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쇼 하이쿠 선집 - 보이는 것 모두 꽃 생각하는 것 모두 달
마쓰오 바쇼 지음, 류시화 옮김 / 열림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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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문학을 언급할 때 빠질 수 없는 하이쿠를 여러 책에서 접하고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적이 있다. 그 당시 날 것 그대로의 하이쿠를 처음 접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오래도록 마음에 와 닿았거나 기억에 남는 하이쿠가 거의 없었다. 그 후 나쓰메 소세키의<풀베개>를 비롯하여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도 하이쿠가 언급되어 있어서 어떻게 된 일일까 몹시 궁금해졌다. 후자의 책에서는 작가가 바쇼의 기행문 오쿠노호소미치細道 깊은 곳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 제목을 차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다시 제대로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읽게 되었다. 1,100편의 하이쿠 중 선별한 대표작 350편과 역자의 해설이 함께 들어있다.

 

 한 페이지에 한 편의 하이쿠와 일본어 원문이 실려 있다. 처음 하이쿠를 접했을 때는 일본어 공부는 오랫동안 쉬고 있던 상황이어서 잘 와 닿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요즘 한창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어서인지 한 글자 한 글자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예전엔 ()()로 읽었고, ()()로 읽었던 모양이다. 옛날에 쓰이던 글자와 오늘날의 언어변화를 짐작해 볼 수도 있었다. 우선 하이쿠 소재의 다양함에 놀라게 된다. 무엇이든 하이쿠의 재료가 된다. 자연은 물론 일상에서 얻은 소재를 다루어서 일본의 문화, 풍습 등 에도 시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역시 어떤 책이든 마음에 다가오는 때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이렇게 열일곱 글자에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 함축된 단어 너머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역자의 해설이 있었기에 더욱 스며들었을 것이지만. 역자는 하이쿠를 감상하는 독자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이해를 돕기 위한 최소한의 배경설명과 정평 있는 평단의 해설을 요약해서 소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꽃은 싫어라

사람들의 입보다

바람의 입이

 

(はな)にいやよ世間(せけん)(くち)より(かぜ)(くち)(P27)

 

 

 꽃구경을 하는 축제인 하나미はなみ[花見]를 즐기는 사람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벚꽃이 무리지어 피어있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화사하다. 저마다 이 꽃 저 꽃이 예쁘다고 함박웃음을 웃고 안부를 묻는 사람들로 떠들썩한 분위기가 그려진다.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들의 입이 미울까. 저 화사한 꽃들을 다 떨어지게 하는 바람이 더 밉다는 것이다. 절대로 관찰하지 않고 지그시 바라보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하이쿠가 나오겠는가. 이것은 19세에서 29세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란다.

 

서리 밟으며

절룩거릴 때까지

배웅했어라

 

(しも)()んでちんば()くまで(おく)りけり(P43)

 

 

 ‘아침 서리를 밟으며 그대를 배웅하러 나왔다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함께 간 것이 결국 다리를 절룩거릴 정도로 먼 곳까지 갔다.’ 하이쿠 앞에는 이 말이 적혀있는데 시인 시유(四友)와 작별할 때 쓴 작품으로 가마쿠라에 가는 시유를 배웅하러 나섰다가 결국 끝까지 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헤어지는 것이 그토록 아쉬웠을까. 끈끈한 인정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들판의 해골 되리라

마음먹으니

몸에 스미는 바람

 

()ざらしを(こころ)(かぜ)のしむ()かな(P66)

 

 

 ‘()ざらし(노자라시)’는 들판에 버려진 해골이라는 뜻으로 바쇼가 41세의 가을, 최초로 방랑을 떠나는 절실한 각오가 담겨있는 하이쿠라고 하겠다. 하이쿠 지도자로 명성과 지위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음에도 무소유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인데. 욕심을 버리고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백골이 되더라도 포기하지 말자 다짐했더니 뼛속에 바람이 스며든다. 하이쿠를 읽는 자체로도 오싹한 한기가 느껴진다. 이 시에서 제목을 딴 여행기노자라시 기행 ざらし紀行의 서문에 실려 있다고 한다.

 

종소리 멎고

꽃향기는 울리네

저녁 무렵

 

(かね)()えて(はな)()()(ゆう)(かな)(P146)

 

 이 하이쿠는 40대의 작품으로 자신의 시풍에서 벗어나 당시의 언어유희를 따른 느낌을 담고 있다 한다. 종소리(청각), 꽃향기(후각), 저녁(황혼 녁/시각)으로 이어지는 공감각적 시작법을 엿볼 수 있다. 옛날 국어시간에 배우고 암기했던 공감각적 표현법을 떠올리게 한다. 바쇼의 작품 외에도 동양의 시문학에서 자주 시도되는 기법이라고 한다.

 

 

(P177)

 

 하이쿠를 음미해보고자 필사를 해 보았다. 오랜만에, 그것도 잘 써보려고 하니 잘 안 된다. 열 번은 썼나보다. 더 이상 손이 아파서 안 되겠다 그냥 올리자. 이 시는 46세의 봄, 바쇼는 간토, 오슈, 호쿠리쿠 등 일본 동북 지방을 지나 중서부 내륙까지 도는 도보 여행을 출발한다. 스미다가와 강의 다리까지 배웅 나온 문하생들에게 준 작별의 시로 오쿠노호소미치서문에 실려 있다. 자신은 하늘을 나는 새로 뒤에 남은 문하생들은 물고기에 비유했다. 떠나는 사람 남는 사람 모두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겠지 더구나 노쇠한 스승의 떠남이라니.

 

보리 이삭을

의지해 부여잡는

작별이어라

 

(むぎ)()(ちから)につかむ(わか)れかな(P311)

 

 

 방랑의 삶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여행길에 수많은 문하생들을 찾아 하이쿠 모임도 하고 후원을 받은 거처에서 쉬기도 했지만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혹독한 더위와 추위를 견뎌내면서 객지에서 세월을 보내는데 몸이 성할 리 없다. 51세의 음력 5월 교토 지역으로 생애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가 음력 511일 다시 에도로 출발하면서 가와사키(도쿄 남쪽의 도시)까지 송별하러 나온 사람들에게 남긴 작별의 하이쿠다. 체력은 이미 바닥나고 몸은 허약해져 있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보리 이삭을 부여잡는 작별이라니 마지막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절실함과 슬픔이 파고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 바쇼나 잇사의 하이쿠가 언급되어서 상당히 의아하고 신기했었다. 동양권도 아닌 영미소설에서 말이다. 오쿠노호소미치 細道 는 일본을 대표하는 기행문이며 외국에 가장 많이 소개된 일본 고전 작품으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 2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하이쿠의 성인 바쇼는 세계에 일본을 알리는 지대한 역할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읽는 중에도 다 읽고 나서도 멈출 수 없었던 생각은, 우리도 우리 나름의 정서와 멋이 담긴 정형시 시조가 있으며 그 이전으로 들어가면 고려가요, 향가 등 우수한 작품이 많은데 이것이 세계에 얼마나 알려졌을까 궁금해졌다. 전통을 아끼고 계승하는 면에서는 어쩌면 한 수 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청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너무 짧아서 말하다 마는 듯한열일곱자의 짧은 시구에서 한 편의 이야기를 상상할 여지를 준다.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은 우리 안의 시인을 깨우는 일’(P404)이라는 역자의 말에 매우 공감된다.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의 멋을 알게 될 것 같다.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하이쿠를 자주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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