쳐야 할 밭이라는 것의 실체를 좀 더 똑똑히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그들을 흙의 노예로 만들었을까? 인간이란 원래 한 줌의 육신을 소모시키면 그만인데 어째서 60에이커나 되는 땅을 부려야 한단 말인가? 어쩌자고 태어나는 그 순간 무덤을 파기 시작한단 말인가? 인간은 이 모든 것들을 내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야만 한다.’(p12)

 

 바로 이 부분이다. 농장을 현대의 직장으로 바꾸면 된다. 회사의 직원이 되어 일하는 것이 부품운운하는 하는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세계적인 경제 전문가인 로버트 기요사키도 현대인들이 은행을 위해서 일한다고 했다. 빚을 갚기 위해 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정곡을 콕 찌르는 말에,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아이러니다 예전에 읽은 <조화로운 삶>의 저자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이 버몬트의 산골짝에서 스무 해를 보낸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준으로 정하고 철저히 자급자족하는 삶, 그리고 남은 시간은 책을 읽으며 글을 쓴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지만,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다. 문명의 이기를 내려놓아야 하고 그러한 환경에 놓이는 자신이 행복감을 느껴야 한다. 그들도 삶은 만족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책이 나온 지는 이미 백 육십 년이 지났고, 산업화로 인하여 땅을 일구어 힘들게 일하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대신 기계화, 자동화된 직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도구들도 버튼 하나만 누르면 간단하게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할 수 있어서 일하는 시간을 단축시켜 준다. 그런데도 현대인은 늘 시간이 없어 바쁘다고 한다. 마음의 여유도 별로 없다. 오히려 조금 시간이 생기면 이 생각 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궁금해진다. 많은 이들이 <월든>을 찾게 되는 것은 아마도 나와 다르게 살았던 사람에 대해 동경하고, 그 삶을 들여다보며 어떤 위로를 받고 싶었던 마음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치품 대부분, 그리고 이른바 생활 편의품 이라고 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없어서 안 될 물건이 아닐 뿐 아니라 인류의 발전에 확실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사치와 편의에 대해 말하자면, 현인들은 가난한 이들보다 훨씬 더 소박하고 빈약한 생활을 누려왔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등지의 고대 철학자들은 외적인 부라는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가난하면서 내적인 부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부자였던 계층이었다.’(p25)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삶에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과정에 있다고 말 한다. 야생의 생명체들은 식량과 잠자리만 있으면 된다. 인간 또한 삶의 필수품과 식량, 주거와 의복과 연료 같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겉모습을 화려함으로 치장하지만, 내면은 절망감으로 감춰져 있다고 일침을 놓는다. 예로부터 열 가지를 갖고 있으면 열 가지 고통이 따른다고 했다. 가문을 영락케 만들고 국가를 쇠약케 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사치의 본질이란 무엇인지 설파하고 있다.

 

 월든 호수 옆에 땅을 가지고 있던 에머슨의 허락을 받아 숲으로 들어간 소로는 그 곳에 직접 집을 짓는다. 농사를 지어 수확물을 판매하기도 하고, 때로는 막노동도 한다. 그리고 지출과 수입을 비교한다. 자신의 소박한 식생활을 알려준다. 자급자족을 하면서도 경제적 효율에 초점을 맞춘다. 나머지 시간은 책을 보거나 몽상에 잠기기도 한다.

 

 ‘어른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은 깊은 공감이 간다. 제법 책을 읽는다는 이들조차도 최고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 어려운 그리스어를 마스터하고 그리스 시인의 난해한 시() 정신을 마스터하고 나서도 기민하면서도 대담한 독자에게 자신의 지식을 나누어줄 만한 교수가 거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평생공부를 통해 교양을 쌓아 내면을 고양시키라는 메시지로 들린다. 무지를 깨닫는 일이야말로 성장을 위한 꼭 필요한 요소라고.

 

 숲에서 살아가는 소로에게서 무한한 환희와 행복감이 느껴졌다. 새처럼 요란하게 지저귀는 기쁨이 아니라, 조용히 마음으로 되새기는 기쁨이었다. 누군가 의심한 것처럼 은둔자도 아니었고, 사람과의 교제를 좋아하였다.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와, 사상을 논하기도 하고 소박한 일상 이야기도 했다. 거기서 바라보는 호수와 동식물 등 자연을 묘사한 부분은 실물을 보고 있는 듯하다. 세밀한 관찰에 대한 이야기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계절에 따른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며 일체가 되어 22개월을 보낸다. 콩코드의 주민들은 소로를 마을의 박물학자로 간주했으며, 많은 학자들은 미국 자연보호 운동의 선구자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결국은 소로의 삶을 동경하더라도 그렇게 살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진정 원하는 삶이라면 몰라도. 하지만, 현재 있는 자리에서도, 너무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거기서 빚어지는 복잡다단한 생활을 조금이라도 단순화 시키는 방법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마차가 지나가던 시절이니까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시대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근본은 단순하게, 단순하게 살아라.’이다. 그리고 여유 있는 시간을 벌어서 '가 오롯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라고 한다. 오늘날 는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살아가는 시대이다. 외관으로 비교하고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성취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성취하고 성공하려는 마음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다가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가. ‘좀 더 많이, 좀 더 빨리를 외치는 이 시대에 월든 호숫가의 이른 아침의 정경은 딴 세상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평온한 고독과 정적 속에서 몽상에 잠긴 소로의 모습, 안개와 거울같이 매끄러운 수면, 사방에서 지저귀는 숲개똥지빠귀의 울음소리... 현실 세계와는 다른 삶의 여백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삶은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다른 삶이 궁금해서 엿보기도 하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쉽고 간단한 삶은 없는 것 같다. 각자에게 어울리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의 본연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속도와 다른 느림의 미학을 보여준다. 삶의 터전이 되는 곳과 그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고 묘사한 부분이 많기에 좀 지루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천천히 느긋하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음미하듯이 읽어보면 좋겠다.

 

             “내가 숲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였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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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죄인 박열과 가네코 - 천황 폭살을 기획한 조선의 아나키스트
김세중 지음 / 스타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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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던가. 한 마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삶이란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가. 항일투쟁의 독립투사라고 했다. 유관순열사, 안중근, 윤봉길의사는 알고 있었지만, 박열은 생소한 이름이었다. 이웃 블로그에서 영화 박열로 만나서 알게 되었고, 궁금하던 차에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조선과 일본, 국적은 다르지만 하나의 뜻을 품고 동지, 연인, 부부로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 떠난 이들이 있다. 열혈청년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다.


 천황부자를 폭살하려는 계획을 갖고 실행에 옮기려는 중에 관동 대지진이 터지고, 대역사건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거쳐 사형을 언도받게 된다. 이들은 어떻게 만났을까. 박열은 경상북도 문경출신이며 3.1일 독립시위를 목도하게 된다.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닐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하기 위하여 1919년 도쿄로 건너간다. 고학을 하면서 흑우회, 흑도회, 불령사라는 항일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한다. 여기서 가네코 후미코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의 충북 청원군 부강리에서 살아본 경험도 있는, 조선인에 대한 어떤 편견도 없는 자유여성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후미코의 이모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갔고, 어머니도 여러 남자를 전전하는 불안정한 가정 분위기였다. 더구나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은 ‘무적자’였다. 조선에서 고모와 할머니와 살면서 식모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정신적, 신체적으로 가혹한 학대를 받는다. 어쩌면 이렇게 온 몸으로 견뎌야 했던 고통스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혁명을 향해 싹을 틔우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평소처럼 정우영의 하숙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박열과 마주대하게 되고, 교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포기할까 할 무렵 박열이 찾아온다. 당차게 교제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만남을 거듭하며, 동지로 뜻을 모아 서서히 연인이 되고 부부의 인연을 만든다.


 이 두 사람의 생각이나 활약상이 잘 나타나 있다. ‘천황제’와 군국주의 대한 반감을 연대로, 당당하게 일본 정부에 맞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일본 사회를 발칵 뒤흔들었다. 그들의 동거 계약서는 그 당시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 동등한 입장에서 동지로서 동거한다.

2. 아나키스트 활동에서는 가네코 후미코가 여성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3. 한쪽의 사상이 타락하여 권력자와 손잡는 일이 생길 경우 즉시 동거생활을 청산한다.

 

 후미코는 고학생으로 일하면서 사회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진보서적과 잡지를 탐독한다. 그녀가 박열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조선 청년>에 실린 제목도 민망한 ‘개새끼’라는 시를 본 후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이 책에는 후미코의 삶과 사상을 알 수 있는 단가나 박열, 후세 다츠지 변호사 등 재판장, 지인들에게 쓴 편지와 일본 특유의 하이쿠를 느낄 수 있는 3행시들이 들어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조선 청년>의 ‘개새끼’

 

                                 지금까지 맛본 인생

                                 이제 끝인가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네-173p 맨 위의 시


 23년의 짧은 생애 중 20여 년은 고통으로 얼룩진 삶이었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의 고통. 씻을 수 없는 상처였을 게다. 아마도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 지은 3행시로 추측된다. 사형선고를 받고 만세를 불렀다는데. 옥중에서 목을 매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나온다. 같이 살고 같이 죽자고 맹세했다고 했는데, 자살이라니 처음엔 의아했다. 후에 사형을 면해준다는 말을 듣고, 천황 따위가 뭔데 나를 살리고 죽일 수 있느냐며 반박했다고 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 당하던 반발심으로 자신의 목숨을 자신이 거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여전히 책임을 벗어나려

                                 버둥대는 살인자의 모습

                                 정말로 끔찍하구나-180p 세 번째 시


  위의 시는 일본 천황 이하 군국주의자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후 조선인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그에 대한 반발이 예상되자 박열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그들의 비열함을 비꼰 것 같다. 자신의 국가를 떠나서 의로운 일에 초점을 두고 뜻을 같이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또 한 사람,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가 있다. 두 사람을 위해 열성적으로 변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양심의 소리를 가진 이 사람은 그 외에도 많은 조선인을 위한 일에 앞장섰다.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의로운 일을 향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 세상에 맞서 해쳐나가는 삶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더 이 두 사람의 일생이 조명 받는 것이다. 예전에 비해 국가의식도 많이 옅어진 세상이다. 그만큼 세상은 할 일도 넘쳐나고, 관심거리도 많아졌다. 시시각각 변화되는 세상의 일들을 인터넷의 바다에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의인들은 사람들 마음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의인들도 있을 수 있다. 사사로운 자신을 버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뜻을 두고 살다가, 떠난 사람들에 대한 발굴을 통해서 고통으로 얼룩진 그들의 삶이 제대로 보상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이들에게 빚진 것을 갚는 방법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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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 빈센트 반 고흐 전기, 혹은 그를 찾는 여행의 기록
프레데릭 파작 지음, 김병욱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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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고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가난한 삶의 고통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주로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글이었는데, 살아있는 고흐가 느껴져 감동적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간절한 마음에 이 책과 만나게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그의 삶의 일부만 알 수 있는 편지글과 달리, 온전히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알 수 있는 기회라서 기대가 컸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화가인 프레데릭 파작의 고흐에 대한 전기이며 프랑스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메디치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우선 책 속에는 그림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림으로 예술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여유와 더불어 고흐의 열정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어릴 적 빈센트는 어떤 아이였을까.

‘말을 잘 듣지 않는 자손심이 강한 아이’였다. 역시 예술가의 자질이 보인다. 화를 내어도 눈에 띄게 크게 터뜨렸고 외로운 아이였다. 틈만 나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히스가 무성한 들판이나 시냇가에서 풍뎅이를 잡기도 하는 등 자연에서 큰 위안을 삼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기를 바랐고, 데생과 수채화를 가르쳤다. 딸들은 피아노를 배우며, 온 가족이 손에 악보를 들고 노래를 했다. 화목한 가정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지만, 따뜻함이 느껴지는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은 딱 여기까지였다. 부모님은 열한 살 빈센트를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느 기숙학교의 건물 계단에 내려놓고 가버린다. 비 내리는 날 그 도로를 따라 멀어져가던 부모님의 뒷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된다. 물웅덩이에 비친 자동차의 노란 빛. 회한의 색깔이 되었다. 기숙학교 이전은 천진함과 헌신적인 어머니와 주의 깊은 아버지의 애정, 가족의 따뜻한 화목이었다면, 기숙학교 이후는 온통 ‘고독’이었다.


 빈센트 특유의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우울한 성격은 학교에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놀림을 받기 일쑤였다. 결국은 열다섯 살에 학교를 완전히 떠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빈센트는 무신론자임을 선언하면서 가족과 갈등이 시작된다. 뭔가 일을 해야 하는데 무엇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어떤 일이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화랑을 운영하는 그의 삼촌의 힘을 빌려 구필 화랑 헤이그 지점으로 보낸다. 판매원으로서 훌륭한 실적을 보이며 잘 적응하는 듯 보인다. 그러는 동안 그림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날이 갈수록 커진다. 그러던 중 런던 지점으로 전근을 통보받고, 군복무 문제 등(병역의무는 대체복무로 해방된다.) 이 나오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된다. 런던을 떠나 파리로 파견되고, 갑자기 프랑스인 목사 미망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내가 돼 달라고 간청을 하지만, 거절을 당하고 굴욕감에 깊은 절망에 빠진다.


 이때 통찰력 있는 테오는 데생 화가나 화가가 되라고 형을 격려한다. 하지만, 목사가 되겠다고 한다. 성직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경멸하면서도. 기숙학교에 격리된 트라우마로 인해 ‘사랑’을 받고 싶다는 애착이 자리한 것일까. 수습 선교사 자리를 얻지만 신경질적인 태도, 화술부족 등 여러 이유를 들어 부적합 판정을 받는다. 다시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시작했지만, 결국은 열다섯 달 만에 부모님 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내 인생 최악의 시기였다”(P50)고 말 한다.


 끊임없이 ‘실패자’라는 생각으로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방황을 하던 빈센트는 아브라함 피터르선 목사와의 만남으로 그의 삶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끈기를 갖고 계속 그림을 그리라고 빈센트를 격려한다. 비로소 예술가의 소명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빈센트는 자신을 학대한다. 소나기에도 쏟아지는 눈 속에서도 맨발에 누더기를 걸친 채 때에 전 시커먼 얼굴로 황야를 돌아다닌다. 먹거리는 빵껍질에 얼어터진 사과만 허용한다. 모두 미치광이 취급한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열정을 실험해 본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절대 고독으로 이어지고, 성격으로 형성된 것은 아닐까. 일을 안정적으로 할 수 없으니, 돈이 없고 굶주림과 노숙 끊임없이 떠도는 생활은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이미 가족에게 그는 “도무지 감당 안 되는 수상쩍은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의 예술적 야망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부모님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하자 퀴엠으로 도망친다. 그림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발산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울분이 그의 온 몸을 타고 흘렀다. 그 광기어린 표정이나 모습을 보통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를 말할 때 흔히 ‘광기’를 떠올리지만, 그 이전에 자연에 가까운 순수함이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으며, 항상 초조했다. 갚아야 할 부채와 완수해야 할 과업을 고민했다. 어떤 학파의 환심이나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솔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가난하고 추한 노동자, 농부 등이 주인공인 회색빛이던 그림은 나중에 강렬한 원색으로 바뀐다. 그 추함을 ‘소름끼치게’ 잘 그려냈다고. 자청해서 요양원에 구금되기도 하고 남프랑스에서 북프랑스로 옮겨 다니는 등 여전히 불안하고 분주하다. 화가들과 교류를 통해 잠시나마 활력을 찾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그의 그림에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도 생기지만, 팔리지는 않는다.


 빈센트에게 참으로 다행인 것은 그를 믿어주고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는 테오가 있었다는 점이다. 모든 불평불만과 짜증을 다 받아준 테오. 그들의 형제애가 아름답다. 어쩌면 부모노릇을 온전히 해낸 동생이 아닐까. 물론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에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지만. 반면 그의 어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신이 가진 약간의 재능으로 데생이나 수채화를 가르쳐 준 사람인데, 장남이 그림과 광기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두고두고 후회했을까.


 살아생전에 딱 한 점 팔렸다고 한다. 한 여인이 구입한 <붉은 포도밭>. 평생 가난했고, 사랑을 갈구했으며, 그러나 항상 고독했던 빈센트는 테오와 나란히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누워있다. 빈센트의 열정과 테오의 희생이 빚어낸 혜택으로 우리의 눈앞에 그의 그림이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열정은 많이 부족하다. 광기로 점철된 삶이라고 하지만, 더 속 깊은 빈센트의 내면과 그림에 대한 열정, 작품세계와 그 변화를 알 수 있는 감동적이고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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