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 나의 일본 미술관 기행
진용주 지음 / 단추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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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 일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내가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일본어공부를 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더 알고 싶다는 갈증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책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사람의 생각이나 말하는 바를 표현하는 통로, 그것은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하나로 통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는 왜 미술관에 갔을까. 책이나 잡지를 만드는 일을 하는 이른바, ‘종이밥을 먹고 살아왔던 저자는 반복적인 일상으로 피폐해진 삶을 보상받기 위하여 미술관 여행을 시작한다. 일본 열도 전국에 있는 미술관을 찾아 떠나기를 10여 년 동안 계속한 여정이 이 책에 담겨있다. 좋아했으니까 가능한 것이었다. 갔던 곳을 다시 가기도 했다. 계절을 달리하여 같은 곳을 찾아가 보는 일은 얼마나 설레는 일이었을까. 꽃이 있다가 녹음이 되고 단풍이 들고 마침내는 빈 가지를 드러낸 풍경 속에 놓인 미술관의 모습은 다른 얼굴을 보여줬을 것이다. 그림을 보고 또 무엇을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해석이 먼저 따른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찾고 또 찾아가서 본 그림에 얽힌 뒷이야기를 접하고 오해였음을 알게 된 에피소드를 풀어놓기도 한다. 그림은 벽에 고정되어 있지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일은 없다. 오직 보는 사람의 생각의 변화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미술관을 둘러보는 여행이 아니다. 화가와 그림을 통해서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읽어내고 삶의 사유로 이어진다.

 

칸다 닛쇼 기념미술관

 

 

 

 도쿄에서 태어나 척박하고 황량한 홋카이도의 토카치에서 개척 농민화가로 살다 간 칸다 닛쇼를 소개하며 그의 격투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베니어판에 그려진 유작이며 미완성 작품인 <>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혹독한 가난 속에서 분투해야 했던 닛쇼의 절실함을 보여준다. 다 그리지 못한 말의 엉덩이와 뒷다리, 무엇보다 어쩔 수 없음의 체념이 가득 들어있는 눈빛에서 개척농민들의 절박한 삶을 읽는다. 주어진 삶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활달한 청년이었다는 닛쇼의 그림 속에는 개척과 식민의 땅에서 하루하루 버텨야 했던 노동자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그림에 모든 것을 걸었던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는 작품을 통해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저자는 닛쇼를 사적 미술사에 첫 번째로 꼽는 애정을 보이며 그의 절실한 삶을 직접 보고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카나자와 21세기미술관

 미술관은 왠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나 관심이 아주 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많이 가지 않을까 싶다. 가고는 싶었지만(학생 때는 피카소 전시회를 본 기억도 있는데, 미술에서 멀어진 지 오래되었다.) 막상 어색해져서 실천하기는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럴 때 접근하기 쉽고 친숙한 미술관이 있었으면 싶기도 했다.

 

 21세기 미술관은 마을 공원 같은 미술관을 슬로건으로 내걸며 문턱 낮은 미술관을 만들고 싶다는 희망으로 탄생했다. 일본의 많은 미술관이 숲 속이나 산 위에 있는 공원에 만들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도서관이 아닐 수 없다. 미술에 흥미가 없는 사람도 와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면 하는 그 바람이 매년 평균 150만 명이 넘게 찾고 있으며 2015년에는 전국 미술관, 박물관 중 방문자 수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니 대단하다.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제임스 터렐의 <블루 플래닛 스카이>와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수영장>이라 한다. 전자는 터렐 방이라고도 불리는데 정사각형의 구멍을 통해 하늘과 빛을 바라볼 수 있다. 시시각각 변화되는 밝음과 어둠, 바람과 비와 눈, 구름을 긴 의자에 앉거나 바닥에 주저앉거나 혹은 누워서 바라볼 수 있다니! 또 투명강화유리로 만들어져 색다른 수영장을 체험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얼마나 놀랄만한 일인가. 붙박이처럼 붙어 있는 그림과는 달리 입체적이고 온 몸의 감각을 동원해서 느끼는 미술관이라니, 기존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장면이다.

 

건축만으론 오래가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사용하는가가 중요하다. 나오시마도 안도 타다오가 처음 건축을 시작했을 땐 사람들이 잘 몰랐다. 여러 예술가가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사람들이 모였다. 이사 오는 사람도 생겼다. 주민 인식이 달라지면서 마을의 정체성도 생겼다. 커뮤니티의 힘이다. 지역은 건축과 삶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연환경, 역사적 재산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빌바오의 이미지를 변화시킨 것은 구겐하임 미술관이지만, 이미지를 강화시킨 것은 빌바오가 가진, 요리와 같은 독자적 바스크 문화였다.”(P247)

 

 단지 이름 있는 건축가의 힘만이 아니라 지역민의 애착과 커뮤니티의 힘도 같이 실렸을 때 미술관 건축이 지역을 부흥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사느라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구나 싶었다. ‘우리 마을에는 어떤 미술관이 있는가?’를 궁금해 하고 그 속으로 참여하고 공유할 때 우리 삶은 조금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사가와 미술관

 칸사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가와택배가 창립 40주년을 기념해 그동안 모은 컬렉션을 바탕으로 1998년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인 비화호() 가까이에 지었지만 미술관 부지의 대부분을 물로 채워 섬처럼 보이는 외관이란다. 2007년에는 교토를 대표하는 장인 가문 중 하나인 도예 가문 라쿠키치자에몬의 15대 당주와 협력해서 다실과 전시실을 둔 신관을 지었다고 한다. 라쿠키치자에몬이 디자인한 신관은 센노리큐의 말에서 가져온 슈와리(守破離)’ , 지키고, 부수고, 마침내 떨어진다 는 뜻으로 다도, 무도, 전통예술 등을 배우고 익히는 자세를 일컫는 정신이 깃들어있다는데. 얼마 전 다도에 관한 책을 읽은 적도 있어서 솔깃해진다.

 

 

 

사가와 미술관의 다실 모습.

 

 물과 빛이 만나 일렁이고 그림자들이 춤을 추는 미술관의 풍경을 얘기하는 부분은 이렇게 멋진 미술관도 다 있다니 정말 부러웠다. 그림이 아니어도 풍경을 보고 삶의 기쁨과 충만함을 얻을 수 있다면 이런 호사야말로 누려볼 만하지 않은가.

 

와카야마 현립근대미술관

  펜의 힘은 칼보다 세다는 말이 있다. 그림은 어떨까. 그림의 힘을 보여주는 이시가키 에이타로의 <K.K.K>가 나오게 된 배경을 소개한다. 19308월 인디애나주의 소도시 마리온에서 백인 인종주의 단체 KKK(Ku Klux Klan)에 의해 흑인 청년이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고 노래로 만들어졌다.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린다네

잎과 뿌리에 피가 흥건해

미풍에 검은 몸뚱이들이 흔들리네

포플러 나무에 내걸린 이상한 열매

-노래 <Strange Fruit>중에서(P290)

 

 

 

이시가키 에이타로의 <K.K.K>

 부당한 폭력에 분노하고 가엾게 여기는 인정이 있었기에 세상에 알려졌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역지사지의 공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느냐에 따라 사건의 전후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금세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에 말을 거는 것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글로 음악으로 그림으로 표현하는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있기에 세상은 조금씩 좋은 쪽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의 힘은 무척 세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카즈키 야스오 미술관, 야마구치 현립미술관

 

본 것은

보았다고 해라(P396)

(시인 이시하라 요시오의 <사실>의 한 구절)

 

짧은 시구가 강렬한 울림을 준다.

보고도 못 본 척 하고 안 보고도 보았다고 억지를 부리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시구처럼 본 것을 본 대로 그린 화가 카즈키 야스오를 소개한다. 카즈키 야스오는 19434, ‘아시아-태평양 15년 전쟁의 막바지에 징집당하고 패전 후에는 시베리아로 끌려가 억류당하게 된다. 만주 침략과 중일전쟁에서 침략자이자 지배자, 학살자로 군림했던 일본인들의 악행에 대한 복수로 철조망에 걸린 붉은 시체를 보고 전쟁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한다. 억류에서 풀려 돌아온 카즈키 야스오가 보게 된 히로시마의 검은 시체를 앞세워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모습은 가증스러움이었다. <수경>, <그물침대>는 부모에게 버려진 상실감과 고독이 잘 드러난 작품이며 <시베리아> 연작은 노예처럼 팔려나간 60만 명의 군인들의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시베리아를 그리면서 나는 다시 시베리아를 체험하고 있다. 나에게 시베리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나에게 달려들어 나를 꿀꺽 삼키고 나를 휘몰아 갔다. 이번에는 내가 시베리아를 캔버스 속에 넣어, 비틀어 엎어눌러서라도 그것을 파악하려고 한다. 육체가 시베리아를 체험하고 있을 때, 정신이 그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가혹하고, 너무나 어지러웠다. 나의 군대 생활과 포로 생활은 다 해야 고작 4년 반에 지나지 않는다. 벌써 그 네 배의 시간을 4년 반의 체험을 반추하는 것에 썼지만, 아직도 그것을 잘 표현할 수 없다. 단지 내 육체와 기억에 각인된 상처를 단서로, 내가 그때 느끼고 보던 것을 최대한 충실히 보여주려 할 뿐이다.”(P409)

 

그렇게 보여주는 것으로 지도층이 얼마나 바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려는 우리에게 카즈키 야스오는 다시 한 번 일침을 놓는다. 오늘을 오늘로서 사는 것. 산다는 것은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밖에 스스로에게 납득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은 없다. 오늘은 오늘의 그림을 그린다.”(P411).

 

해박한 미술사에 얽힌 역사적 지식과 화가, 건축가 등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에 감탄했다. 미술을 잘 모르지만 읽어가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풍경, 그림 속에 들어있는 안타까움과 고통의 이야기에 공명할 수 있었다. 좋아하다보면 애정이 생기기 마련이고 전문가가 되는 모양이다. 또 저자의 감수성은 어떻고. 왜 미술관에 가는 걸까 했는데 이제 알았다. 우리가 책을 읽고 마음의 고통이나 상처를 치유 받듯이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자꾸 들여다보면 그림이 말을 걸지는 않을까. 서로 대화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모두 가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멋진데 다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다. 특히 눈 내리는 풍경 속의 아오모리 현립미술관, 산속의 무릉도원을 지향했다는 미호뮤지엄, 석양이 아름다워 폐관시간이 일몰 후 30분 후로 맞추어져 있다는 시마네 현립미술관은 꼭 보고 싶을 정도다. 삶을 성장시키는 깊이 있는 여행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열정과 내공이 깃들어 있는 미술관 여행기였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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