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기술자
토니 파슨즈 지음, 박미경 옮김 / 북플라자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작품의 도입부 프롤로그는 한 소녀가 학교의 음침한 지하실에서 여러 명의 사내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승리를 자축하며 대마초에 취해 몽롱한 틈을 타서 상처와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탈출한다. 물론 도망가다 걸려서 격렬한 몸싸움이 일어나고 소녀는 온 힘을 다해 누군가의 눈을 푹 찌른다. 가까스로 도로까지 나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고 살려 달라고 외치는데,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은 조금 전 제일 악랄하게 굴었던 뚱보 녀석, 아까 그 놈들이다! 사지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는데 다시 죽음의 소굴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 이런 정도의 사건이 벌어지면 보통은 언론과 신문에 떠들썩하고 제보를 요하는 현수막이 걸리고 난리가 나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덮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엔 비밀이 없는 법, 언젠가 밝혀지게 되어 있다.


 화자인 울프 경장은 딸 스카우트와 애견 스탠과 같이 살고 있다. ‘죽기로 작정한 남자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육안으로 식별이 어려워 신원이 일치하지 않는다며 스와이어 총경은 철수를 명령한다. 하지만, 울프는 명령에 불복하며 경찰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자신의 감()으로 용의자를 잡으면서 영웅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강력계의 신참이 된다.


 어느 날 35세의 유능한 투자은행가 휴고 벅의 시신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청소부에 의해 발견된다. 아무도 그의 비명이나 의심되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다. 새벽시간에도 사람이 바글거리는 건물인데도. 소리를 치려면 공기가 필요한데 기도(氣道)가 베여서, 비명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칼에 목을 절단하여 머리가 댕강 잘릴 뻔 한 모습... 끔찍하다. 아무 흔적 없이 살인을 하다니 그야말로 살인 기술자가 아닌가. 흔히 있을 법한 지문도 없다. 더구나 장갑지문조차도 발견되지 않아 맬러리 경감을 비롯한 수사팀은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다. 아내가 딴 남자에게 가버려서 다섯 살 난 딸과 살고 있는 외로운 형사 울프는 의외로 예리한 데가 있다. 상관인 총경의 명령이라고 해서 무조건 곧이듣지 않는 강단이 있다. 여기서도 이런 일을 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도살자나 외과의, 군인 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범위를 한정한다.


 선혈이 낭자한 휴고 벅의 책상엔 일곱 명의 젊은이가 군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만이 한 장 있다. 보통의 경우와 달리 상당히 의외다. 가족사진도 아니고 일곱 명의 소년티가 나는 남자들이라니. , 그때 그 지하실 사건인가. 미제사건으로 남을 뻔한 일이 휴고 벅의 살해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지나 보다, 점점 빠져들면서 심장이 두근두근한다. 빠르게 읽히며 다음 장이 궁금해서 막 넘어간다. 처음엔 휴고의 아내 나타샤가 용의자로 의심받는다. 전날 경찰이 출동하는 폭력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울프는 범죄 감식현장에서 나오다가 벽에 쓰여 있는 글씨를 발견한다.


돼지

피가 말라서 거무스름해진 글씨다. 이 글씨는 사건을 해결하는데 어떤 단서가 될까.


 휴고 벅을 살해한 용의자를 찾기 위해 분분한 가운데 또 하나의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마약에 찌든 노숙자의 시신. 목의 기도가 잘린 모습으로 범행 수법이 똑같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인식하고 연쇄살인의 가능성에 두고 수사방향이 확 바뀐다. 그의 이름은 아담 존스. 그의 집에서 휴고 벅스의 책상에서 발견한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발견한다. 탐문 탐색을 통해 좀 더 빠르게 윤곽이 드러난다. 이들은 포터스 필드 고등학교 동창생으로 죽은 두 사람 외에 쌍둥이 형제 벤 킹, 네드 킹, 가이 필립스, 살만 칸, 제임스 서트클리프 이렇게 일곱 명이 확정된다. ‘포터스 필드는 성경에서 따온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공동묘지라는 뜻이라 하는데 마치 이들의 불행을 예고하는 것 같아 섬뜩하다. 이쯤 되면 다음은 차례는 누구일까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범행에 쓰인 무기는 페어번-사익스 군용 나이프로 맞붙어 싸울 때는 이만한 도구가 없을 만큼 확실한 도구란다. 이 중에 제임스 서트클리프는 열여덟 살에 자살한 것으로 나오는데...


 한편 도살자 밥이라는 인물이 익명 서비스와 어니언 라우터라는 보안이 강화된 매체를 이용하여 SNS에 메시지를 퍼뜨리며 분위기를 조장한다. 그중 빠지지 않는 후렴구 같은 내용은 돼지를 모두 죽여라. 어느 사회나 부자들을 향한 증오심은 팽배하다. ‘도살자 밥은 부자에겐 공포의 대상이지만, 빈자에겐 대리만족의 효과를 노리는 것처럼 영웅으로 부각하여 혼란을 부추기는 양상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총경을 비롯한 언론 기자 등은 도살자 밥을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하지만, 울프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나름 열심히 조사하고 다닌다. 블랙 뮤지엄(범죄 도구 박물관)이나 전쟁 박물관 등을 찾아다니며 실마리를 얻기 위해 바쁘다.


 한 사람씩 죽어가고 모교에서 친구들의 장례식이 열린다. 아담 존스만 빼놓고 나머지는 부유층이다. 은행가, 체육교사, 정치인, 현직 군인 대위, 변호사로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신의 위치가 있다. 울프와 맬러리 경감은 남아 있는 친구들을 차례로 만나 이야기를 듣고 단서를 잡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닌다. 친구들은 하나 같이 섹스중독자인 휴고와 마약 중독자인 아담이 죽어도 싸다고 말하지만, 자신들의 신변에도 위험이 닥칠까 차츰 불안에 사로잡힌다.


 울프와 맬러리 경감은 뚱보 필립스와 면담하려고 포터스 필드에 갔다가, 똑같은 수법으로 당한 필립스를 마주하게 되고... 자살한 친구 포함 네 명이 죽었으니 이제 남은 사람은 쌍둥이 형제, 살만 칸 이렇게 셋이다. 엄청난 반전이 있고 작은 반전들의 연속이다. 법의학자의 명쾌한 감식과 울프와 형사 연수생 에디 렌의 척척 맞는 조합도 재미있다. 놀라운 작가의 필력이다.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토니 파슨즈를 기억해야겠다. 범인은 진짜 생각지 못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음악의 천재였던 아담 존스는 친구들을 잘못 만나 마약에 찌들게 되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변태성욕자인 선생으로부터 정신적, 성적 학대를 받으며 일그러졌다. 면담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그들의 어두운 과거는 충격 그 자체이다. 우리의 미래여야 하는 아이들에게 학교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생각 거리를 안겨준다.


 사람이 괴롭힘과 학대를 당하면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복수해 준다는 말이 있다. 이 작품도 그런 맥락이다. 허점투성이인 학교, 경찰, 법원 등 지역 사회가 못해 준 일을 누군가 나서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휘둘렀다. 마지막까지도 숨겨져 있던 반전을 발견하며 오싹한 공포를 느꼈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자신이 쌓아올린 안위를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하는 인간의 파렴치함을 보았다. 선함 속에 숨어 있는 악은 여간해서 드러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모른 척하고, 누군가가 무서워서 입을 열지 못하는 피해자와 그 가족이 있다. 이를 두고 생각나는 속담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고 하는 것일까. 하나의 피해자는 다른 피해자를 낳는다. 모든 국민들에게 열려 있어야 할 지역, 국가 사회의 안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커다란 악을 생산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이렇게 우리사회의 교육, 행정 등 지역사회의 작동 시스템은 제대로 돌아가는지 여부에 일침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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