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 직업을 삼다 - 85세 번역가 김욱의 생존분투기
김욱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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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도 힘든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모처럼 일주일 동안 휴강이라 책을 읽는 호사를 누렸다. 이 책의 저자인 김욱 번역가는 몇 년 전 김애리의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를 읽고 나서 알았다. 나이 일흔에 번역가가 되었다는 것과 30년 기자 생활을 하다가 은퇴 후 보증을 잘못 서서 쫄딱 망했다는 사연 정도만 알고 있었다. 얇은 분량에 내 책 판형보다 더 작은 이 책에 저자의 묵직한 인생이 들어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문학에 관심이 많아 고교에 입학하자마자 문학동인회를 만드는 등 대학에서도 국문학을 전공했단다. 문학지 신인 작품 모집에 응모하여 1차 예심에 합격하고 2차 심사만 남겨둔 어느 날, 6.25 전쟁이 터졌다. 그 후로는 이북에 끌려갔다가 2개월 만에 죽기 살기로 도망쳐왔고, 생업을 위해 신문 기자가 되어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에서 30년 동안 일했다. 그리고 은퇴 후 그의 인생은 급변하여 거센 풍랑을 만난다. 고통스러운 인생 이야기를 어쩌면 그렇게 생생하고 재미있게 쓰셨는지. 인간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 존재인가. 웃다 울다 가슴 찡한 먹먹한 감동에 뭉클해지기도 했다.

 


번역 공부를 하는 중인 나로서는 어떻게 김욱 할아버지가 번역가가 되셨는지 제일 궁금했다. 1930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일본어를 강제로 공부해야 하는 시절이어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15세에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고 기자 생활 30년을 했으니 글밥을 먹는 인생을 사셨다. 그렇다고 해도 학창 시절 배운 일본어로 번역가가 된다는 건 다른 문제다. 하지만 김욱 번역가는 어렸을 때부터 외우다시피 읽었던 책들이라 번역이 아니라 독후감 쓰듯 술술 글이 나왔단다. 일흔이라는 나이에 어느 날 뚝딱 하고 번역가가 된 게 아니었다. 꿈을 향한 열정과 꾸준함이 낸 성과였다. 공부의 쓸모란 정말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95세에 일어 번역가를 은퇴하고 나서 새롭게 중국어를 공부한 다음 백열 살쯤에는 루쉰의 명작 광인 일기를 번역하고 싶다던 김욱 할아버지의 도전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 나이가 많다, 여건이 안 된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날마다 과제가 있고 마감 시간을 지켜야 하는 다소 벅찬 번역 수업을 수행하면서 괜히 사서 고생하는 건가,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잠깐 이런 고민을 하던 나는 큰 힘을 얻었다. 그리고 역시 시작하길 잘했다고 스스로 뿌듯해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열심히 번역에 몰두하고 일을 마치면 점심시간이란다. 남들이 한창 일할 시간에 여유롭게 서점에 나가 책을 고르거나 산책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번역가의 삶을 엿보며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나이 여든이 되어서도 번역에 열중하고 있는 인생이란 멋지겠다. 적어도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일 테니까.

 


김욱 번역가의 인생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무엇을 하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는 걸 상기해준다. 번듯한 기자 생활을 하다가 남의 가문 묘막 살이를 하는 등 혹독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어렸을 적 꿈을 간직하고 있다가 일흔에 번역가가 되고 작가도 되었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독자들에게 큰 용기를 줄 만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인상적인 몇 대목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치려 한다.

 


묘막에 기거하던 어느 날, 하릴없이 백과사전을 뒤지며 시간을 보내다가 우연히 바그너가 소개된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고, 히틀러와 니체가 우상처럼 섬겼던 대작곡가가 현재의 나와 비슷한 나이에 빚에 쫓겨 감방을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중략)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바그너보다는 형편이 좋은 것 아닌가. 그리고 좀 더 욕심을 내보자면 감방을 들락거리던 바그너도 예순아홉 나이에 필생의 역작인 파르지팔을 완성하고 대성공을 거두었다.’(p46~47)

 


찰스 스트릭랜드도 포기하며 살았을 것이고, 폴 고갱도 포기하며 살았을 것이다. 우리 또한 포기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찰스 스트릭랜드는 찾아냈고, 폴 고갱도 결국에는 찾아냈다. 남은 것은 우리들이다. 찾아내려고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다. 늘 마음 한구석에 미련이 남고, 궁금하고, 흥분되는 뭔가가 있었지만, 바쁘니까, 누가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늙었으니까 나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부정해온 만큼, 핑계를 찾아낸 만큼, 게으름을 피운 만큼, 빈둥거리며 가는 시간만 재고 앉았던 수고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하고, 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서두르고, 뭔가를 붙들려고 노력한 시간들이 쌓였더라면 지금과 같은 후회스런 모습은 결단코 되지 않았으리라.’(p123~124)

 


그런데 사람들은 해보지도 않고 못하겠다며 물러난다. 여든이 넘은 늙은이도 해내는 판에 나보다 훨씬 어린 것들이, 건장한 것들이, 힘이 있는 것들이, 능력이 있는 것들이 못하겠다며 우는 소리를 해댄다.’(p135)

 


막다른 골목은 절대로 나쁜 의미가 아니다. 여기보다 재미난 놀이터는 없다. 길이 끊긴 벽 앞에서 어떻게 해야 이 벽이 부서질까를 고민하는 것처럼 즐거울 때가 없다. 나를 가로막는 벽이 없고 사방이 뻥 뚫려 있는 것이야말로 곤란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피를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누가 나를 아프게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아프게 만드는 것이다. 누가 나를 때리기 전에 내가 먼저 모나게 구는 것이다. 자처하는 삶이자, 선점하는 인생이다.’(p15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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