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작년 여름부터 신경쇠약 기미가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나는 축농증 탓인가 했다. 자꾸 콧물이 나고 구역질이 일어서 엎드리면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일어나 있을 때는 끊임없이 코를 풀어야 했다. 자연히 사고력과 집중력이 떨어졌다. 죽을힘을 다해 원고지 삼천 매 남짓한 장편소설에 몰두하자고각오한 것도 이 육체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싶다. 아니 극복해 - P83
보이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 이 노력이 무리수였지 싶다. 삼백 매나 오백 매라면 또 모를까, 삼천매넘는 작품이 하루아침에 써질 리 만무하다. 당연히 체력을 적잖이 더욱더 소모하지않을 수 없었다. - P84
나는 악착같이 일과 싸웠다. 산만하고 느슨해진 주의력을 높이려고 각성제를 다량 복용하고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아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더는 술만으론 소용없어 수면제를 써야 했다. 내가 먹은 수면제는 정량의 열 배쯤이었다. 그 정도가 아니면 이미 잠들지 못하는 상태였다. - P84
짜증만 안 나면 글은 죽죽 써진다. 때때로 글자 쓰는 시간이성가시기도 하다. 쓰다 막히면 손에 집히는 대로 책상 위 책을펼쳐본다. 대개 두세 장 읽는 사이 다시 쓸 수 있게끔 된다. 책은 뭐든지 괜찮다. 어릴 적부터 사전 읽는 버릇이 있어서 『딕슨영숙어사전』따위를 읽곤 한다. 다만 지우는 일도 글쓰기에 들어가니까, 완성한 원고 매수와 작업 시간의 비율로 따지면 오히려 속도는 느린 편에 속한다. 지울 때는 별 미련 없이 지워버린다. 그래도 아직 덜 지운 감이 들지만. - P88
다 쓰고 나면 언제나 녹초가 된다. 쓰는 일만큼은 이제 당분간 거절하자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일주일쯤 아무것도 안 쓰고있으면 적적해서 견딜 수 없다. 뭔가 쓰고 싶다. 그리하여 또 앞의 순서를 되풀이한다. 이래서는 죽을 때까지 천벌을 받을 성싶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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