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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 갇힌 여인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평점 :
알베르틴이 크루즈 여행을 포기하고 화자와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살게 된다. 그런데 함께 하는 가운데 사랑의 기쁨도 누리지만 왠지 권태를 느끼고 사랑이 식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베르틴이 옆에 없을 때 오히려 기쁨을 맛보았다는데... 특히 아침 날씨가 좋을 때는 날씨를 알려 주던 카푸친 수도사를 떠올리며 행복한 기분을 느끼는 등 사색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둘 사이의 관점이 달랐던 때문일까. 화자는 사랑을 ‘소유’한다는 것에 의미를 둔 것 같았다. 하지만 알베르틴은 앙드레와 어울리는 시간이 많거나 자유분방해서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한쪽에서 붙잡으려고 하면 한쪽에서는 도망치려는 법인가. 이 9권에서 주된 이야기는 질투에 대한 이야기다. 질투에 대한 성찰적인 문장 중에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전부터 ‘갇힌 여인’이란 단어가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었는데 이 권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화자의 집에서 살게 된 알베르틴을 ‘갇힌 여인’으로 생각한 것이다. 가장 가까이 함께 지내면서도 질투를 느끼는 화자의 마음이라니. 완벽한 소유란 있을 수 없으니까. 가까이 있어도 한 길 사람 속, 마음은 모른다고 하지 않은가.
질투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고 있어서 인상적인 문장들을 몇 개 음미하는 것으로 이 권을 기억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모두 말해준다면, 우리는 어쩌면 쉽게 사랑에서 치유되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질투에 사로잡힌 남자가 제아무리 질투의 감정을 교묘하게 감추려 해도, 그 사실은 질투를 불러일으킨 여인에 의해 재빨리 발각되기 마련이며, 이번에는 여인이 교묘한 술책을 쓴다. 여인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자 속임수를 쓰고 또 성공한다.(P100)
마치 연인들의 심리전을 꿰뚫고 있는 듯한 장면이다. 어떻게든 알베르틴을 완벽하게 소유하려 했던 화자의 고뇌가 이야기 전반에 걸쳐 자주 묘사되고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도시와 길을 우리는 질투 때문에 알고 싶어 하는가! 질투는 앎에 대한 갈증이며, 그런 갈증 덕분에 우리는 일련의 고립된 요소들에 대해서는 온갖 지식을 차례로 취득하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하고, 언제 의혹이 나타날지도 결코 알지 못한다.(P139)
‘앎에 대한 갈증’이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하는 것이 질투라니. 사랑만큼 에너지 소모가 많은 것도 있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재미있고 공감할 수 있는 이런 질투에 대한 성찰이 엄청나다.
‘사랑하는 사람의 실제 삶과 관련해서 우리가 모르는 온갖 것에 대해 우리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런저런 일이나 사람들에 대해 그녀가 했던 말도 모두 망각한다. (중략) 우리의 질투심은 과거를 뒤지면서 어떤 사실을 유추하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언제나 회고적인 질투는 자료 하나 없이 역사책을 쓰는 사학자와도 같다. 언제나 뒤늦게야 나타나는 질투는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지만, 거기에는 주삿바늘로 질투를 자극하고, 잔인한 군중이 화려함과 간계를 찬미하는 그런 거만하고도 찬란한 존재는 더 이상 없다. 불확실한 질투는 허공 속에서 몸부림친다.’(P241)
질투를 경험한 이들이라면 무척 공감할 만하지 않은가.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가련한 몸부림.
드레스를 사주고 요트며 포르투니의 실내복을 사주고 알베르틴의 순종하는 모습에서 어떤 특권을 느끼며 사랑을 소유했다는 자부심도 느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 이제 나는 나만의 여자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래서 내가 느닷없이 보낸 첫 번째 쪽지에 자신의 귀가를, 데리러 온 사람의 인도 아래 돌아온다는 말을 공손히 전화로 알렸던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주인이었다. 더 주인이라고, 다시 말해 더 노예였다. 이제 내게는 알베르틴을 만나고 싶은 초조한 마음이 사라졌다.’(P258)
화자 마르셀이 요즘의 사랑법을 좀 알고 있었다면 알베르틴과의 사랑이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았을까. 서로 밀고 당기는 밀당 말이다. 알베르틴에게 별 관심 없는 척 멀리하기도 했더라면 그쪽에서 몸이 달아 더 적극적이지 않았을까. 너무 순진하고 순수한 나머지 온전히 사랑하고 온전히 소유(?)하려고 애쓰다 보니 눈치빠른 알베르틴이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을까. 물론 화자가 헤어질 결심을 했다고는 했지만, 왠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랑에 지쳐서 그런 결심을 한 건 아닐까, 엉뚱한 상상을 해 보았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갈매기 같은 소녀들의 무리에 둘러싸인 채 느린 걸음으로 방파제를 걷던 새가, 일단 내 집에 갇힌 몸이 되자, 알베르틴은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가질 수 있는 온갖 기회와 더불어 그녀의 빛깔도 다 잃어버렸다. 그녀는 점차 자신의 아름다움을 잃어 가고 있었다. 비록 질투는 내 상상적인 기쁨의 감소와는 다른 차원에 속했지만, 해변의 찬란한 빛 속에 감싸인 그녀를 다시 보기 위해서는, 그녀가 나 없이 혼자 외출해서 이러저러한 여인이나 젊은 남자와 동반했으리라 상상되는, 오늘과 같은 산책이 필요했다.’(P285)
어머니도 프랑수아도 알베르틴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 말고도 화자는 다른 걸 생각했을까. 이를테면, 자신이 보통 사람들처럼 건강한 청년은 아니었다는 점을, 아니면 아주 가까이서 본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관찰로 자신과는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까. 질투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알베르틴을 가엾게 여기는 배려심도 느껴졌다. 원래 있어야 할 장소에서 벗어나 ‘잠시 내 소유물이 되면서 별 가치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자신의 탓인 것처럼 생각한다. 알베르틴의 여자친구 앞에서 모욕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도 소중했던 존재가 내게 모욕을 준’것이었다. 그런 수치심과 질투를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면서 다시 아름다운 알베르틴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떠올리며 스스로 치유하기도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명대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쩌면 문학적으로 이루어야 할 꿈을 더욱 크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함께 침대에 누웠던 것이 경이로웠고 그렇게도 좋아하는 볼로뉴 숲의 호숫가에서 태양 아래 드리워진 그녀의 그림자, 단지 목소리만으로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 상상만으로도 충분하게 그녀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사랑했는데 결국 헤어질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참 힘들었겠지. 아, 내가 여기까지 오다니!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10권을 시작해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