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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양장)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이영의 옮김 / 새움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살고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나니.’(1825)
-역자 후기에서-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익숙한 시다. 이 시로 푸시킨을 알았다. 세로글씨로 쓰인 대위의 딸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오빠가 빌려왔거나 사온 책이었겠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읽었던 것 같은데. 남아있는 기억이 없으니 처음 읽은 거나 마찬가지다. 먼저 읽은 분들의 평이 재미있다고 해서 기대되었는데 역시 그랬다. 이 작품은 연애소설, 성장소설, 역사소설 등의 여러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어려움을 헤치고 하나하나씩 풀어간다는 의미에서는 영웅소설적인 느낌도 난다. 흔히 러시아 소설은 인명 자체가 길고 어려워서 잘 읽히지 않는데 이 작품은 술술 읽힌다. 화자의 말과 생각을 통해서 이 시를 쓴 푸시킨의 긍정적인 성격과 모험에 대한 도전 정신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러시아 근대문학사에 있어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명예와 위업은 가히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시로써 러시아 시문학의 황금시대를 열었고, 산문으로는 19세기 후반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으로 이어지는 영예로운 러시아 작가의 선조가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문학은 러시아를 넘어 세계 독자들에게도 공감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데 그것을 ‘푸시킨 현상’으로 설명한다. 이미 이것의 비밀은 푸시킨의 시 속에 나타나 있고 그의 운명까지 묘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삶과 문학에의 열정과 사고가 조화롭게 스며든 결과가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의 화자는 ‘나’, 표트르 안드레이치다. 화자는 작가 자신이 되기도 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뒷이야기를 예고하는 등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열일곱 살이 된 청년이 군대에 가게 되는데 아들과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마음과는 달리 해방감을 느끼며 페테르부르크에서의 삶을 고대하고 있다. 군인으로 공적을 쌓은 아버지의 아들답다고 해야 할까. 오늘날 자녀의 병역의무를 어떻게든 면제받으려고 하는 우리 사회의 정치계의 상황과 묘하게 대비된다. 하지만 그리뇨프의 바람과 달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시골 벽지인 오렌부르크로 가게 된다. 충직한 늙은 하인 사벨리치와 함께 길을 떠나는데...
군에 도착하기도 전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 하룻밤 묵게 된 여관에서 어느 대위를 만나 할 줄도 모르는 당구 시합을 하다가 백 루블을 빚을 져서 돈을 뜯기고, 눈보라 속에 막무가내로 강행군을 하다가 길을 잃었다가 길 안내인의 도움을 받는데 이 사람에게는 토끼가죽 외투를 내어준다. 아직 어린 청년임에도 귀하고 비싼 옷을 덥석 내어줄 정도로 배포가 크다. 인정을 아는 성품이라고 해야 할까. 천방지축인 이 도련님 때문에 사벨리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무던히도 참아낸다. 다행인지 이런 기이한 인연이 나중에는 위험에 빠진 그리뇨프가 안전하게 목숨을 보전하는 인과응보로 작용한다.
그렇게 물불을 못 가리는 그리뇨프가 상관인 미로노프 대위의 딸 마샤를 만나고 서서히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일까. 마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약한 겁쟁이였던 마샤가 부모를 잃고 나서는 이런 면도 있었나 할 정도로 바뀌어간다. 사랑이 깊어지고 결혼을 약속 하지만 표트르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힌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거역하려 들거나 하지 않고 축복받는 결혼을 위해 기다릴 줄 안다. 천생 여장부 같은 엄마를 닮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처음엔 풋사랑일 뿐이라고 결혼을 반대하던 표트르의 부모도 마샤의 본모습을 알게 되면서 아껴주게 된다.
한 편 악당의 손아귀에 있던 마샤를 구하기 위해 푸가초프의 도움을 받기까지 그리뇨프와 푸가초프가 얽힌 행적은 정부군의 귀에 들어가고 유배를 당하기에 이르는데, 마샤는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당당하게 예카테리나를 만나고 미래의 남편의 운명을 좋은 쪽으로 만들어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나약한 개인이 국가권력인 예카테리나 여제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였을까. 국가를 위해 공헌을 한 미로노프 대위의 애국심과 충정이 있었기에 예카테리나 여제의 선의도 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보면 어떤 거창한 위업이나 위대한 투쟁, 대단한 권력을 통해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소한 인간의 선의, 선량한 영혼에 기인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푸시킨의 사상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국가권력인 예카테리나 여제와 민중 봉기를 통해 민중의 황제로 추앙받는 푸가초프가 대립하던 역사적인 장면이다. 반체제 청년 장교(데카브리스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시인 푸시킨의 가장 마지막에 쓰인 푸시킨의 장편소설로 그의 문학적 재능을 온전히 발휘한 작품이라고 한다. 역사권력과 개인의 갈등을 푸는 열쇠는 폭력과 강제성이 아닌 선량함, 선한 의지, 도덕성, 비폭력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피력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18세기 후반 부패한 제정 러시아와 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삶의 모습과 더불어 청년 장교의 사랑과 모험을 간결하면서도 생생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당시의 역사의식과 민중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는 고전으로써 항상 반복되는 역사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